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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대로 되는 것 네 가지 (창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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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 되는 것 네 가지 (창 1:3~5)


세상에는 그대로 되는 것 네 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에 한 가지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나머지 세 가지는 사람에게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은 우리의 반응에 따라서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다가올 수도 있고 좋지 않은 것으로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사람에게 속한 세 가지는 우리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에게 좋은 것이 될 수도 있고 좋지 않은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 속한 것과 사람에게 속한 것 모두 다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갈 6:7에 보면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대로 거두는데 무엇을 그대로 거둡니까? 사람이 심은 것을 그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아름답게 창조하셨고, 인간을 지극히 존귀하게 만드셨습니다. 인간은 모든 것을 누리며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하지만 창조 이후에 인간은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에 자신의 선택에 의한 열매를 먹게 되는 것입니다. 좋은 것을 선택하면 좋은 것을 먹고 좋지 않은 것을 선택하면 좋지 못한 것을 먹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그대로 되는 것 네 가지가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1. 말씀대로 됩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사건의 기록입니다. 그 중에 첫째 날 빛을 창조하신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빛이 있으라”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지니 말씀하신 대로 그대로 되었습니다. 빛이 생긴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은 천지 창조를 하시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말씀하신 그대로 말씀하신 것이 만들어졌습니다. 말씀대로 된 것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니 그대로 되었다는 말씀이 여섯 번 나옵니다. 7절에 보니 물을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었습니다. 9절에 보면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들어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었습니다. 

11절에서는 채소와 나무를 내라고 하시니 그대로 되었습니다. 15절에서는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고 하시니 그대로 되었습니다. 24절에서는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었습니다. 30절에서는 짐승들에게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었습니다. 
사 55:10,11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헛되지 않으며 말씀대로 된다고 말씀합니다. 

“이는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

하나님께 말씀의 능력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과 동등 된 분이신 예수님께도 말씀의 능력이 있습니다. 마 9장에 보면 중풍에 걸린 한 사람이 주님을 만납니다. 그는 병세가 심해서 스스로 걸어서 주님에게 올수 없었던 사람입니다. 그의 친구들은 그를 살리기 위하여 침상에 뉘여서 주님에게로 데리고 왔습니다. 주님은 그를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리고 다시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주님의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중풍병자는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침상을 들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니 그대로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들에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성경으로 말씀하시고 성령으로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성경의 말씀도 하나님의 말씀이고, 성령의 음성도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대로 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하신 말씀을 이루십니다. 중요한 것은 말씀에 대한 우리의 반응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행 27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탄 배가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게 됩니다. 풍랑이 심하여 사공들의 짐과 배의 기구들을 버립니다. 상황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행 27:20절에 보니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다고 말합니다. 소망이 끊어졌습니다.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밤에 천사가 바울을 찾아옵니다. 그리고 천사가 바울에게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고 말합니다. 

상황으로 볼 때는 구원의 소망이 없지만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는 행 27:25에서 배에 탔던 사람들에게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자신이 처한 상황을 보고 그 상황을 믿어버린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바꿀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던 것입니다. 

말씀을 믿으면 순종하게 됩니다. 말씀을 믿지 못하니까 순종이 안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믿으면 순종하면서 일어나는 갈등도 충분히 이길 수 있습니다. 말씀을 확실하게 믿는대 무슨 갈등이 있겠습니까? 믿지 못하니까 갈등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믿으면 하나님께 다 맡기고 염려하지 않습니다. 두렵지 않습니다. 믿는데 뭘 염려하고 두려워하겠습니까? 

자동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린다고 생각해 봅시다. 시속 100km로 달립니다. 이 때 우리는 자동차에서 내려야 하나 계속 타고 있어야 하나를 갈등하지 않습니다. 달리다가 자동차가 분해되어 산산조각 나는 것은 아닌가 염려하지 않습니다. 전혀 두려움 없이 자동차를 타고 이동을 합니다. 무슨 이유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자동차가 안전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데 무슨 갈등이 필요하고 무슨 염려가 필요합니까? 뭐가 두렵습니까? 믿으면 그렇게 못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믿으면 회개하게 됩니다. 말씀이 기준이고 내 생각과 내 생활이 기준에서 벗어났다면 다시 기준으로 돌아오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고 돌이키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믿으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자신의 종의 치유를 위하여 주님을 초청했던 백부장은 오시는 주님에게 오실 필요 없이 말씀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마 8:8,9에 보면 백부장이 주님에게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라고 하며 믿음을 표현합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면 그대로 되리라고 확신했습니다. 그 결과를 마 8:13에서는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고 말합니다. 

