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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라 (시 103: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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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라 (시 103:1~14)


조금씩 나이가 들면서 하나 느끼는 것은 잘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가끔씩 잊어버리고 실수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메모를 하려고 노력을 합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메모지를 어디에 두었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아주 귀중한 물건들은 깊숙이 잘 두려고 잘 감추어 두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어디에 두었는지 몰라서 온 집안을 뒤질 때가 종종 있다는 것입니다. 뭐 저의 아내나 저나 여러분들과 비슷하니까 대게 비슷할 것입니다. 집사람이 예전에 자꾸 가스 불을 켜놓고 밖에 나갔습니다. 한번은 우리 아이가 밖에 나갔다 들어와 보니 집안에 연기가 가득하고 위험했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현관문 앞에 “가스불 확인! 가스 조심!” 이렇게 써놓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다음부터는 좀 조심하는 것 같았습니다. 

또 집사람을 보면 차를 주차해 놓고는 아침에 자기가 차를 어디에 주차해 놓았는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아파트 지하 1층인지, 지하 2층인지, 지상인지 구분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한참 생각하는 경우를 보았습니다.

저도 좀 비슷할 때가 있습니다. 제가 커피믹스를 잘 먹는데, 커피믹스를 먹기 위해서는 보통 물을 데우고, 찻잔을 놓고, 끄트머리를 가위로 자르고 찻잔에 커피를 붓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그 껍데기만 쓰레기통에 넣어야 하는데 커피를 그만 기껏 잘라서 쓰레기통에 부어버렸습니다. ‘아 이럴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살아가면서 이런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보통 ‘건망증’이라고 합니다. 차문을 잠갔는지 안 잠갔는지 다시 확인해 볼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 잊어버려도 진짜 잊어버리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은혜를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다른 건 다 잊어버려도 은혜를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그래서 은혜의 건망증은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은혜를 잊어버리면 심각해집니다. 

마태복음 2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마지막 제자들과 함께 만찬을 나누시면서 하신 말씀이 “너희가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올 때까지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이 기념하라는 말은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사실을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주님이 보혈을 흘리심으로 내 죄가 용서받은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잊어버릴 것이 있고, 잊어버려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마지막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 때까지 이 은혜의 사실만은 여러분의 마음에 꼭 새기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누가복음 17장에 보면 10명의 문둥병자의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데 10명의 문둥병자를 만났습니다. 이 문둥병이라는 것은 천형입니다. 가족들과 같이 지낼 수가 없습니다. 동리에도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지난번에 돌아가신 원로 목사님의 사위가 고흥에 기독안과라고 개업을 해서 장로님들과 멀리 심방을 간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소록도가 가까웠습니다. 소록도 앞에 바라보이는 횟집에서 점심을 먹고 이왕 온 김에 소록도에 한번 가보기로 했습니다. 예전에는 배를 타고 갔지만 지금은 다리가 놓아져서 잠깐이면 건너 갈 수가 있었습니다. 소록도라는 곳은 한번 들어가면 평생 죽을 때가지 못하는 무서운 곳이었습니다. 한번 나병에 걸리면 가족과 영원히 결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 나병환자들이 예수님을 보고 소리칩니다. “예수 선생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너희 몸을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이 좋아가지고 제사장에게 갔습니다. 제사장은 그 당시 의사였습니다. 제사장에게 가서 건강 진단을 받고 병이 다 나았으면 집으로 돌아가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제사장에게 가다보니 문둥병이 깨끗이 나은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너무 좋았습니다. 그런데 그들 대부분은 제사장에게 들렸다가 집으로 가버렸습니다. 하지만 그들 중 한 사람, 사마리아인 한 사람만은 다시 예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앞에 무릎을 꿇고 감사드렸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묻습니다. “아니, 열 명이 고침 받았는데 어찌 한 사람만 왔느냐? 다른 아홉 명은 어디에 있느냐?” 예수님 마음에도 섭섭함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홉 명의 유대인들은 감사할 줄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비난하는 한명의 사마리아인만이 주님께 돌아와서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감사는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감사는 결코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먹기 나름입니다. 여러분들도 늘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옆에 분들에게 한번 물어보십시오. “당신은 아홉 명 쪽입니까? 한명 쪽입니까?” 아홉 명 쪽이라면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도망가 버린 사람이고, 한 명쯤은 돌아와서 감사할 줄 알았던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대에 가장 큰 비극은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감사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자녀들은 부모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예전 같지 않습니다. 부모님이 낳으셨으니 기르는 거지, 그걸로 크게 부모에게 감사하는 별로 많이 않을 것입니다. 효심이 자꾸 사라집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자꾸 사라집니다. 

