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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시험을 잘치기 위한 준비 (막 4:3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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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을 잘치기 위한 준비 (막 4:35~41)


누구나 좋은 사람과는 함께 있고 싶어 하고 성격이 사나운 사람과는 함께 지내기를 한사코 싫어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좋은 사람 곁에서보다도 성격이 사나운 사람 곁에서 겸손의 덕을 닦기가 훨씬 더 낫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까다로운 사람 없이 우리가 어떻게 참아야 할 일이 있고. 남에게 시달리는 일 없이 우리가 어떻게 인내의 덕을 닦을 수 있겠습니까? 또한 나의 일을 가로막는 사람 없이 어떻게 용서하는 사랑을 배울 수 있고, 나의 뜻을 반대하는 사람 없이 어떻게 인종의 아름다운 덕을 배울 수 있겠습니까? 

나에게 부당한 명령을 하는 사람 없이 어떻게 자기 부정의 연단을 받을 기회가 주어지고, 나에게 빈번히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 없이 어떻게 남에게 자비를 베풀 기회가 주어지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자기 마음에 맞는 사람에게서 보다도 자기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에게서 더 훌륭한 덕을 닦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그런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일을 절대로 싫어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누구 때문에 힘들어 한다는 것은 곧 나 때문에 힘들어 하는 사람도 있다는 뜻입니다. 사실은 누가 어때서 문제가 아니라 그것은 문제로 받아들이는 내 자신이 문제라는 생각을 먼저 해 보아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로 내 자신이 주님 앞에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이요 그런 나를 주님이 감싸 안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먼저 그 사랑을 받았으면서도 요나처럼 나는 그런 사랑을 내가 문제로 여기는 그 사람이 받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주님처럼 저들을 용서하여 달라고 하던 스데반의 사랑이 오늘 내게도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는지요? 생각해 보면 겸손은 여러 사람들 속에서 수많은 괴로움과 시달림을 받으면서 다듬어져 나오는 보석 같은 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도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같이 사람이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잠 27:17)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우리에게 닥쳐오는 시련들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를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예나 지금이나 이 세상에는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시련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일 년을 나눠서 생각해 보아도 사시사철이 있습니다. 날씨도 추운 날과 더운 날 따뜻한 날들이 이어집니다. 같은 햇볕인데도 따뜻하고 포근하게 느껴질 때도 있고 짜증나도록 뜨겁게 타오를 때도 있습니다. 반면에 그 햇빛이 마냥 그립기만한 장마철도 있고 비구름으로 가득한 날도 있습니다. 같은 비가 와도 어떤 때는 너무 지겨워 이제 그만 할 때가 있고 너무 반가워서 우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맞으며 뛰어다니고픈 그런 비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주님과 함께 하는 그 길에는 아무런 어려움도 없는 지극히 평안하고 복된 날들만 이어질 것으로 기대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구름 기둥 불기둥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믿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상은 아닙니다. 당연히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형통한 자가 되었으니 그 길이 평안해야 맞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를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광의 나라 복된 나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반드시 거치도록 하는 과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곧 광야입니다. 광야는 버려진 땅처럼 보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온전히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따를 수 있는 훈련 장소가  됩니다. 한발만 잘못 디디면 죽음의 수렁으로 빠져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그 안에 있습니다. 물이 없이는 단 사흘은커녕 하루도 온전히 버티기 힘든 불볕이 그 안에 있습니다. 거기에 살인적인 추위가 밤을 장식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먹을 것이나 많은가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먹을 것을 구한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어렵습니다. 더 큰 문제는 어디까지 가야 광야가 끝날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내자가 필요합니다. 그 안내자는 누구보다도 광야를 잘 아는 분이어야 합니다. 그분이 바로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성령에게 이끌리어 광야로 나가셔서 40일을 금식하시고 그 이후 사탄의 시험과정을 거치셨습니다. 그리고 승리하셨습니다. 그 승리의 비결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있는 시련들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우리로 깨닫게 만드는 귀한 역사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베드로 전서 4장 12절로 13절은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야고보서 1장 2절로 4절은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씀했으며 또한 야고보서 1장 12절은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시험은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약속하신 모든 것을 누리기에 합당한 자로 세우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로 하여금 광야를 통과하게 하실 때 우리만 버려두시는 것이 아니라 친히 하나님께서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인도하신 것처럼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르쳐 주시고 인도하시며 그 능력으로 우리를 사로잡아 주신다는 것을 깨달아 온전히 주님만을 바라보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줍니다. 그러니까 시련은 우리로 하여금 온전히 하나님만을 믿고 따르도록 만드는 훈련장소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보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닷가에서 큰 무리들을 여러 가지 비유로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그들 스스로는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의미합니다. 분명히 예수님과 함께 한 길입니다. 그것도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떠난 길입니다. 그런데 왜 풍랑이 있습니까? 우리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예수님의 말씀 따라 살아가고자 하지만 그런 우리들에게 닥쳐오는 시련들이 있습니다. 어떻게든 벗어나 보려고 몸부림을 치지만 그럴수록 더욱 깊은 수렁으로만 빠져드는 것 같습니다. 