개인이 잘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나라가 잘 살기 위해서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런 의미로 본다면 기독교인들이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은 자신을 복되게 만드는 것만이 아니라 크게 애국하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200년 전에는 노르웨이라는 나라는 정말 비참하고 가나한 나라였습니다. 나무껍질로 빵을 만들어 먹기도 하였고 길거리에서 굶어 죽은 사람들의 시체를 보는 일은 너무나 흔한 일이었습니다. 학교는 부족하였고 대학은 아예 하나도 없었습니다. 수백 년간 이웃 나라의 지배를 받아 온 노르웨이는 어촌과 작은 농장 밖에 아무것도 없는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1796년 4월5일 <한스 닐센 헤우게>(Hans Nielsen Hauge)라는 젊은이가 회심을 경험하고는 1796년부터 1804년 사이에 나라 전체의 마을 곳곳을 다니며 성경을 보급하였고, 천개가 넘는 가정교회에서 성경을 가르치기 시작하자 나라가 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인간은 창조주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고, 그분의 뜻대로 정직하게 일해 부를 창출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역설하였고, 경건한 생활을 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가 가르친 제자들이 다시 사역자로 세워져 나라 곳곳에서 성경을 가르치기 시작하여 마침내 노르웨이는 1인당 국민소득이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가 되었고, 훌륭한 교육체계로 인하여 문맹률이 0 인 나라가 되었습니다. 헤우게는 “하나님 말씀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진 모든 것보다 더 귀중하고 거룩한 보물”이라고 가르쳤습니다. 

2. 말대로 됩니다.

하나님께 말씀의 능력이 있는 것처럼 우리들에게도 말에 능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에게 말의 능력이 있는 또 하나의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말을 들으시고 말대로 역사해주시기 때문입니다. 민 14:28에 보니 하나님께서 정탐꾼들의 보고를 들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우리의 인생은 혀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혀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살기도하고 죽기도 하고 복을 받기도 하고 저주를 받기도 하는 것입니다. 

혀는 배의 키와 같다고 했습니다. 약 3:4,5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써 사공의 뜻대로 운행하나니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혀는 작은 것이지만 큰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의 방향을 혀로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승리하는 인생을 살려면 승리의 말을 해야 합니다. 성공적인 인생을 살려면 성공적인 말을 해야 합니다. 승리를 원하고 성공을 원하지만 늘 패배를 말하고 실패를 말한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패배와 실패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잘 살려면 말을 잘해야 하는 것입니다. 잠 18:21에서는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잠 12:14에 보면 “사람은 입의 열매로 말미암아 복록에 족하며”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복록’이 무슨 뜻입니까? ‘좋은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공동번역에는 “입을 잘 놀리면 좋은 것을 배불리 먹고...”라고 번역되었습니다.  

언어학자들은 인간의 말이 가지고 있는 기능을 세 가지로 얘기하고 있습니다. 첫째, 인식적 기능입니다. 사람은 말과 글을 통해 사물에 대한 지식을 갖게 된다는 것 입니다. 제 아무리 머리가 좋은 사람도 말과 글이 없으면 배울 수 없는 것입니다. 둘째, 표현적 기능입니다. 

사람은 말로써 자기의 의지와 감정 그리고 소원 등을 표현합니다. 만약 말을 할 수 없다면 자신의 마음을 표현 하는데 어려움을 겪을 것입니다. 표현적 기능이 있기 때문에 소설도 쓰고 시도 쓰고 노래도 하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 수행적 기능입니다. 말로서 무엇인가를 행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이 갖는 위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말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한 대뇌 학자의 말에 의하면 우리 뇌의 98퍼센트가 말의 지배를 받는답니다. 말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말하는 자신의 머리 회전도 달라지고, 생각도 달라지고, 창의력도 달라지고, 예술성도 달라지고, 리더십도 달라진다는 말입니다. 말에 의해서 자신의 능력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말은 육체의 건강에도 영향을 크게 미칩니다. 프랑스의 유명한 약사 에밀 큐가 임상 실험을 했는데, 환자들에게 약을 지어주면서 “약을 먹을 때 그냥 먹지 말고 ‘나는 날마다 점점 더 좋아지고 있다.’라고 말하며 먹으세요.”라고 했습니다. 그의 말대로 말하고 약을 먹는 사람들의 치료 효과는 급속도로 빨라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을 바꿔야 합니다. 부정적인 말은 긍정적인 말로 바꾸고, 패배의 말은 승리의 말로 바꾸고, 실패의 말은 성공의 말로 바꾸고, 불신앙의 말은 신앙의 말로 바꾸어야 합니다. 