여러분! 요즘 공부하는 학생들이 스승에게 크게 감사하는 것 보셨습니까? “선생님이 월급 받고 하는 거지, 나도 등록금 내고 배우는 건데.” 스승에 대한 감사가 자꾸 사라집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백성들은 국가에 대한 감사가 없습니다. 정말 내가 이 나라 백성이 됨으로서 내가 이렇게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 내가 직장을 가지고 이렇게 행복하게 산다는 것에 대해 별로 감사를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서 입만 열면 나라에 대해 비판을 하고, 정부에 대해서 원망을 하는 것입니다.

하물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하여 감사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기에 우리의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103편은 다윗의 찬양시요, 감사시입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송축하라는 말은 찬양하라, 감사하라는 뜻입니다. 시편 103편에서 7번이나 반복해서 소개됩니다. 

여러분! 다윗은 정말 너무나 많은 고난의 삶을 살았던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하나님의 돌보심과 보호 가운데 그는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인생의 노년에 그는 살아온 나날을 회고하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의 찬양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오늘 이 다윗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오늘 우리가 이 시편을 중심으로 한 세 종류의 인간상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부류에 속하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첫째는 은혜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은혜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아니 신앙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감사라는 것은 해 본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 마음이 바로 교만한 마음이고, 불신의 마음입니다. 

누가복음 12장에 보면 어리석은 부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주 돈 많은 부자가 한 해 농사를 잘 지어서 아주 수확을 많이 거두었습니다. 창고가 부족해서 창고를 더 크게 증축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창고에다가 자기가 거둔 모든 수확들을 가득 쌓아두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노래합니다. “이제는 평안히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이제 이 모든 쌓아둔 것을 내 인생을 위해 즐기는 데 사용하자.” 

그런데 그 날 밤에 하나님이 그 부자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내 영혼을 도로 찾아가리니 그러면 네가 준비한 모든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그렇습니다. 아무리 많은 재물을 쌓아놓아도 그 영혼, 그 생명을 거두어가시면 그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습니까? 자기의 것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놓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이 말은 바꿔 말하면 하나님께 대하여 인색한자. 하나님께 대하여 감사하지 못한 자의 종말이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를 깨닫지 못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중국 선교사인 ‘스탠리 존슨’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교양인과 야만인의 차이는 감사할 줄 아느냐, 감사할 줄 모르느냐의 차이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인간됨의 그 됨됨이는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알고, 하나님을 높여 찬양할 줄 아는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또 이사야서 1장 3절에 보면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소도 주인을 알아봅니다. 그 임자를 압니다. 나귀도 구유를 압니다. 그런데 그들이 태어난 하나님의 존재를 모른다면 이것은 짐승보다 못한 존재입니다. 

