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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새벽기도 (막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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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새벽기도 (막 1:35)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 1:35). 

Ⅰ. 본문해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사신 동안 평범한 사람들과 꼭 같이 하신 것이 하나님께 간구와 소원을 올리는 기도 생활이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 앞에 드리는 기도 속에서 사셨지만, 시간적인 규범으로 보면 새벽에 기도하는 것을 일생동안의 삶의 양식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새벽기도는 어떤 것이었을까요? 


Ⅱ. 예수님의 새벽기도 

시실 예수님은 기도를 하실 필요가 없어 보이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도 하나님이셨고, 오신 후에도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언가 필요한 것이 있다면 하나님이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충족하시고, 완전하신 분이 아닙니까? 그런 하나님의 속성을 예수님도 가지고 계셨기에 예수님은 전혀 기도할 필요가 없으신 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이 세상을 사는 동안 기도의 생애를 사신 것은 자기를 낮추는 겸손 때문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이신 그분이 하나님의 성품을 사람의 성품 아래 감추시고 스스로 그것을 행사하시는 대신 사람처럼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기도의 헌신을 통해 당신 스스로, 하나님 아버지를 의존하면서 살지 않으면 안 되는 지극히 연약한 인간들에게 모범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지상생애를 통해서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지 배웁니다. 그때 기도는 우리의 전체적인 삶에서 하나님을 의존하는 신앙생활을 하도록 만듭니다. 하나님을 의존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의존의 마음이 넘치는 가운데 하나님을 찾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사랑이며, 사랑은 곧 하나님께 자기를 의지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A. 교제로서의 기도 

예수님의 기도 생활은 교제로서의 기도가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험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며 인간들을 가르치는 데 필요한 능력을 매일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으셨습니다. 이런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인 교제 가운데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기도하신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마 6:9-13).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육체와 영혼으로 만드셨습니다. 육체는 흙으로부터 왔기에 이 땅의 자원으로 생명을 유지합니다. 그렇지만 영혼은 하나님부터 왔기에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며 그분으로부터 부어지는 신적인 생명으로부터 도움을 받아서 살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하나님과의 영적인 의존 관계를 보여주시는 핵심적인 표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우리가 필요한 어떤 것들을 얻어내는 수단이기 이전에, 우리 영혼의 생명을 하나님 앞에 풍부히 받아 누리며 살게 하는 교제의 통로인 것입니다. 

오늘날은 거의 기도하지 않는 교인들이 많은 시대입니다. 앞으로는 더 심해질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는 다니지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진정한 표인 복음적인 경건에 낯선 자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실로 애통한 일입니다. 신앙의 비밀은 경건의 비밀이고, 경건의 비밀의 진수는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 속에서 경험됩니다.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깨달아 가야할 길을 알게 하고, 기도는 아는 그대로 살 수 있는 하늘의 능력을 공급받는 통로가 됩니다. 우리의 많은 기도가 주님께 수많은 청구서를 가지고 나와서 낭독하고 난 후, 기도의 문을 닫아 버리는 통로가 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성경적인 기도생활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자신을 충분히 하나님 앞에 바쳐 주님이 충분히 영향을 미치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신앙이 어릴 때는 우리의 기도가 우리 맘을 알아달라는 기도지만, 신앙이 자라나면 주님의 마음을 더 많이 알게 도와달라는 기도로 이어지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더욱이 건조하고 메마른 기도생활은 육욕에 가득차서 패배하는 신앙생활의 내면적인 특성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일생 동안 하나님과의 생명적인 교제 속에서 사셨음을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그분의 삶은 언제나 하늘의 능력을 덧입고, 그분의 성품은 모든 섬김 속에서 아름답게 빛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 속에서 종종 한순간의 짧은 기도로 위대한 하늘의 능력을 경험한 기도의 용사들을 만납니다. 여호수아, 모세, 다윗, 바울과 같은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공통된 특징은 바로 평소에 그들이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속에서 산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이것 없이 자기가 필요한 짧은 순간에 위대한 힘을 불러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신앙의 만용입니다. 뿌리 깊은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평소 주님과의 깊은 교제 속에서 살아가는 신앙생활이야말로 능력 있는 기도 생활의 밑바탕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의 교제의 생활은 어떻습니까? 혹시 주님과 만나는 시간과 장소도 모두 잊어버린 것은 아닙니까? 발달한 문명 속에서 우리는 지극히 발달된 교통수단과 통신수단 그리고 눈과 귀를 현혹시키는 매체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진정으로 간절히 간구하고 의지하며 사는 일은 점점 잊혀져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은 매우 메마르고 건조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힘 있는 기도생활의 밑바탕은 하나님과의 깊고 진실한 교제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기도 속에서 느끼는 이상한 감정이나 신비한 현상을 추구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가장 신비한 것은 기도 속에서 경험하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무엇을 명령하시든지 그 뜻대로 살고자 하는 선한 의지가 용솟음을 치는 것을 느끼는 감화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마주 앉아있으면 한 시간이 짧지만 빚쟁이와 마주 앉아있으면 오 분이 한 시간입니다. 결국 주님과의 깊은 교제 속에서 살아가는 모습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정도와 비례합니다.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옆에 누가 끼어드는 것이 싫습니다. 사랑할수록 둘이 만나는 것이 아니면 만나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의 교제 생활은 어떻습니까? 주님과만 대면합니까? 아니면 세상의 염려와 근심과 욕망도 함께 동석하고 있습니까? 돌아보십시오. 그리고 조용히 하나님 앞에 자기를 드리는 교제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B. 흔들리지 않는 규범 

