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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레데에 남겨두신 이유 (딛 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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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데에 남겨두신 이유 (딛 1:4~5)


1. 들어가는 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미국의 제 35대 대통령 케네디가 저격당하기 전날 밤에 만찬회에서 행한 인상 깊은 연설이 있습니다. 케네디는 그 연설에서 우리 모두가 개척자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마지막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역사의 법정 앞에 설 때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바로 그 자리에서 네 가지의 질문을 받게 될 것입니다. 
첫째, 당신은 참으로 용감한 사람이었습니까? 
둘째, 당신은 현명한 판단을 했습니까? 
셋째, 당신은 당신의 맡은 일에 성실을 다했습니까? 
넷째, 당신은 하는 일에 전적으로 헌신을 하였습니까?” 

그는 이 연설에서 사람들에게 참으로 용기 있게 살았는지, 아니면 타협하면서 비겁하게 살지는 않았는지, 그리고 현명하지 못한 판단으로 인하여 후회스러운 일은 없었는지, 내가 맡은 일에 성실을 다했는지, 그리고 그 일에 전적인 희생과 헌신을 했는지를 물어보라고 요청했습니다. 한 마디로 그는 이 연설에서 우리가 역사의 수레바퀴를 이끌어 가는 사명자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자신에게 주어진 일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가 처한 상황에서 용기있게, 지혜롭게, 성실하게, 그리고 최선을 다하여 헌신을 하며 섬기는 사명자들을 사용해서 역사를 이끌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자기에게 주어진 일이 힘들고 어렵다 하여 불평하고, 피하거나, 때로는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았던 사람들은 결코 하나님의 쓰임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2. 믿음의 아들 디도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는 너무나도 척박한 환경에 홀로 남겨진 채로 사명을 부여받는 한 믿음의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바로 디도입니다. 오늘 아침 우리가 읽은 디도서는 바울이 그의 믿음의 아들 디도에서 보낸 편지입니다. 디도는 유대인이 아닌 헬라인이었지만, 바울을 통해서 복음을 전해 듣고, 또한 바울의 믿음 안에서의 양육을 통해 바울이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도를 향해 오늘 본문 4절에서 “나의 참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면 디도는 바울이 힘들고 어려운 선교 여행을 하는 동안 줄곧 따라 다니며 바울의 사역을 도왔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종종 그에게 매우 중요한 임무를 맡기곤 하였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보면 바울이 특별히 어려울 때에 늘 그와 함께 동행 한 사람이 바로 디도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인들을 형제로 받아들일 것인가 아닌가를 결정하는 중요한 순간에도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이었던 디도를 데리고 그 회의에 참석을 하였고(행전 15장),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꾸짖는 편지를 보낼 때에도 디도를 통해서 그 중요한 편지를 보냈습니다(고후 2:4). 그리고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가 기근으로 인해서 어려움을 겪을 때 이방지역에 있던 교회들의 구제헌금을 모아 어머니 교회(mother church)인 예루살렘 교회를 돕게 하는 일도 역시 디도에게 맡겼습니다(고후 8:16-17). 
따라서 이런 여러 가지 성경의 기록들을 보면 디도는 분명히 바울이 가장 신뢰하고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후 8:23에서 “디도로 말하면 나의 동료요, 너희를 위한 나의 동역자요, 우리 형제들로 말하면 여러 교회의 사자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니라”라는 말씀을 합니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디도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바울은 디도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영광”이라고까지 표현하고 있습니다. 진실로 디도는 바울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믿음의 아들이었습니다. 