경제적인 문제로 시험을 당하기도 하고 사람과의 관계에서 시험을 당하기도 하며 건강상의 문제로 시험을 당하기도 하고 믿음의 문제로 시험을 당하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은 별 것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을지 몰라도 본인에게는 이것만큼 심각한 것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할 것입니다. 그까짓 것 가지고 그러냐고. 하지만 본인에게는 그것보다 심각한 것은 없습니다. 한데 그런 어려움들이 믿음의 길을 걷기 시작할 때만 생겨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음 안에 든든히 뿌리를 박고 있다고 생각되어질 때도 종종 계속되는 것이라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미 믿음 안에 깊이 뿌리를 박고 주님만을 따르는데 왜 또다시 그런 광야가 또다시 그런 시험이 있단 말입니까?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항상 주님의 은혜를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바울 사도도 너희가 선줄로 생각하면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합니다. 사탄은 할 수만 있으면 믿는 자라도 시험하여 넘어지도록 만들고자 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가 우리에게 닥친 어려움들 가운데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 길이 무엇입니까? 

기억하십시오. 문제 해결의 열쇠는 오직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주님께만 있습니다.
그 험한 풍랑 가운데서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셨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피곤하셨으면 풍랑 가운데서도 이렇게 주무실 수가 있단 말입니까? 그것은 모여드는 무리들을 가르치시며 고치시느라 식사할 겨를도 없으실 정도였기에 육신을 가지신 예수님은 피곤할 수밖에 없었고 그래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가는 그 잠시를 이용해 주무셨지만 우리 성령 하나님께서는 졸지도 주무시지도 아니하시고 우리들 가운데 함께 계신 보혜사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런데 문제는 그동안 풍랑이 일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바다에는 자신이 있는 제자들이 그 가운데는 있었기에 처음에는 조금도 염려하지 않았습니다. 한데 갈수록 풍랑이 더욱 거칠어지기에 이제는 도무지 그들의 힘만으로는 그들의 능력으로는 감당할 길이 없었습니다. 이제는 죽는가 싶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 가운데 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우리들에게 닥쳐오고 있는 그 문제를 내 스스로 해결하려고 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경우도 있겠지만 내가 해결하겠다고 하는 것은 엄청난 착각입니다. 내가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게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닙니다. 한번 우리 마음에 섭섭한 마음이 들기를 시작하면 그건 내 스스로는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한번 믿음이 흔들리면 그건 대책이 없습니다. 어떻게 그가 그럴 수 있어 하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보이는 것도 없습니다. 한번 믿음이 흔들리게 되면 그래서 실망하게 되면 누구의 말도 내 귀에 들려지지를 않습니다. 아니 잠시는 아 이렇게 하면 되겠네 할 때도 있습니다. 빛이 보이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게 마음처럼 되지를 않습니다. 잠시 빛을 본 것도 같은데 그게 내 힘으로는 되지를 않습니다. 용서하고 용납하라고 했지만 그게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닙니다. 한번 상처를 받은 마음이 쉽게 치료가 되지를 않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하는 마음으로부터 시작해서 돌이켜 보면 한 가지 한 가지 모든 것이 그 실망으로 연결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퍼즐 조각을 맞추듯 모든 것이 그렇게만 보입니다. 그리고는 결론을 내립니다. 여기에 무슨 선한 것이 있겠고 여기에 무슨 은혜가 있겠는가 차라리 여기를 떠나 은혜 있는 장소를 찾는 것이 낫지 않겠나? 그 생각도 틀린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건 임시방편일 뿐이고 그렇게 해서 에덴동산과 같이 아름다운 곳을 찾았는데 오히려 거기가 소동 성일 수도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 발걸음을 온전히 하나님이 인도하여 주셔야만 소돔 성도 천국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무엇을 하든지 내 스스로 하려고 하지 말고 먼저 주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여기 제자들이 그렇게 했습니다. 