여러분! 사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것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해를 주시고 비를 주시는 겁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고, 건강을 주시고, 가족을 주시고, 재물을 주시고, 사업을 주십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내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에 빠지는 것입니다. 은혜를 깨닫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이 은혜를 깨닫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두 번째 부류는 은혜를 잊어버린 사람입니다. 처음은 은혜를 깨닫지 못한 사람, 두 번째는 은혜를 잊어버린 사람입니다. 은혜를 알기는 아는데, 은혜를 깨닫긴 깨달았는데 은혜를 망각해 버린 사람.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 같습니다. 그들이 애굽에서 400년 동안 종살이하다가 모세의 인도로 애굽에서 나올 때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시고,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시고……. 정말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미리암은 소고를 치면서 우리를 홍해에서 구원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그 감사와 찬양이 오래 가지를 못했습니다. 그들은 곧 망각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광야에서 조금만 어려운 일을 당하면, 물이 좀 부족하면, 음식이 좀 부족하면 하나님을 향하여 불평을 쏟아놓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원망하다가 광야에서 어린아이들을 제외하고는 다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은혜를 잊어버린 사람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그런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내가 예수 믿고 구원받은 감격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은혜가 희미해져 버렸습니다. 감격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저 나오는 것은 불평이요 원망이요,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마음밖에 없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여러분! 역대하 32장에 보면 히스기야왕에 대한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히스기야가 마음이 교만하여 그 받은 은혜를 보답하지 아니하므로 진노가 그와 유다와 예루살렘에 내리게 되었더니” 히스기야 왕이 참 훌륭한 왕입니다. 은혜를 아는 왕입니다. 그가 죽을병에 걸렸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고침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은혜를 잊어버렸습니다. 망각해버렸습니다. 마음이 교만해졌기 때문에 결국 그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떨 때 은혜를 잊어버립니까? 교만한 마음이 찾아올 때입니다. 은혜를 잊어버리면 마음이 교만해집니다. 은혜를 잊어버리면 원망과 불평을 쏟아놓기 시작합니다. 그 입술에 찬양과 감사가 없습니다. 원망과 불평 뿐입니다. 은혜를 잊어버리면 자기 자신을 내세우게 됩니다. 자기를 뽐냅니다. “내가 잘 된 것은 내가 잘나서 그런 거지. 내가 머리가 좋아서 그렇고, 내가 사업을 잘해서 돈 버는 거지.” 하나님의 은혜가 없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자기 자랑만 늘어놓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자랑할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랑해야 하는데, 하나님을 자랑해야 하는데 자기만 자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패망의 길이고, 멸망에 이르는 길입니다.

제가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드렸습니다. 연못가에 개구리들이 모여서 개굴개굴 놀고 있는데 하늘을 날아가는 독수리나 황새를 보니 너무 부러웠습니다. 개구리 한 마리가 “야! 나도 저렇게 하늘을 훨훨 날면 얼마나 좋을까?” 그랬더니 어떻게 그 소원을 황새가 들었나 봅니다. 황새가 와서 “개구리야! 내가 너를 하늘을 날게 해 줄게!” “방법이 있어?” “방법이 있지. 자! 내가 내 입에 작대기 하나를 물을 테니 너도 그 작대기를 입으로 꼭 물고 있으면 네가 하늘을 나와 같이 날거야.” 

정말 황새가 입에다 작대기를 물고 와서 개구리도 같이 작대기를 물고 하늘을 날게 되었습니다. 너무 신나고 기분이 좋았습니다. 연못가 위를 지나가는데 동료 개구리들이 놀랐습니다. “야! 쟤가 하늘을 난다. 야! 너 어떻게 그렇게 기발한 생각을 했니?” 개구리가 입이 간질간질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친구들에게 한 마디 했습니다. “ 야! 이 멍청이들아, 내 생각이지 누구 생각이야.” 하고 입을 여는 순간 땅으로 떨어져 즉사하고 말았답니다.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뽐내다가 결국 죽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은혜를 잊어버린 사람들은 자기를 내세웁니다. 자기를 뽐내고 자기를 자랑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챕니다. 그리고 교만에 빠집니다. 그리고 입에서는 원망과 불평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합니다. ‘내 가족 때문에 행복한 것이 아니라 내 가족들은 거추장스러운 것이고, 내 가족들 때문에 내가 불행해.’ 늘 이런 생각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문제가 있습니다. 은혜를 잊어버린 경우입니다. 그래서 오늘 시편 기자는 뭐라고 강조합니까? 

