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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의 삶 (마 6: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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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삶 (마 6:19~34)

  
보험회사에 근무하는 베벌리 쉐아(Shea)라는 한 월급쟁이가 있었습니다. 
1930년대 당시 미국은 극심한 불황으로 회사마다 혹독한 구조조정과 임금삭감에 시달렸습니다. 
어느 주일날 아침, 그는 찬송가를 연습하기 위해 피아노 앞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회사문제로 인해 좀처럼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셰아는 건반 위에서 조그마한 종이쪽지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그것은 어머니 레아 밀러(Rhea Miller)가  괴로워하는 아들을 위해 적어놓은 시였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이 삶의 우선순위를 분명하게 정하길 원했습니다. 
쉐아는 이 시를 읽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시에 곡을 붙여 찬송을 만들었습니다. 
이 곡이 바로 그 유명한 찬송가 102장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입니다. 
삶의 우선 순위 - 특히 그리스도인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말입니다.

마5:-7장 까지를 예수님의 산상수훈이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산상 에 데리고 가서 가르쳐 주신 말씀인데 이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 말씀인지 산상보훈이라고도 합니다. 
산상보훈은 한마디로 그리스도인의 생활원리 즉  [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 ]는 내용입니다.
그러면서도 산상보훈은 그 시작이 말해주듯이 복 있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 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삶의 비결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된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생활원리를 마음에 품고 삶의 우선순위에 먼저 눈이 뜨여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인의 생활 원리는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것은 말씀에 순종과 기도생활에서 잘 나타난다고 합니다.

2) 인간관계입니다.
   그런데 교인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그래도 노력합니다만 인간관계는 조금 등한히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5:23절에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하면서 사람과의 관계를 강조합니다.
  인간관계는 5:39-41절에 잘 요약되어 나타납니다.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되며」               
 용서하는 관용의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너를 송사하여 속 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인간의 한계성을 넘어서는 사랑의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봉사의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3) 물질과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인간관계는 그래도 노력하는 편입니다만 물질관계에서는 그의 대부분 교인들이 성경의 원리를 따르지 않고 자기가 더 잘 알아서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물질관이 바로 되어져야만 
그리스도인으로서 복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물질관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산상보훈에서 나의 물질관이 확립되어 복된 삶을 살아가는데 자기원칙이 있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왜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합니까?

1. 왜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할까요?(19-21절)

19-20절에서
[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 두라 ] 고 합니다.
왜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할까요?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는 말이 무슨 말이겠습니까?
이 말은 소망을 살아계신 하나님께 두라는 말입니다.  사람은 소망이 있는 곳에 마음이 그곳에 다 가 있습니다. 21절 보세요. [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느니라 ] 
사람은 소망이 잇는 곳에 마음이 집중 되어 있고  따라서 시간도 그기에 다 투자합니다.
나아가 물질도 그기에 다 쌓아놓습니다. 바울도 딤전4:10절에 진정 경건한 성도는 소망을 살아계신 하나님께 둔 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이 땅에 그 무엇에 소망을 두고 살면 보물을 땅에 쌓아두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보물을 땅에 쌓아두면 안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땅에 쌓아두면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도적질 해간다는 것입니다.
꼭 도둑이라 해서 밤손님만 도둑이 아니라 질병, 재난, 불의의 사고, 실패 등이 재물을 앗아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늘에다가 보물을 쌓으려면 뭐니 뭐니 해도 헌금생활을 바로 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보물, 귀한 재물 가운데서 얼마를 구별해서 교회 헌금함에 넣는 것이 헌금입니다. 따라서 헌금은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헌금만큼 우리의 신앙인격을 정확하게 평가하는 것이 없습니다. 

헌금의 기본은 십일조입니다. 
특전대원 출신 목사님이 십일조는<10m 점프대>다 라고 비유합니다.
군인들 중에서 낙하산을 타는 특전 대원이 있습니다. 
비행기에서 낙하산을 타고 뛰어 내리는 사람들, 보기에는 아주 낭만적입니다. 
그런데 이 비행기에서 낙하산을 타고 뛰어 내리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지상에서 피 눈물 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사람이 제일 공포를 느끼는 높이가 11미터라고 합니다. 

