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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야곱 방황을 끝내다 (창 3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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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 방황을 끝내다 (창 35:1~5)

야곱이 이에 자기집안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미국 하버드대학교 졸업생 가운데 남학생들의 인생을 추적한 결과가 나왔습니다. 졸업생들 가운데서도 더 수재들이고 더 좋은 환경에서 자라고 더 뛰어난 능력을 가진 졸업생 268명이 인생을 어떻게 살았을까 72년간의 인생을 추적해 보았습니다. 대학생 때 능력이 뛰어나고 경쟁에서 언제나 수위에 있던 학생들은 중년기에 접어들자 적대적이 되고 가출하고 마약을 하고 일찍 사망하더라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대학생 때 평범하게 보이고 인간관계가 좋았던 학생들은 가장 안정적으로 행복하게 살아가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연구한 하버드 대학교 의과대학 정신과 교수인 조지 베일런트라는 분이 결론 내리기를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첫째는 인간관계이고 둘째는 행복은 결국 사랑이라는 것”을 발표했습니다. 

사람은 47세까지 형성된 인간관계가 그 이후 인생을 결정한다고 합니다. 사람이 인간관계가 좋다는 말은 그만큼 누군가를 사랑하고 헌신하고 양보하고 더불어 살아가고 손해 볼 줄 아는 삶을 말합니다. 그때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 주고 사랑해 주고 관계를 돈독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혼자 약고 손해 조금도 안 보려 하고 미운 짓 하고 독선적으로 살아가면 누군들 관계가 좋아지겠습니까. 그러니까 그 인생에 고독함이 있고 관계가 원만하지 않고 고난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고난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당하고 있는 고난은 대부분 원인이 나 자신에게서 기인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자기실수와 판단착오와 욕심 때문에 그리고 내 잔꾀들 때문에 또 수단 방법을 쓰다가 오늘 고난을 자초하게 된다는 점을 말씀 드렸습니다. 그 외에도 서툰 인간관계에서 고난이 찾아오기도 하고 내 능력만 믿고 남을 무시하고 속이고 살아가다가 실패해서 고난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보면 조지 베일런트 교수의 진단이 옳게 여겨집니다.  

오늘 본문은 야곱의 이야기입니다. 야곱은 혹독한 고난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 원인을 보면 자기 꾀에 자기가 당하고 그 결과 야곱은 피눈물 나는 혹독한 고난의 삶을 살았습니다. 약은 고양이 밤눈 어둡다고, 약아빠진 야곱이 제 꾀에 자기가 빠진 꼴입니다. 

여기 야곱은 오늘 현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꾀와 수단과 방법을 다 가지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오늘 현대인들의 전형적인 모델”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성경은 야곱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야곱의 아주 파렴치한 행동까지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에게 몇 가지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죄라는 것을 깨우쳐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방황의 역사를 말씀하시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결국 인간이 가야 할 곳이 어디인가를 말씀하시려고 합니다. 여기서 야곱의 죄에 대하여 그냥 넘기기 어려운 죄임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야곱의 이야기를 보면 야곱이 지은 죄가 대체적으로 세 가지가 나오고 있습니다.    


이기적인 삶 

야곱은 지독한 이기주의자였습니다. 야곱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상대방을 무서운 절망으로 빠지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큰 죄입니까. 그 이기적인 모습이 몇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형의 장자권을 배고픔을 이용해서 빼앗는 모습입니다. 아주 교묘한 방법으로 형의 장자권을 빼앗습니다. 물론 형도 문제는 있습니다. 뺏기는 사람도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게 소중한 것을 지키지 못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그렇지만 어수룩한 형의 약점을 이용해서 교묘하게 뺏는 야곱에게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참 두려운 일입니다. 야곱은 자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서운 수단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야곱이 아주 이기적인 죄를 지었습니다. 야곱은 지독한 이기적인 사람이고 욕심이 많은 사람이고 자기 위주이고 남에 대한 배려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편애입니다. 야곱은 네 아내 중 둘째 아내 라헬만 예뻐했습니다. 그리고 첫째 아내 레아는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레아로 하여금 한이 맺히도록 했습니다. 그 결과 야곱의 네 아내들로 하여금 불화를 야기했습니다. 또 야곱은 12아들 중에서 요셉만 사랑했습니다. 그 결과 요셉이 다른 형제들에게 미움을 사게 만들어 끝내 요셉을 팔아버리는 형제간에 있어서는 안 될 일을 저지르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야곱이 처가에서 돌아올 때 에서를 몹시 무서워했습니다. 에서는 자칫 자기는 물론이고 자기 가족들까지 다 죽일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야곱은 형 에서를 만나는 시간이 다가오자 두려움이 극에 달했습니다. 그래서 종 출신의 아내들과 그 자식들을 맨 앞에 세웠습니다. 만일 에서로부터 당하면 먼저 죽게 하려는 의도입니다. 그리고 그 뒤에 레아와 그 자식들을 세웠고 그 뒤에 사랑하는 아내 라헬가족을 세웠습니다. 그 아내도 당하면 당하리라 하고 자기는 맨 뒤에 위치했습니다. 여차하면 혼자라도 도망하겠다는 계산입니다. 

