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거듭남의 증거 (요 3:1~15)

  • 잡초 잡초
  • 2878
  • 0

첨부 1


거듭남의 증거 (요 3:1~15)
 

오늘 저는 “거듭남”에 대하여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현대인들에게는 거듭남이라는 말이 그리 생소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무슨 새로운 결심을 밝힐 때 거듭나겠다고 말을 사용합니다. 예를 들면, 정치인들이 국민의 지지를 호소할 때 “이제 우리 정당은 거듭나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또는 어느 기업체에서 생산한 식료품에서 몸에 해로운 물질이 발견되었을 때, 해명서를 발표하면서 “이제부터 거듭나는 심정으로 고객을 위해 봉사하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은 성경이 말씀하는 거듭남과는 거리가 멉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거듭남은 영적인 차원에 속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거듭남은 우리의 구원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 믿는 사람을 일컬어 하나님의 자녀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보니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곧 예수의 이름을 믿는 것과 같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는 단지 구원을 선물로 받은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영적 신분이 바뀐 것을 의미합니다. 

그 영적 신분이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말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부여 받은 것입니다. 곧 하나님께서 예수 믿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법적으로만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장 13절에 이르기를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서 태어나는 것을 가리켜 중생(重生) 또는 거듭남이라고 합니다. 영어 성경에는 born again 곧 “다시 태어남”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리고 일본어 성경에 보면 신생(新生) 곧 새롭게 태어남이라고 번역했는데, 이는 의역을 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거듭남은 곧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한 고린도후서 5장 17절 말씀과 같습니다. 이처럼 거듭난 사람은 이전의 그 사람이 아닌 전혀 새 사람이 된 것입니다. 외모 상으로 변한 것이 아무 것도 없어도, 여전히 이전에 쓰던 그 이름을 갖고 있고, 이전과 같은 가족 관계 속에서 살고, 그야말로 외적으로 변한 것이 하나도 없어 보이지만, 그 사람의 내면은 전혀 새롭게 변한 것입니다. 

가장 근본적인 변화는, 거듭나기 전에는 하나님에 대하여 알지 못했고 전혀 관심도 없었는데, 거듭나고 나서는 하나님에 대하여 알게 되고 더 알기를 원하게 된 것입니다. 이는 과거에는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였는데, 이제는 하나님과 소통하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러나 중생 또는 거듭남은 우리가 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해 주셔야 가능합니다.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있는 사람은 거듭남에 대한 욕구를 가질 수조차 없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 보면, 거듭남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나옵니다.

한번은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바리새인인데다 유대교의 최고 법정에 해당하는 산헤드린의 의원이기도 했습니다. 산헤드린의 의원수가 겨우 71명에 불과했던 점을 감안하면, 그가 상당히 귀한 신분이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그가 예수님께 와서 말하기를 “랍비여, 우리는, 선생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임을 아나이다. 하나님께서 같이하지 않으시면, 선생님께서 하시는 그런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말하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으므로 “사람이 늙은 뒤에,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날 수 있단 말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거듭남에 대하여 이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육으로 난 것이란, 우리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것을 가리킵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머니에게서 육으로 태어나는 경험을 합니다. 그러나 거듭남은 다시금 어머니의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가리켜 성령으로 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하신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하시든지 주권적으로 행하십니다. 따라서 거듭남이 성령의 일이라는 말씀은 거듭남이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로 됨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반드시 거듭나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것은 그 다음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요 3:5).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은 구원을 받지 못하고 영원한 멸망에 떨어진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볼 때, 거듭남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거듭남의 은혜를 받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믿는 자 곧 그 이름을 영접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는 말씀이 이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성령께서 우리의 영을 거듭나게 해 주십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라”(마 7:21)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라고 말한다고 해서 다 믿는 사람이라고 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입으로 예수님을 주로 고백할지라도 거듭나지 못한 사람이 있으며, 그런 사람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거듭나지 못했지만 얼마든지 예수님을 믿는 사람처럼 행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혹 나는 거듭난 것일까, 아니면 거듭나지 못한 것일까, 궁금해 질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하기를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 13:5)고 했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우리는 각자 자기의 믿음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입으로만 “주여, 주여”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요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 자신이 거듭난 사람인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을 일러줍니다.

