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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긍휼의 눈길로 바라보시는 주님 (눅 22:5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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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휼의 눈길로 바라보시는 주님 (눅 22:54~62)
 


지난 주에 저희 부부가 영성수련회를 다녀왔습니다. 아침 7시 30분에 시작하여 거의 저녁 12시까지, 어느 팀은 새벽 1시까지 내적치유 사역을 진행하는 고된 수련회였습니다. 힘은 들었지만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수련회 기간 동안 찬양을 인도하는 임종환 목사님이 계십니다. 성악을 전공하고 유럽에서 오페라에 출연하는 실력가입니다. 그 분이 찬양을 인도하는데 얼마나 은혜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 큰 집회의 찬양을 혼자서 인도합니다. 춤을 추며 온 몸으로 찬양합니다. 그런데 그 분은 프로그램 순서의 분위기에 따라 가요도 부르는데 그 분이 부르면 가요가 복음 성가가 되더라구요. 그 분이 찬양을 인도하는 가운데 윤복희 권사님이 불렀던 ‘여러분’이라는 가요를 부르는데 어느 복음 성가 보다도 은혜스러웠습니다. 

가사가 이렇게 시작됩니다. 

네가 만약 괴로울때면 내가 위로해줄게
네가 만약 서러울때면 내가 눈물이 되리
어두운 밤 험한 길 걸을 때 내가 내가 내가
너희 등불이 되리
허전하고 쓸쓸할 때 내가 너의 벗되리라
나는 너의 영원한 형제야 
나는 너의 친구야
나는 너의 영원한 노래야 나는 나는 나는 
나는 너의 기쁨이야

네가 만약 외로울때면 내가 친구가 될께
네가 만약 기쁠때면 내가 웃음이 되리
어두운밤 험한길 걸을때 내가 내가 내가
너의 등불이 되리
허전하고 쓸쓸할 때 내가 너의 벗되리라
나는 너의 영원한 형제야
나는 너의 친구야
나는 너의 영원한 노래야 나는 나는 나는
나는 너의 기쁨이야

나는 너의 영원한 형제야
나는 너의 친구야
나는 너의 영원한 노래야 나는 나는 나는
나는 너의 기쁨이야

이번 주 주일 설교를 대략적으로 구상을 하고 영성 수련회에 참가한 상태였기 때문에 설교의 내용과 연결되면서 이 노래의 가사가 그렇게 좋았습니다. 저는 노래를 부르면서 이 곡에 저만의 새로운 의미로 해석을 하며 ‘아멘’ 했습니다. 

