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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 (암 4: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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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


아모스 4:4-13
(4)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 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5)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드리며 낙헌제를 소리내어 광포하려무나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것이 너희의 기뻐하는 바니라 이는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6) 또 내가 너희 모든 성읍에서 너희 이를 한가하게 하며 너희 각처에서 양식이 떨어지게 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7) 또 추수하기 석 달 전에 내가 너희에게 비를 멈추어 어떤 성읍에는 내리고 어떤 성읍에는 내리지 않게 하였더니 땅 한 부분은 비를 얻고 한 부분은 비를 얻지 못하여 말랐으매 
(8) 두 세 성읍 사람이 어떤 성읍으로 비틀거리며 물을 마시러 가서 만족히 마시지 못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 내가 풍재와 깜부기 재앙으로 너희를 쳤으며 팟종이로 너희의 많은 동산과 포도원과 무화과나무와 감람나무를 다 먹게 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0) 내가 너희 중에 염병이 임하게 하기를 애굽에서 한 것처럼 하였으며 칼로 너희 청년들을 죽였으며 너희 말들을 노략하게 하며 너희 진의 악취로 코를 찌르게 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1) 내가 너희 중의 성읍 무너뜨리기를 하나님 내가 소돔과 고모라를 무너뜨림같이 하였으므로 너희가 불붙는 가운데서 빼낸 나무 조각같이 되었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2) 그러므로 이스라엘아 내가 이와 같이 네게 행하리라 내가 이것을 네게 행하리니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 
(13) 대저 산들을 지으며 바람을 창조하며 자기 뜻을 사람에게 보이며 아침을 어둡게 하며 땅의 높은 데를 밟는 자는 그 이름이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4-5)

한국교회만큼 헌신적인 성도들을 찾아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주일에는 이른 새벽부터 성가대다 교회학교 교사로 수고합니다. 주일 예배 뿐만 아니라 오후예배나 저녁예배를 드립니다. 또 여러 회의나 성경공부가 있습니다. 쉬지도 못하고 주일 온 종일 충성합니다. 주중에는 어떻습니까? 열심 있는 성도는 매일 새벽 기도를 드립니다. 수요예배, 금요기도회, 구역예배뿐만 아니라 주중 성경공부나 전도, 교회봉사, 여 전도회나 선교회 일로 바쁩니다. 부흥회나 교회에 특별행사가 생기면 더 바빠집니다. 세상 친구를 만날 시간이 전혀 없습니다. 정말 엄청난 헌신이라 할 것입니다. 

이것뿐입니까? 한국교회 성도들의 물질적인 헌신도 엄청납니다. 한국교회 헌금이 어디 좀 많습니까? 주일헌금, 감사헌금, 십일조헌금, 건축헌금, 구역헌금, 선교회헌금, 부활절 맥추절 감사절 성탄절 등 절기 헌금, 부흥회 특별헌금, 자녀 소원헌금, 생일 감사헌금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요즘 보니까 일천번제 헌금도 있습니다. 솔로몬이 기브온의 산당이란 곳에서 일천 번제를 드렸습니다. 이 일천번제가 하루에 한번씩 1천 일을 드린 것인지, 아니면 1천 번이라는 횟수를 말한 것인지, 아니면 1천 마리의 번제물을 드린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한국교회는 이것을 매일 드리는 제사로 해석하여 1천일을 작정하고 매일 헌금을 드립니다. 여러 모양의 헌금이 있어 벅찰 듯도 한데 순종하여 드리는 모습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지금 한국교회는 줄어드는 추세입니다. 특별히 40대 초반 이하 30대, 20대의 젊은 세대가 줄어들고 교회학교도 줄어드는 추세입니다. 숫자만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헌신도도 예전 세대만 못합니다. 예배 시간을 보면 나이든 세대가 대부분이고, 교회 헌금도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도 서구교회와 같은 전철을 밟을지 염려가 됩니다. 

