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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불로 심판하시는 하나님 (암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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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로 심판하시는 하나님 (암 1:3~2:5)


(1: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다메섹의 서너 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철 타작기로 타작하듯 길르앗을 압박하였음이라 (4) 내가 하사엘의 집에 불을 보내리니 벤하닷의 궁궐들을 사르리라 (5) 내가 다메섹 빗장을 꺾으며 아웬 골짜기에서 그 거민을 끊으며 벧에던에서 홀 잡은 자를 끊으리니 아람 백성이 사로잡혀 길에 이르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6)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사의 서너 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모든 사로잡은 자를 끌어 에돔에 붙였음이라 

(7) 내가 가사 성에 불을 보내리니 그 궁궐들을 사르리라 (8) 내가 또 아스돗에서 그 거민과 아스글론에서 홀 잡은 자를 끊고 또 손을 돌이켜 에그론을 치리니 블레셋의 남아 있는 자가 멸망하리라 이는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두로의 서너 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그 형제의 계약을 기억지 아니하고 모든 사로잡은 자를 에돔에 붙였음이라 (10) 내가 두로 성에 불을 보내리니 그 궁궐들을 사르리라 (11)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에돔의 서너 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가 칼로 그 형제를 쫓아가며 긍휼을 버리며 노가 항상 맹렬하며 분을 끝없이 품었음이라

 (12) 내가 데만에 불을 보내리니 보스라의 궁궐들을 사르리라 (1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암몬 자손의 서너 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자기 지경을 넓히고자 하여 길르앗의 아이 밴 여인의 배를 갈랐음이니라 (14) 내가 랍바 성에 불을 놓아 그 궁궐들을 사르되 전쟁의 날에 외침과 회리바람 날에 폭풍으로 할 것이며 (15) 저희의 왕은 그 방백들과 함께 사로잡혀 가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2:1)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모압의 서너 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가 에돔 왕의 뼈를 불살라 회를 만들었음이라 (2) 내가 모압에 불을 보내리니 그리욧 궁궐들을 사르리라 모압이 요란함과 외침과 나팔 소리 중에서 죽을 것이라 (3) 내가 그 중에서 재판장을 멸하며 방백들을 저와 함께 죽이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4)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유다의 서너 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여호와의 율법을 멸시하며 그 율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그 열조의 따라가던 거짓 것에 미혹하였음이라 (5) 내가 유다에 불을 보내리니 예루살렘의 궁궐들을 사르리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설교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설교는 교훈적인 말씀을 듣고 마음을 수양하는 것입니까? 내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위로 받는 시간입니까? 일주일을 이길 수 있는 힘을 공급받는 시간입니까? 아니면 우리에게 임할지도 모르는 악과 저주를 막고 축복을 받는 시간입니까? 이 모든 것은 설교의 효과는 될 수 있을지언정 설교의 정의는 아닙니다. 설교는 곧 하나님 말씀의 선포입니다. 오늘의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설교의 기적은 인간의 입술을 통해서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된다는 사실입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의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말씀이 곧 설교의 정의입니다. 우주보다도 더 크시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 예수라는 인간 육신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제는 설교자라는 인간의 입술을 통해서 자신의 뜻을 계시하십니다. 

우리가 이런 사실을 진정으로 인정한다면 이 강단이 얼마나 엄숙하고 거룩한 현장인지 우리는 두려워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시내 산 앞에 서 있습니다. 지진과 불과 빽빽한 구름과 천둥과 큰 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말씀하시는 하나님, 바로 그 앞에 서서 두려워 벌벌 떨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을 연상해 보십시오. 바로 지금이 그 순간입니다. 그러므로 한가하게 팔짱을 끼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습니다.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서서 ‘무슨 말씀이든지 말씀하옵소서. 순종하겠습니다.’ 하는 자세로 듣는 것이 설교를 듣는 바른 태도입니다. 