그래서 특전대원들을 훈련시키는 곳에는 10미터 높이의 점프대가 있습니다. 
10미터 짜리 점프대 위에 딱 서면 눈 높이가 11미터가 되는 것입니다. 
내려다보면 아찔하죠? 거기서 계속 뛰어 내리는 것입니다. 
무섭지 아니할 때까지 뛰어 내리는 것입니다. 
10미터 점프대가 두렵지 않고 맘대로 뛰어 내릴 수 있으면 그 다음에는 비행기에서도 뛰어 내립니다. 
왜냐하면 그 이상 아무리 높아도 무섭기는 똑같으니까요. 
어디든지 뛰어내리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일조가 무엇이냐? 면 `10미터 점프대`입니다. 
거기서 뛰면 비행기에서도 뛸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십일조에서 겁 없이 뛰어 내릴 수만 있다면 
그 다음에 헌금에 대해서는 자유 합니다. 
얼마든지 하나님께 드릴 수 있고 하나님 나라에 쌓아 놓을 수가 있습니다.
담임목사로서 권면합니다.
인생을 허무하게 사시렵니까? 흐뭇하게 사시렵니까?
흐뭇하게 살기를 원한다면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2. 우리가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22-24절)

1) 눈이 어두워서 그렇습니다. 22-23절 
[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 
[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 
눈이 어둡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영안 즉 믿음의 눈이 뜨여지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마음의 눈이 어두워지면 하나님보다 돈이 더 크게 보입니다. 
물질에 욕심이 생겨 눈이 어두워지기 시작하면           
double vision 이 되어 사물을 바로 분간할 수 없습니다.
double vision 아시죠?  T. V 화면에 물체가 두개로 보이는 것 있죠? 
그러니 잘 분간할 수 없습니다. 마음의 눈이 침침해져 사물을 바로 분간할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의 특징은 자기가 염려하는 것입니다. 염려하게 되면 마음이 갈라집니다.
그러니 성도가 물질에 집착하게 되면 염려가 생겨  하나님과 물질에 마음이 갈라집니다.
마음이 물질에 빼앗깁니다. 그러니 믿음의 눈이 흐려지는 것입니다.

몸이 아무리 건강해도 온전히 행동하려면 눈이 밝아야하듯이, 영적으로 하늘에 보물을 쌓으며 투자하는 삶을 살려면 영적인 눈이 밝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청춘과 생명을 불살라 보물을 하늘에 쌓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나라와 담을 쌓고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죄악 된 이 세상에서 살면서 `영적 눈`이 흐르려지지 않도록 늘 주의해야 합니다.  

그리고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지 못하는 이유가                     
2) 두 주인을 섬기려는 약은 마음 때문입니다.
두 마리 토끼를 다 쫓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24절 [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제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
여기에 재물이란 말 - Mammon 이라 하여 본래는 <신뢰하다>란 말인데
돈만 믿고 사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래서 Mammonism 하면 배금주의를 말합니다.                    
맘몬은 현대인의 우상인 것입니다.  현대인에게는 돈이 우상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안 믿는 것은 아닌데 신앙생활 보다 사업이 더 바쁜 교인 
예수 안 믿는 것은 아닌데 예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는 교인을 두고 말합니다.
그럼 물질하고 담 쌓고 어떻게 세상 살아가느냐?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도 물질하고 담 쌓아라 고 하지 않습니다. 물질에 노예가 되지 마라. 돈을 사랑하지 마라.
하나님보다 돈이 더 크게 보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돈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어떤 경제학자는 한나라의 피와 같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몸에 피가 흘러야 살듯이 국가에 돈이 흘러야 나라가 산다는 것입니다. 또 많은 사람이 `인생을 행복하게 만드는 확실한 수단`으로 생각을 합니다.      
`힘을 과시할 수 있는 막강한 무기`로 생각을 합니다.         
 또 `안전을 지켜주는 확실한 방패막이`로 믿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나의 생명도 나의 건강까지도 보장해 줄 수 있는  절대적인 존재`로 생각합니다. 
이렇게 돈을 높이니 자연히 돈의 횡포가 심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얼마나 그 세력이 무서운지요. 돈의 힘 앞에 국가도 무릎을 꿇고 마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돈의 위세 앞에서는  法도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을 우리는 날마다 보고 삽니다. 
돈은 이미 화폐라고 하는 가치를, 그 영역을 뛰어넘은 지가 오랩니다. 
이미 월권행사를 한지가 오랩니다.  돈은 우리의 정신까지 지배를 합니다. 
심지어 우리의 가치관까지 마음대로 뒤집어 놓습니다. 
우리의 전인격을 파괴하고도 남을 수 있고                
이 세계의 도덕성을 완전히 무너뜨릴 수 있는 막강한 힘을 가진 세력으로 지금 우리 앞에 서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인간과 돈의 밀접한 관계를 꿰뚫어 보신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충성은 한 분에게 충성해야지 두 사람에게 똑같이 충성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에게 가장 큰 비극이 무엇입니까?  돈이 하나님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특별히 예수 믿는 사람에게 돈이 하나님으로 보이면 영적으로 최악의 상태에 빠집니다. 
돈은 사이비 하나님 노릇을 합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은 하나님 하고 돈 하고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왜 물질에 대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까?