예수님의 새벽기도는 또한 흔들리지 않는 규범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새벽 시간과 깊은 밤에 규칙적으로 기도하셨습니다. 가끔 우리는 기도 시간이 언제인가 질문을 받습니다. 그리고 때로 이렇게 대답합니다. “특별한 기도 시간은 없습니다. 늘 기도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사람들은 둘 중 하나입니다. 너무 심오한 기도의 세계를 가져서 항상 기도의 영속에서 사는 사람이거나(이런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거의 기도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의 규범은 무엇입니까? 대부분 사람들은 언제 기도를 하겠다는 뜻을 세우기 싫어합니다. 규범을 세우면 가책을 받아야 때문입니다. 

개인의 규범과 은혜 생활에는 정말 미묘한 관계가 있습니다. 은혜가 충만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을 때는 규범을 지키는 것이 참 기쁩니다. “야 주일이다! 새벽에 기도하러 가야지.” 그리고 이렇게 규범을 따라 살 때 행복하고 은혜 생활은 증진됩니다. 마치 길을 안전하게 가려는 사람에게 차선과 정확한 신호등이 있는 것처럼 편하고 좋습니다. 그러나 은혜가 떨어지면 규범은 귀찮고 양심에 거리끼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규범을 없애버립니다. 실제 우리는 대책 없이 규범을 부도수표처럼 남발할 때가 많지 않습니까? 규범이 무너지면 흐느적거리는 삶 밖에는 남지 않습니다. 

어느새 규범을 어겼다는 가책도 없어지지만 그러나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 살아가는 영혼의 자유함도 사라지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환경을 탓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십시오. 앞으로도 환경이 우리의 편이 될 날은 오지 않을 것입니다. 게다가 어차피 신앙생활은 영적인 전투입니다. 그러므로 끊임없는 시련과 고난이 올 때는 그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러 나가고, 평탄할 때는 평탄 가운데 부패하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린다고 생각해야 기도 생활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결국 육체의 희생도 없이 기도 생활을 지속할 수는 없습니다. 누군들 편안한 생활을 마다하겠습니까? 오히려 육체와 영혼의 수시로 대화할 때 게으른 육체를 꺾고 일어나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항상 육체가 쇠잔하여 기도하기 힘들 때가 나에게도 오리라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주님도 육신으로는 사람의 몸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분도 늦잠을 자는 것이 편하고, 금식하며 주리는 것은 본성에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그렇게 사셨습니다. 우리도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흔들리며 살아서는 안 됩니다. 주님이 어떻게 우리를 구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는데 그렇게 생각 없이 살 수 있겠습니까? 