야곱이 이런 사람입니다. 지독하게 이기적이고 자기본위이고 야비한 사람입니다. 성경은 그런 야곱의 이야기를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야곱의 이 같은 이기적인 삶을 고발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이기적인 심성은 타락된 본성입니다. 영적으로 변화받기 전의 인간성을 말합니다. 예수를 만나기 전의 인간성은 대부분 이렇게 이기적이기 쉽습니다. 자기 위주이고 자기본위이고 자신은 조금도 손해 보지 않으려는 마음,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는 심성입니다. 그런 인간성이 예수를 만나면 비로소 변화하게 됩니다. 그 변화가 곧 성결입니다. 본문은 야곱의 타락된 이기적인 죄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거짓되고 간교함 

야곱은 또한 아주 거짓되고 간교했습니다. 그 간교함이 몇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야곱이 형도 속였지만 눈이 어두운 아버지도 속였습니다. 형이 받아갈 축복의 기도를 교묘하게 눈이 어두운 아버지에게 형인 것처럼 위장하고 와서 가로채 갔습니다. 형이 늦게 돌아와 보니 이미 상황이 끝난 뒤였습니다. 아버지가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성경을 보면 “몸을 떨었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치를 떨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큰 아들 에서에게 “네 아우가 간교하게 와서 네 복을 빼앗았도다”라고 말할 때 에서가 말하기를 “그가 나를 속임이 이것이 두  번째이니이다”(창 27: 35-36)라고 말합니다. 

얼마나 간교합니까. 눈이 어두운 아버지의 약점을 이용해서 감쪽같이 속였습니다. 아버지가 “네가 어떻게 이렇게 빨리 짐승을 잡았느냐”고 묻자 야곱은 “하나님이 도와 주셔서 빨리 잡았습니다”하고 능청을 떱니다. 그렇게 해서 야곱이 그 밤에 하란으로 도망을 갑니다. 하란에 도착해서 우물가에 앉아 있을 때 외삼촌의 둘째딸 라헬이 양떼를 몰고 옵니다. 그때 야곱이 물을 길어주고 “라반의 집을 아느냐” 하고 물으니 “우리 집이다”라고 말합니다. 그 말은 그 여자가 외삼촌의 딸이라는 말입니다. 

그러자 순간 야곱은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연극을 아주 잘했습니다. 그리고 라헬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그 연극으로 마침내 장인의 마음도 사로잡았습니다. 그리고 동정심을 유발하여 그 집에서 20여 년 동안 안전하게 거주하게 됩니다. 야곱이 이렇게 간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14년째 되던 해에 외삼촌에게 제안을 합니다. 장인과 계약을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양이 새끼를 낳되 아롱진 것과 점이 있는 것이 낳으면 다 내 것이 되고 흰 양은 다 외삼촌 것으로 하자“고 제안을 합니다. 외삼촌은 당연히 허락합니다. 왜냐하면 양이 태어나면 대부분 희게 태어나지 얼룩진 양이 태어날 이유가 있습니까. 그때 외삼촌은 속으로 “너는 이제 죽었다” 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누가 죽는가는 며칠 뒤부터 나타났습니다. 그때부터 야곱은 잔꾀를 부려 공작을 시작했습니다.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와 신풍나무 가지들을 꺾어다가 반씩 껍질을 벗겨 알록달록하게 만들고 그 가지들을 물속에 잠겨놓고 그 모습을 보고 양떼들이 물을 마시게 하고 또 그 모습을 보고 교미하게 해서 그 환경에서 새끼를 배게 했습니다. 그것도 건강한 것들만 골라서 그곳에서 교미하게 했고 병든 것들은 그냥 내버려 두었습니다. 그러자 양들이 새끼를 낳는데 건장한 것들은 모두 얼룩무늬로 낳았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계약대로 자기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병든 것들은 모두 흰색으로 낳았으니 당연히 장인의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몇 년 안에 양떼들이 다 자기 것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것이 야곱의 거짓되고 간교한 모습입니다. 

또 나중에 야곱이 마침내 형을 만나는데 형이 상상외로 야곱을 반갑게 맞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동생의 얼굴을 맞대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때 야곱이 형 에서에게 말하기를 “내가 형님의 얼굴을 보니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 같습니다”(창 33:10)하고 말합니다. 아첨도 비유 맞추는데도 일가견이 있습니다. 이런 간교함이나 거짓된 처세술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이것은 아주 무서운 죄입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뱀이 간교했다”고 했습니다. 간교함은 마귀적 입니다. 

사무엘하 13장을 보면 암논의 친구 요나답이 심히 간교한 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암논으로 하여금 강간죄를 짓게 유도하고 그 결과 다윗집안에 피비린내 나는 살인극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 중에 이렇게 간교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 간교함은 사탄의 기질입니다. 이 간교함은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고 타락하게 하고 넘어지게 하고 마침내는 자신도 넘어집니다. 이 간교함은 죄의 속성입니다. 야곱이 그렇게 간교했습니다. 그래서 여러 사람들을 속이고 눈물 흘리게 하고 결국 자기도 고난의 삶을 살았습니다. 