103편 2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봅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저를 따라해 보십시오.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은택이라는 것은 은덕, 은혜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선행과 그 사랑을 결코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번역으로 보면 “주께서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다른 모든 것을 다 잊어버려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잊어서는 안 됩니다.

디모데후서 3장 2절에 보면 “부모를 거역하며 부모에게 감사치 아니하며”라고 나옵니다. 요즘 시대를 종말의 시대라고 하는데 그 종말의 특징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들이 감사를 잃어버립니다. 

여러분! 하루하루 감사하며 살아가십니까?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백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그는 겸손히 고백합니다. 시편의 시인은 “여호와께서 내게 베푸신 은혜를 내가 무엇으로 보답할까.”라고 고백합니다. 한 끼의 식사를 앞에 두고도 우리가 감사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마르티 바덴’이라는 독일의 재무장관을 지낸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은 젊은 시절에 아주 가난했습니다. 한번은 돈도 얼마 없이 여행을 가게 되었는데 어느 여인숙에서 하룻밤을 자게 되었습니다. 아침에 자고 일어나니 자기가 신고 왔던 새 신발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 당시에는 신발이 귀하니까 새 신발이라 누군가 훔쳐갔는가 생각했습니다. 불평을 합니다. “세상에,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이럴 수가 있는가!” 여인숙 주인이 그 말을 듣고 안 되었던지 “오늘 주일이니 나와 교회를 가십시다.”하고 헌 신발 하나를 내 주었습니다. 그 신발을 신고 터덜터덜 교회를 갔습니다. 무슨 그 마음에 은혜가 되겠습니까? 오늘도 억지로 끌려온 분들은 별로 은혜가 안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을 유심히 봤더니 양쪽 다리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예배를 드리는데 구구절절 감사의 찬양을 올리는 것입니다. 기도를 들어보니 “하나님 내 생명을 구원하시니 감사합니다. 내 죄를 씻어주시니 감사합니다.” 계속 감사와 찬양 밖에 없었습니다. ‘아니 저 사람은 뭐가 그리 감사한가?’ 생각하다보니 마음의 감동이 왔습니다. ‘저 사람은 신발은커녕 양 발이 없어도, 다리가 없어도 감사하는데, 나는 멀쩡한 두 다리를 가지고 신발을 잃어버렸다고 불평하다니.’ 그는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때부터 인생관이 달라졌습니다. 그는 있든 없던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사람이 되었고 후에 독일의 재무장관이 되어서 나라를 위해 크게 공헌하게 됩니다.

감사란 늘 풍족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족한 가운데서도 감사할 줄 아는 것이 진정한 감사입니다. 욥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신 분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분도 여호와시니 오직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실 지어다.” 사랑하는 여러분! 은혜를 기억하는 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다윗이 쓴 시편에는 구구절절이 감사의 말씀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3절~5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봅니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 도다”

다윗의 많은 감사의 고백이 있는데 그 중에 몇 가지를 살펴보면 내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죄를 용서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인간의 문제는 죄의 문제입니다. 죄의 정결함을 입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이 죄는 정말 누구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보내주셔서 그로 하여금 고통을 받고 고난의 피를 흘림으로 우리의 죄가 용서받게 하셨습니다. 제일 행복한 사람은 죄가 용서받은 사람입니다.