이런 사실에 비추어 볼 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있는 설교자는 얼마나 더 긴장해야 할 것입니까?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중개하는 대언자로 서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설교 강단에서 자기 경험이나 잡다한 개인 이야기나 하거나, 자기 사상이나 이념을 강변하거나, 우스개소리나 하고 세상적인 교훈과 지식을 전하거나, 자기 욕심이나 그 공동체의 욕심을 위해 설교를 사적인 용도로 사용하거나, 전혀 기도나 성령의 임재 없이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자들은 하나님 앞에 엄청난 죄를 범하고 있다 할 것입니다. 이사야 6장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뵙고 그 입술을 가리며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사6:5) 라는 탄식이 우리 설교자들의 가장 중요한 죄의 고백이 될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설교자들이 그러했습니다. 아모스의 메시지는 하나같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로 시작하고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로 마칩니다. 오늘 읽은 다메섹, 가사, 두로, 에돔, 모압, 암몬, 유다를 향한 7개의 신탁이 모두 이렇게 시작하고 이렇게 마칩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이나 자신의 판단을 전하지 않습니다. 철저히 하나님의 뜻만을 전하고 있습니다. 

선지자나 설교자의 권위는 그가 가진 학벌이나 학식이나 인간적인 매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철저히 하나님의 권위에서 비롯되고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전하는 데서 나옵니다. 듣는 사람도 인간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입술을 통해서 나오는 하나님 말씀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자는 마치 왕의 칙사나 대사와 같다 할 것입니다. 왕의 칙사가 오면 모두가 마치 왕을 본 것처럼 그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칙사를 보는 것이 아니라 왕을 본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칙사도 마치 왕처럼 행세합니다. 그는 자신의 권위가 아니라 왕의 권위로 왕의 명령을 수행하기 때문입니다.   

서너 가지 죄로 인하여

아모스는 이스라엘을 대하여 예언했던 선지자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먼저 이스라엘 주변의 일곱 나라에 대한 예언을 먼저 선포합니다. 이 일곱 나라는 이스라엘을 둘러싸고 있던 나라들입니다. 아모스는 주변 나라의 죄악과 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외치면서 그 핵심인 이스라엘을 향하여 접근해 갑니다. 마치 그 주변부로부터 시작하여 점점 안으로 조여 들어감으로써 이스라엘을 더 이상 옴짝달싹 못하게 하려는 수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소용돌이가 안으로 몰아치는 듯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수사적 기교만은 아닙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하나님의 기대가 무엇인지 깨닫게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역사의 하나님이십니다. 내 개인의 문제, 내 상한 감정의 문제, 나의 거룩에, 교회의 선교와 부흥에만 관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 분은 역사에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기를 원하시는 역사의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교회 안에만 갇힌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은 온 우주와 역사를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정의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에만 정의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 모든 나라가 정의롭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을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만드신 모든 피조물들을 사랑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만을 사랑하고 이스라엘만을 다스리신다는 편견을 깨뜨리고 있는 것으로 대표적인 선지서가 바로 요나서 말씀입니다. 니느웨에 악독이 가득 찼고 곧 심판이 임박했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요나는 다시스로 달아납니다. 이스라엘의 원수였던 앗수르가 죄 가운데서 그대로 망하기를 원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 갇히게 되고 결국 돌이켜 니느웨에 가서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망하게 될 것이라 외칩니다. 그런데 이 회개의 외침을 듣고 니느웨 왕으로부터 짐승까지 금식하며 회개하여 심판을 면하게 됩니다. 이 모습을 보고 화가 난 요나가 박 넝쿨 아래서 하나님께서 정말 니느웨를 망하지 않게 하시는가 지켜보겠다고 하며 앉아 있습니다. 그런데 벌레가 그 박 넝쿨을 다 먹어버리는 바람에 햇볕을 그대로 받게 된 요나가 죽을 지경이 되자 자기를 차라리 죽여 달라고 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욘4:10-11) 하나님은 그 해와 비를 선인이나 악인이나 모두에게 내리시는 분이십니다. 모두가 구원받기를 원하고 모두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사시기를 원하십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자기 민족만을 위하신다는 생각을 깨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하나님을 교회의 하나님으로만 가두어두고 있지나 않습니까? 교회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동일하게 세상도 사랑하십니다. 교회가 거룩하고 바르게 살기를 원하시는 것처럼 세상 또한 그러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선교학적으로는 ‘하나님의 선교’ 개념이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선교학에서 기존의 순서는 하나님 - 교회 - 세계 이런 순이었습니다. 선교의 관심은 교회에 있고 교회로 사람을 모으는 것에 그 목표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교 신학에서는 하나님 - 세계 - 교회로 그 순서가 바뀝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세계에 있고 교회는 이 하나님의 관심을 돕는 기관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계가 정의롭고 평화가 이루어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하기를 원합니다. 교회는 이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도록 힘쓰는 것이 그 본질입니다.