3. 예수님은 왜 물질에 대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까?(25-29절)

25절에 예수님은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  
하십니다만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딜레마,  곤란한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1.자고나면 끼니 걱정해야하는 제자들에게 먹는 것, 입는 것, 염려하지 말라    
하니 예수님 참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소리 하신다고 하실 것입니다.
2. 또 어떤 분은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먹는 문제 입는 문제 가지고 염려하지 말라 하느냐?
그렇지요 지금 여기 있는 성도들 중에 먹는 문제 때문에     
염려하는 교인 있긴 합니다만 얼마나 되겠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열심히 일하면 이 땅에서는  먹고사는 문제는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하신 이 말씀은 가난한 자에게만 하신 말씀만이 아니요
또 돈 있다고 염려가 없다는 말씀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 아무리 먹고 살 수 없는 상황이고 염려를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도 
  염려하지 말라 ] 합니다.

왜? 염려하지 말라 합니까?
1) 첫째는 신분상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두 가지 비유를 듭니다.
(1) 26절 공중 나는 새를 보라  
(2) 28절 들의 백합화를 보라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염려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7:11절 [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  
염려할 시간에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해라고 합니다.

그러니 신분상 맞게 삽시다. 손에 성경책 들고 교회 가는 것,  교회 와서 손들고 찬송하고 무릎 꿇고 기도하는 것 보고  세상 사람들이 매력을 느낄 수 있느냐?
예수 믿으니 저러겠지 하고 별로 매력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들이 감동을 받을 수 있고 예수 믿는 사람 정말 다르구나 할 수 있는 것
그들이 주저앉을 자리에서 우리는 일어서는 것이고 그들이  염려하는 자리에서 우리는 염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2) 두번째는 염려는 백해무익이기 때문입니다.                      
27절 [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한다고 키를 한자나 더할 수 있느냐? ]                
더 할 수 없다는 말이지요 그러니 염려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되려 25절에 [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 
이 말은 염려하면 목숨만 상하고 몸만 상한다고 합니다.
염려하면 제 명데로 못산다는 것입니다.                          
염려는 영육간에 백해무익 합니다.                                 
염려 잘하는 사람치고 믿음 좋은 사람 있는가 보세요.
눅21:34절 예수님의 재림을 이야기 하면서                  
[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                          
마음이 둔하여지면 신앙이 병들기 마련입니다. 신앙 병들면 결국 삶이 말라지는 것입니다.

염려의 본질을 살펴보면  염려는 <물어 뜯는다 숨통을 죈다>는 뜻입니다.
마치 동물의 왕국에 사자가 얼룩말이나 사슴의 목덜미를 물어 숨통을 죄이지요.
염려는 이와 같은 것입니다. 염려하면 우리의 신앙이 맥을 못춥니다.
염려는 백해무익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염려하는 것 그것 백해무익이야 
그러니 너희는 마음 푹 놓아라. 염려 붙들어 매어 놓아라.

예수님께서 이렇게 물질 대문에 염려하지 말라고 하는데도
우리가 염려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4. 우리가 물질에 대해 염려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30-32절)

1) 믿음이 적기 때문입니다.
30절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 뒤집어 생각해보면 
염려하지 않고 걱정하지 않는 비결은 믿음만 있으면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이 염려 뚝! 하면 뚝! 하는 것이 신앙인 것입니다.
32절 [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 아멘~!
사도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빌4:6-7절
[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다면 그 분의 약속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약속이 무엇입니까?

