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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기 존재의 고백과 은혜 (롬 7: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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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존재의 고백과 은혜 (롬 7:14~25)


2005년도에 만들어진 우리나라 영화중에 거저 웃고 지나갈 정도로 가벼운 웃음을 주는 코미디 영화<싸움의 기술>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제목이 충동적이다 생각하면서 재미삼아 봤습니다. 늘 맞고 사는 게 일과인 부실 고등학생이 안 맞고 편하게 사는 방법을 찾기 위해 온갖 책을 다 봅니다만 방법이 없자 사는 것이 하루하루 고역입니다. 그러던 중에 독서실에 기거하는 한 고수를 만납니다. 15년 전 전설적인 싸움 실력으로 전국을 제패하고 멕시코의 푸른 바다를 꿈꾸며 은둔하고 있는 전설의 싸움고수를 만나서 싸움의 기술을 배우고 복수를 한다는 오락성 위주의 영화입니다. 

이 영화를 통해서 싸움을 미화한다거나 폭력을 조장하고자하는 의도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이 영화에서 긍정적인 면을 찾는다면 17년간 맞는 게 일과였고 그럼으로 말미암아 소심하고 피해망상에 사로잡혀서 살아야했던 한 소년이 50년간 기술을 터득해온 절대고수를 만나서 공부에도 싸움에도 그 모든 것에서 부실했던 자기 존재를 회복한다는 의미에 둘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평생 맞고만 살아야 하고 무시당하면서 살아야한다는 패배의식에 사로잡힌 자기 존재를 가지고 살아간다면 아마 무슨 일도 할 수 없었을 것이고 영영 자신의 진실한 존재를 발견하지 못하고 인생이 끝날지도 모릅니다. 이건 불행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람들은 도대체 왜 싸울까요? 정말 돈 때문일까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지위 때문일까요? 그것 때문에 싸우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동기가 무엇이 되었던지 간에 결정적으로 싸움이 폭발하는 그 시점에는 공통적인 이유가 있답니다. 뭐 이런 저런 이유로 말다툼을 하다가 딱 한마디가 나오면 꼭 싸움이 터진답니다. 그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당신, 아주 몹쓸 사람이구만! 사람이 그러면 못써.” 하는 말과 혹은 다른 말로 “당신 같은 사람하고는 말도 하기 싫어!” 그러면 꽝하고 터진답니다. 거의 그렇답니다. 

여러분 다 부부싸움하시죠? 부부싸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로 언성을 높이다가 부인이 딱 한 마디 합니다. “당신이 이런 사람인 줄 몰랐어! 내가 당신 같은 사람하고 몇 십 년을 살았으니 내가 미쳤지!” 그러면 그때부터 꽝하는 겁니다. 그 전까지는 그래도 소리만 지릅니다. 그러나 그 한 마디 딱 나오면“뭐라고? 다시 한 번 말해보라!”고 부서지고 깨지고 대부분이 이렇게 싸웁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 한번 우습지만 이 싸움에 대해서 연구해 봅시다. 이게 싸움의 기술입니다. 알아야 잘 싸울 거 아닙니까? 왜 이런 유의 말만 한 마디 나오면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될까요? 사람에게는 은연중에 자기의 존재와 진실이 공격을 받으면 못 참는 심리적 특징이 있습니다. 특히 남자들은 더합니다. 내가 비록 돈은 없지만 존재는 있다는 겁니다. 왜 내 존재가 너에게 평가절하 당해야 하느냐는 것이지요. 내가 지위는 낮지마는 그러나 나에게도 인격은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왜 무시당해야하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배우지는 못해서 유식하지는 못해도 진실하다는 겁니다. 그 자존심이 있는데 이걸 건드렸단 말입니다. 그래서 싸움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직장에서든지 어디에서든지 부하직원이나 다른 사람을 불러놓고 실수를 지적 하거나 혹은 충고를 할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도 좀 생각해야 됩니다. “오늘 당신이 만든 문서, 당신이 만든 프로젝트에 이것 이것이 이렇게 잘못된 거 아니냐? 이렇게 고쳐라.” 까지만 해야 되는데 만일 “넌 왜 사람이 그 모양이야! 그러니까 매일 똑 같지”그러면 문제가 생깁니다. 이 사람이 이 충고를 듣고 나가면서 속으로 ‘니가 사장이면 사장이지 뭐 별달리 잘난 것도 없는 놈이...’ 그런단 말입니다. 