아모스는 일곱 나라의 죄악을 열거합니다. 그들의 서너 가지 죄 때문에 그렇다고 합니다. 서너 가지라고 하는 것은 많다는 의미이거나, 셋과 넷을 합해서 일곱이 되니 완전한 죄의 수자를 의미합니다. 아모스는 가득 찬 죄악들 중에서 각 나라마다 한 가지 죄악들만 언급합니다. 많지만 대표적인 한 가지만 밝힌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고질적으로 괴롭혔던 아람의 다메섹에 대해서는 철 타작기로 타작하듯 길르앗을 압박하였다고 죄를 묻습니다. 

요즘 식으로 따지면 불도저와 탱크로 사람들을 깔아뭉갠 것과 같은 잔인함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길르앗은 요단강 동편의 이스라엘 땅입니다. 이곳을 정복하고는 그 주민들을 잔인하게 몰살시킨 것입니다. 블레셋의 중심도시인 가사에 대해서는 그들이 사로잡힌 포로를 에돔에 팔아넘긴 비인도적인 행위에 대해서 죄를 묻습니다. 두로는 형제의 계약을 파기하고 역시 에돔에 사로잡힌 자들을 팔아넘긴 행위에 대해 죄를 묻습니다. 서로 맺은 형제 관계를 파기하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은 엄한 책임을 물은 것입니다.

에돔은 항상 그 형제를 괴롭히며 분노를 품은 것에 대해서 고발합니다. 여기서 형제는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에돔은 야곱의 형인 에서의 후손들입니다. 형제 관계인데도 불구하고 계속 다투고 싸운 것에 대해 하나님은 책임을 묻습니다. 암몬은 자기 지경을 넓히고자 아이 밴 여인의 배를 가른 정말 야만적인 행위에 대해서 고발합니다. 모압은 에돔 왕의 뼈를 불살라서 회를 만든 죄를 묻습니다. 중근동에서는 시신을 훼손하는 것을 금기시여깁니다. 시신이 잘 묻혀야 지하세계에서 편안히 영면할 수 있다는 사고입니다. 그러니 모압의 죄는 이미 죽은 자를 모욕하는 그런 죄였습니다.

이상의 여섯 나라의 죄들을 보면 상식적이거나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한 죄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차원적인 윤리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최소한도 계약 맺은 것 잘 지키고, 포로들에게 예우를 지키고, 정복했다고 해서 잔인하게 대해서는 안 된다는 정도입니다. 고대사회에서 전쟁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승자와 패자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성을 파괴할 정도로 잔인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승자가 잔인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과거도 그렇게 현대사도 그렇고, 승자가 패자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서 얼마나 잔인한지 모릅니다. 