당대의 세기적인 설교가 스펄전이 불같은 말씀을 쏟아내던 영국의 메트로 폴리탄에 있는 태버너클 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는 19세기 말 그 당시 규모가 가장 웅장했던 곳으로 좌석만 6천 석이 넘었고 매주 2만여 명이 몰려들었습니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교회에는 주일에 불과 100여 명의 나이 든 노인들만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있을 뿐입니다. 한국교회는 서구교회의 모습을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은 교세와 그 영화를 자랑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역사의 축을 옮기시면 장차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제가 이렇게 한국교회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모스가 말씀을 전파하던 시대가 이처럼 종교적 행사와 헌신이 많았던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아모스가 활동하던 여로보암 2세 시대는 ‘정치적 성공’과 ‘문화적 번영’이라는 두 개의 문장으로 압축되던 시대였습니다. 주변에 강대국들이 약화되었기에 이스라엘이 정치적인 성공을 거둘 수 있었고, 이를 기반으로 경제적 문화적 번영을 이루었습니다. 문화적 번영이라고 할 때는 종교적 행사나 헌신이 많았다는 의미입니다. 

아모스가 4절 이하에서 전하고 있는 종교의 모습을 보십시오. 벧엘과 길갈이 당시 유명한 성소였습니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열두지파의 아버지 야곱이 돌베개를 베고 자다가 처음으로 하나님을 만났던 곳입니다. 길갈은 이스라엘이 요단을 건너 가나안 땅에 처음으로 진입했던 역사적인 장소입니다. 이들은 아침마다 희생 제사를 드렸습니다. 십일조를 삼일마다 드렸다고 합니다. 대단하지요. 감사의 제사인 수은제, 자원하여 드리는 낙헌제 등 종류도 다양했습니다. 5장 21절 이하에 보면 절기마다 제사를 드렸다고 하며 번제와 소제, 살진 희생의 예물을 드렸다고 합니다. 종교적 헌신이 매우 많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종교적 헌신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였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무어라고 말씀합니까?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성소에 와서 제사를 드리고 예물을 드리는 행위에 대해서 범죄라고 규정합니다. 그 횟수가 많아질수록 죄 또한 더해진다고 말씀합니다. 

이런 헌신에 대해서 하나님은 ‘너희 희생’ ‘너희 십일조’ ‘너희 기뻐하는 바’라 하고 있습니다. 5장 21절 이하에서는 이렇게까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왜 이렇게 싫어하시는 걸까요? 무엇보다 이것이 자기 이름을 내고 자기 만족을 위한 제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너희 희생’ ‘너희 십일조’ ‘너희 기뻐하는 바’라 말씀하시는 것을 보십시오. 5절에서는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드리며 낙헌제를 소리내어 광포하려무나”라고 합니다. 원래 감사의 제물로 번제를 드릴 때는 누룩이 없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올바른 예배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번제를 드리는 그 행위를 다른 사람들이 보아주기만을 바랍니다. 낙헌제를 드리면서도 아주 큰 소리로 나 제사 드린다, 내가 얼마나 경건하고, 내가 얼마나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지 좀 보아달라는 태도로 예물을 드립니다. 제사의 목적이 한 마디로 자기 영광이요 자기 만족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헌금이나 헌신은 사람들에게 자랑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우리들이 교회 주보나 아니면 공개적으로 누가 얼마의 헌금을 했는지 밝히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의 영광을 받기 좋아하는 우리들은 습관적으로 헌금 명단이 주보에 올라가 있기를 바라고 내가 많이 낸 것을 누가 알아주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는 가장 중요한 이유인데 그 제사가 불의의 제물로 드리는 제사이기 때문입니다. 생활 속에서 공의와 경건이 없이 성전에만 와서 경건한 채 하는 예배를 주님은 받지 않습니다. 이미 아모스는 2장 8절에서 이스라엘의 죄를 고백하며 “모든 단 옆에서 전당 잡은 옷 위에 누우며 저희 신의 전에서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를 마심이니라”고 비판한 적이 있습니다. 

성전 제단에 와서 기도하기 위해 자리를 펼쳤는데 그가 깔고 앉아 있는 자리는 전당잡은 가난한 사람의 겉옷이었습니다. 성전에서 먹는 거룩한 포도주 또한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빼앗은 포도주였습니다. 이는 단순히 아모스만의 비판이 아니었습니다. 이사야는 정의가 없는 형식적 예배에 대해서 가차없이 비판합니다. 좀 길지만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이사야 1장 11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생활 속에서 가난한 자를 돕고 정의로운 삶을 살지 않는 모든 제사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겠다는 뜻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동일하게 외쳤습니다. 예레미야 7장 4절에서 7절입니다.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정의를 행하며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아니하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 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 뒤를 따라 화를 자초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이 곳에 살게 하리니” 

예루살렘 성전은 매우 거룩한 곳입니다. 이방인이 잘못 접근하거나 불경한 행위를 하면 돌에 맞아 죽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이 성전 앞에 서서 이것은 여호와의 성전이 아니라고 외쳤습니다. 대단합니다. 제가 여의도 순복음교회 앞에서 이곳은 여호와의 성전이 아니라고 하면 난리가 날 것입니다. 

