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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감사한 사람 (눅 17: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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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한 사람 (눅 17:11~19)


안젤리나 졸리라는 미국의 여배우가 있습니다. 그녀는 완벽함의 대명사입니다. 우선 돈을 많이 법니다. 일 년 수입이 일천칠백 만 불입니다. 엄청난 돈을 벌고 또 그녀가 출연하는 영화마다 히트를 합니다. 게다가 그녀의 남편은 만인의 선망의 대상인 브레드 피트입니다. 엄청나게 잘생긴 남편을 두었습니다. 그리고 안젤리나는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다니면서 아프리카의 난민들과 어린이들을 구호하는 자선활동을 폅니다. 그것으로도 세계적인 명성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 것 뿐만이 아니고 그 바쁜 와중에 완벽한 몸매와 외모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어느 모로 보나 완벽함의 대명사입니다. 거기에 비하면 대다수의 여성들은 그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하기가 힘든데 어떻게 그 여성은 그 많은 것을 다 할 수 있을까 부러움의 대상이고 얄밉습니다. 얄미운 사람이에요. 

고대 그리스에는 오스트라시즘 도편추방제라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항아리 조각에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의 이름을 써서 투표를 하는 제도였는데 육천표 이상을 얻은 사람은 죄가 있은 없든 십년동안 추방하는 제도였습니다. 그런데 아테네의 정치인인 아리스테이데스라는 사람이 길을 가는데 어떤 사람이 ‘내가 글을 쓰지 못하는데 이 항아리에 아리스테이데스라는 이름을 써주시오.’라고 부탁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지금 이 사람이 누군지 모르고 그렇게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아리스테이데스가 ‘왜 그 사람을 추방하고 싶습니까?’ 그랬더니 ‘나는 그 사람을 알지는 못하지만 하도 사람들이 그를 의인이다, 의인이다 하니까 얄미워서 그렇습니다.’ 이렇게 대답하더랍니다. 아리스테이데스는 어이가 없었지만 부탁하는 대로 자기 이름을 써주고 그리고 그는 추방을 당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도 엄친딸이라는 말이 있지요. 엄친아. 그 말은 엄마 친구의 딸, 엄마 친구의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돈의 팔촌으로 건너가는데 거기를 가면 공부도 잘하고 엄마 말도 잘 듣고 그런 아들딸들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이건 좀 얄미운 대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그렇지 못하니까. 나는 우리 엄마 아빠가 바라는 만큼 공부든 부모님 말씀 듣는 것이든 부족한데 사람들 말에 의하면 엄친딸 ․ 엄친아 라는 게 있다고 한다. 그들이 그렇게 공부도 잘하고 부모님 말씀도 잘 듣는다고 한다. 그래서 엄친아 ․ 엄친딸 때문에 나까지 욕을 먹는 얄미운 대상이 아닐 수 없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의로움을 사모하고 그게 좋은 줄 알지만 내 자신이 의롭지 못하기 때문에 상대방이 너무 의로운 것처럼 보이면 그것이 친밀함을 낳는 것이 아니고 거리를 낳고 오히려 그 사람 때문에 내가 불편하고 가까워질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면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정서를 예수님도 이해하시고 예수님도 어느 정도는 이러한 정서를 공유하셨습니다. 믿어지지 않지만 놀라운 사실이지요. 그 당시에 소위 의인 취급을 받은 사람들에 대하여 예수님은 불편하게 생각하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불의해서가 아니고 그 당시에 의를 자랑하던 바리새인들에 대하여 예수님은 그들의 의가 첫째는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의이고 그들의 의로움이 남들을 천대하게 만들고 그들의 의로움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예수님은 못마땅하게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누누이 말씀하시기를 ‘너희의 의를 사람들 앞에 보이려고 행하지 말아라. 너희는 바리새인처럼 기도하지 말고 바리새인처럼 금식하지 말고 바리새인처럼 구제하지 말아라.’ 의인을 예수님이 폄하한 게 아니고 ‘그 바리새인들의 소위 자기가 의롭다고 생각하고 남들을 업신여기고 자기의 의를 자랑하려고 하는 것은 그건 이미 이 세상에서 상급을 받은 것이다. 너희는 의를 행할 때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행하라.’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소위 의인이라는 바리새인들도 예수님에 대해서는 불편하게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진짜 앞에서 가짜가 드러나는 것처럼 예수님의 참된 경건과 참된 순종과 참된 천국의 능력 앞에 그들의 의라는 것은 무늬만 의로운 것이지 거기에는 천국의 능력도 천국의 기쁨도 천국의 긍휼도 없는 인간적인 행위에 의한 도토리 키 재기 식의 의라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병자를 보시면 고쳐주시고 죄인을 보시면 죄인이 돌아오게 하시고 잃어버린 영혼을 보시면 구해주셨지만 바리새인의 의는 병자를 낫게 하지도 못하고 죄인들을 감화시키지도 못하고 잃어버린 영혼을 구하지도 못하는 무늬만 의인 표면적인 의의 모습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불편하게 생각하고 위협으로 생각하고 예수님을 좋게 생각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역설적인 얘기이지만 참된 신앙이 왔을 때 소위 신앙적인 연조와 열심이 있는 사람들이 오히려 그 신앙을 거부하고 그 신앙으로부터 멀리 있던 자들이 오히려 받아들이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 원리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하시기를 ‘건강한 자는 의원이 필요 없고 병든 자라야 필요하다 인자가 온 것은 의인을 부르려 함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려 함이니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구절은 마태복음에 기록된 것이고 그 평행구절이 누가복음에도 있는데 누가는 거기에 한 구절을 삽입했습니다. 그래서 마태는 ‘인자가 온 것은 의인을 부르려 함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려 함이라’ 이렇게 평이하게 말씀하셨는데 누가는 ‘죄인을 불러 회개케 함이니라’라고 회개라는 말을 삽입했습니다. 이것은 그 당시에 초대교회 시대에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을 의식했기 때문입니다. 