시편 32편에 보니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어떤 죄를 범했든지 오늘 하나님 앞에 나아와 자신을 내어놓고 주님 앞에 회개하는 자는 그 영혼이 용서받고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더 더욱 하나님은 그 죄를 따라 처벌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죄악에 따라 처벌하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죄악을 갚지 아니하신다고 했습니다. 그 죄가 생각나지 않도록,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멀리 옮겨버리셨습니다. 바다 깊은 곳에 그 죄악을 던져버렸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도 그도 한때는 죄를 범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눈물로 침상을 적셨습니다. 그 죄가 용서받은 그 감격, 그 기쁨, 그 감사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그는 그 모든 병을 고침 받은 것을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내 모든 병을 고치시며.” 여호와 하나님은 치료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질병에서 건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문둥병자를 고치시고, 앉은뱅이를 일으키시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벙어리의 입을 열게 하시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고, 이것이 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병을 치료하시는 분이십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탈리아의 ‘파피니’라는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세 가지만 있으면 여러분은 감사하십시오. 오늘 먹을 양식이 있다면 감사하고, 오늘 건강하며 감사하고, 미래의 소망이 있으면 감사하십시오.”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늘 감사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다윗은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4절에 보니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라고 나옵니다. 우리를 파멸에서 건져내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 파멸이라는 건 죽음의 자리입니다. 죽음의 위기에서 우리를 건져내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개인적으로 보면 위험한 때가 얼마나 많이 있었습니까? 정말 위험한 때, 운전하다보면 큰일 날뻔한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통해서, 천사들을 통해서 지켜주신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우리가 민족적으로 보면 감사할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지난주일 환영의 주일로 보냈지만 지난 주일은 6.25 기념 주일이었습니다. 우리가 6.25를 경험한지 59년이 되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우리는 아무런 방비가 없을 때 북한의 인민군들이 소련제 탱크를 앞세우고 밀고 내려왔습니다. 파죽지세로 밀려서 며칠 서울을 뺏기고, 낙동강까지, 부산까지 다 피난을 가게 되었습니다. 남한은 인민군에게 넘어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UN을 통해서 우리를 위기에서 건져주셨습니다. 정말 기적적으로 유엔안보리이사회가 모이고, 우리 대한민국을 돕기로 결의해서 유엔의 16개국 나라가 전투병들을 보내주었습니다. 특히 미국이 많이 참전했습니다. 3년 동안 6.25전쟁이 지속되었는데 무려 연인원 480만 명의 미군이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5만 6천명이 죽었습니다. 얼굴도 모르는 나라에 와서 전쟁을 하다가 우리를 위해서 5만 6천명이 죽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렀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툭하면 미국 욕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물론 미국도 잘못 하는 게 많습니다. 그러나 6.25를 생각하며 미국의 도움과 유엔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지금 이렇게 행복하게 살 수 없습니다.

1950년 미국육군사관학교 졸업생이 365명이었는데 그 중에 111명이 한국 전쟁에 왔다가 부상을 당했습니다. 46명이 죽었습니다. 그 젊은 초임장교들이 한국전에 나와서 다 죽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미국 장성들의 아들들이 한국에 와서 많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도 미국을 욕합니다. 뭐가 불만인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미국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480만 명의 미군이 우리를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어떻게 오늘의 이런 행복을 누릴 수가 있겠습니까? 똑같이 전쟁을 경험했지만 지금 북한은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그곳이 사람 사는 곳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모르고 자꾸 불평합니다. 여기에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터키와 같이 잘 들어보지도 못한 나라에서 군인들을 보내어 우리를 도와주었습니다. 이번에 59년을 맞이해서 우리 한국을 돌아보고 다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싸운 보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전우들이 여기서 죽었지만 대한민국이 이렇게 번영할지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 폐허의 흙더미에서 오늘의 조국을 이루었습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여러분! 우리 대한민국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다 하나님이 이 민족을 지켜주신 것입니다. 100년 전에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왔습니다. 유명한 대학교들을 다 기독교에서 세웠습니다. 유명한 병원은 다 기독교에서 세운 병원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저 교회라고 하면 싫어하고 미워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우리의 행동이 모범이 되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한국의 기독교가 한국의 역사 속에서 끼친 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국가에 대해서도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를 파멸의 위기에서 건져주신 하나님 앞에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감사한 일이 참 많습니다. 올해는 금융위기 때문에 너무너무 힘들겠다는 평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에 신문을 보니 OECD 30개국 가운데 한국이 금융위기를 제일 먼저 극복한 나라라고 나옵니다. 이 어려운 금융위기를 한국이 제일 먼저 극복했습니다. 제일 앞서서 경제회복을 이루고 있는 나라가 바로 한국이라고 나왔습니다. 참 놀랍습니다.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안타까운 것이 있습니다.