주님을 깨우며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부르짖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주님께 부르짖을 때 주님은 한 번도 모른 척 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그리고 또 주님이 해결하지 못할 일이란 없습니다. 주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깨우면 됩니다. 시편 기자는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고백하고 있고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문제 해결의 첫 번째 열쇠는 깨어 있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우리의 모든 문제를 아뢰는 것입니다. 보잘 것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라고 해도 그것마저도 주님께 아뢸 때 주님께서는 한 번도 아니라 하시지 아니하시고 세밀하게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그래서 실망한 마음으로 하여금 오히려 더 큰 사랑으로 가득하도록 만들고 힘들고 지친 우리로 하여금 새 힘으로 넘쳐나도록 만드시며 연약한 육신을 강하게 하시고 앞이 보이지 않던 우리들로 하여금 피할 길을 내어 주셔서 능히 감당할 수 있도록 만드시며 만나와 메추라기가 상징하듯이 우리들의 경제 문제도 하나님께서 해결책을 주시어 그 길로 나아가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그러기에 성령으로 말미암는 은혜가 우리 안에 넘쳐야 하고 성령께서 은사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바 지혜와 지식과 명철과 총명으로 가득해야 하고 성령 안에서 사랑으로 시작하여 절제에 이르기까지의 열매들이 내 안에 가득하게 될 때 우리는 진정 하나님이 약속하신 바 큰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상급을 누리게 될 것 것입니다. 한데도 우리는 여전히 나 혼자서 고민하고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아니 어떻게 하든지 그 문제의 핵심을 회피하려고 합니다. 도망하려고만 합니다. 가나안까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왔던 아브라함이 가뭄이 드니까 점점 남방으로 가다가 이윽고 애굽까지 이르는 것처럼 나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 은혜와 믿음과 사랑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나름대로는 이유가 있습니다. 누구 때문에 무엇 때문에 그렇다고 우리는 말합니다. 하지만 요셉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고 요셉이 형통한 자가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요셉은 더 큰 수렁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는데 어떻게 노예로 팔릴 수가 있으며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그래서 그 말씀을 지켰는데 왜 모함을 받아 감옥으로 들어갑니까? 하지만 거기엔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세우기 위한 하나님의 세말한 계획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보디발의 집에서의 노예 생활과 감옥 생활이 요셉에게는 광야였습니다. 

시련의 날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날들이 있었기에 그가 애굽의 총리로 세움 받을 수 있게 되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어떤 어려움이 있고 상처가 있다고 해도 우리는 결코 거기서 도망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아니 실상은 풍랑이 이는 바다 한 가운데서 우리가 도망할 데란 없습니다. 오히려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이미 내 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해결책은 주님께만 있습니다. 해결하실 수 있는 분도 주님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제자들처럼 주님을 깨우며 부르짖어야 합니다. 내게 닥친 이 문제를 나는 해결할 길이 없습니다. 내 육신의 연약함을 나는 이길 수 없습니다. 주님이 나로 하여금 연약함을 이기고 주님의 능력으로 새 힘을 얻게 하옵소서. 주님 인간관계에서 생겨진 이 실망감을 내가 극복할 수가 없습니다. 도무지 용서와 용납이 안 됩니다. 

사랑하고 용납할 수 있도록 나를 도우시고 그를 내 마음에 품을 수 있도록 인도하옵소서. 주님 먹고 살길이 깜깜합니다. 내게도 만나와 메추라기를 허락하여 주시고 먹을 것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옵소서. 이런 부르짖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은 한 번도 우리를 실망시키신 적이 없으신 분입니다. 주님이 일어나 한 마디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인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왜 주무십니까? 아니 그것은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깨우십시오. 

주님께 우리의 문제를 가지고 나아가십시오. 주님께 부르짖으십시오.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는다고 했고 주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무엇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까? 바로 우리의 어려움들을 주님께 부르짖어 아뢰는 것입니다. 내가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부탁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잠들어 있지는 않습니까? 나 혼자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제 다시금 주님의 품에 안기십시오. 주님께 부르짖으십시오. 깨어 일어나십시오. 그래서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심으로 풍랑이 잠잠케 되는 놀라운 역사가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결국 우리가 기억할 것은 오직 믿음뿐입니다.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다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이 누구십니까?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 분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풍랑이 우리들 앞에 불어 닥친다고 해도 그 어떤 어려움이 있다고 해도 주님께서 해결하지 못하실 일이 없습니다. 주님께 못 고칠 질병이 하나도 없으며 주님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를 가지고도 오천 명을 먹이고도 남으신 분입니다. 