우리 사회가 노무현 전대통령의 서거로 인해 또 한번의 충격을 받았습니다. 매우 안타까운 사건이었습니다. 수련회 기간에 영결식이 진행되어서 그분의 마지막 가는 길을 보지 못했습니다만 돌아와서 인터넷을 보니 노무현 신드롬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대단했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노무현이라는 사람에게 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한 정치인으로, 그리고 나라의 지도자로 존경했습니다. 그가 펼친 정책을 100% 지지한 것은 아니지만 약자와 서민을 돌보는 그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사람입니다. 절대적인 권력을 국민들에게 돌려준 것은 앞으로 역사가 두고 두고 평가해야할 내용입니다. 그 분의 죽음의 소식을 접하고는 안타까우면서도 우리 사회의 불의한 구조에 화가 났습니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 가운데 임기를 마치고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사랑을 받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야를 하고, 시해를 당하고, 임기를 마친 후에 부정과 부패로 인해 감옥에 들어가고, 자녀들과 친인척들의 비리로 식물 대통령이 되어 심각한 레임덕 현상으로 임기 말년을 제대로 통치하지 못했습니다. 노무현 전대통령은 5년의 임기 동안 여러 정책을 펼치는 가운데 롤러코스터를 타는 위기의 상황들이 있었지만 그래도 5년간의 임기를 마치고 당신의 말을 빌리면 죽어 나오지 않고 마지막까지 대통령의 권한을 유지하다 청와대를 나온 사람입니다. 그가 마지막까지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대통령으로서 정책의 중심에 설 수 있었던 힘은 그분이 그렇게 힘주어 강조했던 자신의 도덕적인 힘이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아간 것은 자신이 정치적인 생명처럼 여겼던 도덕적성 난도질 당해 더 이상 회복할 수 없다는 절망감이었다고 봅니다. 검찰에 불려가기 전에 자신의 홈피에 심경을 밝히며 자신을 지지했던 사람들을 향해 ‘이제는 저를 버리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 안에는 여러 가지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목사로서 노무현 전대통령의 살아온 삶에 존경심을 가지고 있지만 한 가지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 분은 ‘당신의 의로움’은 알았지만 ‘하나님의 은혜’ 는 잘 모르는 분이었습니다. 그 분은 자신의 의로움에 기초를 두고 살았습니다. 정의로움 위에 자신의 삶을 세웠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 분이 외치는 정의로움에 매력을 느꼈습니다. 그의 정의로움에 공감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정의로움에서 흠을 발견했을 때 사람들은 실망했습니다. 쑥덕거렸습니다. 조롱했습니다. 그 분이 자신의 정의로움을 말하고 싶었지만 사람들이 믿지를 않았습니다. 자신이 주변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사과와 잘못된 내용을 해명할 수 있는 길이 차단되었습니다. 억울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평생을 외쳤던 정의로움에 대한 상처의 아픔과 회복을 위해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그가 ‘나를 버리십시오’ 라고 외칠 때 그의 아픔과 억울함과 서러움을 따뜻하게 감싸 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의 상처와 실수, 그리고 아픔을 있는 그대도 품어 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세상이라는 곳은 쓰면 뱉고 달면 삼키는 곳입니다. 우리 국민들도 그렇습니다. 언론도 그렇습니다. 정부도 그렇습니다. 세상은 그렇습니다. 그러기에 세상에서는 상처받은 영혼의 진정한 위로와 치유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세상은 쓰면 뱉고 달면 삼기는 곳이지만 세상과는 다르게 써도 삼키고 달아도 삼키는 분이 계십니다. 하나님이십니다. 세상과 사람들은 조석간에 변하지만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실 때 그 사람이 행한 일을 보시고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즉 행함 때문에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하십니다. 즉 존재 자체을 사랑하십니다. 남들보다 좀 더 선하게 살았든, 아니면 악하게 살았든 그들이 행한 일을 평가해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우리의 존재를 그대로 사랑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베드로가 나옵니다. 베드로에 관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습니다. 12 제자들 중에 다른 제자들은 가족을 떠나 혼자 선교 활동을 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만큼은 자기 부인하고 동행하며 선교 활동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을 잘못 알아들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는데 베드로는 ‘자기를’에서 ‘를’ 자를 빼먹고 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 로 알아 듣고 제자들 중에 유일하게 자기 부인과 함께 선교를 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베드로는 자신의 의로움에는 실패했지만 자신의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서 회복되어 더 귀한 역사를 만든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로마 군사들에게 잡혀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너희들이 다 나를 버리고 도망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예수님을 버리지 않을 것이고 예수님과 함께 죽임을 당하겠다고 호언장담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장담하던 베드로가 너무나 철저하게 무너지고 맙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잡혀 재판을 받으실 때 대제사장의 집에서 일하는 하녀에게 맥없이 무너집니다. 베드로는 자신을 저주하면서까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합니다. 바닷물에 모래성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것처럼 무기력하게 무너지고 맙니다. 

예수님께 그렇게 호언장담했던 베드로가 맥없이 무너지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를 본문에서 찾아보면 54절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한 목소리로 읽어봅시다. ‘예수를 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새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베드로는 예수님이 로마 군사들에게 붙잡혀 법정으로 끌러갈 때 적당한 거리를 두고 따라 갔습니다. ‘멀찍이 따라갔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지면 무기력한 신앙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진다는 것은 예수님의 영향력을 덜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멀찍이 따라가는 신앙은 언제나 계산적입니다. 필요하고 도움이 되면 앞으로 뛰쳐 나가지만 실패나 고통이 따를 것 같으면 뒤로 물러납니다. 아닌 것처럼 자신을 위장하거나 소극적인 자세를 취합니다. 상황과 추이에 따라 행동하는 회색신앙입니다. 이런 신앙은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가까워질 수 없습니다. 야고보서4장 8절에 보면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며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정결하게 하라’ 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가는 사람입니다. 

