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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엡 5: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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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엡 5:15~21)
 

2010년 남아공화국에서 열리는 월드컵의 예선전이 전 세계적으로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7회 연속으로 월드컵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7회 연속 월드컵 참가는 월드컵 역사로 보면 대단한 일입니다. 남아공 월드컵 본선에서도 우리 선수들이 좋은 성적을 내면 좋겠습니다. 

동네 축구를 하다 보면 심판 없이 선수들이 자체적으로 경기를 할 때가 있습니다. 선수들이 대략 경기의 규칙을 알기에 심판이 없이도 경기를 합니다. 경계선도 정확하지 않고 대충 정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경기를 하다 보면 아주 민감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서로 보기에 따라 판단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오프 사이드 같은 경우를 보면 수비수들은 오프 사이드라고 말합니다. 반면에 공격수들은 오프 사이드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태클을 했을 때 공격수는 파울이라고 말하고 수비수는 파울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어느 선수는 공이 선 안으로 들어갔다고 말하고 다른 선수는 선 밖으로 나갔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서로의 주장을 상대방에게 어느 정도 하다가 끝나면 좋은데 아주 심각한 상황까지 가서 서로 고성을 지르고 몸싸움까지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시합은 곧 아수라장이 됩니다. 시합만 아수라장이 된 것이 아니라 사람 관계도 깨지고 맙니다. 

동네 축구지만 심판 자격증을 가지고 있거나, 축구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심판을 보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경계선도 정확하게 그립니다. 심판이 입에 호루라기를 물고 함께 뛰어 다니며 정확하게 경기 규칙에 따라 경기를 운영합니다. 선수가 규칙을 어길 때에는 어김없이 호루라기를 힘차게 불어 파울을 선언합니다. 상대 선수에게 심하게 태클을 하는 선수에게는 경고를 주기도 합니다. 오프 사이드인지 아닌지를 정확하고 엄격하게 봅니다. 경기는 규칙에 따라 질서가 있게 진행됩니다. 경기를 하는 선수들도 불평이 없습니다. 심판의 결정에 따릅니다. 즐겁게 경기를 하고는 경기 후에도 상대방 선수들과 격려의 인사를 합니다. 

여러분, 축구 경기를 할 때 규칙이 없이 경기를 하는 것이 더 자유롭습니까? 아니면 규칙을 정하고 경기를 하는 것이 더 자유롭습니까? 사람들은 규칙이 없이 자신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더 자유로울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혼란스러워지고 무질서해집니다. 경기에 임할 때 규칙과 경계선이 자유를 제한하는 것 같고, 답답하게 느껴지지만 그것으로 인해 질서가 생기고, 도리어 경계선 안에서 주어지는 자유를 마음껏 즐길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방종을 자유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방종은 절대로 자유가 아닙니다. 방종은 삶의 규칙이 없습니다. 자신의 기분이 내키는 대로,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합니다. 방종의 삶이 편하고 행복할 것 같지만 결국은 불행해집니다. 허무해집니다. 자유는 삶의 규칙이 있습니다. 자유는 자신이 책임을 질 수 있는 삶을 삽니다. 진정한 자유는 책임적인 존재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규칙을 존중합니다. 그 규칙이 자신의 생각과 행동에 약간의 제약을 주지만 그 규칙을 존중하고 따르면 도리어 그 속에서 참 자유의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신앙에도 이와 같은 원리가 적용됩니다. 어떤 면에서 성경은 우리에게 축구 시합에 있어서 규칙과도 같은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율법책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이 ‘안’이고 무엇이 ‘밖’인지를 분명하게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과 해서는 안되는 일을 분명하게 말씀해 주십니다. 그 규칙 안에서 인생을 살아간다면 진정한 자유와 기쁨이 있습니다. 삶의 진정한 의미와 보람을 찾게 됩니다. 그러나 그 규칙을 깨뜨리면 상처를 입고 불행해집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의 즐거움을 망치기 위해 ‘살인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행복하게 사는 것을 훼방하기 위해 ‘간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게 하기 위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것을 부담스러워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삶에 있어서 많은 제약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지 말아야 할 것과 해야 할 것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규칙은 우리가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게 하기 위해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행복한 삶을 가로 막는 장애물이 아니라 행복한 길로 인도하는 이정표입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이 하나님 안에서 행복한 삶을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에 따라 살면서 가장 행복한 삶을 산 사람이 있습니다. 다 윗 왕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삶의 가치와 기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삼았습니다. 그의 삶의 모든 결정의 기준이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어리석을 정도로 말씀을 따랐습니다. 그는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사울 왕을 죽이고 왕이 될 수 있는 기회가 몇 차례 있었습니다. 부하들은 사울 왕을 죽이고 왕이 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 왕을 죽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머리에 기름을 부으셨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간음하는 죄를 짓습니다. 