C. 치열한 삶 

예수님의 새벽기도는 치열한 삶 속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본문 말씀의 앞에 21절부터 34절까지의 모든 기록은 하루 동안 일어난 일입니다. 때는 안식일이었습니다. 평소처럼 예수님은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가르치는 것이 큰 권세로 나타났고, 회중은 그 내용이 서기관의 가르침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상당한 시간 동안 말씀을 강론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거기서 귀신을 내쫓으셨습니다. 그리고 회당에서 나와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셔서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떠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숙소로 돌아오셨을 때 해는 저물어 가는데도 모든 병자와 귀신들린 자들이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물리치지 않으셨으니 아마도 밤늦게 까지 너희들이 병 나음을 받았으니 이렇게 살라고 교훈해 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35절에 새로운 날이 되었습니다. 새벽 미명에 예수님이 홀로 일어나셨습니다. 제자들은 피곤해서 골아 떨어졌을 때 예수님이 홀로 새벽에 나오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는 없으셨지만 우리와 같이 육체는 매우 피곤하고 힘드셨을 것입니다. 

어쩌면 눈은 붉게 충혈 되고 너무 고단한 일과로 입술은 부르트고 혓바늘이 돋으셨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그 새벽의 시간에 아직 어두울 때 일어나셔서 한적한 곳에서 하나님 앞에 자신을 다 바치는 기도 속에 헌신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 시간은 규범으로 정해놓으셨지만, 장소는 정해 놓으시지 않았습니다. 병들고, 무지하고, 상처받고, 죽은 자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가셔서 고치고 위로하고 살려야 하시는 예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예수님처럼 마음을 쏟는 기도 생활을 하고 싶어 합니다. 왜냐하면 기도 생활 속에서 맛보는 영혼의 희열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마음의 소원을 가지고 있어도 삶이 하나님을 향해 올바르고 열렬하지 않으면 열렬한 기도가 불가능합니다. 오늘날 이런 교제의 기도 속에서 살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사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사는 치열한 삶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과거에 도대체 왜 예수님이 특별히 새벽에 기도하셨을까 하는 의문을 가졌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 것에는 오히려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결론을 내게 되었습니다. 새벽시간이 밤보다 거룩하거나 그래서가 아닙니다. 만일 예수님이 낮에 기도하셨다면 그 수많은 병든 사람들, 진리를 듣기 원하는 사람들, 상처받은 사람들은 누가 돌보았겠습니까? 어두운 세상에서 하나님을 힘입고 믿음을 살아가는 것이 눈물 골짜기를 지나는 것처럼 힘든 것이기에 하나님은 오늘도 당신 뜻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여러분의 삶은 어떠합니까? 치열하고 정신없이 살지만 하나님 없는 치열함은 아닙니까? 경쟁에서 이기고, 내일을 위해 부를 j쌓고, 남들보다 더 높아지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 이상은 아닌 삶이 아닙니까? 우리는 결국 신앙의 방황을 끝내고 돌아올 때 항상 똑같은 결론에 도달합니다. “아 나 혼자 걸어갈 수 있는 길이구나!” 그래서 주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주님은 치열한 삶을 사셨기 때문에 언제나 그분의 기도생활은 새벽에 불꽃처럼 타올랐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의 불길은 당신이 못 박혀 죽으시는 십자가에서도 꺼지지 않았습니다. 


Ⅲ. 결론 : 기도로 나아감 

우리는 이것을 본받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어떤 처지에 있든지, 누구이든지, 여러분의 깊은 마음을 헤쳐 보면 주님과의 교제 속에서 살아왔던 날들에 대한 그리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여러 가지 것들로 갈증을 해결하려고 하지만 실패합니다. 그것은 이 세상으로 해갈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자리로 돌아가십시오. 은혜의 자리로 다시 돌아가십시오. 거기서 주님을 만나십시오. 주님께 온전히 엎드려 자기가 주님을 의지하며 살 수 밖에 없는 지푸라기와 같은 인간이라고 고백하며 그분의 은혜를 구하십시오. 다시금 그 은혜를 부어주실 것입니다.. (김남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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