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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악질 재앙의 교훈 (출 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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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질 재앙의 교훈 (출 9:1~7)


어제 우리는 불과 1년 반 전만해도 최고의 권력을 가진 분이 초가을 낙엽처럼 추락된 모습을 보았습니다. 검찰청에 불려가는 날 즈음에 아내와 자살하고 싶은 충동이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떻게든 극복해야 할텐 데”라고 생각했는데 비극적인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높은 권력과 인기를 누린 사람은 그만큼 상실감도 크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권력과 언론의 독약을 마셨다고 권력과 언론을 공격합니다. 그러나 권력과 언론의 속성은 본래 그런 것입니다. 권력은 부자와도 나누어 가질 수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언론의 속성도 그런 것입니다. 관심을 끄는 것을 끝없이 드러내는 것입니다. 

21세기 언론에 의한 추문확산은 대표적인 시대적인 특징입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사탄이 인간을 넘어뜨리는 데는 메스미디어 만큼 효과적인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메스 미디어가 순 기능도 하지만 신앙인의 눈으로 볼 때 수많은 악기능을 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섹스문화, 폭력문화, 허위문화를 통한 인간 의식을 병들게 하는 것이 대표적인 악기능입니다. 

끝임없이 쏟아내는 대표적인 반 기독교적 사상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은 없다. 네가 네 인생의 주인이다. 진리는 없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지옥은 없다. 현재를 즐겨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시대에도 메스미디어는 발달되지 않았지만 인간 삶의 모습은 비슷합니다. 바로는 당대 최고의 권력자입니다. 자신을 신이라고 생각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4번의 재앙을 내렸지만 여전히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내 인생 내가 산다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주인은 나라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다섯 번째 재앙인 악질 재앙을 내립니다. 오늘 다섯 번째 재앙 악질 재앙이 주는 교훈은 무엇이겠습니까?

1. 우리는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만 경외하여야 합니다(1-4). 

다섯 번째 악질 재앙은 지금까지 있었던 4차에 걸쳐 내려진 재앙과 다른 것이 바로 생명을 거두는 것입니다. 첫 번째 나일 강이 피로 변하는 재앙, 두 번째 개구리 재앙, 세 번째 이 재앙, 네 번째 파리 재앙 모두 생명을 죽이는 재앙은 아니었습니다. 삶에 불편을 주고 자연환경의 변화에 의해 고통을 주는 재앙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섯 번째 재앙이 앞에 임한 네 가지 재앙과 다른 것은 하나님이 무서운 전염병을 통해 가축의 생명을 거둔다는 것입니다. 재앙의 강도를 높이는 것이면서 하나님께서 생명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는 생명의 주인이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는 것입니다. 생사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보내 주지 않으면 바로 네 생명도 거둘 수 있다는 것을 가축이 죽는 재앙을 통해 경고해 주는 것입니다. 

당시 바로는 자신을 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태양과 하늘의 신 호루스의 후계자이며 태양의 아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신성한 권력과 지위를 가지고 신이 주신 질서를 수호할 임무가 있었고 고위 관리들은 바로를 도와 그가 우주의 조화와 정의를 유지할 수 있도록 보좌하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집트의 모든 영역을 소유하고 백성의 삶을 지배하며, 사방의 적들을 물리치는 전능한 신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신만이 백성들의 생사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교만한 것입니다. 자신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인생도 나라도 달라진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생축을 일시에 죽이는 재앙을 통해 바로 네가 생사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생사권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화복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가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신으로 군림하는 것은 그의 군사력과, 경제력입니다. 그가 지지받는 것은 바로 이것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일순간에 그것들을 거두어 버립니다. 생축은 가축을 말합니다. 가축은 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재산 명세서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말은 전쟁용으로 사용되는 것이고 나귀는 단 거리 수송용, 약대는 장거리 수송용으로 이용되는 교통수단입니다. 이런 것을 통해 바로는 권력을 유지하고 세계 최강국의 지위를 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일순간에 군사력과 경제력, 교통에 치명타를 입혔습니다. 전국에 있는 가축이 다 죽으면 우연한 질병 때문에 그랬다고 할 것 같으니까 애굽의 가축만 죽이고 이스라엘의 가축은 살려 놓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확연하게 볼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화복을 주장하시는 분임을 알라는 것입니다. 