다윗은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그 죄를 지적받았습니다. 다윗은 나단을 죽이고 자신의 죄를 감출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의 죄가 드러났을 때 통회하며 회개합니다. 다윗의 삶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났다가도 그 사실을 알게 되면 바로 하나님의 말씀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하나님의 법은 그를 행복하고 가장 가치 있는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향해 ‘너는 내 마음에 합한 자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말씀의 법에 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최고의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는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 가운데 가장 행복한 사람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는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었고 자유자였습니다. 그가 자신을 행복한 사람으로 노래합니다. 그가 하나님 안에서 행복한 자임을 노래하는 시가 시편에 가득 실려 있습니다. 

다윗 왕의 아들 솔로몬은 아버지와 반대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안에 있었지만 하나님의 법을 떠났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어 놓은 경계선을 자기 맘대로 들락거리고, 넘어갔습니다. 솔로몬은 자신의 쾌락과 안정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았습니다. 그는 수천 명의 여인들을 거느리며 음란과 향락에 빠졌습니다. 그는 자신의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이웃 나라와 정략적인 결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결혼 지참금으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약속의 땅을 이웃 왕들에게 떼어 주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12 지파의 경계선을 무시하고 자신이 임의대로 경계선을 새롭게 정했습니다. 그 이유는 단지 자신의 삶을 더 풍요롭게 누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자신의 쾌락과 풍요로움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식은 죽 먹듯이 쉽게 어겼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본다면 솔로몬처럼 부러운 사람이 없습니다. 그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일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가장 행복한 사람처럼 보였던 솔로몬이 죽음의 문턱에 이르러서는 살아온 인생을 후회하며 인생의 허무함을 노래합니다. 전도서 1장 2절에서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고 말합니다. 그는 죽음 앞에서 자신의 불행을 고백합니다. 솔로몬은 자신이 하나님의 경계선을 떠나 자유로운 삶을 살겠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삶은 자유가 아닌 방종의 삶이었습니다. 방종의 삶의 결국은 멸망이고 헛된 것입니다. 