3. 그레데에 남겨두신 이유 

그런데 이토록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운 디도를 그레데 섬에 보내면서 바울은 그 보낸 이유를 오늘 본문(딛 1:5)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남은 일을 정리하기 위함(부족한 일을 바로 잡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1) 그레데란 어떤 곳인가? 
부족한 일을 바로잡다니 이것은 무슨 뜻일까요? 우리는 바울의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그레데라는 곳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에 나타나 있는 그레데라고 하는 곳은 어떤 곳입니까? 오늘 디도서 1장에 반복해서 나타나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먼저 그레데는 복종치 않는 자들이 많은 곳이라 했습니다(10절). 헛된 말을 하는 자가 많은 곳이라 했습니다(10절). 속이는 자가 많은 곳이라고 했습니다(10절). 특히 할례당이 교회를 어지럽히는 곳이었습니다. 더러운 이익을 구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11절). 뿐만 아니라 가정을 무너뜨리는 자들이 많은 곳이었습니다(11절). 한마디로 그레데는 악명 높은 곳이요, 참으로 골치 아픈 곳이요, 문제가 가득찬 곳이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그들은 술꾼들이요, 무례하고 거만하고 믿을 수 없는 자들이고, 거짓말을 잘하는 자들이고, 탐욕스런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헬라어에 “크레티조”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거짓말하다” “속인다”는 뜻인데, 그레데가 바로 이 “크레티조”라는 말에서 왔습니다. 즉 그레데라는 호칭 자체에 “속이는 자”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이름만 보아도 그레데라고 하는 곳이 얼마나 험악한 곳이었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딛 1장 12절에서 말하기를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뱅이라 하니 이 증언이 참 되도다”라고 했습니다. 

고대의 저술가인 폴리비우스(Polybius)는 “탐욕과 허세가 그레데 토양에 본래부터 뿌리 내리고 있으므로 그들은 어떤 식으로 수입을 얻든 상관하지 않는 유일한 백성이다”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자신들의 배를 채우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유일한 백성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그레데의 현실을 볼 때 바울이 디도에게 말하기를 이렇게 말해야 옳지 않겠습니까? “디도야, 내가 너를 그 문제 많은 곳에서 데리고 나온데는 이유가 있다” 그래야 맞을 것 같습니다. 

“디도야, 내가 너를 그 악한 곳에서, 그 골치 아픈 곳에서 데리고 나온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이렇게 해야 할 것 같은데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오히려 정 반대로 이렇게 힘들고 고통스럽고, 문제 많은 그곳에 너를 남겨 둔 이유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디도도 이것에 대해서 불순종하거나 거역하지 않았습니다. “나를 왜 이런 곳에 둡니까? 좀 좋은데 두지” “왜 나를 이렇게 골치 아픈 곳에 두십니까? 왜 나를 이렇게 문제 많고 힘든 곳에 두십니까?” 라고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교회 성도 여러분, 바로 여기에 오늘 아침 우리가 들어야 할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믿음의 비밀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는 오늘 칭찬과 긍정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세상의 악한 것들, 더러운 것들만 가득한 곳에, 아들처럼 사랑하는 디도를 그곳에 남겨둔 이유가 있다고 말하는 바울의 음성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을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도 문제 많은 곳에(그레데에) 남겨두신 데는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2) 그레데에 남겨두신 이유 
남은 일을 정리하기 위함(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디도는 문제 많은 그레데 섬에 홀로 남겨져 있을 때 바울로부터 편지를 받았습니다. 내가 너를 문제 많은 그곳에 남겨둔 데는 이유가 있는 데, 그것은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함이라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언젠가 그레데 섬을 방문하여 그곳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이유 때문에 그는 그곳에 오래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레데에 있는 교회는 여러 가지로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았고, 미완성된 많은 과제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남은 일이 있다” “부족한 것이 있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레데에는 어떤 문제들이 있었을까요? 
예를 들어 9-10절에서 볼 수 있는 대로, 그레데에는 우선 처리해야 할 거짓 교사들과 할례당의 잘못된 가르침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즉 할례를 받아야 구원받는다는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14절)를 전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가리켜 14절에서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는 복음의 진리를 배반하는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또 그레데 교회는 교회를 계속해서 든든히 세워 가는데 있어서 필요한 기둥 같은 존재들인 장로들, 즉 교회의 지도자(leadership)들을 세우는 일도 남아 있었습니다. 바울은 교회를 개척하고 곧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도자들을 아직 세우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곳에서 장로들은 어떤 사람들이어야 한다(6절). 혹은 감독(오늘의 목사)은 어떤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7-9절)는 것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본문 16절에서 볼 수 있는 대로, 그레데 교인들 가운데는 믿음의 실천을 가르쳐야 할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울이 계속해서 지적하는 바대로 그들 가운데는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는 자들,” “복종치 아니하는 자들”(16)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들”(16)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디도는 바로 이런 부족한 모습들, 남겨진 문제들을 바로 잡기 위하여 문제 많은 그곳에 남겨진 것입니다. 

