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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역설적 복음전파 (빌 1: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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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적 복음전파 (빌 1:12~18) 
 
 
사람이 불행한 이유는 대개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각만 바꿀 수 있다면 행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절망하는 이유도 대개 스스로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각만 바꿀 수 있다면 희망을 발견을 할 수 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로 기억됩니다. 선생님께서 칠판에 그림 하나를 그리셨습니다. 큰 울타리에 입구 하나를 그리셨습니다. 그리고 그 입구에 “곰”이라고 쓰셨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들이 저 울타리 안에 있다. 어떻게 나오겠니?”

우리 생각에 울타리 입구에 곰이 버티고 있으니 나올 길은 둘 중에 하나 뿐인 것 같습니다. 하나는 울타리를 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곰과 싸워 이기는 길 뿐입니다. 그러나 어린 아이들로서 그 둘 다 불가능했습니다.

아무도 답을 하지 못하자 선생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냥 문을 열고 나오면 된다. 여기 ‘곰’이라고 쓴 것은 울타리 안에서 보면 곰이지만 울타리 밖에서 보면 그것은 ‘문’이기 때문이다.”

선생님께서는 우리 앞에 놓인 장애물을 곰이라 생각하느냐 아니면 문이라 생각하느냐 그 생각에 따라 길이 열리느냐 막히느냐를 가르쳐주시려 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문제는 생각입니다. 고정관념, 선입관, 그리고 편견에 사로잡히면 안됩니다. “저것은 곰이다!”라고 인정해 버리면 길이 찾아지지 않습니다. “저것은 문일 수 있다”라고 생각할 수 있어야 길이 열립니다. 

사실 곰이라는 글자는 뒤집어 보면 문이 됩니다. 이렇게 생각을 바꿔보는 것 그것을 역설이라고 합니다.
기독교는 한 마디로 역설의 종교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의 핵심은 그 자체로 역설입니다. 기독교의 가르침은 세상의 고정관념을 깨고 새로운 길을 제시해 주는 역설적 진리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마 23:12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높아지고 싶어서 자기를 높이면 낮아질 것이지만,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면 높아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높아지려면 낮아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뒤집는 역설입니다.

고후 12:10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니라” 내가 힘이 없고, 가진 것이 없고, 아는 것이 없어서 가장 약할 그 때 오직 주만 의지하기 때문에 사실 그 때가 가장 강할 때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내가 힘이 있고, 가진 것이 많고, 아는 것이 많아서 내 생애 최고의 순간에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그 때가 약할 때라는 것입니다. 이 또한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뒤집는 역설입니다.

역설의 절정은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모두를 살리셨습니다. 이 십자가의 정신을 기초로 해서 예수님께서 마 10:39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그러니까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요, 죽으려 하는 자는 살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철저하게 뒤집는 역설 중의 역설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역설적인 말씀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고정관념에 사로잡혀서 살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 사람들의 생각을 뒤집어서 길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도 하나의 역설적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복음 전파의 위기상황

본문 12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무엇인가 소식을 전하기 위해 편지를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소식이란 자기가 로마 감옥에 수감 생활하고 있는 것이 오히려 복음 전파에 도움이 되어 생각지 않게 복음 전파가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에게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길지 않은 기간 빌립보에 머물며 복음을 전하다가 쫓겨나듯 그 성을 떠나게 됐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갔을 때 사람들을 보내서 후원했습니다. 사실 바울은 원칙적으로 자비량 선교를 하기로 해서 어느 교회의 도움도 받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빌립보 교회의 도움은 고맙게 받았습니다. 

세월이 지난 후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로마 감옥에 수감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날마다 바울 사도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정성을 모아 후원했습니다. 급기야 에바브로디도라는 청년을 로마 감옥에 보내서 옥중의 바울을 시중들게 했습니다. 빌립보 교회만의 지극한 사랑과 정성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기를 찾아온 에바브로디도에게서 빌립보 교인들의 안타까운 마음을 전해 듣게 됩니다. 빌립보 교회가 바울이 옥에 갇히게 돼서 이제 복음 전파는 힘들게 됐다고 염려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 감옥에 수감됨으로써 복음 전파는 결정적인 위기상황을 맞게 됐다고 걱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선 저들의 따뜻한 사랑에 감사해서 편지를 썼습니다. 그리고 그 편지 안에 빌립보 교회의 염려와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오늘 본문 내용을 기록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빌립보 교인들 생각에 바울이 로마 감옥에 투옥됐다는 것은 더 이상 복음을 전할 수 없게 됐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저들은 그동안 바울이 빌립보를 시작으로 유럽 지역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해서 많은 교회들이 세워졌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이 땅에 새롭게 교회가 세워지고, 새롭게 복음을 믿는 사람들이 생기는 일은 끝이 난 것처럼 생각하게 됐던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이 바로 복음 전파에 결정적인 위기상황이라고 생각하게 됐던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빌립보 교인들은 지금 자기들 앞에 놓여있는 상황을 위기로 인식했던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가지는 고정관념 속에 빠져있었던 것입니다. 

어느 농부에게 노새가 한 마리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노새가 물 없는 마른 우물 속에 빠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농부는 그 노새를 구해낼 방법이 없었습니다. 

고심하던 농부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노새는 이미 늙었고, 마른 우물도 메우려 했으니 노새를 고생하지 않고 빨리 죽도록 도와주는 것이 상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웃들과 함께 마른 우물 속에 흙을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노새에게는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입니다.