현대의 교회들은 고대 이스라엘의 성전에 비할 바가 못됩니다. 그곳은 지극히 거룩한 곳이었는데 이런 곳에서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고 엄청난 선언을 합니다. 예레미야가 이렇게까지 외치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생활에서 정의와 사랑이 없는 삶 때문입니다. 생활은 엉망이면서 주일 하루만 경건한 모습을 보이려는 우리들의 태도에 대해서 하나님은 용납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자신과 한국교회의 모습을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앞에서 1천 번제 헌금에 대해서 말씀드렸지만 정말 1천 번제 헌금을 드리는 사람은 대단한 신앙의 사람입니다. 그 1천 일 동안 하나님을 향한 정성을 바치는 것이 어디 보통일입니까? 이런 과정을 통하여 신앙도 성장할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가급적 이처럼 헌신할 수 다양한 형태의 헌금이나 기회들을 많이 만들어내려 합니다. 

그러면 교회는 물질적으로 부유해지고 성도는 신앙이 자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 비추어본다면 이런 제물을 주님께서 받으시겠습니까? 일터에서나 가정에서나 평일의 삶에서는 전혀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하고, 심지어 불의까지 저지르면서 하는 헌신을 하나님께서 받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재물에 굶주렸습니까? 또 그 과정에서 자기를 자랑하려는 동기를 은연중 드러낸다면 하나님께서 그 예물을 받으시겠습니까? 교회는 겉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하지만 속으로는 자기 교회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이것을 이용하고 있지 않습니까? 끊임없이 건물을 뜯었다 고쳤다 하고 새성전을 매입하고 그것도 모자라 기도원과 수양관, 묘지 자리까지 매입하기 위한 수단으로 교묘히 이런 헌신들을 이용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이런 예물을 기뻐받으실까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나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었던 하나님은 매우 까다로운 분입니다. 이것이 우상과 하나님을 결정적으로 갈랐습니다. 우상은 한 곳에 고정되어 있으면서 제물만 많이 바치면 좋아합니다. 재물을 많이 바치는 자를 인정해 주고 축복을 주는 것이 우상입니다. 우상은 실상 인간들의 탐욕을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천천의 수양과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많은 제물을 가지고 와도 질렸다고 하며 내 땅만 밟을 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활 속에서 정의와 거룩과 사랑과 겸손함을 회복하지 않으면 그 예배를 받지 않습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수많은 교회가 십자가를 자랑하지만 그것은 인간적 자랑일 뿐입니다. 

탐욕에 물들지 않고 청빈하며, 권력을 좇아가지 않고 섬김의 삶을 살며, 쌓고 누리기보다는 베풀며 사랑하며, 낮고 가난한 자, 고난을 받는 자와 함께 하지 않으면 누구보다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교회로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교회라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고(6-11)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기에 그들이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재앙을 주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6절에서 11절 사이에 하나님께서 베푸신 다양한 재앙들이 나옵니다. 6절에서는 먹을 양식이 없어서 이가 한가해지는 기근의 재앙을 주셨습니다. 

7절에서는 추수하기 석달 전까지 비를 내리지 않는 가뭄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물을 구하려고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비틀거리며 헤맸다고 합니다. 9절에서는 풍재, 곧 곡식을 마르게 하는 재앙과 깜부기 재앙으로 소출이 없게 만드셨습니다. 10절에는 전염병이 임하고 전쟁과 도적들의 침략이 있어 청년들이 죽고 말들이 노략 당하였다고 합니다. 11절에는 소돔과 고모라처럼 지진과 불로 쳤다고 합니다. 

우리는 모든 역사와 자연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래서 자연적인 재난이나 인간이 만든 재난이나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주관 아래 있음을 믿습니다. 우리는 이런 일들이 벌어질 때 그것이 개인적인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하나님께서 이런 재난을 허락하신 뜻을 물어야 합니다. 

전도서에서는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전7:4)고 말씀합니다. 고난의 때에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하며 자기 삶을 반성하는 때입니다. 잘 반성하면 큰 화를 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들은 여러 사인들이 있고 작은 사건들을 통해서 경고를 주어도 돌이키지 않습니다. 이 경고를 무시하면 결국 크게 넘어지고 맙니다.

