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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남을 위해 산다는 것 (막 10:4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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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위해 산다는 것 (막 10:42~45)


막 10:35-40
35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36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37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3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39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40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예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예수님과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 사이에 대화를 통해서 발견할 수 있는 사실은 무엇인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서 그 목적이 순수하지 못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은 3가지 면에서 오해하고 있었다.

1)세속적 영광을 구하려 한 것.

오늘 본문에서는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요청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마태복음에서는 그들의 어머니 살로메가 부추기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마 20:20-21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그들은 주님의 나라를 세상 나라로 오해하고 있었다. 예수님의 보좌 좌우편에 앉는 것을 세상적 지위로 생각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오해는 오늘날도 반복되고 있다. 예수 믿으면 출세하고, 예수 믿으면 부자되고, 예수 믿으면 건강해진다는 것이다. 자신의 희망이 신앙의 목적이라면 그것은 기독교 신앙이 아니다. 

기독교 신앙이 기복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기복주의는 아니다. 70년대 초부터 한국교회에 기복주의 신앙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예수 믿으면 성공하고 강건해진다는 소문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다. 잘 살고, 성공하려고 교회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환란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지켰네’라는 순교적 신앙은 사라졌다. 미국의 실용주의에 영향을 받은 번영신학, 성공신학 때문이다. 그런 신학의 기초에는 물질주의적 가치관이 자리잡고 있다. 예수님이 계시지 않고 인간의 이기적이고 탐욕적 심리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십자가 대신 물질적 풍요와 세상적 성공, 육신적 강건을 추구하려는 기대가 신앙의 목적이 된 것이다. 

2)고난 없이 영광을 얻으려 했다.

38절에서, 예수님은 두 제자에게 물으셨다. ‘너희가 나의 마실 잔을 마시며, 나의 받을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두 제자는 고난의 잔을 마실 수 있다고 답변했다. 
‘Yes, we can!'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지체 없이 대답했다. 그러나 불과 얼마 후 그들 앞에 고난의 시간이 닥쳐왔을 때 그들은 다 도망쳤다. 

주기철 목사님은 일제강점시대 신사참배를 거부한 이유로 옥고를 치르셨다. 고문으로 몸이 많이 쇠약해져서 일본 경찰이 목사님을 잠시 풀어 주었다.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교회로 돌아오신 목사님이 강단에서서 설교하였다. 일본 고등계 형사들이 감사하고 있었다. 

설교 제목은 ‘나의 다섯가지 기도 종목.’

1)첫째는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옵소서
2)장기간의 고난을 견디게 하옵소서.
3)나의 노모와 처자와 나의 양떼들을 주님이 돌봐 주옵소서.
4)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옵소서.
5)내 영혼을 주께 부탁하나이다.

설교를 마친 후 다시 투옥되셨고,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고 말았다. 고난 없는 영광은 없다. 오늘날 신자들은 너무 편안하게 믿으려는 경향이 많다. 편안하게 쉽게 믿으려는 사람은 고난이 닥쳐오면 다 도망친다. 쉽고 편하게 주를 따르려는 생각은 사단의 유혹이란 사실을 기억하라. 예수 제대로 믿으면 고난이 따라온다.

딤후 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3)대접받는 자리에 있기를 원했다.

막 10:42-44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43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제자들의 잘못된 생각을 예수께서 고쳐주셨다. 세상나라의 통치 방식과 하나님 나라의 통치 방식을 대조하면서 설명하셨다. 세상 나라의 집권자, 고관들은 백성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권력을 남용한다. 
예)국회의원의 특혜 - 연봉 1억1천7백만원, 보좌관 6명, KTX, 선박, 항공료 무료, 비행기 1등석, 재외공관 영접, 공항귀빈실 이용. 어떤 의원, 왈, ‘의원직은 마약과 같은 거예요.’

그래서 권력 쟁취를 위해 목숨을 걸고 덤벼드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지가 않다.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고,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찬송가 370장(455장),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주 안에 있으면서도 근심이 많은 이유가 무엇인가? 내 욕망의 짐을 풀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닌가? 교회 안에서 자기 주장대로 하려 하고, 어른 노릇하려 하고, 대접 받으려 하니까 다른 사람들과 부딪히게 되는 것이다. 

