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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맥추감사절] 당신은 나귀 턱뼈를 감사해 보았는가? (삿 15: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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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나귀 턱뼈를 감사해 보았는가?  (삿 15:14~20)


오늘은 2009년 맥추감사주일입니다. 
출23:19절에 보면, “너의 토지에서 처음 익은 열매의 첫 것을 가져다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드릴찌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40년 광야시절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늘이 내려주는 ‘만나’로 생활했습니다. 
이제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40년 만에 처음으로 땅에서 나는 열매를 맛보게 됩니다. 

얼마나 황홀하겠습니까? 
얼마나 감격스럽겠습니까? 
그러나 땅에서 거둔 것은 경험적으로 볼 때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입니다. 
봄에 씨를 뿌리고 가을에 거두잖아요? 
작년에 그랬듯이 올해도 그럴 것입니다. 
그런데 이 평범하고, 일상적이고, 사소한 것을 새롭게 보고, ‘이게 큰 축복이구나.’ 라고 감사하도록 하는 것이 맥추감사절의 의미입니다.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삼손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 가운데 태어났습니다. 
큰 힘을 부여받았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영이 함께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 스토리가 어떻게 전개되어야 마땅할까요? 

‘.......이러한 이유로 그는 성공했고, 축복받았으며, 승리했다. 원수와 싸워 이기는 영웅적인 삶을 산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어야 자연스럽고 당연한데 삼손 스토리는 정반대로 흘러가고 말았습니다. 
실패와 상처투성이의 인생입니다. 
넘어지고 흔들리는 이야기가 계속됩니다. 
‘들릴라’라는 여인의 무릎에 누워 머리가 빡빡 깎기는 모습, 원수들에게 붙잡혀 눈까지 뽑힌 뒤 짐승처럼 맷돌을 갈고 있는 모습,  비참하게 취후를 마치는 보습........ 
이런 스토리로 인해, 삼손에 대한 일반적인 선입견은 대단히 부정적입니다. 

여러분, 자식에게 ‘삼손’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부모를 본 적이 있습니까? 
부모들은 자식에게 ‘피터’니, ‘폴’이니, ‘스테판’이니 하는 이름을 잘 지어줍니다. 
그 이유는 그 이름들이 존경받는 이름이고, 닮고 싶은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삼손은 그렇지 못해요. 
삼손이란 이름을 지어주지 않습니다. 
그만큼 삼손이란 이름은 부정적입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지금까지의 우리의 선입견을 잠시 뒤로 미뤄놓고, 성경은 삼손을 어떻게 평가하는지를 살펴봅시다. 

히브리서 11:32-33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장입니다. 
거기에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위시한 믿음의 영웅들이 소개되고, 그들이 얼마나 치열한 신앙적인 삶을 살았는지 자랑스럽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의 반열에 삼손도 버젓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에게 충격적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삼손을 평가하는 것처럼 그렇게 평가하고 있지 않거든요. 

왜 하나님은 삼손을 믿음의 반열에 당당히 올려놓으셨는가요? 
피상적으로 바라보는 우리의 눈에는 삼손의 실패와 연약함이 먼저 들어옵니다. 
‘나실인인 그가 어떻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삼손 스토리는 한 인간의 실패를 다룬 이야기가 아닙니다. 
삼손 스토리는 삼손과 같은 그런 실패자까지도 끝까지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다룬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생각해보십시오. 

나실인으로 태어나 하나님의 각별한 축복을 받고,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고, 최고의 힘을 가진 삼손이 아무런 실패 없이 완벽하게 영웅적인 삶을 살다갔다면 그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던져줄 수 있겠습니까? 
실패하여 좌절하고, 작은 유혹에도 걸려 넘어져 절망하는 우리에게 그런 성공적인 삼손의 이야기가 무슨 의미를 주겠느냐는 것입니다. 

부러움의 대상이 될지는 모르지만 그 어떤 도전이나 용기를 주지는 못합니다. 
‘아, 참 대단하다!’ 이 한마디로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삼손은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실패한 놈’을 끝까지 용서해주시고, 기다려주시고, 참아주시고, 덮어주시며, 그의 부르짖는 기도를 외면치 않으셨습니다. 

이 사실이 얼마나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삼손 이야기가 우리와 상관있는 것입니다. 
이해하실 수 있지요? 

성경은 완벽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경은 실패하여 쓰러진 사람들이 다시 일어서고, 회복하는 이야기입니다. 
즉 실패한 사람들에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일깨워 주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큰 도전과 용기를 얻게 됩니다. 