바울이 에베소서를 쓰고 있는 문화적 배경을 보면 에베소 도시의 문화는 술과 혼음 축제의 신인 바커스, 곧 디오니소스를 섬겼습니다. 그들은 술의 신 디오니소스와 교제하기 위해 술에 취해야 했습니다. 도시 전체의 정신문화가 술과 연관되어 있고 술로 인해 음란의 문화가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도시였습니다. 방종이 판을 치는 세상이었습니다. 바울은 그 시대를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고 말씀하면서 ‘악한 시대’ 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이런 세상에 살고 있는 에베소 교인들을 향해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고 말씀하십니다. 방탕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려면 술에 취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에 취해 살아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악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려면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믿음 안에서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생선 장수가 마을에 생선 가게를 내고 간판을 ‘이곳에서 신선한 생선을 팝니다’ 써서 달았습니다. 한 사람이 가게에 들어와서 말했습니다. “간판에서 ‘신선한’이라는 단어는 빼시오. 다 신선한 생선 아니오?” ‘그렇군요’ 주인은 간판에서 ‘신선한’이라는 단어를 뺐습니다. 다른 사람이 들어오더니 말했습니다. “ ‘이곳에서’라는 단어는 빼도 되지 않을까요? 이곳에서 생선을 판다는 것은 다 알지 않습니까?” 듣고 보니 그럴 것 같아서 그 글자로 뺐습니다. 다른 사람이 들어오더니 말했습니다. “ ‘팝니다’라는 말도 빼야 합니다. 거저 주는 것이 아니니까요” 듣고 보니 그래서 그 글자도 뺐습니다. 다른 사람이 들어오더니 말했습니다. “ ‘생선’이라는 글자도 필요 없습니다. 근처에 오기만 하여도 생선 냄새가 나니까요.” 그래서 그 단어도 뺐습니다. 그래서 간판 없는 생선 가게가 되었습니다. 결국 조금 후에 장사가 되지 않아 가게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바울은 악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살려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세상의 유혹과 요구에 조금씩 신앙의 자리를 양보하기 시작하면 결국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사라지고 맙니다. 세상에서 살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분명한 정체성과 또 그리스도인으로 신실한 삶을 살도록 인도하시고 도우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세상의 쾌락과 향락의 지배를 받으면서, 술의 지배를 받으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제대로 된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술 취한 모습으로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과 동행할 수는 없습니다. 세상의 것에 취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임할 수가 없고, 능력이 나타날 수가 없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고는 교회가 교회다워질 수가 없습니다. 성도가 성도다운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내면의 본성과 삶의 변화는 성령님의 강한 역사가 아니고는 변할 수가 없습니다. 지난주에 말씀을 나눈 마가 다락방에 역사하신 성령님의 강한 임재하심 이후에 베드로와 제자들의 모습이 놀랍게 변화되었습니다. 그들의 변화의 힘은 이성, 감성, 경험이 아니었습니다. 성령님이었습니다. 성령님의 임재하심 이후에 그들의 신앙과 생활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나를 변화시키는 힘은 성령님이십니다. 악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은 내 능력이 아닌 성령님의 능력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이 기억해야 하는 것은 성령 충만은 하나의 제안이 아니라 명령이라는 사실입니다. 성령 충만은 받아도 좋고 안 받아도 괜찮은 옵션이 아니라 반드시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권면하시는 것이 아니라 명령하신 것입니다. 몇몇 교회 지도자들이나 사역자만을 향한 명령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명령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악한 세상에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빛과 소금을 역할을 하려면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또 다른 하나는 성령 충만을 받으라는 명령이 현재형이라는 것입니다. 과거의 성령 충만이 아닙니다. 미래의 성령 충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현재의 성령 충만입니다. 어쩌다 한 번씩 충만하라는 뜻이 아니라 매 순간마다 계속적으로 성령 충만함에 거하라는 말입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에게는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성령님을 항상 사모합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갈망하듯이 성령님을 사모합니다. 마가 다락방에서 120명의 성도들이 성령님의 임재하심을 사모하며 간구한 것처럼 사모합니다.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언제나 함께 있고 싶어 합니다. 언제나 성령님과 함께 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을 때 성령님의 임재하심과 충만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부담스러워 하는데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믿어 너무 행복해 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부담스러워하는데 어떤 사람은 꿀 송이 보다 더 달다고 합니다. 술자리가 편하고 예배하는 자리는 불편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술자리가 불편하고 예배하는 자리가 편한 사람이 있습니다. 성령님 안에서 변화된 사람과 변화되지 않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우리 교회 성도님들이 성령으로 충만한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가 성령님이 임재하시고 운행하시는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성령님 의 충만함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부담이 되거나, 부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우리의 힘이 되고 영와 육을 세우는 지혜와 능력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성령님의 충만함의 은혜가 우리 가운데 가득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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