히틀러는 6백만의 유태인을 학살하여 그 흔적을 지우려 하였습니다. 유고슬라비아에서는 세르비아계가 알바니아 계를 향하여 인종청소라는 끔찍한 만행이 벌어졌습니다. 르완다에서는 민족이 다르다고 하여 후투족과 투치족 사이에 근 백만 명이 넘는 사람을 죽고 죽이는 끔찍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중국은 티벳이라는 나라를 지우기 위해서 티벳 주민들을 다른 곳으로 이전 시키고 그곳에 자기 민족을 이주시키는 정책을 벌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패자의 눈물과 한숨, 분노의 소리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소리를 외면하면 언젠가는 하나님은 그에 대해 대가를 물으실 것입니다. 승자가 패자에 대해서 아량을 베풀며 인도주의적인 모습을 보이면 평화라는 선물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억압하고 모욕을 주게 되면 저항이 끝이 없고 결국 자기들도 동일한 모욕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승자가 패자에게 인간적인 존중과 아량을 베풀어 화합과 발전의 길을 열었던 것이 바로 미국의 남북전쟁이라 생각합니다. 남북전쟁은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미군들이 죽었던 전쟁입니다. 2차 세계 대전이 큰 전쟁이라고 하지만 그때 죽었던 미군 전사자가 약 39만 명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남북전쟁 당시의 전사자는 약 65만 명에 이릅니다. 19세기의 재래식 무기의 성능에 비하면 엄청난 희생이었습니다. 이 정도 사람이 죽었다면 승리한 북군은 남군에게 그 책임을 물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 중심에는 링컨이 있었고 승자인 링컨의 패자에 대한 배려와 화합 정책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미국처럼 강고한 연방제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대통령 재선에 성공하고 행한 그의 취임사에서는 그 정신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이 취임사는 1865년 3월 4일에 있었고, 그로부터 약 한 달 후인 4월 9일에는 남군이 항복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취임사는 전쟁의 승기가 완전히 북군에게 기울어진 그 때에 행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자신이 승리했다느니 북군이 남군보다 더 정의롭다느니 하는 그런 언급은 전혀 없고 화해의 메시지로 가득합니다. 그 취임사의 일부는 다음과 같습니다.

“......양측은 모두 같은 성경을 읽고 같은 하나님에게 기도하며 서로 상대방을 응징하는 데 하나님의 도움이 있기를 간청하고 있습니다......그러나 우리가 심판받지 않기 위해서 상대를 심판하지 않도록 합시다. 남북 어느 쪽의 기도도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어느 쪽도 신의 충분한 응답을 받지 못했습니다...... 누구에게도 원한 갖지 말고, 모든 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더러 보게 하신 그 정의로움에 대한 굳은 확신을 가지고...... 이 나라의 상처를 꿰매기 위해, 이 싸움의 부담을 짊어져야 하는 사람과 그의 미망인과 고아가 된 그의 아이를 돌보고 우리들 사이의, 그리고 모든 나라들과의 정의롭고 영원한 평화를 이루는데 도움이 될 모든 일을 다 하기 위해 매진합시다."

1865년 4월 9일, 패배한 남군의 리 장군이 승리한 북군의 그랜트 장군에게 항복문서에 서명하기 위해 애퍼머톡스 코트하우스에 나타납니다. 보통 패장에게는 온갖 수치를 안겨주고 항복에 대한 대가로 엄청난 배상들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리 장군은 북군으로부터 장군으로서의 예우를 다 받았으며 항복조건도 너무나 간단했습니다. 단지 연방정부에 대해 무력으로 대항하지 않겠다는 서약 단 하나였습니다. 리 장군은 패장의 표시로 자신의 칼을 승장 그랜트에게 바치려고 했으나 그랜트는 그것을 거부했습니다. 북군이 승리하던 날 축포조차 쏘지 않았습니다. 

기쁨이나 승자의 오만이 없었던 것입니다.  남북전쟁 후 반란국 총사령관이었던 리 장군과  남부 동맹의 대통령인 반란 수괴 제퍼슨 데이비스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놀랍게도 리 장군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은 채 고향 버지니아로 돌아가 이후 대학총장으로 봉직하면서 평온한 여생을 보냈다고 합니다. 제퍼슨 데이비스는 체포 구금되기는 했으나 단지 2년 의 감옥살이 후 석방되었고  그 역시 보험회사 사장까지 역임하며 남은 생을 조용히 살았다고 합니다.