3) 우리의 그레데: 조국, 한국교회 그리고 우리 가정과 일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이제 우리 이야기를 해볼까요? 생각해 보면 오늘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한국사회도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 민족에게는 지금 넘어야 할 산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저는 요즈음 우리가 살고 있는 우리 조국 한반도가 바로 그레데와 같은 곳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면에서 지금 우리 사회는 그 무게중심을 잃어버린 체 흔들리고 있습니다. 특별히 정치와 사상 면에서 온 나라가 좌우로 양분되어 6.25 때보다 더 심한 분열로 치닫고 있습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저 이북에서는 세계현대사에서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3세대 부자세습을 위하여 계속해서 장거리 미사일과 핵으로 한반도와 동북아의 위기를 조성하고 있습니다. 또한 경제적으로는 20대 태반이 백수(이태백)로 지내고 있는 청년실업문제를 비롯하여, 계속되는 경제 불안으로 인하여 우리는 지금 모두 다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살기가 너무 힘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지금도 매일같이 35명이 자살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문제 많은 한반도에 살아가면서 수많은 어려움과 고통을 직접 간접으로 경험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가 바로 그레데가 아닌가요? 

그런가 하면 우리가 신앙생활하고 있는 한국교회에서도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악해도 교회만은 그렇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교회까지 문제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실망을 하여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가 “개독교”라는 이름으로 불리면서 세상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하고 있습니다. 어떤 큰 교회들은 담임목사직을 자식에게 세습을 하면서 교회를 마치 목사 개신의 사유재산인 것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큰 교회들이 리더십의 바톤 터치를 하는 과정에서 서로 power 게임을 하다가 분란이 생겨 교회가 나누어지고, 나누어지다 못해 교인들끼리 서로 폭력을 가하는 모습이 TV 등의 언론매체에 여과 없이 그대로 보도가 되어 교회가 손가락질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라와 민족이 심각한 어려움에 빠져있는 이런 상황에서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서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눈물로 중보기도를 해도 부족할 판에, 교회는 오히려 자기모순과 자기만족에 빠져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아마도 우리들 가운데는 가정과 일터에 어려운 문제들이 있는 분들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사업의 문제로 인하여 고통 받고 있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가장의 실직으로 인하여 온 가족이 경제적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자녀의 문제들로 인하여 한숨짓고 있는 분들도 있을 것이고, 우리 젊은이들은 진로문제로, 직장문제로, 직장에서는 인간관계로 인하여 고민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또 우리 가운데는 가족 간의 불화로, 가족 가운데 사랑하는 이가 병들어 누워 고통을 받고 있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왜 이렇게, 우리 집에는 왜 이렇게 문제가 많은가 탄식하며 한숨짓고 있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가 이미 잠시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오늘 문제 많은 가정에, 일터에, 한국교회에, 그리고 이 나라와 민족에 하나님께서 나를 남겨두신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즉 우리는 세상의 악한 것들, 그리고 어려운 문제들로 가득한 곳에, 아들처럼 사랑하는 디도를 남겨둔 이유가 있다고 말하는 바울의 음성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바로 저와 여러분을 통해 문제 많은 곳에, 그 문제를 회복하게 하기 위하여, 그 부족함을 채우기 위하여,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하여 우리를 그곳에 두셨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가정의 아픔과 일터의 문제와 한국교회의 문제와 이 나라와 민족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오늘 저와 여러분을 바로 이곳에 부르시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 그레데의 현실에서, 즉 한반도의 현실에서, 한국교회의 현실에서, 우리 가정의 어려운 상황에서, 나의 문제 많은 일터에서, 그리고 내가 처한 문제 가운데서 도피하려고 하지 말고, “왜 나에게만 이런 어려움이 계속되는가?”라고 원망도 하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이 문제 많은 곳에 나를 남겨두신 이유가 있다”는 사명의식을 가지고 그것을 발견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문제 가운데 있을 때, 문제를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들의 존재의 가치를 다시 한 번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문제가 있으면 회피하려고 합니다. 무엇인가 부담이 되면 먼저 도망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앙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오히려 문제 가운데서 나의 존재의 가치를 역설적으로 발견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일어나는 그 어떤 일도 우연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필연, 아니 하나님의 섭리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에 의해서 움직여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사상을 철저히 믿고 고백하는 청교도들의 후예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그 어떤 일도 우연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그 어떤 일들 속에서, 그 일이 어렵고 힘든 일이라 할지라도, 그 일이 내게는 너무나 괴로운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왜 나를 이곳에 두셨는지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나를 이런 어려운 상황에 두셨는지를 오히려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오히려 역설적으로 나의 사명을 발견해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지금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지 간에, 문제 많은 그곳에서 그 문제를 회복하게 하기 위하여, 그 부족함을 채우기 위하여, 그 상처들을 치유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그곳에 두셨음을 기억하십시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성도들이 가져야 할 바른 신앙의 태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명의식이 있는 자를 우리 가운데서 부르고 계십니다. 