동상이몽(同牀異夢) 이란 사자성어가 있다. 같은 자리에 자면서 다른 꿈을 꾼다는 뜻으로, 겉으로는 같이 행동하면서도 속으로는 각각 딴생각을 하고 있음을 이르는 말이다. 

제자들의 발걸음은 주님과 함께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었다(32절). 그러나 제자들의 생각은 예수님과 너무나 달랐다. 그들은 세속적 영광을 꿈꿨고, 고난을 몰랐고, 대접받는 자리에 앉기를 원했다. 그들은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원인은 주님의 목적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결론적으로 말씀하셨다.

막 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의 삶은 한 마디로 남을 위한 삶이셨다. 그분의 목적은 섬기기 위함이었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시기 위한 희생의 삶이었다. 남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다.

연변과기대 1회 졸업생 가운데 ‘리 강화’란 학생이 있다. 그는 소아마비로 하반신을 전혀 사용하지 못하는 지체장애가 있어서 중국의 다른 대학에 입학할 수 없었다. 그 학생이 고중(고등학교) 3학년 때 김 진경 총장에게 자신을 받아달라는 간절한 편지를 보내왔고 얼마 후에는 그 학생이 다니는 흑룡강 성 영안고중 재학생들 약 700여명이 A1 정도의 큰 종이에 서명하여 “강화 형을 받아 달라”는 연판장(?)을 보내왔다. 

당시에 학생을 모집하러 흑룡강성 목단강 고중에 갔던 연변과기대 박 덕호 교수가 김 총장의 특별 지시로 그 학생을 면접하게 되었다. 친구인 리 덕권에게 업혀온 그 학생을 보고 박 교수는 덕권에게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네가 만일 너의 친구 강화와 같이 연변과기대에 가서 친구의 팔, 다리가 되어줄 수 있다면 강화를 입학시키는 것을 고려해 보겠다. 어떻게 할래?” 
덕권은 의자에 앉아 머리를 푹 수그리더니 10여분 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고개를 들고 그 교수에게 말했다. 
“강화랑 같이 연변과기대에 가겠습니다.” 박 교수는 다시 덕권이에게 물었다. 
“여기 연변과기대 신입생 초생(모집)요강이 있으니 다시 보고 대답을 해라.” 

그 모집 요강 하단에는 “학교 졸업장은 줄 수 있지만 중국 국가 졸업장은 줄 수 없다”는 문구가 있었다. 지금은 모든 졸업생들에게 국가 졸업장이 주어지지만 그 당시는 학과들이 아직 정식 허가를 받지 못해 국가 졸업장을 줄 수 없던 때였다. 덕권이는 요강을 보고나서 다시 고개를 푹 수그리더니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이윽고 고개를 들고 말했다. 
“그래도 가겠습니다.” 덕권은 그 당시에 흑룡강성 가목사 공학원(공대)에서 합격 통지서를 받아 논 상태에 있었다. 

그렇게 해서 연변과기대 전산학과에 입학한 강화는 4년간 덕권이의 도움을 받으며 공부하게 되었다. 강화와 덕권은 같은 기숙사 방을 배정받아 함께 생활하게 되었고 같은 방 다른 친구들도 강화를 도와주었다. 학교에 아직 장애인을 위한 시설이 되어있지 않아 강의가 있을 때마다 덕권이는 강화를 업고 층계를 오르내렸다. 

마침 같은 학과의 ‘채 혜숙’이란 작고 귀여운 인상을 주는 여학생이 덕권이 대신 휠체어를 끌고 다니기도 하였다. 졸업하고 나서 강화는 자기 휠체어를 끌어준 혜숙과 결혼하였다. 
가족의 반대가 심했지만 딸의 결심을 꺾을 수가 없어서 결혼을 허락해 주었다고 한다.

졸업후에 강화 부부는 몇 년 동안 상해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북경에서 장애인 20여명을 모아 장애인을 위한 직업학교를 시작하였다. 일반적으로 중국에서 장애인들은 간단한 작업을 하거나 수공예품들을 만들어 팔기 때문에 생활이 매우 어려웠다. 그래서 그들에게 부가가치가 높은 에니메이션을 가르쳐서 자립할 수 있도록 하였다. 최근에는 직업학교보다 한 단계 더 발전된 장애인과 정상인이 함께 하는 공동체를 만들려고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4년 동안 강화의 수족이 되어 섬겨 주었던 덕권은 졸업 후에 역시 같은 학과 혜숙이 친구인 김 선영과 결혼했다. 김 선영은 전산학과 1등으로 졸업한 학생이었다. 덕권은 취직해서 한국에서 근무하다가 북경으로 와서 다시 강화와 만나게 되었다. 