특히 애굽인들은 황소의 신 아피스가 힘과 풍요를 준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황소를 죽이는 것입니다. 사랑과 미의 여신 암소의 신 하토르를 섬겼습니다. 염소의 신을 섬겼습니다. 그런데 그런 동물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풍요를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자연재해와 사건을 통하여 교훈해 주시고 있습니다. 생사화복의 주인의 하나님이시다는 사실을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조류 독감이 다가옵니다. 돼지 독감이 다가옵니다. 한순간에 쓰나미가 몰려와 수많은 사람들이 죽습니다. 하루아침에 지진으로 도시가 파괴됩니다. 전직 대통령이 최고의 권력에서 떠난 지 1년 반도 안 되어 권력과 언론의 사약을 먹고 싸늘한 시신으로 변했습니다. 권력이란 별거 아니라는 것을 느끼지 않습니까? 부란 별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지 않습니까? 생명이란, 명예란 한 순간이라는 것을 깨닫지 않습니까? 이 땅의 삶이란 그렇게 집착해야 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느끼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4:14)” 모세는 120세 되어 인생의 죽음 앞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와 함께 하는 신이 없도다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 없도다 (신 32:39)”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시는 분입니다. 상하게도 하고 낫게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고 억울한 인생을 살다가 하나님께 기도하여 사무엘을 낳은 한나가 어떻게 고백합니까?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삼상 2:2-7)”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고 부하게도 하고 가난하게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생사화복권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세상의 부귀영화를 다 누렸던 솔로몬의 고백을 보십시오. 시편 시127을 보시기 바랍니다. 인생의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축복해야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집을 세우는 일(1) 하나님이 축복해야 온전해 진다는 것입니다. 바벨탑을 쌓으려던 사람들이 노력은 하나님께서 축복하지 않으니까 하루아침에 무너졌습니다.(창11:1-9). 성을 지키는 일(1)도 하나님이 축복해 주어야 밤새워 지키는 파수군의 노력이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이다. 돈버는 일(2)도 우리의 노력이 열매를 맺는 때는 하나님의 축복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녀 문제(3-5)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밑에 있는 시편 128편을 보십시오. 인생이 복 받는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수고한대로 먹습니다. 형통합니다. 가족이 잘됩니다. 시온에서 복을 받으며 평생 예루살렘의 번영을 볼 것이라고 했습니다. 장수하여 평강을 누릴 것이라고 했습니다. 최고의 권력을 못 누려도, 비록 가난하여도, 비록 인기가 없어도 우리는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을 경외하여 복 있는 인생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2.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할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 앞에 돌이키고 나아가야 합니다(5-6).