4. 주기철 목사님의 예 

하나님께서 나를 고통스러운 곳에, 문제 많은 곳에 두신 이유가 있음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온갖 종류의 고난과 시련을 견디고 승리하신 분이 있습니다. 그는 바로 일제시대에 신사참배를 반대하시다가 고문 끝에 순교하신 순교자 주기철 목사닙입니다. 저는 저의 할아버님을 생각할 때마다 그는 실로 문제 많은 그레데에 남겨진 디도와 같은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분은 일제의 강점 아래서 7년간 5차레 감옥에 드나들면서 온갖 종류의 고문을 당하다가 결국 순교하셨습니다. 
일제의 형사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목사님에게 매질을 하였고, 매질이 지루해지면, 가로지른 각목에다 발목을 묶어 매달아 놓고 가죽 채찍을 휘둘러 때리면서 “비행기 타는 맛이 어떤가?”(비행기 타기) 물으며 비웃었습니다. 그리고 일제는 전기 고문에 고축가루 주전자를 강제로 들이 붓기, 손톱 발톱을 대나무 바늘로 후벼 파기 등의 온갖 종류의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언젠가 저의 선친께서는 할아버님께서 할머니에게 하소연 하듯이 이런 말씀을 하는 것을 들은 기억이 있다고 제게 말씀해 주셨는데, 할아버님께서 가장 견디기 어려운 고문이 두 가지가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는 잠을 안 재우며 괴롭히는 고문이요(정신이 몽롱해져서 신사 앞에 절을 하겠더라는 것), 또 하나는 사람을 널빤지 위에 눕혀 놓고, 사지를 묶고, 아랫도리를 벗긴 다음 알코올에 적신 탈지면을 심지로 감은 꼬챙이를 요도에 쑤셔 넣는 고문이었다고 합니다. 주 목사님은 그런 고문을 당하실 때에는 살이 찢겨서 피가 흐르고, 면도날로 아랫도리를 저며 내는 듯한 극심한 통증이 와서 기절을 하기를 하루에도 몇 번씩 했습니다. 그리고 그 때마다 목사님께서는 “주님, 차라리 제 생명을 빨리 거두어 달라”고 울부짖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런 고문을 당하고 나면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그 통증에 소변을 잘 볼 수가 없어서 감옥 안에서 변기를 붙잡고 울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고문은 계절도 없이 7년간 계속되었는데, 특히 겨울에는 견디기 힘든 혹독한 세월이었다고 합니다. 한번은 할머님이 면회를 가셨는데, 솜을 두둑히 넣은 저고리와 바지를 받으시다가 목사님이 낯을 찡그리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발 옷 속에 솜을 넣지 마시오” 
“그러면 이 추위에 솜 두지 않은 옷으로 어떻게 견디시려고 하십니까?”(할머니) 
“내가 일일이 설명을 해야만 알겠소? 입을 열면 엄살이 될 것 같아서 말하기 싫었소. 고문이 끝난 뒤에 돌아올 무렵이면 내 옷은 피에 흠뻑 젖는 게요. 그 피가 두툼한 솜에 스며들어 마르지를 않소. 피에 젖어 축축한 옷 밑에서 터진 살이 자꾸 곪으면 고름이 흐르고, 피와 고름이 섞여 얼어붙으면 그것이 칼처럼 다시 살을 찢어서 그래요. 고문 끝에 기절하면 일제가 양동이로 찬물을 끼얹는데, 그 찬물이 옷에 배어서 피와 고름이 함께 얼어붙으니 나는 옷 얼음판 위에서 떨게 되는 거요, 그러니 제발 솜을 넣지 마시오. 