우리 국민의 GDP(국내총생산)의 27%가 사회적 갈등으로 손실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 국민들의 땀 흘리고 수출해서 벌은 돈의 27%가 사회 갈등으로 소멸되고 있습니다. 데모 때문에, 노사갈등 때문에 싸우느라고 27%를 잃어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참 안타깝습니다. 외국에서 한국에 투자하려고 해도 너무 싸움이 많으니까 투자하기 불안하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저는 노무현 대통령도 좋다고 생각하고 찍었었습니다. 그런데 그분도 욕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저는 그 분을 욕 안 했습니다. 내가 찍은 분이니까 잘하도록 밀어줘야지. 저는 이명박 대통령을 찍었습니다. 잘하라고 기도하고 있는데 왜 그렇게 욕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전에는 노 씨를 싫어하더니 요즘에는 이 씨를 싫어합니다. 어떤 분들은 술 먹다가 안주가 없으면 대통령을 씹어 먹는다나.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대통령 뽑아놨으면 5년 동안 잘 하도록 믿어주고 기도해줘야지 왜 그렇게 끌어내리려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의 위기입니다. 우리나라가 OECD 국가 중에 사회적 갈등이 제일 많은 나라입니다. 돈은 많이 벌지만 27%를 다 갈등으로 잃어버립니다. 더 잘 살 수 있는데 참 안타깝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만이라도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는 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나라가 하나 되지 않으면 이 어려운 위기를 건져낼 수 없습니다.

여러분! ‘채명신’ 장군을 아십니까? 베트남 전쟁에도 다녀오시고 6.25전쟁 때에도 큰 역할을 하신 분이십니다. 이분이 장로님이신데 얼마 전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현실이 6.25 전쟁과 똑같다. 여야가 치고 박고 싸우고, 서로를 용납 않고 싸운다.” 우리가 한 동족인데 어떻게 원수처럼 그럽니다. 대통령을 잡아죽어야 된다고 하고. 무슨 개도 아니고. 대통령을 어떻게 잡아 죽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같은 동포이고 같은 동족인데. 우리는 그런 마음을 가지면 안 됩니다. 오늘의 현실이 여와 야로,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져서 6.25전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위기입니다. 역사 속에서 우리를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보호하시는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 때문에 감사해야 합니다. 8절 말씀을 읽어봅니다.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신 분입니다. 만약 우리가 잘못할 때마다 우리를 징계하셨다면 여기에 남아있을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잘못해도 하나님이 참고 기다리셨습니다. 우리가 회개할 때까지 참아주셨습니다. 마치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기는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기 때문에, 우리가 진토같이, 흙먼지같이 연약한 존재임을 아시기 때문에 그러시다는 것입니다.

13절, 14절 말씀을 함께 읽습니다.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아버지가 그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데 그는 우리의 체질을 아십니다. 한약방에 가면 체질을 따집니다.

 우리가 어떤 체질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죄를 범하는 체질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연약한 것을 아십니다. 먼지같이 부족한 존재임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랑으로 우리를 용납하시고 용서하시고 우리를 인도해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잘 아십니다. 우리를 너무나 잘 아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축복하시는 이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 깊이 세기면서 하나님의 사랑 앞에 감사하며 찬양하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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