이게 그 다음부터 일이 제대로 되겠습니까? 말하자면 실수된 사건과 그 사람의 존재를 별개시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실수와 인격을 한꺼번에 묶어버리면 그건 못 참는 겁니다. 누구에게나 이런 생각이 있습니다. 내가 비록 실수는 했어도 이건 원래 내가 아닙니다.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더라도 그건 어디까지나 실수일 뿐이지 나라는 존재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알아주길 바라는 겁니다. “아, 당신은 본래 그런 사람이 아닌데 어쩌다가 실수를 했군요!” 이래야 얘기가 되는데 “당신은 태생 적부터 그랬어!” 그러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이걸 알아야겠습니다. 어디까지나 하나의 사건일 뿐인데 그 실수된 사건과 그 사람의 본질을 묶어가지고 내던지면 비수로 가슴을 찌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싸움이 터지는 것입니다. 자, 싸움에 대한 연구 끝입니다. 

여러분, 사실은 싸움 이전에 먼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누구냐에 대한 대답입니다. 도대체 자기 자신이 무엇입니까?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말한 이유도 철학이 어떻고 우주가 어떻고 세상이 어떻고 본질이 어떻고...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알아야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먼저입니다.  

철학자 키엘케고르도 인간의 고독과 불안의 그 깊은 원인은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이요, 또 하나는 자기 자신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특별히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생명을 바칠만한 일이 없어서 인간은 고독하고 불안하답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내가 죽어도 좋다는 확실한 사명을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좀 철학적인 이야기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사람이 현재를 모른다는 게 문제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과거란 지난 것입니다. 현재는 바로 눈앞에 펼쳐진 지금입니다. 미래는 앞으로 올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우리는 과거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으면서도 현재는 모릅니다. 그리고 미래에 대해서는 그저 막연할 뿐 입니다. 

이 말씀을 잘 생각하십시오.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가십니까? 현재 이 시간에는 생각이 안 납니다. 지금 이 시간에는 잘 몰라서 어떻게 해야 할지 허둥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지나간 다음에 그것이 곧 과거가 되고야 결과를 안다는 것 그게 바로 인간의 실존, 즉 현재의 나라는 말씀입니다. 결국은 모르는 현재가 과거의 결과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자기 자신을 바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지나면 바로 결과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현재 자기 자신에게 정직해야 합니다. 곧 바로 평가되어지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자기 자신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결과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한 자기 자신을 인정하는데 담대해야 합니다. 그것이 싫은 모습이든, 원하지 않는 모습이든지 이것이 나라고 인정할 수 있는 담대함이 필요합니다. 숨길 필요도 없고, 감출 것도 없는 적나라한 나의 지금 모습을 볼 줄 알고 인정할 수 있어야 결과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사도바울의 적나라한 자기고백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렇지만 정말 진실한 고백입니다. 지금 바울이 로마로 보내는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로마사람들은 사도바울의 얼굴을 보지 못했습니다. 다만 소문만 듣고 위대한 이방인의 사도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알고 있는 그들에게 써 보내는 이 편지 속에“나는 이런 사람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정말 인간적인 모습을 숨김없이 써 내려가고 있습니다. 어쩌면 위대한 영웅쯤으로 인정받고 싶고 많은 사람들이 우러러 존경할 만한 인물이고 싶었을지도 모를 우리들과 같은 인간적인 마음은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솔직히 어떻습니까? 누가 존경해 주지 않으면 섭섭해 합니다. 대우해 주기를 늘 바라면서 삽니다. 그러나 바울, 정말 위대합니다.“나는 이런 사람입니다.”하는데 그 내용이 온통 자신의 인간적이 부족함 투성입니다. 자랑거리는 하나도 없고 가장 진실한 모습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유명한 얘기가 있습니다. 미국의 남북전쟁 당시에 아브라함 링컨이 참모총장인 장군하고 의견이 충돌됐습니다.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자 옥신각신 하다가 대통령[링컨]이 맘대로 해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작전이 실패하고 말았답니다. 링컨이 미안해서 그 참모총장에게 편지를 써 보냈는데 큰 메모지에다가 딱 한 문장 “ I am sorry!” 라고 써서 비서를 통해 보냈습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있던 참모총장이 이걸 받아보고는 한마디 했는데“이 멍청한 녀석!” 그랬답니다. 대통령도 안 보는데서 욕한다고 욕을 해버렸습니다. 비서가 깜짝 놀라면서‘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생각하면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링컨이 묻습니다.“그래 편지 읽으면서 뭐라고 하던가?” 이걸 바로 고할 수가 없고 쩔쩔맵니다. 그때[링컨]이“솔직하게 말해라.”그럽니다. 하는 수없이“멍청한 녀석! 이라고 합디다.”그랬더니[링컨]이 껄껄 웃으면서“아하! 그 사람, 사람 볼 줄 아는구먼!”그랬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위대하다는 겁니다. 자기 자신도 실수 할 수 있는 사람이고 실수했습니다. 그것을 깨끗하게 인정합니다. 이것이 위대하다는 겁니다. 요래조래 변명하고 뭐 어떻고 저떻고 하는 사람은 초라해집니다. 