누구보다도 우리의 문제를 잘 아시는 분입니다. 그분만이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정확하게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과 인도하심을 따르면 됩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이 찾으시는 믿음입니다. 내 실망한 마음을 주님이 사랑으로 채워주시면 됩니다. 나도 주님을 실망시킨 적이 얼마나 많은지 그런데도 여전히 주님은 나를 감싸 안아주셨습니다. 내가 먼저 받았던 은혜입니다. 그 은혜를 생각하면 됩니다. 그런데 요나처럼 내가 받은 은혜는 귀한데 그 은혜는 다른 사람이 받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주님이 기뻐하시는 마음은 아닙니다. 내가 받은바 은혜를 다른 사람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아니 내가 그렇게 감싸 안아야 됩니다. 그건 내 힘으로가 아니라 주님이 그렇게 내 마음을 지켜주실 때 다시 말해서 성령께서 내 안에 은혜와 사랑으로 채워주시고 깨우쳐 주심으로 말미암아 가능합니다. 

래서 믿음을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찌 무서워하느냐 어찌 믿음이 없느냐는 말씀은 어찌 실망하느냐 어찌 외면하느냐 어찌해서 떠나려 하느냐 어찌해서 포기하려느냐 어찌해서 멈추어 서느냐는 말씀으로 바꾸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암만 생각해도 이건 아냐 이럴 수는 없어. 한데 그게 누구 말입니까? 주님도 그렇게 말씀하실까요? 주님이 명령하셨고 주님이 함께 하신 길에 어떻게 풍랑이 있을 수 있습니까? 아니 주님을 그토록 믿고 따랐던 제자들인데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던 그들이요 죽으면 죽었지 결코 주님을 떠나지 않겠다고 했던 제자들인데 어떻게 그들이 예수를 심지어 저주까지 하며 맹세하며 모른다고 부인할 수가 있습니까? 하지만 그런 제자들을 예수님은 끝까지 끌어안으셨습니다. 그것이 곧 믿음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을 수 있다면 그 주님이 오늘 내가 힘들어 하는 모든 부분들을 해결해 주실 것도 믿어야 합니다. 주님께 능치 못하실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전서 10장 13절은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를 위해서 피할 길을 준비하십니다. 요나를 위해 물고기를 준비하시고 박넝쿨을 준비하시는 것처럼 우리를 위해서도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믿음으로 말미암는 해결책을 준비하시는 분이심을 믿으십시오. 그래서 조금도 의심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믿음 안에서 담대하십시오. 오늘 힘들어 했던 것 이상으로 더 큰 기쁨과 평안을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실 것입니다. 이 귀한 믿음으로 오늘 내게 있는 풍랑을 물리치고 이기는 승리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선천 보성여고에서 음악을 가르치시던 안이숙 선생님이 신사 참배를 반대한다는 이유로 쫓기는 몸이 되어 어느 외딴 산골에서 피신 생활을 하고 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안 선생님은 매일 찬송가와 성경을 암송하고, 금식을 습관화하면서 장차 닥쳐올 고난을 대비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앞서 잡혀간 성도들이 당한 끔찍한 고문에 대해 들을 때면 어느새 공포심으로 가슴이 내려앉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때 그녀의 어머니는 이런 말로 용기를 불어넣어 주셨다고 합니다. "예야! 나는 학교 다닐 때 시험 보는 것이 제일 기뻤단다. 시험을 쳐 보아야 내 실력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있으니 말이다. 하물며 우리가 마음과 뜻을 다해 믿어온 믿음을 한번 시험쳐보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이겠니! 시험을 쳐 보지 못한 믿음은 모든 것이 흐리멍덩하고 자신이 없는 거야. 이숙아, 이제 네 믿음의 질과 양이 나타날 때가 되었고 또한 예수님의 말씀이 그 얼마나 참이신 지를 볼 때가 된 것 같다. 너 같은 청춘의 아름다운 시절을 세상 허영에 바치지 않고 주를 위해 고난을 당할 수 있다면 그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겠니! 우리 끝까지 기쁜 마음으로 이 시험을 잘 치기 위해 준비하자구나."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 시험을 잘 치기 위해 준비하십시다. 이를 위해 깨어 기도하십시다. 그래서 오직 믿음으로 승리하시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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