죄인을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고 은혜를 통해서 죄사함을 받는 것까지는 이해를 하겠는데 그렇게 되면 그게 죄를 방조하지 않을까 죄를 장려하는 결과를 낳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여전히 죄를 짓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그 당시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는 예수님의 똑같은 말씀을 기록하면서-편집자의 권리지요-자기가 강조하고 싶은 말을 거기에 삽입해서 ‘죄인을 불러 회개케 함이니라’ 다시 말하면 회개하지 않고 구원받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런 식으로 신학적인 해석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위험은 하나님도 알고 계시고 하나님도 감수하십니다. 죄인을 위하여 예수님이 오셨다는 사실 또 죄인이 행함이 아니고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사실에는 한 가지 위험이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을 받은 이후에 이제 무슨 수로 그 사람을 붙들어 매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구원을 받았고 이 구원은 행함이 아니고 은혜로 말미암는 것인데 한번 구원을 받은 다음에 자기 멋대로 산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규제할 방법이 없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게 아니고 만일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면 죽는 날까지 자기의 행실을 염려하고 주의하고 또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애를 쓸 테지만 그게 아니고 이미 의롭다함을 받은 상황에서 무슨 수로 그 사람을 신앙에 붙들어 맬 수 있겠느냐 하는 그런 어떤 행위적이고 도덕적인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도 이미 알고 계시고 예수님도 알고 계시고 그 위험을 예수님은 감수하셨습니다. 그래서 열 명의 문둥병자가 다 깨끗함을 받았지만 아홉 명은 예수님께 돌아오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아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건이 여기 기록돼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열 이라는 숫자는 많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사람의 손가락 숫자가 열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손가락으로 표시할 수 있는 가장 최고의 숫자가 열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열이라는 숫자는 많다는 의미입니다. 

열 명의 문둥병자가 다 깨끗함을 받았다는 말은 죄사함을 받는 사람은 의외로 많다는 얘기입니다. 아마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효험을 받는 사람들은 많을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에도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도리어 섬기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하려 함이라’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목숨의 대속물에 의하여 대속을 받을 사람들은 의외로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개중에 주님에게 돌아와 감사하고 주님의 말씀을 배우고 주님과 동행하려고 하는 사람은 적습니다. 주님은 그러한 위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고 그것을 감수하셨어요. 그 사실을 아시면서도 그럼에도 세상 죄를 지고 가셨어요. 여기서 이 아홉 명은 예수님께 돌아오지 않았다고 해서 문둥병이 다시 도진 게 아니에요. 한 번 깨끗함을 받으면 영원히 깨끗해요.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과 가깝지 않고 원래 예수님에게 우리를 긍휼히 여겨 달라고 했을 때도 멀리 서있었는데 그 이후에는 더 멀어졌으니까 예수님과의 관계는 별로 없는 것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예수님과의 관계가 멉니다. 애초부터 멀었습니다. 남의 어깨 너머로 복음을 듣고 남의 어깨 너머로 기독교를 접했어요. 그리고 한 번도 주님에게 가까이 갈 엄두를 내지 못했어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 복음을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과는 다릅니다. 주님의 은혜는 한 방울을 경험하더라고 그 안에 그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예수님의 겉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깨끗함을 입었는데 예수님의 품에 안기든 예수님과 가까이 하면 얼마나 더 큰 은혜가 있겠습니까. 