첫째로, 우리가 구원의 진리를 믿는 것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성령께서는 믿는 자들을 영적으로 거듭나게 하실 뿐 아니라, 거듭난 성도와 함께 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께서는 거듭난 성도들과 함께 하시지,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과는 함께 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16)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17)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성령께서 믿는 사람 속에 계시는 것을 성령의 내주(內住)하심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성도들은 그 속에 성령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에 대하여 고린도전서 6장 19절 이하에는 ”19)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20)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했습니다. 성도들은 성령을 모신 성령의 전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전이 되다니,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그러면 성령께서는 얼마 동안 우리와 함께 하실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제, 성령께서 우리 몸을 성전 삼아 임하여 계시면서 하시는 일이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16:13)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설교를 듣고 구원의 진리를 알게 된 것은 우리 안에 임하여 계신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열어서 깨닫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 의미를 알고 감동을 받는 것 역시 성령께서 우리를 감화하신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구원의 진리는 인간의 머리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라도 성령의 은혜를 입지 못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아무것도 깨닫지 못합니다. 오늘날 창조론을 부인하고 진화론을 신봉하는 학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학자들은 물질세계에 대해서는 과학적으로 탐구해서 잘 이해하지만, 영적 차원에 속하는 일에 대해서는 캄캄절벽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계신 것도, 예수님이 인류의 구주이신 것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성령의 은혜를 입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공부를 많이 했건 적게 했건 상관없이 하나님이 창조주 되신 것을 알며, 예수님이 구세주이심을 확신하는데, 이는 그가 성령의 은혜를 입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성경의 모든 말씀을 하나도 모르는 것이 없이 다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난해한 말씀도 적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구원의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으며,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 때, “아는 것”은 단지 머리로 외워서 아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과 인간들을 창조하셨음을 믿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것을 믿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신 것과 무덤에 장사된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을 믿습니까? 우리는 아무 공로가 없는 죄인이지만,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죄 사함 받고 하나님 앞에 의롭다는 인정을 받게 됨을 믿습니까? 우리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이 같은 사실을 믿는 것은 우리가 성령의 은혜를 받아 거듭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거듭난 것은 우리 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것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거듭남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므로 하나님을 보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는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입니다. 이 세상에는 부자지간이라고 반드시 사랑의 관계라고 단정 지을 수 없지만, 하나님 아버지와 그 자녀의 관계는 전적으로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슨 일을 하시든지 오직 사랑의 동기로 행하십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대속의 죽음을 당케 하신 것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절정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5장 5절 이하에는 이 같이 말씀합니다.

“5)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6)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리고 요한일서 4장 9절 이하에는 이 같이 말씀합니다.

“9)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10)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내어주신 파격적인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어주셨습니다. 그것도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할 그 때에 먼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해 그 아들을 화목제물로 주셨습니다. 사실인즉, 이 같은 하나님의 사랑은 너무나 놀랍고 기이해서 우리의 이해를 초월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 사랑을 우리가 마음 깊이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다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마음에 받아들이는 데는 지장이 없습니다. 

예를 들자면, 수영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튜브를 타고 바다 깊은 곳에 들어갔다가 그만 튜브를 놓치는 바람에 물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데, 누군가가 헤엄쳐 와서 그를 구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구해준 사람은 너무 힘을 소진한 나머지 쓰러져 죽고 말았다고 합시다. 자, 구출 받은 사람의 입장이라면 그 심정이 어떠할까요? “나 때문에 저 사람이 죽었구나, 나를 죽음에서 구해 내기 위해 자기 목숨을 버렸구나.” 그러면서 그의 희생에 감사하는 마음을 평생 잊지 아니할 것입니다. 육신의 생명을 구해 주는 것도 귀하지만, 영원한 지옥 형벌로부터 우리의 영혼을 구해 주신 것은 더욱 귀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알게 되면 그 순간부터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 전파에 어찌나 열정적이었던지, 사람들은 그를 보고 미쳤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말씀하기를 “13)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14)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후 5:)라고 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받은 주님의 사랑을 생각할 때 복음 전파에 열심을 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 같은 사랑을 알려면 먼저 거듭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뿐 아니라, 거듭난 성도들은 그 사랑을 더 깊이 깨닫는 만큼 믿음도 자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열심 내라 권면해도 마이동풍인 사람이라도 한번 주님의 사랑을 알게 되기만 하면 누가 권면하지 않아도 신앙생활에 열심을 내는 것을 봅니다. 그렇습니다. 강제로 사랑하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 속에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이 있는지,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지를 보아서 거듭난 사람인지 여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을 보아서 거듭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영적으로 볼 때 하나님과 적대관계에 있습니다. 그는 아직 육에 속한 사람으로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 욕심을 따라서 살아갑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려는 소원이 전혀 없고 오로지 자신을 기쁘게 하려는 욕망으로 가득합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행위를 합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8장 5절 이하에 이 같이 말씀합니다. 