하나님은 거듭해서 기회를 주십니다. 이미 네 차례에 걸쳐 바로에게 기회를 주었습니다.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께 돌아와 하나님을 섬기라고 계속적으로 바로에게 기회를 주시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는 길 만이 살길이라는 사실을 표적을 통해 네 차례나 보여 주었는데도 여전히 마음이 강퍅합니다. 무감각합니다. 깨닫고 회개하고 돌아오지 않습니다. 네 가지 재앙을 당하면서도 조금 불편하고 잠시 고통을 받는 것이라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몸에 이상이 왔는데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정치에 이상이 왔는데, 경제에 이상이 왔는데, 민심에 이상이 왔는데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바로의 강퍅한 마음은 하나님께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래도 또다시 다섯 번째 기회를 주십니다. 그런데 이 때는 이제까지 네 가지 재앙과는 달리 정확하게 기간을 정하여 말씀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기한을 정하여 말씀합니다. 내일 행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대로 행하십니다(6). 하루의 시간 여유를 주겠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그를 존경하고 따를 수밖에 없는 요소인 경제력과 군사력에 심각한 피해를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는 어떻게 합니까? 여전히 보내지 않습니다. 유다와 같습니다. 기회를 주는데도 돌아오지 않습니다. 결국 자살해 버립니다. 사울과 같습니다. 기회를 주는데도 회개하지 않습니다. 결국 자신도 죽고 자식들도 전쟁터에서 다 죽고 맙니다. 어떤 어려움이라고 주어진 기회를 갱신의 기회로, 회생의 기회로, 승리의 기회로,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는 기회로 활용해야 합니다. 실패하고, 폭로되고, 자존심 상하면 그것을 죽을 기회가 아니라 회개하고 더 성숙할 기회로 활용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바로는 오히려 상실의 기회로, 실패의 기회로 활용해 버립니다. 더 많은 것을 잃어버리는 기회로 활용해 버립니다. 

사단에게는 하나님은 회개의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에게는 어떤 악한 사람일지라도 돌아올 기회를 주십니다. 우리는 다 부족합니다. 쉽게 변합니다. 그러나 돌아오면 됩니다. 탕자처럼 타락할 수 있지만 돌아오면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넓은 가슴으로 우리를 품어 주십니다. 우리를 외면하지 않습니다. 회개하고 돌아오는 데는 늦은 시간이 없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 말씀합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계 3:20)” 
뜻하지 않는 일을 당하고 무언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진지하게 자신을 성찰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문제를 통하여 부르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마귀를 계속 우리를 유혹합니다. 바로의 마음처럼 강퍅하게 살라고 유혹합니다. 되어지는 일에 무감각하게 살라고 유혹합니다. '하나님'은 없고, '진리'도 없으며, '지옥'도 없다는 것입니다. 일어나는 일들은 그저 우연히 일어나는 일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신경 끄고 살라는 것입니다. 진리라고 말하는 모든 것은 상대적이니 그저 네 마음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뭐 그리 죄의식을 가지고 복잡하게 사느냐는 것입니다. 되는 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지옥도 없으니 그저 이 세상이 전부로 알고 살라는 것입니다. 죽으면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니 살았을 때 마음껏 즐기라고 합니다. 어떤 일이 벌어져도 하나님과 관련을 맺지 말라는 것입니다. 병이 들도, 사업에 실패해도, 지진이 일어나도, 마음에 감동이 와도, 사고가 나도 하나님과 관련을 맺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무감각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충격적인 재앙을 통해 바로가 확실히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느낄 수 있도록 이집트 사람과 이스라엘 사람을 구별하여 재앙을 내림으로 하나님께 돌아와 하나님을 섬기라고 기회를 주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구약의 선지자를 통하여 이스라엘이 돌아오기를 얼마나 많은 기회를 주십니까? 그런데 끝까지 이스라엘이 돌아오지 않자 하나님은 북쪽은 앗수르에게 남쪽은 바벨론에게 망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극단적인 처방을 합니다. 그제서야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신을 차립니다. 기회가 주어졌을 때 잡아야 합니다. 기회는 뒷거름 치지 않습니다. 지나가면 끝입니다. 흘러간 바람으로 바람개비를 돌릴 수 없습니다. 아무리 후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미국 오하이오주에 농장을 경영하는 테일러라는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청년이 찾아와 일거리를 달라고 간청을 하였답니다. 너무나 강청하여서 그는 그 청년에게 일거리를 주었답니다. 그 이름은 제임스라는 청년이었답니다. 이 청년은 건초 저장 창고에서 잠을 자고 밥을 먹으면서 일을 하였답니다. 아주 열심히 일을 했답니다. 사람이 건장하고 인품이 있고 정직하였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주인집 딸이 그 청년을 사랑하기 시작했습니다. 둘은 사랑하는 사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는 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딸을 설득했지만 딸은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불쌍해서 도와주었더니 연애하다니," "아니 어떤 녀석인지도 잘 모르는 놈하고 연애를 하다니.... " 결국 그 청년을 쫓아 내버렸습니다. 그 후 30년 세월이 흘러서 테일러씨는 옛날 그 청년이 일하던 건초 창고를 깨끗이 드러내고 청소를 하는데, 기둥을 보니까 아주 오래 전에 글을 새긴 것이 있어서 보니 '제임스 카필드'라고 쓰여져 있었답니다. '제임스 카필드'는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였습니다. 