그런데 우물 안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노새는 쏟아지는 흙을 신속하게 털어내고는 발로 그 흙을 다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흙이 부어지면 부어질수록 노새는 점점 위로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노새는 우물 밖으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언뜻 보면 분명히 위기상황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 기회의 실마리가 있습니다. 그걸 찾아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려면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역설적 복음 전파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빌립보 교인들의 염려가 기우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로마 감옥에 갇힌 것이 오히려 복음 전파의 중요한 계기가 됐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감옥에 갇히지 않은 것보다 훨씬 더 효과적인 복음 전파의 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우선 13-14를 보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

이 말씀은 이런 뜻입니다. 바울은 지금 황실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황실의 사람들이 바울에 관해서 알게 됐습니다. 바울이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혔다는 것, 그리고 그 외에는 다른 죄가 전혀 없다는 것이 황실 주변에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황실과 로마 시내에 복음의 내용이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바울이 평범한 전도인으로 로마에 와서 복음을 전했다면 황실에 이런 사실이 알려지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이제 황실 사람들 가운데 믿는 사람들이 하나 둘씩 생겨나게 됐습니다. 이런 사실을 알고는 바울을 사랑하던 로마교회 교인들이 힘을 얻어 복음을 전하게 된 것입니다.

다음으로 15-17을 보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증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이 말씀은 이런 뜻입니다. 로마에는 바울이 오기 전에 이미 교회가 있었습니다. 나름대로 신앙생활하며 교회가 발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나타나자 영적 주도권이 바울에게 넘어가게 됐습니다. 저들에게 바울을 시기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 열심히 전도하여 자기들의 세력이 바울을 따르는 세력보다 크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혼자 복음을 전할 때보다 훨씬 활발한 복음 전파의 역사가 로마에 나타나게 됐던 것입니다.

결국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히게 되자 크게 세 가지 복음전파의 역사가 활발하게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하나는 바울이 황실 감옥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둘은 바울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용기를 내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은 바울을 시기하는 사람들이 자기들 세력을 키우기 위해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바울 혼자 로마에 와서 복음 전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열매가 거둬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역설적인 복음 전파입니다.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힌 것은 얼핏 보면 복음 전파의 위기상황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것이야 말로 복음 전파의 새로운 전기입니다. 과거와 다른 새로운 차원의 복음 전파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여기에 역설이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하나, 우리의 위기가 하나님의 기회라는 점입니다.

분명히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힌 것은 복음 전파의 위기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기에서부터 새로운 도약의 계기를 마련하셨습니다. 로마 황실에 복음이 전해지는 계기를 마련하셨습니다. 그리고 바울 혼자가 아니라 로마 교회가 나서서 복음을 전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셨습니다. 

[암, 너 잘못 걸렸어]라는 재미있는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사랑의 교회 이재명 집사가 쓴 책입니다. 이 분은 30여년 평범하게 예수를 믿고 살아온 분입니다. 어느 날 폐암 3기 진단을 받게 됩니다. 갑자기 인생의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그 후 50여 차례 항암 치료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분은 그 절망의 순간에도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50여 차례 항암치료를 받아야 하는 그 고통의 순간에도 하루에 두 번씩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새로운 사명을 깨닫게 했습니다. 바로 복음 전하는 사명입니다. 그래서 암 환자와 그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암 환자와 가족들 60여명이 예수 믿고 주께 돌아오게 됐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살인마 지존파를 전도해서 회개하고 예수 믿게 했습니다. 

그러던 가운데 하나님께서 암도 치료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난 후 암 환자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이 책을 쓰게 됐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분은 인생의 위기가 찾아오기 전에는 평범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자신만을 위해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위기가 찾아온 뒤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손이 붙잡히게 됐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사는 사람이 됐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위기는 하나님의 기회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위기를 맞아 주저앉아 울고 있을 때 하나님의 새로운 일을 시작하십니다. 그래서 위기는 결코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오히려 좋은 기회일 수 있습니다. 

둘, 내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다는 점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분명 바울이 로마 감옥에 수감된 것은 더 이상 복음 전파가 진전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처음에 바울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야말로 사람들의 생각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바울이 감옥에 들어가야 로마 황실에 복음이 전파될 길이 열린다고 생각하셨습니다. 바울이 감옥에 들어가야 로마교회 교인들이 복음 전파에 나설 수 있다고 생각하셨습니다. 

마 16:22를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말씀하시자 베드로가 보인 반응입니다. 결코 그렇게 돼서는 안 되고 자기가 어떤 일이 있어도 그렇게 되지 않도록 가만 두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23절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책망하셨습니다. 요지는 사람의 생각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내 생각에 사로잡히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생각이 무엇인지를 찾으려 해야 합니다. 많은 경우 내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셋, 큰 생각을 가져야 한다는 점입니다.

18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바울은 자기 반대파가 자기를 괴롭히려고 복음을 전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보인 반응입니다. 나는 어떻든 관계없다는 것입니다. 복음이 전해진다는 그 자체로 기쁘다는 것입니다.

우물 안 개구리들은 서로 경쟁하고 다툽니다. 그러나 우물 밖의 세상을 보면 서로 다투지 않습니다. 더 큰 경쟁 상대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서로 힘을 합할 생각을 합니다. 큰 생각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상대는 사탄입니다. 그래서 우리끼리 서로 아웅다웅 싸우지 말고 오히려 힘을 합해야 합니다. 우리는 보다 큰 생각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삶을 살고, 역사를 의식하며 살려고 하면 보다 큰 생각으로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을 살다보면 위기가 찾아옵니다. 그 때가 중요합니다. 고정관념을 탈피하고 역설적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회가 시작됐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보다 큰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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