말이 변화되는데 있어서 핵심적인 키는 성령충만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말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여러 가지 노력을 할 수 있지만 성령께서 주시는 변화의 능력을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오순절에 성령께서 120문도에게 강력하게 역사하셔서 가장 먼저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말을 변화시키셨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면 하나님과 코드가 같아집니다. 그래서 성령충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말을 하게 되고 하나님은 그 말을 들으시고 아름답게 축복으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3. 생각대로 됩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생각을 잘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생은 생각대로 되기 때문입니다. 
잠 23:7에 보면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이라고 말씀합니다. 그 사람의 됨됨이는 그 사람의 생각이 결정한다는 뜻입니다. 욥은 욥 3:25에서 “내가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내가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라고 말하며 자신이 고난을 당하는 원인이 평상시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렘 6:19은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땅이여 들으라 내가 이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이것이 그들의 생각의 결과라” 예레미야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재앙이 내린 것은 그들의 생각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생각을 잘못해서 망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시대에 홍수로 세상을 쓸어버리실 결정을 내리실 때에 가장 결정적인 원인을 창 6:5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두 가지 원인을 말합니다. 

첫째는 세상에 죄악이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둘째는 사람의 생각이 악했기 때문입니다. 롬 8:6에 보면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이라고 말씀합니다. 생명과 사망이 생각의 결과로 주어집니다. 평안하게 사느냐 평안하게 못 사느냐도 생각의 결과입니다. 

생각은 영적고지입니다. 생각을 지키지 못하면 사단 앞에서 모든 것이 무너지고 맙니다. 생각을 지키면 모든 것을 지킬 수 있습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타락시킬 때 그 사람에게 먼저 생각을 집어넣습니다. 사단이 주는 생각을 분별하고 물리치면 사단은 그 사람을 타락시킬 수 없습니다. 사단의 생각을 받아드리기 때문에 사단에게 지배를 당하여 결국은 타락하는 것입니다. 요 13:2에 보면 사단은 가룟유다에게 먼저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넣었습니다. 가룟유다가 그 생각을 물리치지 않고 받아드리니 그 생각의 고지를 통해서 사단이 들어오게 되고 결국 그는 예수님을 팔아먹었던 것입니다. 

생각을 잘해야 합니다. 생각을 잘하면 우리의 인생은 승리하는 인생, 풍성한 인생, 성공하는 인생이 됩니다. 생각을 잘 못하면 패배하는 인생, 궁핍한 인생, 실패하는 인생이 됩니다. 
생각을 잘하려면 열심히 기도하십시오. 빌 4:6,7에서는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생각을 잘하려고 해도 우리는 육신을 가지고 있고, 세상과 접촉하며 살고, 마귀가 악한 생각을 계속해서 집어넣어주기 때문에 늘 좋은 생각을 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안 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십니다.

옛날에는 어느 나라에서나 큰 도시에는 성문이 있고 문을 지키는 문지기가 있었습니다. 들어가서는 사람을 일일이 조사해서 선량한 시민은 들어가게 하고 나라를 해칠 염려가 있는 사람은 못 들어가게 했습니다. 우리의 마음의 문도 지켜야 합니다. 나쁜 생각은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해야 하고 좋은 생각은 더 하게 해야 합니다. 이 일을 우리는 할 수 없으니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도우심 속에서 생각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4. 믿음대로 됩니다.

마 9:29에 보면 주님께서 눈을 뜨기 위하여 주님을 찾은 소경들의 눈을 만져주시면서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눈을 뜨느냐 못 뜨느냐는 그들의 믿음대로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이 자신들을 만지심으로 인하여 자신들이 눈을 뜰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믿음대로 그들의 눈이 밝아졌던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주님이 자신들의 눈을 만지셨지만 그들의 시력에 전혀 변화가 없을 것이고 이전처럼 앞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믿었다면 그들은 여전히 소경인 상태로 지내야 했을 것입니다. 

히 11:1에서는 믿음이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정의를 내립니다. 믿음은 당사자가 바라보는 것이 실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바라봄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바라보는 것이 현실이 됩니다. 믿음대로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긍정적인 믿음과 큰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긍정적인 믿음과 큰 믿음을 가지면 우리에게는 긍정적인 역사와 큰 역사가 가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믿음대로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부정적인 믿음과 작은 믿음을 가지면 우리들에게 부정적인 일들과 작은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왜냐하면 역시 믿음대로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우리가 가진 모든 문제에서 우리를 구해주실 수 있는 예수님이 계시고, 아들도 아끼지 않고 우리들을 위하여 내어주신 좋으신 아버지가 계시고,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시며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시는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에 무조건 긍정적인 믿음을 가져야 하고 큰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은 긍정적이고 큰 것을 바라보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긍정적인 믿음과 큰 믿음을 갖게 하셨습니다. 99세의 나이에 자식을 낳는 긍정적인 믿음을 갖게 하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99세의 나이에 하늘의 별과 같은 후손을 바라보는 큰 믿음도 갖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바라봄의 법칙대로 100세에 이삭을 얻었고 이삭 이후에 수많은 후손들을 얻어서 열국의 아비가 되었습니다.