대조적으로 손 한번 대는 것만으로도 깨끗하게 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은 주님의 은혜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주님의 보혈은 역사하는 힘이 많습니다. 그런데 아홉 명은 떠나갔어요. 아홉 명은 일단 깨끗함을 받은 다음에는 주님을 필요로 하지 않았지만 한 사람만이 돌아왔습니다. 이게 진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깨끗함을 얻은 것 뿐만이 아니고-그건 기본이에요- 믿는 순간 구원을 받습니다. 그렇다고 거기서 신앙생활이 끝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깨끗함을 얻는 것은 기본이고 그리스도인은 그 다음에 주님께 돌아와서 감사하고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섬기고 주님 말씀을 배우고 주님과 동행하고 주의 복음을 전하고 그게 그리스도인이에요. 그렇게 함으로써 깨끗함을 얻는 것은 아니에요. 깨끗함은 이미 얻었어요. 이미 얻고 시작하는 것입니다. 한참 수고한 다음에 깨끗함을 얻는 게 아니에요. 깨끗함을 얻고 시작하는 것입니다. 죄사함을 얻고 시작하고 의롭다함을 얻고 시작하는 것입니다. 천국백성이 된 다음에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깨끗함을 얻는 것이 끝이 아니에요. 깨끗함을 얻는 것은 기본이고 그 다음에 주님과 동행하고 감사하고 주와 함께 길 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 할렐루야!

세상 사람들뿐만이 아니고 율법주의적으로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은 주님과 같이 길을 가기는 가는데 즐겁다고 생각하지 않고 고역이라고 생각하고 마지못해 한다고 생각하고 그래야 복을 받을 줄 생각하고 자기가 주님에게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give & take 식으로 내가 이렇게 하면 주님도 나에게 빚을 갚겠지 이런 식으로 하고 즐거움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마지못해 그렇습니다. 

몇 주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을 father로 생각하는 게 아니고 bother로 생각해요. 귀찮아요. 성가셔요. 마지못해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섬기는 것만 그런 게 아니고 인생을 그런 식으로 사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우리가 사실 뭐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공부든 살림이든 직장이든 운동이든 모든 것을 자기가 즐거워서 하는 게 아니고 마지못해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아침부터 나가서 밥을 먹는 남편은 최고의 남편이고 아침만 먹는 남편은 그래도 낫고 저녁을 빠지지 않고 집에서 먹는 남편은 아주 귀찮은 남편이고 점심마저 먹으면 그건 눈치 보면서 먹는 것입니다. 살림도 즐거워서 하는 게 아니고 직장생활도 즐거워서 하는 게 아니고 그럼 도대체 이 세상의 무엇을 즐거워합니까. 

도대체 논다는 것, 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가 마땅히 해야 되는 일을 즐거워 할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할렐루야! 그게 행복한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일을 마치고 그리고 행복을 추구하러 가는 게 아니고 자기가 마땅히 해야 되는 일을 즐거움으로 할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다리미질을 하면서도 행복하고 직장에서 늘 똑같은 일을 반복하면서도 감사하고 그리고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 우리 주님 앞서가신 생명 길로 가겠네.

우리가 은혜로 구원을 얻었는데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구원을 얻은 후에도 여전히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되는 이유가 무엇이냐? 구원을 잃을까봐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 문둥병자들 중에 아홉 명이 주님께 안 돌아왔다고 해서 문둥병이 도진 게 아닌 것처럼. 그러나 주님에 대한 감사, 의리, 사랑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조폭만도 못하면 안됩니다. 조폭은 자기의 생명을 건져준 사람에게는 생명을 바쳐서 충성합니다. 그게 의리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 중에는 조폭만도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주님이 자신의 모든 것을 건져주셨는데 주님에 대한 의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 우리가 아이들을 키울 때 ‘이것 빨리 해 안하면 너 맞아.’ 그건 아이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요. 만약 부부가 남편이 아내에게 ‘이거 저녁까지 다려 놔. 안 하면 맞아.’ 그런 결혼생활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건 병적인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고 아끼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지 맞을까봐 두려워서 뭘 하고. 

인간관계도 그러한데 주님과의 관계도 그래야 되지 않겠습니까. 왜 맞을까봐 두려워서 뭘 한다고 생각합니까. 그건 주님이 기뻐하시는 게 아니에요.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주님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 말씀에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리라’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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