세상 사랑 

세상을 사랑하는 것도 죄입니다. 세상을 사랑한다는 말이 왜 죄냐 하면 그 말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짐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잊어버린다는 의미입니다. 신앙인들이 세속에 깊이 물들거나 빠지게 되면 하나님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신앙에서 멀어지게 되고 영성에서 메말라지게 됩니다. 야곱이 마침내 하란에서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왔으면 당연히 벧엘로 올라가야 합니다. 벧엘은 성스러운 곳입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 벧엘입니다. 그리고 그곳은 아브라함이 처음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 곳(창 13:4)입니다. 그리고 그곳은 자신이 형을 속이고 도망치던 밤에 돌 베게 하고 잠자던 곳인데 그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야곱에게 위로하시고 격려하시고 환상을 보여 주시며 반드시 다시 돌아오게 하리라고 약속하시며 야곱에게 비전을 주신 곳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일어나 그곳에 제단을 쌓고 “하나님이 평안히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시면 내가 평생 11조를 드리겠다”고 서원한 곳입니다. 야곱은 마땅히 그곳으로 가서 머물러야 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돌아와서 어디로 갔는가 하면 세겜으로 갔습니다. 세검으로 가서 추장 하몰에게서 땅을 구입하여 그곳에 정착하려고 했습니다. 그곳은 이방인들이 사는 곳이고 세속의 도시입니다. 롯이 아브라함을 떠나서 소돔을 찾아간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맹자의 어머니는 자녀의 교육을 위해서 몇 번이나 이사를 했다는데 환경은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하나님의 집 보다 세상을 더 그리워하는 본성이 있습니다. 인간은 경건보다 번화한 세속을 더 즐거워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에 묻혀 살기를 좋아하는 것이 죄입니다. 그렇게 살면 다 잃어버리게 됩니다. 경건을 잃게 되고 말씀도 잃게 되고 기도도 묵상도 잃게 되고 결국 하나님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야곱이 세겜이라는 세속도시에서 묻혀 살다가 딸 디나가 강간당하는 사건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그리고 야곱의 두 아들이 약속을 어기고 그 세겜성의 남자들을 다 죽이는 무서운 사건이 발생하지 않습니까. 그때 하마터면 야곱의 온 집안사람들이 한꺼번에 몰살당할 뻔하였습니다. 그때 야곱이 얼마나 혼쭐이 났겠습니까. 아마도 그때 야곱이 눈앞이 아찔했을 것입니다. 정신이 번쩍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나서 창 35장을 보면 야곱이 가족을 이끌고 비로소 벧엘로 올라갑니다. 혼쭐이 나고 야곱은 비로소 벧엘로 올라갔던 것입니다. 그 내용이 오늘 읽은 본문 말씀입니다. 2절을 보면 “야곱이 이에 자기 집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이방신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가 환란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에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고 말합니다. 

그때 야곱은 무서운 결심을 합니다. 그래서 다 바꾸었습니다. 다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외쳤습니다.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다 버리라, 자신을 정결하게 하라, 너희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그 말은 이제 다 털고 미련 없이 하나님께로 돌아가겠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야곱이 가족들을 이끌고 비로소 벧엘로 올라갔습니다. 벧엘은 자신이 초라하게 도망가던 날 밤에 꿈을 꾼 곳입니다. 환상을 본 곳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임재한 곳입니다. 야곱이 다 포기하고 벧엘로 돌아갔다는 말은 이제 더 이상 방황대지 않고 하나님께로 돌아가겠다는 말입니다. 이제는 다른 수단이나 꾀나 세상 사랑이나 세상에 대한 미련들을 다 포기하겠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마땅히 가야 할 곳으로 그리고 서야할 지점에 서겠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회복이고 회개이고 유턴이고 복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누구든지 마다하지 않고 받아 주십니다. 탕자를 맞아들이시듯 아무 말 없이 받아주십니다. 야곱이 그렇게 벧엘로 돌아갔을 때 그때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복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창세기 35장9-10절을 보면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다 마는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드디어 야곱의 운명이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천국을 바라보며 살았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야곱이 그때 비로소 세상에 대한 애착을 버리고 하늘을 바라보며 살았다는 말씀입니다.  

 야곱은 오늘 우리의 모형입니다. 그의 생각이 오늘 우리들의 생각입니다. 그의 야심이 오늘 우리의 야심과 목적과 처세와 똑 같습니다. 그러던 그가 마침내 다 포기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 비로소 그의 방황이 끝났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들이 한 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들의 몸속에서 이 야곱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핏속에 지독하게 이기적이고 간교하고 세속적인 기질의 유전인자가 지금 내 몸에서도 흐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들도 마치 야곱처럼 약고 이기적이고 세상을 좋아하는 기질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숫한 실패도 발생하고 세상을 좋아해서 방황하며 살아가고 그 결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마침내는 그 하나님 곁을 떠나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기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예수 안에서 변화를 받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주 안에서 내가 먼저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내 삶이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내 삶에 주인이 주님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때 나는 주님의 자녀가 되고 영적인 사람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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