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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삼상 26: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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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삼상 26:1~12)


지난주에는 삼상 25장을 중심으로 나발과 아비가일을 설명하면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나발과 아비가일은 부부였습니다. 
성경은 아비가일을 '총명하다‘고 했는데 ‘총명하다’라는 말은 뛰어난 지능으로 사태 파악력이 탁월하다는 의미도 있으나 더 나아가 하나님의 뜻에 민감하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그리고 나발을 ‘완고하다.’고 했는데 ‘완고하다.’라는 말은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 거칠며 악하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아비가일은 하나님의 뜻에 민감합니다. 
나발은 마음이 강퍅하여 하나님의 뜻을 거스릅니다. 

여기에 나발과 아비가일 이야기가 주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왜 이 두 사람은 함께 인생을 살았으면서도 그 이름의 뜻만큼이나 깊이가 다른 삶을 살았습니까? 
왜 부부가 한 사람은 망하고 한 사람은 흥하게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단 하나, 하나님을 향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가 어리석은 자입니까? 
공부를 못한 사람입니까? 
돈이 없는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시14:1절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고 사는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아비가일은 매순간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한 여인이었습니다. 
아비가일은 모든 상황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해석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비가일은 흥했던 것입니다. 

우리 교우들도 그렇게 되길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1. 본문에는 삼상24장에서 일어났던 엔게디 동굴사건과 유사한 사건이 또 다시 일어났습니다. 

사울왕은 다윗을 추격하기 위하여 하길라 산 길가에 진을 칩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사울이 일어나 십 황무지에서 다윗을 찾으려고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과 함께 십 황무지로 내려가서 광야 앞 하길라 산 길가에 진치니라..........” 

권력이 주는 매력이 얼마나 크기에, 政敵에 대한 불안이 얼마나 크기에 사울 왕은 이렇게 끈덕지게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까? 

잠간 삼상 24장에 나오는 ‘엔게디 동굴’ 사건과 삼상 26장에 나오는 ‘하길라 산’ 사건을 비교해봅시다. 

1) 사울왕은 전쟁도 아닌데 두 사건 모두에 군사 3천을 동원합니다. 

삼상24:2절 “사울이 온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을 거느리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찾으러 들 염소바위로 갈쌔” 

삼상26:2절“사울이 일어나 십 황무지에서 다윗을 찾으려고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과 함께 십 황무지로 내려가서” 

다윗을 잡아 죽이려는 사울 왕의 의지가 얼마나 강하고, 집요했으면 전쟁이 일어난 것도 아닌데 군사를 삼천이나 동원했겠습니까? 

삼상26: 12절에 보면, 다윗과 아비새 장군이 사울 왕이 잠자는 진지의 심장부에까지 들어가 사울 왕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을 가져왔는데 이 사실을 눈치 챈 군사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군사들의 정신이 해이해지고, 사기가 떨어진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번 출동이 명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울왕의 군사들도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저렇게 혈안이 된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2) 엔게디 동굴에서는 부하들이 다윗에게 사울 왕을 죽이라고 요구하였으나 하길라 산에서는 부하인 아비새가 직접 사울 왕을 죽이겠다고 했습니다. 

삼상 24:4절 “다윗의 사람들이 가로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붙이리니 네 소견에 선한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날이니이다.......” 

그러나 삼상26:8절에서는 다릅니다. 

“아비새가 다윗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오늘날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붙이셨나이다 그러므로 청하노니 나로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내가 그를 두 번 찌를 것이 없으리이다.” 

하길라 산에서는 아비새 장군이 직접 사울 왕을 살해하겠다고 나섭니다. 

그 순간 다윗은 ‘자신의 손으로 사울 왕을 해치지 않으니까 책임을 회피할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정 그렇게 생각한다면 알아서 하시오. 나는 모르는 일로 하겠소!”라고 묵인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 순간이야말로 유혹의 순간이었겠지요? 

3) 엔게디 동굴에서는 다윗이 사울 왕의 옷을 벴지만 하길라산에서는 사울 왕의 창과 물병을 가지고 왔습니다. 

삼상24:4절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자락을 가만히 베니라.” 