내 한 마디 더하리이까? 고문 끝에 감방으로 돌아가면 간수가 하루 두끼 밥을 넣어 줍니다. 손바닥 만한 식구통에다 밥을 끼어 주면 그것을 내려다가 먹어야 해요, 때때로 단식을 해서 목숨을 단축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그것도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일이기에 그럴 수도 없었소. 그러나 그 밥을 먹으려면 뭉그러진 내 육체를 바로 세울 수가 없어서 언제나 기어서 다가가야 하오. 그럴 때마다 시멘트 바닥에 쓸리는, 피가 엉긴 체 얼어서 뻣뻣한 옷이 내 상처를 다시 쑤셔 놓아 그것이 터지고, 피고름이 흘러서 밥을 먹는 고통이 또 하나의 고문이 되고 마는 거요. 
그러니 제발 솜을 넣지 말라는 것이오. 솜을 넣지 않으면 피가 흘러도 시멘트 바닥으로 다 흘러 버릴 것이고, 그들이 물을 끼얹어도 나중에 쉽게 마를 테니, 차라리 추위를 견디는 것이 나을 것이오. 미안하오, 이런 말을 하지 않으려 했건만 당신이 여기 형편을 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부득불 설명을 했소” 

목사님은 평소에 감옥에 있을 때에도 두 손이 뒤로 묶인 채 수갑이 채워지고, 그 수갑에다가 쇳덩어리를 달아 맨 쇠사슬이 매어있었습니다. 그는 감방에서도 쇠사슬에 매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쇳덩어리가 매어 달린 쇠사슬은 천근 무게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 번 움직이려면 뼈만 남은 어깨가 으스러질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식사 시간이 되어 식구통에 끼워 주는 밥 덩어리를 먹으려면, 그 무거운 쇳덩어리와 쇠사슬로 묶인 몸을 이끌고 문이 있는 자리까지 기어가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배고픔과 그 고통 중에 어느 것을 견딜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면 차라리 배고픔을 견디는 편이 나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분은 굶는 편을 택하려고 했던 자신의 생각을 부끄러워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아직 죽음에 이르지는 않았다. 이 쇳덩어리의 무게가 주님께서 십자가에 메어 달려 겪으신 고통의 무게에 비하랴?” 
그래서 그는 한 뼘 또 한 뼘 그렇게 콩밥을 향하여 앞으로 갔습니다. 
“고난과 고통의 시간을 단축하려는 내 의자가 있었다면 그것도 주님 앞에는 말할 수 없는 죄악이다. 이 밥은 일본이 주는 밥이 아니라, 주께서 내게 주시는 밥이다. 이 밥을 먹는 것이 성찬이다. 이 시간은 일본이 내게 주는 고난의 시간이 아니라.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시간이다. 이 밥을 먹고서야 주님과 더욱 가까워지는 것이다. ‘나는 기념하라’하시며,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 주신 주님의 뜻은 주님께서 겪으신 모든 것을 잊지 말고 간직하라는 뜻이다. 예수님, 그분이 겪으신 수치를 기억하기 위하여 나는 이 밥을 먹는다. 예수 그 분의 참혹한 처형과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을 내 영혼과 내 몸에 새겨 넣기 위하여 나는 이 쇠사슬을 이끌고 밥을 향하여 나아가며, 개처럼 혹은 다른 더 천한 짐승처럼 이 밥을 먹어야 한다. 
오, 주님, 나 같은 것에게 이러한 일을 허락하시다니...나 같은 것이 주님의 그 치욕에 감히 참여하게 하시다니” 

이렇게 고백하며, 그 분은 쇠사슬과 쇳덩어리에 짓눌려 뼈를 으스러뜨려 가면서 밥 덩어리를 입으로 물어다가, 한입 한 입 베어 물어 눈물과 함께 그것을 씹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예수님의 생애를 더듬어 자신에게도 이 길을 갈 수 있는 특권을 주신 그분의 사랑에 감격하면서 말입니다. 
그렇게 고문을 당하다가 한번은 일제가 회유작전으로 3일간 가석방을 시킨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 소식을 듣고 달려온 할머님께서 목사님에게 하신 첫 마디는 이것이었습니다. 