베드로가 자신을 몰아 세우는 대제사장의 계집종에게 ‘나는 네가 말하는 그 예수가 누구인지를 모른다’ 라고 부인하는데 닭이 울었습니다. 잡혀 가시던 예수님께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들으시고는 뒤로 돌아 베드로는 보셨습니다. 베드로는 닭 우는 소리와 함께 뒤돌아 자신을 보시는 예수님을 보는 순간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는 부끄러움과 수치심에 사로잡혀 밖으로 뛰쳐 나가 심히 통곡했습니다. 베드로는 배신자였고 스승을 부인한 실패자였습니다. 저는 베드로가 심히 통곡하는 울음 속에서 ‘주님, 이제 저를 버리십시오’ 라고 부르짖는 절망의 소리를 듣습니다. ‘자신이 말한 약속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어리석고 이기적이고 약한 저를 이제는 버리십시오’ 라고 절규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베드로 개인의 의를 중심으로 보면 베드로의 인생은 여기에서 끝입니다. 누구도 배신한 그의 추한 모습을 수용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를 향해 배신자, 이기주의자, 변덕쟁이, 실패자, 겁쟁이라고 비웃으며 돌을 던지는 사람은 많지만 그를 위로하고 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의 인생은 끝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베드로의 인생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가 닭이 우는 소리와 함께 예수님을 부인하고 안절부절하는 베드로의 모습을 바라다 보는 예수님의 눈길은 저주와 조롱의 눈길이 아니었습니다. 그 분의 눈은 긍휼의 눈이었습니다. 61절에서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는 보시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본다’ 라는 헬라어는 ‘엠블레포’ 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는 긍휼과 자비의 눈길로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예수님의 눈길이 바로 은혜입니다. 

내가 실패하고 배반하면 세상은 우리를 향해 손가락질하고 비난하며 등을 돌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실패하고 죄를 지어 부끄러워 할 때도 긍휼의 눈과 자비의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예수님은 바라보실 뿐만 아니라 찾아오셔서 다시 회복시켜 주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갈릴리 호수의 어부 생활로 돌아간 베드로를 다시 찾아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물으심으로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아픔과 상처를 자신의 말로 고백하게 하심으로 치유 하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당신의 사역을 맡기셨습니다. 

베드로가 실패자로서 통곡하고 있는 그 곳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를 어루만지시고 다시 세우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저는 노무현 전대통령이 ‘저를 버리십시요’라고 말하는 그 절망의 자리에 있을 때 예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 분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는 분이었다면 그와 같은 길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힘들고 어렵겠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짓누르는 그 아픔을 딛고 일어나 이 나라와 후대들을 위해 더 귀한 일과 선한 영향력을 끼쳤으리라 하는 아쉬운 마음을 갖습니다. 

이번 2박 3일 영성수련회 기간 동안에 내적치유를 하는 과정에서 함께 참여한 사람들이 얼마나 처절한 아픔을 가지고 몸부림치며 살고 있는지를 볼 수가 있었습니다. 말로 할 수 없는 수치심과 분노를 품고 사는 통곡의 삶이었습니다. 소설도 그렇게 비극적으로 쓸 수 없을 것입니다. 그 고통과 절망 속에서도 그들이 몸부림치며 새 희망을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을 긍휼의 눈으로 바라보시며 격려하시는 예수님의 은혜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은혜를 경험하며 그 절망과 고통 가운데서도 다시 소망을 가지고 일어나 가정으로, 일터로, 사역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그 모습을 보는 저는 가슴 뭉클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치유 사역의 자리에 동참하면서 윤복희의 ‘나는 너의 영원한 친구야’라는 노래 가사는 복음성가와 같았습니다. ‘네가 외로울 때, 기쁠 때, 험한길 거닐 때, 허전하고 쓸쓸할 때 내가 너의 친구가 되리 너는 나의 기쁨이야.’ 라는 가사는 노래를 부르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나의 영원한 친구가 됨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의 자리에 고통스러운 일들이 있습니다. 영적으로, 육적으로 지치고 힘들어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죄책감으로 인해 주저앉아 통곡하며 ‘저를 버려 주십시오’ 라고 외칠 수 밖에 없는 죄의 자리에 놓여 있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부르짖음 가운데서도 우리 곁에서 긍휼의 눈길로 바라보시는 예수님을 발견하는 믿음이 있기를 원합니다. 두 팔을 벌려 우리를 맞아 주시며 품으시는 예수님의 품에 안겨 진정한 평안과 그 분이 주시는 용기를 덧입어 세상을 향해 일어서는 은혜가 충만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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