‘완벽한 사람도, 실패하지 않은 사람도 없구나! 누구든지 연약하여 쓰러질 수 있구나!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실패자를 절대 버리지 않으시고, 다시 회복시켜 주시고, 기다려 주시고, 덮어 주시고, 참아 주시는구나! 그 많은 약점에도 불구하고 멋지게 사용하시는 분이시구나!’ 
이런 사실을 발견하고 감격하여 펑펑 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읽은 사사기 15장은 “얼마 후 밀 거둘 때에(1절)”라는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그러니까 맥추감사절에 일어난 일이지요. 
삼손은 여우 삼백 마리를 붙들어 그 꼬리와 꼬리를 묶고, 묶은 부분에 횃불을 달아 블레셋 사람들의 논밭에 풀어버립니다. 
꼬리에 불이 붙어 미쳐 날뛰는 여우들에 의해서 그 해 농사를 망치고 말았습니다. 

사사기15:4-5절입니다. 
“삼손이 가서 여우 삼백을 붙들어서 그 꼬리와 꼬리를 매고 홰를 취하고 그 두 꼬리 사이에 한 홰를 달고 홰에 불을 켜고 그것을 블레셋 사람의 곡식밭으로 몰아 들여서 곡식단과 아직 베지 아니한 곡식과 감람원을 사른지라.” 

이 일 때문에 블레셋 사람들이 유다에 쳐들어왔고, 이에 대항하여 삼손은 나귀 턱뼈로 블레셋 사람 1,000명을 쳐 죽였습니다. 
이제 그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1. 우리에게도 나귀의 턱뼈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15절에 보면, “삼손이 나귀의 새 턱뼈를 보고 .......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실, 14절부터 본문이 의도적으로 강조하는 것이 바로 “나귀의 턱뼈”입니다.
이 사건은 턱뼈로 시작해서 턱뼈로 끝납니다. 
14절을 보면, “레히”라는 지명이 나오는데 그 뜻은 ‘턱뼈’입니다. 
15절에 “삼손이 나귀의 새 턱뼈를 보고........” 
16절에 “가로되 나귀의 턱뼈로 한 더미, 두 더미를 쌓았음이여. 나귀의 턱뼈로 내가 일천 명을 죽였도다.” 
17절에는 “말을 마치고 턱뼈를 그 손에서 내어던지고 그 곳을 라맛 레히라 이름하였더라.” 
‘라맛 레히’는 ‘턱뼈의 무더기’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본문은 의도적으로 턱뼈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귀의 턱뼈’가 무엇입니까?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나귀란 좋은 운송수단이긴 하였지만 부정한 짐승으로 취급되어 그 고기를 먹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중동지역에서는 나귀고기를 먹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귀가 죽으면, 땅을 파고 묻어버렸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나귀 뼈는 사람의 눈에 쉽게 띄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쩌다 눈에 띈다할지라도 부정한 짐승의 뼈였기에 가치 없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귀의 턱뼈는 무기로 사용하기에도 보잘 것 없습니다. 
나귀의 턱뼈는 창도 아니고 칼도 아닙니다. 
따라서 ‘나귀의 턱뼈’는 변변치 못하고, 대수롭지 않고, 가치 없는 어떤 것을 상징합니다. 

삿15:16절의 삼손의 고백은 아주 흥미롭습니다.
 “가로되 나귀의 턱뼈로 한 더미 두 더미를 쌓았음이여 나귀의 턱뼈로 내가 일천 명을 죽였도다.” 
‘나귀’라는 단어와 ‘한 더미, 두 더미’의 더미는 발음이 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운율을 염두에 둔 시적 표현이라고 볼 수 있지요. 
‘나귀’와 ‘더미’는 ‘하모르’이라고 발음되는데 아랍어로는 ‘호마르’라고 합니다. 

자음이 같지요? 
같은 셈족어이기 때문입니다. 
이집트에서는 ‘호마르 같은 놈’이라는 욕을 하는데, ‘미련하고 바보스럽다’는뜻입니다. 
아무튼 삼손의 고백은, ‘하하모르 하모르 하모라타임’이 됩니다. 
‘하 하’하니까 무엇이 연상됩니까? 
웃음이지요? 
그러므로 이 시는 단어가 가진 뜻을 넘어 그 소리만 들어도 만면에 웃음을 띤 승리자의 기쁨과 만족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2. 그런데  하나님의 영이 임하실 때 이 나귀의 턱뼈로 위대한 일을 이룹니다. 