삼상26:11절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치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시나니 너는 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자 하고” 

사울왕은 사방으로 둘러싸고 있는 군사들의 한복판에 누워 자면서도, 머리맡에 자기 창을 꽂아두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심리적으로 쫓는 자보다 쫓기는 자가 더 불안한 법인데 다윗은 쫓기는 입장에 있으면서도 담대하게 적의 심장부까지 나아간 반면 사울 왕은 쫓는 입장에 있었으면서도 불안에 휩싸여 있습니다. 

그 창이 어떤 창입니까? 
사울 왕이 자신의 왕권을 보존하기 위하여 악기를 연주하는 다윗에게 두 번씩이나 던졌던 창이 아닙니까? 
그리고 자신의 안전을 지키기 위하여 오늘도 머리 곁에 놓은 창이 아닙니까? 
그러나 그 창은 자신을 보호하는 창만은 아니었습니다. 

다윗이 마음먹기에 따라서 사울 왕은 그 창에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은 우리를 보호하는 완전한 방편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안전을 지키는 방패가 되십니다. 
시 4:8절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 

4) 두 사건에서 동일하게 다윗은 사울 왕에게 호소했습니다. 

삼상24:11절 “나의 아버지여 보소서 내 손에 있는 왕의 옷자락을 보소서 내가 왕을 죽이지 아니하고 겉옷자락만 베었은즉 나의 손에 악이나 죄과가 없는 줄을 아실찌니이다 왕은 내 생명을 찾아 해하려 하시나 나는 왕에게 범죄한 일이 없나이다.” 

삼상26:18절 “또 가로되 내 주는 어찌하여 주의 종을 쫓으시나이까 내가 무엇을 하였으며 내 손에 무슨 악이 있나이까? 

저가 이렇게 엔게디 동굴의 사건과 하길라 산의 사건을 비교하는 이유는 쫓고 쫓기는 상황이 비슷하다는 사실을 밝히고 싶어서였습니다. 
다윗은 비슷한 일을 또 다시 겪고 있습니다. 

2. 다윗은 이런 일을 반복적으로 겪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요? 

여러분이 다윗의 처지였다면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질문) 

열심히 준비한 시험에서 반복하여 낙제하고, 시도하는 취직 인터뷰마다 반복하여 떨어지고, 밤잠을 자지 않고 애쓴 사업에 반복하여 실패하고....... 

그럴 때 무슨 생각을 하게 됩니까? 
몇 가지 추측해봅니다. 

1) ‘언제 이런 상황이 끝날 것인가?’ 라는 ‘상황’에 대한 푸념이 일어나지 않았을까요?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더 나아질 것이다.’라는 희망 때문입니다. 
그러나 비참한 상황이 계속되면 삶에서 희망의 자리는 좁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보십시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끝날 것 같지 않는 현실의 벽에 부딪혀 자살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유서에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 없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밖에 없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 

그에 대한 평가는 역사가 하겠지만 유서에 나타난 그의 심경은 현실적으로 다가온 짐을 너무나 버겁게 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다윗도 반복적으로 전개되는 비참한 상황에 대하여 심한 괴로움을 겪었을 것입니다. 

2) 약속 어기기를 밥 먹듯 하는 사울 왕을 보면서 ‘인간’에 대한 회의를 갖게 되지 않았을까요? 

사울 왕은 엔게디 동굴에서 한 일을 하길라 산에서 똑같이 하고 있습니다. 
엔게디 동굴에서 다윗이 사울 왕을 살려주었을 때 그는 다윗을 “내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삼상24:16) 

그렇다면 그때 고백한 ‘내 아들’이란 말은 무슨 의미였습니까? 
엔게디 동굴에서 사울 왕은 다윗에게 자신이 잘못했다고,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때의 다짐은 무슨 의미였습니까? 
엔게디 동굴에서 사울 왕은 소리 높여 울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때의 울음은 무슨 의미였습니까? 
사람이 흘리는 눈물에서조차 진실이 없다면 사람에 대하여 회의할 수밖에 없겠지요. 
다윗이 사람을 만나고 싶었겠습니까? 

3) 자기의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이 생기지 않았을까요? 

자기 판단이 옳았으면 거기에 따르는 옳은 결과가 나와야 하는데 전혀 엉뚱한 결과가 나왔습니다. 
사울 왕을 죽일 수 있었는데 옷자락만 베면 사울 왕이 달라질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사울 왕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사울 왕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다윗을 향하여 창을 겨누고 있었습니다. 
그런 결과를 보고 ‘이게 아니구나. 내 판단이 잘못되었구나.’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도 좋지만 그것도 상황에 따라, 사람에 따라 달라야 하는 거야’라고 자책하지 않았을까요? 