“목사님, 승리하셨겠지요?” “사흘 말미 뿐이오” 
“그러시면 다시 그곳으로 가셔야 합니다. 어머님, 아이들 걱정은 마시고 다시 가셔서 신앙을 지키시고 순교하십시오. 목사님은 조선 교회의 밀알이 되어야 합니다. 목사님이 맡으신 일은 그 뿐입니다. 조선교회가 많은 열매를 맺도록 하실 의무를 주님께서 목사님에게 주신 것을 잊지 마십시오. 목사님이 순교하셔야 조선교회가 무너지지 않습니다. 목사님이 순교하셔야 조선교회가 꿋꿋하게 서 있을 수 있습니다. 목사님은 결코 살아서 이 붉은 벽돌을 나오시면 안 됩니다” 

언젠가 할머님께서 그 때를 회상하시면서 저희 선친께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아들아, 그것은 내 목소리가 아니었다. 분명 내가 말하고 있었으나 내 귀에 들리는 것은 내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은 준비된 말도 아니었다. 마치 누가 시켜서, 써 준 문장을 읽듯이 술술 흘러나오던 그 말은 내 의사요, 내 뜻이 아니었다” 
성령님께서 그 순간 할머니를 통해서 목사님에게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었지요. 그리고 그 때 할머니께서는 울면서 목사님께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목사님, 용서하세요. 용서하세요. 다만 몇 일이라도 제가 대신 할 수만 있다면, 이 곤욕을 대신 치르고 싶어요, 목사님, 그러나 어찌하겠습니까? 내일 모레 다시 들어가셔야 한다면 다시 가셔야지요. 목사님이 일본 앞에 두 손을 드시는 것은 산정현 교회의 패배요, 조선교회의 항복입니다. 아니지요. 조선 그리스도인 전부의 항복입니다. 이제는 누가 무어라 하여도 목사님은 일본 천황과 영적 전투를 시작하신 것입니다. 사탄과의 싸움이 시작된 것입니다. 당당하게 나아 싸우십시오” 

그리고 목사님도 염려하지 말라고, 주님의 십자가가 자신을 이끌어가고 있으니,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고백하시고, “내 결코 살아서 이 빨간 벽돌을 나가지 않을 것이요”라고 말씀하시며 다시 감옥으로 들어가셨고, 마침내 그는 7년 동안의 모든 고문과 고난을 견디고 순교하심으로 승리하셨습니다. 
그 분의 시신을 모시고 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울고 있었는데, 그 때 저의 할머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러분, 지금은 울 때가 아닙니다. 이제부터 기도해야만 하는 때가 온 것입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나약하고 힘이 모자라서, 그리고 무식해서 죽은 것이 아닙니다. 
당연하게 말해야 할 때 벙어리가 될 수 없어서. 
당연히 가야만 할 길을 도망치거나 피해 가고 싶지 않아서 
그리고 당연히 죽어야만 할 시간에 살아남아 있을 수가 없어서 죽음을 택한 것뿐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를 지는 사람만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광을 누릴 수 있습니다. 
목사님의 승리를 우리가 당당히 누리려면 이제부터 정작 기도해야 합니다. 
조선교회의 앞날을 위하여 기도해야 할 일만 남았습니다. 
소리내어 울지 마십시오. 지금은 울 때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기철 목사님과 오정모 사모님은 너무나 고통스러운 현장에 있었으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그곳에 남겨두신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너져가는 조선교회를 끝까지 떠받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그곳에서 힘들다고, 무섭다고, 괴롭다고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나를, 우리를 여기에 두신 이유가 있다고 고백하고, 그 길을 따라 감으로 승리하였습니다. 나를 여기에 남겨두신 목적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도 문제 많은 곳에서 도피하는 자들이 되지 말고, 디도처럼, 그리고 우리 신앙의 선배이신 주기철 목사님처럼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부족함을 채우는 자들이 됩시다. 

5. 나가는 말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들도 문제 많은 우리 가정에서, 일터에서, 교회에서 그리고 우리 조국 한반도에 살면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과 은혜들을 바르게 간직하고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떤 어려움이 있고,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하나님께서 나를 여기에 두신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나를 통해서 부족함을 채우시기 위함이다”라는 사명의식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 사명자의 삶을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 모두 사명자가 되어 부족함을 채우는 자들이 됩시다. 그 결과 모두가 다 힘들다고 아우성치고 있는 이 때에 우리 교회 성도들이 가는 곳마다 부족함이 채워지고, 남은 일이 정리되고, 상처가 치유되고 회복되는 역사가 있어지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우리들로 말미암아 할일 많고 문제 많은 우리 조국과 한국교회가 새로워지고, 다시 회복되어지는 역사가 있어 지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사명자의 삶을 살아갈 때에 우리 주님은 우리들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 너희는 나의 동료요, 나의 동역자요, 교회의 사자요, 나(그리스도)의 영광이니라”(고후 8:23)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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