5. 성경이 제시하는 성도의 최우선인 삶이 무엇이라 합니까?(33-34절)

33절 [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 
이것이 성도의 바른 물질관입니다. 현대인들 보너스 참 좋아 하지요.
하나님도 우리에게 보너스 주시기를 참 좋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 예수님 닮아가고 예수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이 땅에 교회를 세우고  복음전파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통해 전도하고 선교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이것이 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제시한 그리스도인의 최우선적인 삶의 목표입니다.
성경이 제시한 삶의 목표를 자신의 삶의 목표로 삼은 사람 하나님은 반드시 그를 들어 사용하십니다.
 
이제 막 신부 입장의 웨딩마치가 울리고 있는데  기다리던 신랑이 갑자기 밖으로 달아났습니다. 
식장은 소란해졌고 주례 목사는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축하객들의 형편도 말이 아니었습니다. 
몇몇은 일어나 자리를 뜨고 신부는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약 30분이 지난 후였습니다. 헐떡거리며 되돌아온 신랑의 예복은 검댕과 물기로 젖어 있었습니다. 
`목사님 죄송합니다. 주례를 진행해 주십시오`.
 `아니, 신랑은 어딜 갔다 오는 길인가?` 목사님 물었습니다.
“네 목사님. 저는 소방대원입니다. 
 신랑 입장과 동시에 화재 싸이렌이 들리는데 가만히 멈춰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는 다 진화가 되었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축하객들은 모두 박수를 보냈고 칭찬해마지 않았습니다. 
조금은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이야기이지만 
이 소방대원의 마음에는 우선순위가 확실하게 세워져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도 우리의 마음속에 먼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일에 대한 대한 우선 순위가 
이 소방수만큼만 확실하게 세워져 있다면 아마도 하늘나라의 일은 더 쉽게 전파되게 될 것이고
나의 삶에 그토록 내가 짝사랑하던 물질도 더 해 주실 줄 믿습니다.
 
이것은 마땅히 우리가 해야 할 본분입니다. 하나님은 너희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때          
너희가 욕심을 부리기까지 모으려고 하는 재물  심지어 몸을 상해가며 까지 염려하는 돈 문제
그런 것 다 보너스로 주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물질을 복음전파를 위해 사용되어질 때     
이 모든 것을 더해 주신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보물을 천국에 쌓아두는 것입니다.                          
가장 안전한 은행은 천국은행입니다.  그기는 사소한 오차도 있을 수 없는 곳입니다.

신학자 <죠지 스위팅>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인생 마지막 날 󰡐 내가 얼마나 벌었느냐? 󰡑
 이것은 하나도 중요한 질문이 될 수 없다, 그 때 중요한 질문이 있다면 
‘나는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을 위하여 주님께 드렸느냐?’ 가 중요한 질문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 즉 복음전파를 위해 드려지는 삶이               
우선적이 되어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벼랑 끝에 서는 용기`라는 <로렌 커닝햄>의 책이 있습니다. 
<로렌 커닝햄>은 이 책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에 대한 순종의 결과를   `카렌 라페티`의 예를 통해 이야기합니다. 
<카렌 라페티>는 잘 나가는 나이트클럽에 출연했었는데, 
주님이 그녀를 전임사역자로 부르셨습니다. 
카렌은 그 곳에서 계속 일하면 돈을 많이 벌게 될 것을 알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일자리를 그만 두면 무엇으로 먹고 살까?
남캘리포니아 갈보리 예배당에서 하는 성경공부에 참석한  카렌의 머릿속에 마6장33절이 떠올랐습니다. 그 구절이 카렌의 마음에 강하게 와 닿았습니다. 
카렌은 기타를 집어들었습니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는 가사에 맞추어 곡을 섰습니다. 
지금 카렌은 암스테르담에서 선고사로 살고 있습니다. 
그때 지은 곡은 테이프와 악보로 나왔고 그 곡에 대한 로열티는 지금까지 카렌의 선교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결론>                                                       
성도는 물질관이 분명할 때 물질적인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우리에게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고 가르쳐 줍니다. 욕심으로 마음의 눈이 어두워지면 하나님 보다 물질이 더 크게 보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둘 수 없습니다.그리고 인간적인 생각으로  하나님도 섬기고 맘몬도 섬기면 되지 할런지 모르지만 하나님과 맘몬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럼 돈없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나? 이렇게 내일이 염려될지 모르지만 염려는 백해무익이야
그리고 염려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우리에게 신분상 맞지 않는 일이니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
너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먼저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분명한 삶의 목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제시한 삶의 목표를 나의 삶의 목표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나를 붙들어 들어 쓰시며
이 모든 것을 나의 삶에 넘치도록 더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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