이에 비하면 우리나라 6.25전쟁은 승자와 패자도 없이 상대방을 향하여 얼마나 잔학한 짓을 했는지 모릅니다. 하다못해 선거라는 행위를 통해서도 승리한 자가 패배한 자의 권리를 얼마나 무시하고 모욕을 주는 일이 자주 발생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는 화합을 이룰 수 없습니다. 분노와 원한이 쌓이고 결국 자신이 동일하게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방식이 옳습니다. 하나님은 승자가 패자에 대해서 잔인하게 대하시는 것을 용서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심판하시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나라가 평화롭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가난한 자, 약자, 패자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이 정의에 귀를 기울일 때 나라와 민족이 평안합니다.  

불을 보내리니

그런데 이웃 여섯 나라의 죄를 물으실 때와 유다에 대해서 죄를 물으실 때는 그 기준이 달라집니다. 유다에 대해서는 한 가지 기준이 더 추가됩니다. 4절입니다. “이는 저희가 여호와의 율법을 멸시하며 그 율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유다는 일반적인 죄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은 죄에 대해서 묻습니다. 이것은 많이 받은 자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세상은 몰라서 그렇지만 유다는 하나님의 확실한 뜻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죄를 저지른다는 것은 그만큼 더 무거운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저는 교회가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마지막 날 더 가혹한 하나님의 심판 기준에 의해서 판단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몰랐기 때문에 어쩔 수 없지만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죄는 더 큽니다.

결국 이 일곱 나라가 행한 불의에 대해서 하나님은 심판을 내립니다. 오늘 말씀에서 일곱 나라에 대해서 하나님은 불을 보내시겠다고 말씀합니다(1:4,7,10,12,14, 2:2,5). 불은 곧 전쟁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잔인한 행위를 한 그들에 대해서 동일하게 전쟁을 통해서 심판하시겠다고 선언합니다. 불은 먼저 그 지도자들이 거하는 궁궐에 임합니다. 이는 누구보다도 왕들과 지도자들의 잘못이 더 큼을 알기 때문입니다. 아모스의 예언대로 이 일곱 나라는 그로부터 약 3,40년 후에 앗수르라는 나라의 침입에 의해서 대부분 나라가 초토화되는 심판을 당합니다.

하나님은 불의, 단지 개인의 불의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나라의 불의에 대해서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나라에 죄가 많아서는 안 됩니다. 이 죄 때문에 나라가 망하게 됩니다. 신앙인들은 그래서 역사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역사의식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깨닫는 의식입니다. 역사에 죄가 많아지면 망하고 의와 의인들이 많아지면 흥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의 역사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잠언서 14장 3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의는 나라로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느니라” 사회적 불의를 분명히 보고 그에 대해서 지적했던 사람들이 바로 선지자들입니다. 선지자들은 그렇게 불의가 쌓여 가면 결국 나라가 망한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았던 사람들입니다. 오늘날의 목회자나 신앙인들도 그런 눈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나라의 불의가 쌓이면 나라가 망하고, 개인의 불의가 쌓이면 그 개인이 망합니다.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죄의 삯은 사망”(롬6:23)입니다. 마지막 날 심판의 유황불로 하나님은 우리의 죄에 대해서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심판의 불을 내리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짓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우리 앞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가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를 모든 죄에서 용서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쏟아지는 하나님의 심판의 불을 온 몸으로 막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가 마음껏 죄를 저질러도 좋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는 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절망하지 않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용서의 힘을 덧입어 다시 죄와의 싸움을 시작합니다.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의 죄 때문에 매여 살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용서의 은혜는 나라와 민족 위에도 임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덧입어 나라를 새롭게 하고 죄에서 벗어나며 정의를 구하려 할 때 하나님께서는 이 땅을 고치실 것입니다. 이 땅 위에 평화와 안정과 풍성한 결실의 은혜를 베푸실 것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 민족 위에 가득 부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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