테일러씨는 대통령이 될 사람을 사위로 맞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바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실 기회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지나간 후에 후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회개할 수 있는 기회,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 거부가 될 수 있는 기회, 공부할 수 있는 기회, 성장할 수 있는 기회, 자녀를 잘 양육할 수 있는 기회,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기회, 승진할 수 있는 기회, 좋은 사람과 결혼할 수 있는 기회, 봉사할 수 있는 기회,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 사랑할 수 있는 기회, 용서할 수 있는 기회, 헌신할 수 있는 기회, 행복한 가정을 만들 수 있는 기회 등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3. 하나님께서 구속의 증거를 주실 때 그 증거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야 하겠습니다(7).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정한 시간이 되니까 애굽의 가축을 죽였습니다. 그러자 바로가 어떻게 합니까? 7절에 보십시오. 사람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거주하는 고센 땅에 보냅니다. 이스라엘 가축이 죽었는가 죽지 않았는가 확인하게 합니다. 증거를 확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이스라엘 가축이 하나도 죽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증거를 확실히 본 것입니다. 하나님이 역사 속에 간섭하신다는 증거를 확실히 본 것입니다. 자신의 힘과는 비교할 수 없는 능력을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다는 증거를 확실히 본 것입니다. 이 정도 되며 손을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바로는 어떤 태도를 취합니까? 마음이 완강하여 백성을 보내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이 강퍅합니다. 교만합니다. 완고합니다. 화인 맞은 양심입니다. 증거를 보여주었는데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 대신에 짐승들이 죽은 증거를 보고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죽어야 할 것인데 자신 대신에 수많은 짐승들이 죽었다는 것에 대하여 아무런 감각이 없는 것입니다. 어제 한 때 최고의 권력을 가진 분이 자신의 주변사람들이 고통을 받는 것을 보고 자책하며 유서를 남기고 생명을 끊었지 않습니까? 자책하는 정도로 끝나면 안됩니다. 그런 정황을 통하여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상황에서도 인생은 새로운 길이 열립니다. 소망의 길이 열립니다. 

바로는 자책도 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백성들 가정 가정마다에서 울려 나오는 눈물을 외면한 것입니다. 재산을 잃어버리고 곡하는 소리를 외면해 버린 것입니다. 나 때문에 백성들이 이런 험한 꼴을 당하고 있다고 죄책감을 갖지 않는 것입니다. 동물 애호가들은 이렇게 동물에게 재앙을 내리는 하나님을 잔인하다고 말합니다. 부당하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가축들을 다 죽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인간들을 보십시오.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동물을 실험용으로 사용하고 있습니까? 실험용으로 쥐, 토끼, 개, 고양이, 사슴, 말, 염소, 양, 소, 돼지, 조류, 파충류, 양서류, 어류, 곤충 등 온갖 종류의 동물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리서치 자료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1년에 최소 6억 3천만 마리의 동물들이 실험에 사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한 해 국내에서 실험대에 오르는 동물은 한국실험동물학회 추산치로 약 500백만 마리라고 합니다. 쥐는 일년에 미국과 일본에서만 5천만마리 사용된다고 합니다. 얼마나 잔인하게 실험을 합니까? 음식과 알레르기에 대한 연구를 위해서 알레르겐을 함유한 음식을 급여, 생후 14주 된 강아지들이 설사와 탈모, 가려움증에 시달리다가 사망하게 합니다. 심각한 체중 변화가 간에 주는 영향을 연구하기 위하여 멀쩡한 고양이들의 난소를 제거 한 후 즉시 고카롤리 음식을 강제 급여, 과체중을 만든 후 또다시 급격한 체중 저하를 유도하기 위해 생존에 필요한 기본 칼로리의 25%만 급여하며 7, 8개월을 굶주리게 합니다. 인간이 얼마나 충격에 견디는가를 실험하기 위해 돼지에게 5만 볼트 전기 충격을 주어 쓰러지게 합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잔인한 실험을 합니다. 