언젠가 소개해 드렸습니다만 <우리는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건다>라는 책을 쓴 리차드 칼슨이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합니다. “모든 불행과 근심과 스트레스는 자기 자신의 내부에서 태어난다.” 자기문제를 남의 문제로 내 책임을 사회문제로 돌리려고 하는 순간에 스트레스가 다가온다는 겁니다. 일단 내 책임 이요, 이건 내 잘못이다. 이것을 인정해야 됩니다. 남이 나의 책임을 묻고 인정한다는 게 아니라 내가 내 자신을 바르게 정직하게 인정하는 이 단순한 마음만이 모든 스트레스로부터 자유 할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을 보십시오. 남들이 보기에 성공했다, 존경받을 만하다 할 때 자기 스스로는 자신에 대한 인정을 하고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 몇 가지가 본문에 나오는데 우리가 본받아야 할 자기고백입니다.
먼저, 바울은 자신이 육신에 속하였다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울에 대한 사실은 중생한사람이요, 대사도요, 온 세계에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요, 예수의 이름으로 감옥에 들어가서 매를 수없이 맞은 사람이요, 성자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고백은“아직도 나는 육신에 속했노라.”합니다. 여느 사람과 같이 욕망에 끌리기도 하는 육신에 속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 아래 팔렸다고 말합니다. 사람이 한번 죄를 짓고 나면 죄의 노예가 됩니다. 만약에 한번 거짓말을 했다고 합시다. 바로 회개하지 않으면 또 거짓말해야 됩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사실도 기억해야하고 거짓말도 기억해야 되기 때문에 머리가 복잡해집니다. 제때 회개하면 끝나는 것을 덮다보면 마지막에는 아예 인간자체가 망가지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말도 그걸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지은 죄가 때때로 나를 지배하고 있어서 내가 자유하지 못할 때가 있다. 내 과거가 나를 지배하고 있다. 아무리 끊으려고 해도 아직도 끊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원함은 있으나 행함은 없고 가지 말아야 할 길은 가고 있다.” 인정하고 있습니다. 먹지 말아야 할 음식은 꼭 맛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할 때는 재미가 있지요? 이 병든 성향 자체가 우리에게 있는 것이거든요. 한번 지어본 죄 때문입니다.

또 분문 15절에 보니까 중요한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그랬습니다. 무의식중에 나도 모르게 잘못되고 있고. 나도 모르게 시험에 빠지고 있는 존재더라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잘났다 해도 끝까지 나를 알지 못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21절에서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더라.”는 고백을 합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선한 일 했다고 우쭐하거나 좋은 일 했다고 그것으로 내 존재를 인정받으려고 할 것이 못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선한 일을 한다고 했는데 그 결과가 악이 되기도 합니다. 시험에서 벗어나려고 열심히 기도하는 속에도 또다시 시험에 빠지기도 합니다. 이게 그 누구도 큰소리 칠 수 없는 솔직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을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전적으로 타락한 나를 인정할 때 전적인 은혜로 향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어느 정도 평가하고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언제까지나 훈련하고 기도하고 순종의 연습을 통해서 날마다 나를 쳐 복종시켜야 할 존재로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내가 한 일이 있으니 많은 무리 가운데 마땅히 존경받아야 할 존재요, 지금까지 한 것만으로도 당연히 보상 받아야할 존재라고 생각하며 사십니까? 그렇다면 사도 바울보다 위대합니까? 사도 바울보다 칭찬받을만한 겁니까? 설사 그렇다하더라도 나를 완전히 부정하고야 은혜를 긍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충분히 존경 받을만하고 모범이 될 만한 위치에 섰음에도 불구하고 전적으로 타락된 자신의 모습을 숨김없이 고백하는 사도바울을 봅니다. 이것이 진실한 자기 존재임을 고백할 때 전적인 은혜가 주어짐을 아는 바울이기에 당당한 자기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오늘 자기 자신에게 한 번 더 솔직하십시다. 그리고 나를 완전히 부정해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오직 십자가의 은혜가 여러분의 것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라도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오직 은혜로만 되는 것임을 믿는 믿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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