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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위로하고 격려하라 (살전 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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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하고 격려하라 (살전 5:14)


<노르웨이에서 있었던 일> 

저는 중부 연회 감리사 해외 연수를 잘 다녀왔습니다. 스칸디나비아 4국을 다녀오는 의미 있는 여행이었습니다. 핀란드와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이 4개국은 자연보호가 너무나 잘 된 나라들이었습니다. 어느 곳이나 맑고 깊은 호수가 있었고 들판은 어디나 푸르고 공기는 신선했습니다. 특히 이곳은 요즈음 백야(白夜) 현상이라고 해서 밤 11시가 되어서야 해가 졌습니다. 놀랍게도 밤 10시인데도 썬 글라스를 쓰고 다녀야만 하는 이상한 나라였습니다. 

이번 여행을 통하여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마음껏 감상했다는 것도 잊을 수 없는 추억거리이지만 제 아들 현민이와 함께 여행을 했다는 사실이 더 좋았습니다. 부자지간(父子之間)이라고 하지만 속 깊은 대화를 나눈 적이 별로 없었는데 이번 여행에는 다정한 친구처럼 가는 곳마다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한국과 미국에 서로 떨어져 있는 동안 우리 아들이 얼마나 변했는가를 잘 알 수 없었는데 이번 여행을 통해서 그 변화를 조금이라도 확인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아들이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더 의젓하고 훌륭한 모습으로 성장했다는 사실이 너무도 고마웠습니다. 어떨 때에는 저보다 훨씬 더 건전하고 반듯한 생각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서는 슬며시 미안한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랬습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육신의 아버지인 저는 부족했지만 우리 아들의 진정한 아버지가 되셔서 잘 길러 주셨습니다. 이처럼 이번 여행의 큰 수확은 우리 아들과 더 친밀하고 다정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또 하나 제 머리 속에 인상 깊은 기억을 남겨준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노르웨이의 한 산장 호텔에서 머물렀을 때 일어난 일입니다. 이번 여행에서 우리는 일정의 대부분을 한 대의 버스를 이용해서 다녔습니다. 제가 탑승했던 1호차는 옛날 공산권이었던 동구라파의 에스토니아 출신의 30대 중반의 기사가 운전했습니다. '카이도'라는 이름을 가진 이 기사는 나이보다 훨씬 더 늙어보였는데 아마 동구라파의 공산권 나라들이 한결같이 경제 사정이 어렵다는 사실로 볼 때 고생을 많이 했기 때문에 그런 것처럼 보였습니다. 

며칠 동안 아무 사고 없이 여행을 잘 하다가 노르웨이의 한 산장 호텔에서 일박을 한 뒤 일어나 아침 식사를 하고 짐을 꾸려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저와 서너 분의 목사님들이 호텔 출입문 밖에 나가서 담소를 나누며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버스가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높은 키의 버스를 너무 호텔 가까이에 대다 보니까 앞쪽에 걸려 있던 대형 백미러가 지붕을 쳐서 네온사인 간판이 한 30cm 간격으로 바로 우리 코앞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위험한 순간이었지요. 예기치 못한 이 사고로 호텔 출입문 쪽은 떨어진 네온사인과 지붕 구조물의 잔해로 엉망진창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문제는 대충 치워서 해결되었고 또 보험 처리가 다 되는 것 같아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 정말 큰 문제는 이제 남은 여행기간 동안 조수석 쪽 앞에 있어야 할 대형 백미러를 다시 원위치에 붙여놓는 일이었습니다. 카이도라고 하는 그 운전기사는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차안에서 연장을 끄집어내고 해서 백미러를 원위치에 다시 설치하려고 무진 애를 썼습니다. 

물론 제일 좋은 방법은 자동차 정비공장에 가면 바로 해결될 수 있었지만 아직 아침 일찍이었으므로 문을 열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드라이버질을 하고 망치질을 하는 운전기사의 모습을 자세히 보니 양손 모두를 심하게 떨고 있었습니다. 여기저기서 걱정하는 탄식 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좌석 앞쪽에 앉아서 운전사의 손놀림을 지켜본 분들은 운전할 때에도 손을 많이 떨었다는 증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너나없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버스 안에 가득했습니다. 아마 파킨슨씨병에 걸린 사람 같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수전증에 걸린 것이 아닌가, 갖가지 추측이 난무했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 때 우리 일행 중 손재주가 있는 목사님 몇 분이 기사를 돕기 시작했습니다. 심하게 손을 떨며 어쩔 줄을 몰라 당황하고 있던 기사를 옆쪽으로 밀쳐놓고 이 분들이 드라이버와 망치로 백미러를 원위치에 고정시켰습니다. 그러고 나서 깨어진 유리는 두꺼운 테이프로 칭칭 감아 매서 떨어지지 않도록 만들었습니다. 세계에서 제일 손재주가 좋은 민족이 우리 민족이라는 말이 사실로 확인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출발 시간보다 한 3-40분 정도 지연이 되었지만 모든 문제는 수습이 되었고 다시 여행할 준비가 갖추어졌습니다. 