왜 동물들을 잔인하게 다루며 실험용으로 죽이고 있습니까? 인간을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의 삶의 질을 개선하기 위해서입니다. 약품 안전테스트하고, 화장품 독성 테스트를 하고, 노화테스트, 각종 질병 테스트, 심지어는 심리테스트 등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생축 재앙을 통하여 바로에게 생축의 죽음으로 네가 살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바로는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십자가에 마치 실험용 동물처럼 처절하게 돌아가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증거를 통하여 너희들 대신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것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궁극적으로 10가지 재앙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교훈하고자하는 것입니다. 10번째 재앙은 어린양을 죽임으로 장자를 살리는 것입니다. 그 어린양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역사적 증거로 확실하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 어린양을 통하여 우리가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어린양을 통하여 죄가 용서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어린양이 세상 죄를 지고 대속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 1:29)”라고 외쳤습니다. 우리가 죄를 용서받고 살 수 있는 길을 어린양의 대속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죄 용서받고 살 수 있는 길은 어린 양 예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가 기도할 수 있는 길도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리를 길도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소망 가운데 살 수 있는 길도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죄의 무게 때문에 자살할 필요가 없습니다. 실패의 아픔 때문에 포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능력의 부족으로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 나아가면 용서받을 길이 있고, 참 살길이 있고, 참 희망이 있습니다. 어제 세상을 떠난 대통령을 보십시오. 그렇게 한다고 문제가 해결됩니까? 추문이라는 것은 언론이 활발한 오늘 시대의 대표적인 특징 중의 하나입니다. 유명인은 언제든지 노출되어 있고 순식간에 전파를 타고 세계로 퍼집니다. 클린턴을 보십시오. 얼굴 들고 살지 못한 정도의 추문에 휩싸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회개하였습니다. 

일리노이주에서 열린 성직자 수련대회에 참석한자리에서 4,500여명의 목사들 앞에서 `신앙고백'을 통해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성추문에 대해 참회했습니다. “엄청난 실수”라고 반성하고, “국민들의 용서에 대해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마움을 느낀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죽지 않았습니다. 부인은 국무장관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한 해 연설료만 1천만 달러(120억)를 번다고 합니다. 성군이라고 칭함받은 다윗도 범죄하였지만 회개하였습니다. 

우리 예수님 안에서 회개하면 살 길이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어린양으로 말씀하시면서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 53:5)”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우리의 구원은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벧전 1:19)”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새 생명을 얻고 새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어린양이신 예수님이 언젠가 우리의 눈물을 다 씻어 줄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계 7: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천국에 대한 소망을 두고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죄에서 자유를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형제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봉사하고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슬픔 가운데서도 기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의 문제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을 모시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 없는 가정, 예수님 없는 정치, 예수님 없는 교회, 예수님 없는 경제, 예수님 없는 예술은 바로의 마음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모셔야 심령이 가난해 집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모셔야 애통해집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모셔야 온유한 자가 됩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모셔야 의에 주리고 목마른자가 됩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모셔야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됩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모셔야 마음이 청결한 자가 됩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모셔야 화평케 하는 자가 됩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모셔야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가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삶의 현장에서 구속의 증거를 보고 예수님을 만나 복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생사 화복권을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 예수님을 보내 주신 하나님을 만나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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