삿15:14절입니다. 
“삼손이 레히에 이르매 블레셋 사람이 그에게로 마주 나가며 소리 지르는 동시에 여호와의 신의 권능이 삼손에게 임하매 그 팔위의 줄이 불탄 삼과 같아서 그 결박되었던 손에서 떨어진지라.” 

여기, “여호와의 신의 권능이 삼손에게 임하매”라는 말씀을 다른 성경에서는 “여호와의 영의 권능이 세차게 덮치매”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삼손과 함께하셨다는 말씀이지요. 

삼손에게 ‘여호와의 영이 임했을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사기 15:14절 하반절을 다시 한 번 보세요. 
“........여호와의 신의 권능이 삼손에게 임하매 그 팔위의 줄이 불탄 삼과 같아서 그 결박되었던 손에서 떨어진지라” 
결박이 풀어지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여러분, ‘여호와의 영이 임하시면’ 여러분을 얽매고 있는 줄이 어떤 줄이든지 마치 불탄 삼과 같이 풀어지는 역사가 일어날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가난이라는 굴레가 풀어집니다. 
병이라는 굴레가 풀어집니다. 
패배자라는 굴레가 풀어집니다. 
이렇게 풀어지는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쓸모없다고 생각했던 나귀 턱뼈가 하나님의 영이 임하는 순간 전투를 승리로 이끈 아주 유용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삿15:15절 “삼손이 나귀의 새 턱뼈를 보고 손을 내밀어 취하고 그것으로 일천 명을 죽이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이 임하시면 하찮고 별 볼일 없던 것이 귀하게 쓰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이제까지 대단치 않아보이던 남편도, 아내도, 자식들도, 교회도, 목회자도, 직장도, 이웃도, 정말 소중하게 여겨집니다. 
그래서 고마워하고, 감사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본문의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나귀턱뼈와 같은 하찮게 보이는 것, 작게 느껴지는 것들이 사실은 큰 역사를 이룰 수 있는 귀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가진 평범한 것, 일상적인 것, 사소한 것에 대하여 감사하고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이것이 행복의 길이고, 축복받는 비결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평범한 것, 일상적인 것, 사소한 것에 대하여 감사할 줄 모릅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시인 김용화님의 ‘딸에게’ 라는 시가 마음에 많이 와 닿습니다. 
“너는 지상에서 가장 쓸쓸한 사내에게 날아 온 천상의 
선녀가  하룻밤 잠자리에 떨어뜨리고 간 한 떨기의 꽃.” 
“아빠, 내가 어떻게 태어나게 되었어?”라고 묻는 딸에게 이런 시 한편을 써주는 아버지는 아름답습니다. 
아빠가 대답합니다. 
“그래. 오랫동안 쓸쓸하게 산 한 사내가 있었는데, 그가 선녀 같은 네 엄마를 만나 한 떨기 꽃처럼 예쁜 너를 얻게 된 거야.” 
이 시가 감칠 맛 나는 것은 군더더기가 전혀 없기 때문이고, 이 시가 감동을 주는 것은 일상적인 것, 평범한 것, 사소한 것을 큰 감격으로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자식?  
어떤 사람에겐 누구나 가지고 있는 평범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겐 “내가 저런 아이를 갖게 되었다니!”하면서 극히 비범한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시인은 딸 아이 하나를 극히 비범한 것으로 감사하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복음성가 찬양-날 구원하신 주 감사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너의 토지에서 처음 익은 열매의 첫 것을 가져다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드릴찌라.” (출23:19) 
땅에서 거두는 열매는 경험적으로 볼 때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입니다. 
봄에 씨를 뿌리고 가을에 거두잖아요? 
작년에 그랬듯이 올해도 그럴 것입니다. 
그런데 이 평범하고, 일상적이고, 사소한 일을 새롭게 보고, 특별한 은혜임을 감사하도록 가르치는 것이 맥추감사절입니다. 

여러분은 월급을 특별하다고 생각합니까? 
여러분은 오늘 살아서 아침을 맞이하는 것을 특별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가족이 한 상에 둘러앉아 웃으며 식사하는 것을 특별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하루 세 끼 먹는 것을 특별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건강하여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는 것을 특별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세계에서 경제대국 12위인 한국 땅에서 한국인으로 살아가는 것을 특별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들을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맥추감사절 정신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래서 그 평범한 것, 일상적인 것, 사소한 것에 대하여 깊은 감사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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