하나님이 이런 재앙들을 주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태도를 보였습니다. 6절, 8절, 9절, 10절, 11절에서 계속 반복되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 하였느니라”는 말씀입니다. 기근과 가뭄과 열매 없음과 전염병과 도적과 지진이 일어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레미야는 이렇게 답합니다. 2장 13절입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이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스스로 웅덩이를 팠습니다. 그러나 그 웅덩이는 물을 가두지 못하는 터진 웅덩이였습니다.

재난이 닥치자 이들은 하나님께 돌아오기보다는 우상을 더 신뢰하여 매어 달리려 하였습니다. 어려운 때 하나님께 기도하기보다는 점집으로 달려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떤 사람은 물질을 더 신뢰했습니다. 어려울 때는 돈이 최고야 하면서 더 매어 달리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무기나 세력을 의지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이웃나라와 계약을 하고 애굽의 말과 마병을 의지하여 재난을 피하려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힘이나 경험을 신뢰합니다. 아니면 그냥 아무도 믿을 수 없어 하며 혼자만의 세계로 들어가 문을 닫아 버립니다. 하나님은 이런 시도를 향하여 너희가 터진 웅덩이를 의지한다고 말씀합니다. 아무리 쌓고 저축한다 한들 금새 사라지고 맙니다. 밑 빠진 독에 물붓기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마치 생수의 근원을 얻은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 옹달샘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물은 얼마 고여 있지 않은 데 항상 신선한 물이 끊임없이 솟아오릅니다. 퍼도 퍼도 다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우리에게 필요한 물질을 끊임없이 공급해 주십니다. 영적인 기쁨과 지혜도 끊임없이 솟아나게 하십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외칩니다. “너희가 돌이켜 조용히 있어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어늘”(사30:15) 고난의 때에는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고 신뢰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구원을 얻습니다. 그 짧은 사이를 못 참고 이리 방정 저리 방정하다가는 그 고난이 오래가고 더 큰 고난을 맞게 될 것입니다.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12-13)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아모스는 12절에서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그러나 이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좋은 일이나 성과가 있을 때는 주인을 만나는 것이 즐겁고 기다려지지만 잘못된 행동을 한 후 주인이 보자고 하면 그것은 두렵고 가기 싫은 법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곧 최후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작은 사건들로 경고하셨는데 결국 말을 듣지 않자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시겠다고 합니다. 

그 하나님이 어떤 분입니까? 13절입니다. “대저 산들을 지으며 바람을 창조하며 자기 뜻을 사람에게 보이며 아침을 어둡게 하며 땅의 높은 데를 밟는 자는 그 이름이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온 우주 만물을 만드신 분이요, 그 앞에서는 온 만물이 벌벌 떨며 어떤 것도 감출 수 없습니다. 

옛날 중국에서는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서는 그가 누구든 세 번 무릎을 꿇고 그 때마다 세 번씩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해야 합니다. 황제가 거하는 자금성에는 일곱 개의 문이 있는데 이 문을 통과할 때마다 이런 예식을 행하게 했다고 합니다. 인간 앞에서도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는 더하지 않겠습니까? 

이는 매우 심각한 사실입니다. 인간은 그냥 살다가 죽으면 끝이 아닙니다.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합니다. 인생은 길어야 백년도 되지 않을 정도로 짧지만, 그래서 영원이라는 바다에 비하면 한줌의 모래만도 못하것 같지만, 그러나 그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내가 이 짧은 인생은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영원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는 정말 두려울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계시면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홀로 하나님 앞에 서고 홀로 하나님을 상대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신앙인들도 조심해야 합니다. 11절에 무어라 말씀합니까? “내가 소돔과 고모라를 무너뜨림같이 하였으므로 너희가 불붙는 가운데서 빼낸 나무 조각같이 되었으나” 한참 불이 붙은 나무 조각을 꺼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온통 그을리고 탄 불쌍한 모습일 것입니다. 이처럼 부끄러운 구원을 받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 뜻대로 살지 못하면 이런 부끄러운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를 향하여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1-2)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예배가 하나님께서 열납하실 만한 예배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생활 속에서 무엇보다 이 세대의 정신과 가치관과 풍습을 본받지 않아야 합니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좇아 살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 열납하실 만한 예배를 드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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