바라봄의 법칙에 도전을 주는 인도네시아의 목사님 한 분이 있습니다. 인도네시아는 인구 2억 중 30%인 6천만 명이 예수를 믿고 있습니다. 이슬람국가 안에서 수많은 사람이 순교를 당하고 고난을 당하면서도 굴하지 않고 복음을 전한 결과 아시아 최대의 기독교 국가가 되었습니다. 인도네시아 수루바야에 예배당 좌석수만도 2만5천 석이 넘는 교회가 있습니다. 그 교회 담임목사인 아브라함 알렉스 목사님인데 이분은 이 큰 믿음을 가지신 분입니다. 이 분이 큰 믿음을 소유하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다. 

목사님 가정에 뇌성마비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연약한 그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지만 목사 가정에 뇌성마비 아들이 태어났다고 이슬람교도들이 비웃는 손가락질은 견디기가 힘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바라봄의 법칙을 사용하여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오직 십자가의 능력만 바라보았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아들이 온전하게 건강해진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렇게 매일 기도하길 한 달, 두 달, 석 달... 아무런 변화도 없었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기도하리라” 넉 달이 지났을 때 아침에 기도하러 방에 들어갔더니 아들이 멀쩡한 모습으로 일어나 앉아 “아버지”하고 부르는게 아니겠습니까?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목사님은 제한이 없는 하나님의 능력, 한계가 없는 믿음의 능력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아브라함 알렉스 목사님은 그 아들과 함께 제한이 없는 축복, 한계가 없는 기적을 맛보며 살게 됩니다. 

바라봄의 법칙은 인생에 중요한 법칙입니다. 무엇인가를 바라보면 그것이 내게 오든지 내가 그것에게 끌려가는 것입니다. 지금 상황이 좋지 않은 분들은 실망하지 마시고, 낙심하지 마시고 크고 좋은 것을 바라보십시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의 미래는 달라질 것입니다. 지금 남들보다 앞선 부분이 있다고 거기에서 만족하고 더 크고 좋은 꿈을 꾸는 것을 포기한다면 그 사람의 장래는 지금 수준 정도로 머물든지 아니면 지금 보다 더 못해질 것이 뻔합니다. 

인생의 성공은 꿈구는 자의 것입니다. 일본의 한 유명한 학자는 이 세상 사람들 중 99%가 현재를 보고 미래를 예측하지만, 1%의 사람은 미래의 비전과 꿈을 생각하며 오늘을 어떻게 나아가야 될까를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현재 상황을 보고 미래를 예측하는 사람은 평범하게 살다 가지만 미래의 꿈에 맞추어 자신의 현재를 조종해 가는 사람은 대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비전을 받아야 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완전한 축복은 하나님의 비전에 있다.”고 했습니다. 완전한 축복은 내가 목적하는 것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비전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비전은 일찍 받을수록 좋습니다. 그 비전을 버리지 않고 열심히 기도하면서 준비한다면 비전이 실제가 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지금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민족은 노벨상을 제일 많이 받고 과학자, 예술가 등 여러 분야에서 우수한 사람들을 배출하고 미국의 경제권을 가지고 정치를 움직이는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초등학교만 졸업하면 랍비, 부모, 학생이 앉아 장래를 설계한다고 합니다. ‘장차 어떤 인물이 될 것인가’를 의논하고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목표를 세워 그대로 전진하게 합니다. 설계를 빨리 하기 때문에 유대인 학생들을 따라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대학생들은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 물어보면 두고 봐야 알겠다고 대답을 합니다. 

고등학교 수험생들에게 어느 대학의 무슨 과를 갈 것인지를 물어 봐도 아직 잘 모르겠다고 대답합니다. 비전이 없는 학생들은 비전을 가진 학생들보다 몇 년씩 뒤처지는 것입니다. 비전이 없는 사람들은 일찍 비전을 받고 그 비전을 위하여 헌신한 사람들이 모두 자리를 잡은 후에야 뒤늦게 따라가느라 고생을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시다. 그대로 되는 것 네 가지를 살펴봤습니다. 말씀은 그대로 됩니다. 우리는 믿고 순종하면 됩니다. 말과 생각과 믿음은 우리에게 속한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대로,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우리가 믿는 대로 됩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열심히 기도하면서 크고 좋은 것을 말하고 생각하고 믿어서 여러분의 인생에 크고 좋은 일들이 풍성해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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