최근에 덕권이는 북경 주재 한국대사관의 한 노무 담당관이 “연변지역에 조선족 젊은이들이 빠져나가 안타깝다”는 말을 듣고 다시 연변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현재 연변과기대 R&D 센터 내에서 벤처기업을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장애인 친구를 4년 동안 섬겨준 덕권이란 젊은이, 그는 화려한 도시에서의 편안한 삶을 포기하고 연변의 후배들을 위해 기꺼이 귀향했다. 그리고 장애를 가진 강화와 결혼하고, 장애인들의 재활을 위해 평생을 섬기기로 한 혜숙이란 여성의 희생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떤 모습인가를 잘 보여주는 모델이라 할 수 있다. 

빛과 소금 7월호, 한동대 김영길 박사에 대한 이야기가 실렸다. 
그는 학생들에게 ‘공부해서 남 주자!’라고 가르친다고 한다. 공부를 통해서 내 욕심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쌓은 공부를 남을 위해 쓰는 사람이 되자는 것이다. 그냥 주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이 주기 위해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25년간 과학자로 교수로 살면서 주 관심사는 오직 연구하고, 가치 있는 업적을 쌓고, 특허내고, 석박사 배출하는 일에 주력해왔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그 모든 것이 나만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한동대를 맡고 난 후 교육자로서 교육의 참된 목적이 무엇인가 고민하다가 1642년도 하버드대학 설립 자료집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그 학교의 설립 목적이, ‘우리의 삶과 공부의 주된 목적은 참 하나님을 알고, 영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이 글을 읽는 순간 마음에 큰 도전이 되었다고 한다. 하나님을 바로 알고, 그 분을 삶의 중심에 모시는 것, 이렇게 되면 나를 위한 삶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한 삶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는 교육을 잘 받아서 개인의 편안함만을 추구한 자신의 모습에 부끄러움을 느꼈고 그 이후부터 나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게 되었고 그것이 바로 다른 사람을 위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일의 실천을 위해 몽골, 미얀마, 팔레스타인등 제3세계 학생들을 초청해 교육의 기회르 주고 있다고 한다. 하나님을 아는데 목적을 두고 열심히 공부하여 넉넉히 베풀 수 있는 인재 양성을 하는 것이 하나님이 내게 주신 큰 축복이다고 고백하였다.
(미국 우주항공연구소 연구원, 한국과학기술원 교수, 한동대 총장.)


오늘날 이 시대에 남을 위해 산다는 것, 어리석은 짓일 것이다. 자신의 출세와 성공을 위해서라면 예수님도 이용해야 하는 것이 세상을 사는 지혜일 것이다. 만약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생각을 하고 그렇게 산다면 더 이상 교회는 존재할 의미가 없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높아지기 위해 오시지 않았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대접 받으시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다. 종이 되기 위해 오셨고, 섬기기 위해 오셨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증거했다.

빌 2:6-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삶의 모습이었다. 그렇다면 그분은 십자가에서의 처참한 죽음으로 끝나셨는가? 사도 바울의 증거는 계속되었다.

빌 2:9-11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남을 위해 산다는 것,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남을 위해 살 수 있는가? 예수님의 마음을 품을 때 남을 위해 살 수 있다. 

빌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

남을 위해 사는 것, 참으로 불편하고, 희생이 따르는 일이지만 그러나 그 일은 잃어버린 우리의 모습을 찾는 일이요, 주님의 마음에 합한 일이요. 이기주의 개인주의 물질주의로 가득찬 이 세대에 그리스도인들이 감당해야 할 사명이다. 

남을 위해 사는 성도가 되길 바란다. 남을 위해 살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자. 남을 위해 살기 위해 열심히 일하자. 남을 위해 살기 위해 열심히 수고하자. 오늘날 이 시대에 주님께서 원하시는 성도의 모습이라 확신한다. 

예수의 이름을 부르면서 동상이상 중은 아닌가? 이제 결단하자. 주님의 마음을 품고 남을 섬기며, 세상을 섬기는 성도가 되자. 세상을 섬기는 교회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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