그런 혼란스러움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비전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습니다. 

3. 그러면 무엇이 그를 흔들리지 않게, 꺾이지 않게 했습니까? 

바로 사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삼상26:10절을 보십시오.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이 한마디가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다윗의 믿음이 얼마나 확고했는지를 성경은 다음과 같이 밝혀주고 있습니다. 

1) 다윗은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해하지 않겠다고 다시 한 번 결심합니다. 

9절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다윗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에게 손을 대는 것은 그 사람을 기름부어 세우신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따라서 사울 왕을 죽이지 않은 것은 사울 왕 개인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사울 왕에게 기름을 부으신 하나님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2) 다윗은 하나님께 심판을 맡깁니다.  

10절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 죽을 날이 이르거나 혹 전장에 들어가서 망하리라.” 

하나님이 살아계시는데 어찌 악한 사람이 심판을 받지 않고, 아무 일도 없었듯이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심판의 맷돌은 천천히 돌아 사람들이 느끼지 못할지 모르지만  그 심판은 철저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3) 다윗은 자기 자신 또한 하나님의 심판 받기를 원합니다. 

19절 “청컨대 내 주 왕은 이제 종의 말을 들으소서 만일 왕을 격동시켜 나를 해하려 하는 이가 여호와시면 여호와께서는 제물을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마는.......” 

만에 하나라도 하나님이 사울왕의 마음을 선동하신 것이라면 사울 왕의 추적을 달게 받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라면 죽음마저도 달게 받아들이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본문들이 우리에게 밝혀주는 것은, 다윗은 하나님을 진짜로 신뢰한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어떤 상황에서도, 사람에 대한 회의가 밀려와도, 자신에 대한 실망이 느껴져도 하나님을 바라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삶을 맡깁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을 father(아버지)로 믿는 분이 있고, 하나님을 bother(괴롭히는) 하는 분으로 믿는 분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믿습니까? 

아버지로 믿습니까? 
아니면 귀찮게 하고, 괴롭게 하고, 성가시게 하는 분으로 믿습니까? 

만일 여러분이 “일주일에 쉬는 날은 하루 밖에 없는데, 이날만큼은 좀 쉬자. 귀찮게 하지 마라. 예배는 무슨 예배!”라고 말한다면 하나님을 ‘bother’ 하는 분으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 하나님을 바라고, 믿고, 맡기십시오. 




복음성가- 주 품에 품으소서 
주 품에 품으소서. 능력에 팔로 덮으소서. 
거친 파도 날 향해 와도 주와 함께 날아오르리 
폭풍가운데 나의 영혼 잠잠하게 주를 보리라 
주님 안에 나 거하리 주능력 나 잠잠히 믿네 
거친 파도 날 향해 와도 주와 함께 날아오르리 
폭풍가운데 나의 영혼 잠잠하게 주를 보리라 

CTS에서 한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어려울 때 하나님으로부터 점수 따기가 더 쉽다.” 
어려울 때 하나님을 더 감동시킬 수 있다는 말씀이지요. 
왕상 17장에 사렙다 과부의 이야기가 나오지요. 
그 여인은 가루 한 줌으로 떡 하나를 만들어 아들과 함께 먹고 죽을 작정이었습니다. 
그만큼 어려웠다는 말이지요. 

그때 선지자 엘리아가 그 가루로 그를 위해 떡을 만들라고 요구합니다. 
벼룩의 간을 빼먹지 지금 정신이 있습니까? 
그러나 그 여인은 선지자의 말에 순종합니다. 
빵 하나 더 먹고 죽으나 안 먹고 죽으나 죽는 것은 마찬가지라는 것이지요. 
이럴 바에는 순종하고 죽자고 결단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않는 축복을 받았습니다.(왕상17:14)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켰다는 말이지요. 
다윗은 지금 그 어려운 처지에서 하나님을 감동시키고 있습니다. 
감동받은 하나님은 다윗에게 신정국가의 왕이라는 축복을 내리십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상황이 결코 녹록치 않습니까?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여러분의 속을 뒤집어놓습니까? 
때론 여러분 자신이 실망스럽습니까?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이때야말로 진짜로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있는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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