드디어 버스 기사가 운전석에 앉기 위하여 차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바로 그 때 목사님들과 사모님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고 박수를 치며 기사를 격려하고 환영했습니다. 그랬습니다. 역시 목사님과 사모님이 달랐습니다. 저에게는 이런 모습이 너무도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아마 제가 우리 교인들을 인솔하다가 이런 일을 만났더라면 어떻게 저런 부적격자에게 운전대를 맡길 수 있단 말인가 하면서 항의하고 따졌을 지도 모릅니다. 아마 좀 까다로운 분이라도 있었더라면 여행사에 말해서 당장 운전자도 바꿔주고 버스도 바꿔달라고 요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에 아무도 그런 분이 없었습니다. 정반대로 심하게 손을 떠는 기사를 좀 쉬라고 한 뒤 자기들이 두 팔을 걷어붙이고 도와주었습니다. 그런데다가 아주 멋쩍고 미안한 모습으로 차안에 들어오던 기사에게 박수와 휘파람과 환호성을 보내면서 격려하고 환영해주었습니다. 저는 우리 일행이 그 운전기사가 가난한 동구라파 나라인 에스토니아 출신인 것을 알고서 그렇게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실 그가 가난한 나라 에스토니아 출신의 용병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저를 비롯해서 몇 사람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상황에서는 당연히 격려해야 한다는 자연스러운 마음 하나로 그런 반응이 나온 것이었습니다. 

<정죄와 비난에서 격려와 칭찬으로> 

어쨌든지 간에 이번 경험은 저에게 많은 것을 반성하고 회개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아이들을 키우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교회일을 하면서도 제가 그동안 격려하고 칭찬하기보다는 정죄하고 책망하기를 더 많이 하지 않았나 하는 반성과 회개였습니다. 설사 속마음으로는 격려하고 칭찬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이것을 적극 표현하지 못한 것은 아닌가 하고 반성하고 회개했습니다. 

사실 '율법'과 '복음'의 차이도 정죄와 격려의 차이인 것 같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같은 율법주의자들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을 비판하고 정죄하기에 바빴습니다. 그들처럼 신앙생활에 열심이고 율법에 흠이 없는 이들의 기준으로 볼 때에는 창기들과 세리들은 숫제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이지요. 남보다 신앙생활을 더 열심히 하고 율법적인 의로 가득 찬 사람일수록 자기 수준에 못 미치는 이들을 폄하하고 책망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처럼 비판하고 정죄하기 좋아하는 이들의 문제는 '자기의'(self-righteousness)의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기만 옳고 홀로 의롭다는 독선이 문제인 것이지요. 그런데 이 '자기의'라고 하는 것은 교만과 이기심 때문에 생겨납니다. 

그렇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기 어렵습니다. 항상 자기가  최고이니 어떻게 다른 이들을 섬길 수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을 가지니 다른 사람들의 언행 일체가 미덥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간해서 만족을 하지 못하고 늘 불평하고 원망하게 됩니다. 

이기적인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의 기분이나 딱한 형편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에스토니아 출신의 운전기사의 경우에도, 우리의 안전과 여행 스케줄만 생각했더라면 저런 부적절한 운전자를 빨리 바꿔달라는 요구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에 누구도 그런 요구를 하지 않았습니다. 거꾸로 그 분을 대신해서 도와줬고 박수 치고 환호성을 불러서 격려해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우리의 마음을 헤아리셨던지 그 어느 때의 여행보다도 즐겁고 유쾌한 여행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나의 이기적 욕심보다 이웃의 딱한 형편을 조금이라도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은 격려할 줄 압니다. 오늘 우리가 격려하는 삶을 살지 못한다면 나도 모르게 우리의 삶이 이기적이었기 때문임을 기억하십시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달리 예수님은 세리들과 창기들을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격려해주셨습니다. 그런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속에는 교만 대신 겸손이, 이기심 대신에 이타심이 항상 있었기 때문이지요. 오늘 우리도 예수님처럼 정죄하고 책망하는 대신에 칭찬하고 격려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괜찮아. 괜찮아. 다 괜찮아!> 

