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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도로 깨어 있으라 (눅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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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로 깨어 있으라 (눅 21:36)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눅 21:36). 

Ⅰ. 본문해설 

예수님은 마지막 때, 성도들의 신앙생활이 어떠해야 하는 지에 대하여 본문 말씀을 통해 가르쳐주셨습니다. 즉 마지막 때에는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눅 21:34)“는 말씀이 이루어질 텐데, 그때 성도들에게 깨어있기를 당부하신 것입니다. 


Ⅱ. 환경과 신앙 

여기서 우리는 “이 모든 일들”이라고 지칭된 이 시대의 환경과 신앙에 대하여 생각하게 됩니다. 실상 환경과 신앙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A. 경고하신 “이 모든 일들” 

예수님이 경고하신 “이 모든 일들”은 이중적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대변되는 마지막 날의 큰 환난입니다.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로마제국에 의한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신 것이지만, 우주적으로는 마지막 때에 세계에 미친 큰 환난과 핍박으로 인해 신앙생활이 어려워질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이런 마지막 때에 우리의 내면에서 일어나게 될 믿음을 방해하는 요인들입니다. 바로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인해 마음이 둔해져 하나님만을 바라보지 못하는 일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 우리는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의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살아가고 있고, 시대정신으로 물결은 우리 영혼이 하나님을 진지하게 응시하며, 주님께 마음을 쏟아 기도하는 고전적 신앙생활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B. 기도 없는 현대 신앙 

오늘날은 기도 없는 현대 신앙의 시대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물론 각각의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 아래 거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우리는 이를 통해 시대의 정신이 얼마나 견고하고 강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시대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철저한 자기중심성입니다. 자기가 우주의 중심이며, 자신만이 가치를 판단하는 궁극적인 기준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신앙과 종교도 그러한 한계 아래서만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의 요체는 분명 다릅니다. 기독교 신앙의 요체는 인간이 하나님을 떠난 데서 모든 불행과 비극의 원인을 발견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마치 탕자가 궁핍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자신의 영혼과 육체의 상태를 깨닫고, 풍요로웠던 아버지의 집을 떠난 것이 모든 불행의 근원이었음을 자각하고 일어나 돌아가기를 결단했던 것과 같습니다.

 물론 인간에게는 돌이킬 능력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은혜로 이 일들을 하십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강력한 자기중심성은 이와 같은 회심의 교리를 낯선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돌이켜야 할 분은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패역한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이런 그릇된 태도를 바꾸는 유일한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오직 이 일에는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필요합니다. 

아무리 많은 신학적 지식을 습득한다고 하더라도 한 사람을 기도하는 사람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자기가 중심되었던 삶의 자리에서 자아의 중심성을 깨뜨리고, 자신이 끊임없이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밖에 없고 그분을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바로 여기서 기도의 샘이 솟습니다. 은혜의 샘이 솟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믿음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일들과는 거리가 먼 시대가 올 것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덫에 걸리지 말고 깨어있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깨어있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Ⅲ. 깨어있다는 의미 

기도를 잃어버린 현대 신앙에 물들지 않고 깨어있다는 것은 매우 소중한 일입니다. 이것은 최소한 두 가지에 대해서 깨어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A. 환경을 앎 

첫 번째는 환경을 아는 것입니다. 인간은 환경에 반응하며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환경은 육체뿐만 아니라 우리의 정신과 영혼에도 큰 영향을 미칩니다. 여러분이 신앙에서 미끄러졌다고 말했던 때를 떠올려보십시오. 그렇게 된 이유는 근본적으로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떠났기 때문이지만 , 잘 생각해보면 미끄러지게 한 환경도 함께 있었습니다. 

반대로 은혜를 회복하고 돌이켰던 기억도 있으실 것입니다. 그때도 마찬가지로 마음이 하나님께 돌아간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놀랍게 환경을 사용하셔서, 환경이 마음을 움직이고 마음이 환경에 영향을 주면서 모든 것이 합하여 회복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결국 깨어있다고 하는 것은 이렇게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환경이 자신의 신앙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또 환경의 변화를 통해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떤 말씀을 하시는가 알 수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B. 자신을 앎 

두 번째는 자신을 아는 것입니다. 환경은 대부분 자신과 밀접한 연결을 이루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올바로 믿고 따르는 데 있어서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자기의 마음의 기질과 성향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환경을 아는 지식과 더불어 두 가지를 잘 견주면서, 피할 것은 피하고 맞서 싸울 것은 맞서 싸울 수 있는 믿음의 지혜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깨어있음의 두 번째입니다. 