“5)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9)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이 그 사람 속에 계시지 않기 때문에, 그 사람은 하나님과 원수되는 생각과 언행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반면에, 거듭난 성도는 자기 욕심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갑니다. 그리하여 성령께서 성도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알게 해 주실 때, 기쁨으로 그 말씀에 따라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원칙으로 삼고 그 말씀 앞에서 우리 자신의 생각을 복종시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때 그 마음에 기쁨을 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면 마음에 고통을 느낍니다. 바로 이 점이 거듭난 사람의 특징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불순종해도 아무런 가책이 없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영이 죽은 상태라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리고 거듭난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형제들을 사랑합니다. 

요한복음 13장 34절에 보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나에게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가를 보아서 내가 거듭난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부족한 인간인지라 때로 형제를 미워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난 성도는 곧 회개하고 다시금 형제를 사랑합니다. 그 삶 속에 사랑의 열매를 맺히느냐 맺지 못하느냐를 보아서 그 사람이 거듭난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거듭난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혼의 만나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의 말씀을 양식으로 삼아서 먹고 살아갑니다. 사도 베드로는 우리에게 권면하기를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2)고 했습니다. 

거듭난 성도는 처음에 영적 갓난아이와 같습니다. 갓난아기는 제 발로 걷지도 못하고 말도 하지 못합니다. 혼자서 음식을 찾아 먹지도 못하고, 혼자서 옷도 입지 못합니다. 그야말로 무능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갓난아기가 마냥 무능한 것은 아닙니다. 잘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젖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갓난아기는 젖이 먹고 싶으면 즉시로 울음으로 신호를 보냅니다. 마냥 참고 기다리는 아기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갓난아기는 젖을 먹는 대로 하루가 몰라보게 자라납니다. 이는 영적인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거듭난 지 오래 되지 않은 성도는 영적 갓난아기와 같습니다. 교회생활도 서툴고, 성경 지식도 적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 다 이해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설교를 들어도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도 신기한 것은 왠지 모르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설교를 들으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더라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처음부터 큰 믿음을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자주 설교를 듣다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믿음이 자라고 말씀을 깨닫는 능력이 향상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막 4:28)고 하셨습니다. 씨를 뿌리면 여린 싹이 나오고 그 다음 자라서 이삭이 되고 그 다음에 결실을 하는 것이 순서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믿고 거듭난 성도도 갓난아기의 단계에서 점점 자라나서 성숙한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처럼 날이 갈수록 믿음이 자라고 있다면 그 사람은 거듭난 성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거듭남의 증거는 생활 속에서 선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 보니 “22)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거듭난 성도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기 때문에 방금 소개한 열매를 생활 속에 맺게 되는 것입니다. 거듭난 성도는 이제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붙은 가지가 되었으므로 선하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지금까지 말씀해 드린 세 가지 방법 외에도 거듭남을 알 수 있는 방법들이 있지만, 오늘은 가장 기본적인 것들만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께서는 구원의 진리를 믿으십니까? 여러분 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기쁨으로 순종하며 그 결과 선한 열매를 맺고 있으십니까? 이 세 가지 물음에 진심으로 “아멘!”으로 화답하시는 분들은 거듭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성도님 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추천인 1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