오늘 우리에게는 누구나 다 격려가 필요합니다. 높은 자리에 있든지 낮은 자리에 있든지, 부자이든지 가난하든지, 목사님이든 장로님이든 권사님이든 집사님이든 주일학교 어린이든지 간에 누구나 다 칭찬과 격려가 필요합니다. 어떻게 보면 큰 책임을 맡은 분들에게 더 많은 칭찬과 격려가 필요합니다. 언제부턴가 우리나라의 국민정서가 대통령이 된 분은 누구이든지 간에 무조건 비난하고 정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딱히 큰 범죄를 저지른 것도 큰 실수를 저지른 것도 아닌데 그냥 무조건 적개심을 가지고 비난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나라 대통령에게 더 많은 격려를 보내야 합니다. 우리 인천 시장에게 더 많은 격려를 보내야 합니다. 우리 중구청장에게 더 많은 격려를 보내야 합니다. 담임목사님과 부목사님들, 장로님들, 교회 지도자들에게 더 많은 격려를 보내야 합니다. 

그 자리에 올라가면 자기는 잘 할 것 같지만 그게 쉽지 않습니다.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축구나 야구나 농구도 구경할 때와 막상 자기가 선수가 되어 코트에 뛸 때는 전혀 다릅니다. 프로 야구의 경우에도 유명 타자가 슬럼프에 빠지면 30타수 무안타, 40타수 무안타, 헛망방이만 휘두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4번 타자가 홈런도 제대로 못치고 타율이 2할대라고 비난하지만 자기가 방망이를 들고 타석에 들어서면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우리는 교만과 이기심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남을 먼저 헤아리면서 서로 격려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우리가 속한 모임에 10명이 있다면 그 중 6명은 무조건 우리를 싫어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무 이유가 없이 무조건 나를 거부하고 적대시할 것이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것은 내가 못나고 내가 잘못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상대방 마음속에 있는 상처 때문에, 무의식의 그림자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다른 사람을 격려하기 위하여 먼저 내 자신부터 격려해야 합니다. 다른 이를 사랑하기 전에 먼저 내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하고 끝없이 격려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한국말 중에 참 좋은 말이 하나 있습니다. "괜찮아." 참 너무도 근사한 말입니다. 오래 전에 학교 친구를 찾아주는 방송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한 번은 가수 김현철이 나와서 초등학교 때의 친구를 찾았는데 함께 축구하던 이야기를 했습니다. 당시 허리가 36인치 정도가 될 정도로 뚱뚱한 친구가 있었는데 다른 친구들이 축구팀에 끼워주려고 하지 않았답니다. 그 때 김현철이 나서서 "괜찮아. 얜 골키퍼를 시켜주면 우리 함께 놀 수 있잖아!" 하면서 격려해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는 골키퍼를 맡아 함께 축구를 했고 몇 십 년이 지난 뒤에도 김현철의 따뜻한 말 한 마디를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 실수했을 때 "괜찮아. 다시 하면 되잖아!" 하고 격려하고 위로할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2002년 월드컵 4강에서 독일에게 졌을 때 관중들이 선수들을 향해서 일제히 외쳤습니다. "괜찮아! 괜찮아!" 아, 얼마나 아름다운 함성인지요! 

가끔 TV에 보면 고등학생들이 '도전 골든벨'이라는 퀴즈대회를 할 때 홀로 남아 문제를 풀다가 결국 골든벨이 울리지 못해도 친구들이 얼싸안고 격려해줍니다. "괜찮아! 괜찮아!" 비난하고 정죄하는 말이 아닌, 괜찮다는 그 말 한마디가 얼마나 고맙고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그만하면 참 잘했어."라고 용기를 북돋아주는 말, 어떤 실수를 하고 어떤 실패를 당했다고 할지라도 "괜찮아. 괜찮아. 조금만 참아. 이제 다 괜찮아질거야."라고 격려해주는 말, 이런 말들이 얼마나 필요한지 모릅니다. 왜 그것 밖에 못했느냐고 삿대질하고 심판하고 정죄하는 말, 그리스도인이 할 말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는 정치경제적으로 그 어느 때보다도 위로와 격려가 필요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부속기관인 학교를 위해서 요양원을 위해서, 무엇보다도 건축을 위하여 수고하고 애쓰는 분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 분들에게 필요한 말은 "왜 그것 밖에 못했느냐!"고 따지고 정죄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럴 리는 없지만 만에 하나 작은 실수를 저질렀다고 할지라도 "괜찮아요. 잘 했어요. 결국 모든 일이 다 잘 될 것입니다."라고 따뜻한 위로와 격려의 말 한 마디가 필요한 때입니다. 

우리 서로를 격려하십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다 잘 될 것입니다. 학교도 요양원도 교회도 건축도 다 괜찮습니다. 다 잘될 것입니다. 우리 서로 따뜻한 마음으로 위로하고 격려하십시다. 이제 다함께 오늘 바울 사도가 우리에게 주신 데살로니가 전서 5장 14절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으면서 제 설교를 마치고자 합니다.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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