물론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더욱이 남에게 닥친 시험은 쉬워보여도 자기의 일이라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때 필요한 것은 자신이 직접 자신을 들여다보거나 그저 환경을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진리의 참된 빛을 환경과 자신에게 비추어 주셔야 환경과 그 속에 있는 자기의 할 일 등을 올바로 새기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구약에서 애굽을 가뭄의 재앙에서 건져냈던 요셉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요셉은 후일 형들을 만난 자리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출세라고 하는 환경이 가진 의미에 대해 정확한 해석을 내놓습니다. 즉 하나님이 자기를 애굽의 총리로 세우신 것은 만민의 목숨을 보존하고, 언약백성인 자신들의 가족을 지켜주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진리의 밝은 빛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줍니다. 자신 안에 사랑해야 할 것과 미워해야할 요소가 무엇인지 엄격히 보여줍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깨어있음을 위해 기도해야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는 영혼과 육체를 공정히 사랑하시는커녕 어둠속에서 육체만을 사랑하게 됩니다. 
영혼과 육체를 공정히 사랑하기는커녕 어둠속에서 육체만을 사랑하게 됩니다. 


Ⅳ. 기도로 깨어있음 

이런 깨어있음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때 필요한 것이 항상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받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열렬한 기도 속에 담겨질 때 그 깨달음은 증진되고 우리 안에서 유지되지 않습니까? 만약 시시때때로 말씀의 깨달음이 있어도 성화의 진전이 없다면 기도가 결핍되어 깨달음이 한순간 지성 안에 맺히고, 마음까지 다다르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A. 자기신뢰의 포기 

이런 기도는 자기 신뢰의 포기입니다. 기도하지 않을 때는 우리 말씀 속에서 여전히 자아가 살아서 예전에 회심과 함께 버렸던 자기중심성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열렬한 기도 속에서 우리는 자기신뢰를 포기하게 됩니다. 그리고 말씀의 빛 아래서 환경과 자기를 알게 되면 그는 자기가 신뢰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절실히 알게 됩니다. 

B. 충심적 의존 

또한 기도 안에서 우리는 충심적인 의존을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신자의 마음을 통해 영광을 받고 싶어 하십니다. 그리고 신자는 열렬한 기도를 통해 자신은 끝없이 욕망을 따라 떠도는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의 구심점이며, 한순가도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열렬한 기도의 현실적인 이유가 됩니다. 그러는 동안 자기에 대한 신뢰는 점점 깨뜨려지고 하나님의 말씀의 빛 앞에서 은혜의 소중함을 발견하고, 하나님께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로 깨어있다는 의미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죄 없으시고 한없는 능력을 지니신 예수 그리스도는 기도하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서 사시는 동안 바로 우리에게 하나님을 어떻게 찾고 믿어야 하는지 모본을 보이시기 위해 스스로 모든 일을 행하지 않으시고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기도하는 환경이 좋았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매번 여러 곳을 옮겨 다니셨습니다. 끊임없는 헌신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를 통해 충심으로 하나님께 자신을 바치는 연습을 하셨고, 눈물과 기도로 하나님 앞에 원하는 것을 받으시면서 아들의 마음은 더욱 더 하나님을 향한 성숙한 의존과 순종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과 당신 사이에 있는 사랑을 촉진하는 아주 중요한 동기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예수님이 이 땅에서 보여주셨던 하나님 아버지와의 깊고 오묘한 친밀함의 한 가운데에 바로 기도생활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문제는 무엇이 우리에게 더 중요한가 하는 것입니다. 만일 주님과의 관계가 우리에게 두 번째라면 기도할 만큼 한가할 때는 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을 먼저 하면, 나머지 것은 대부분 안 해도 되는 것들입니다. 우선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그리고 정직하게 하루의 일과를 돌아보면서 피할 수 없이 하나님을 위해 해야 하는 것이 아닌 것들을 찾아내십시오. 

그리고 욕심도 비우십시오. 세속적인 즐거움에 마음이 빼앗긴 나머지 하나님을 조용히 묵상할 여지가 없다면 하나님을 마음으로 버린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가치 없는 것들도 과감히 버려야 합니다. 마음을 낮추고 모든 마음을 주님께 맡기십시오. 말씀이 여러분 속에 깊이 스며들 수 있도록 말씀에게 시간을 주고 마음을 복종시키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 은혜의 단비를 내려달려고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마음의 샘을 터뜨려 기도하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Ⅴ. 결론: 종말을 바라는 삶 

결국 주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종말을 바라는 삶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인자 앞에 서도록 깨어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개인적인 종말이나 우주적인 종말 가운데 무엇이 먼저 올지 모릅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이 두 날이 모두 가깝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깨어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끝없이 바람에 떠밀리듯 사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스스로 하나님의 은혜를 굳게 의지하고 하나님과의 생명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모든 일들이 치열한 분투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깊이 자기를 돌아보십시오. 기도할 제목이 얼마나 많을까요?? 기도에 마음을 쏟으면 쏟을수록 기도의 지경은 넓어지고 더 많은 기도의 제목들이 떠오르지만 기도하지 않으면 기도해야할 이유도, 제목도 찾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게으르지 마십시오. 영적으로 기도하지 못하고 잠들어 있는 것은 죽은 자와 방불한 삶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를 바라보며 종말론적인 긴장 속에서 하나님 앞에 열렬히 기도하시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김남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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