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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부주일] 서로에게 감사하는 부부 (엡 5: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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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에게 감사하는 부부 (엡 5:22~33)


어떤 걸인이 길을 가다가 등이 너무 가려웠는데 긁어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마침 동네에서 가장 존경받던 랍비의 집 앞을 지나가다가 그 집 기둥에 자기 등을 대고 긁기 시작했습니다. 꽤나 시원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때 정원을 거닐던 랍비가 보고 문을 열고 이 걸인을 집으로 들어오게 했습니다. “얼마나 가려우면 그렇게 했느냐?”며 목욕을 시켜주고 옷을 새로 입혀 주었습니다. 그리고 먹을 것까지 주어서 친절하게 보내주었습니다. 

이 소문은 걸인들 사이에 퍼져나갔습니다. 그 다음날 어떤 부부 걸인이 랍비의 집 앞을 지나가다가 기둥에 자기 등을 비비기 시작했습니다. 등 비비는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랍비가 그 소리를 듣고 문을 열고 나왔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저 멀리 가시오, 왜 남의 집 앞에 와서 시끄럽게 구느냐”고 호통을 쳤습니다. 그랬더니 이 부부 걸인이 화가 났습니다. “아니, 어제 어떤 거지는 목욕도 시켜주더니 우리는 왜 그냥 쫒아 냅니까? 불공평하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그랬더니 랍비가 대답합니다. 

“그건 자네가 몰라서 하는 말이네. 어제 그 거지는 혼자 사니까 등이 가려워도 누가 긁어줄 사람이 없지 않은가? 그래서 내가 도와준 걸세. 하지만 자네는 부부가 아닌가? 서로 등을 긁어주면 되지, 왜 여기 와서 난리를 치는가?” 하며 쫒아냈다고 합니다.

부부란 등 긁어주는 관계입니다. 살면서 등도 긁어주고, 서로 도와주고 의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부부를 돕는 배필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등이 별로 가렵지 않은데, 저희 집 사람은 등이 자주 가려운 듯 합니다. 종종 저에게 등을 긁어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등을 잘 긁어주기란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잘 긁어주어도 거기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 밑에, 그 옆에.” 이렇듯 가려운 부위를 잘 찾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등을 긁어주면 고마워하고 감사해합니다. 저의 경우는 종종 ‘발톱은 아내가 깎아주려니’ 하고 안 깎고 기다립니다. 그럼 제 아내가 발톱을 잘 깎아줘서 늘 고맙게 생각합니다. 이렇듯 부부란 서로 의지하며 돕는 배필입니다.

우리가 일생을 살고 나서 가장 후회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그 때 사업을 좀 크게 할 걸.’ ‘그렇게 집값이 오를 줄 알았다면 그 때 집을 좀 큰 걸 살걸.’ ‘이왕이면 좋은 차를 살걸.’ 이런 것을 가지고 후회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고 합니다. ‘좀 더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았을걸.’ ‘좀 더 가족들에게 많은 관심을 가졌으면 좋았을걸.’ ‘아내에게 좀 더 잘 해줄걸.’ ‘남편에게 좀 더 친절하게 해 줄걸.’ 이런 것들이 후회가 된다고 합니다. 여러분! 후회해 봐야 소용없습니다. 있을 때 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서로 결혼할 때 행복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결혼합니다. 그런데 사랑의 유효기간이 그리 길지 않다고 합니다. “너 없으면 죽는다.” 이런 사람도 3년쯤 지나면 그 사랑이 식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부는 늘 새롭게 노력해야 합니다. 사랑의 신선한 샘물을 길어 올리지 않으면 그 결혼관계가 지속되기는 어렵습니다. 살기는 살지만 정말 사랑해서 사는 부부는 많지 않습니다. 그냥 정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혼하지 못하니까 그냥 사는 부부가 대부분이라고 합니다. 부부들 서로 눈 마주치고, 마주보며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라고 하면 잘 못합니다. 양심에 찔리기 때문입니다. 진짜 사랑하지 않고 그냥 살기 때문입니다. 왜 그럴까요?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정말 모두에게 존경받으며 살아간 한 부부가 있었답니다. 80회 생일을 맞은 아내에게 기자가 와서 물었습니다. “당신은 당신 남편을 너무 너무 사랑하셨죠? 하지만 혹시 살아가다가 미워질 때는 없었나요? 혹시 이혼하고 싶은 순간은 없었나요?” 그랬더니 이 아내가 말하기를 “이혼을 생각해본 적은 없었지만 죽이고 싶을 정도로 너무 미울 때가 많았어요.”라고 답했습니다. 남편들은 조심하셔야 합니다.

요즘 부부에 대한 우스갯소리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부끼리 20년, 30년, 40년 오래 살다보면 새로운 맛이 없을 수 있습니다. 권태도 생기고, 실망감도 따라올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30대 아내들은 남편이 늦게 퇴근하면 바가지를 긁으며 “좀 일찍 오라고. 나만 집에서 뭐하느냐”고 한답니다. 40대가 되어도 좀 늦게 들어오면 난리를 친답니다. “좀 일찍 들어오라고.” 그러면 남편은 속으로 은근히 좋아한답니다. 그러나 50대가 되면 남편이 출장 간다고 하면 아내들은 대놓고 좋아한답니다. “잠 편하게 자고, 밥 안 줘도 괜찮고.” 60대가 되면 아예 노골적으로 말한답니다. “오늘 우리 집에서 친구들과 모임이 있으니까 당신 나가서 자고 오세요.”라고 한답니다.

그런가 하면 남편들도 많이 변했습니다. 예전에는 그래도 예의가 있어 아내가 세상을 먼저 떠나시면 젊은 부인과 결혼할 것을 생각에 화장실에 가서 웃으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많이 뻔뻔해져서 부인이 죽자마자 그 옆에서 좋아서 웃는다는 것입니다. 또 아이들이 울고불고 난리를 치면 아빠가 꾸짖는다고 합니다. “야 이놈아! 조용히 해라. 엄마 깬다.” 다 우스갯소리입니다. 사실로 믿지 마십시오. 그런데 그 이야기 속에 오늘 세태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남편과 아내의 사랑이 뜨겁지 않습니다. 또 전통적인 결혼관이 파괴되어 간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너무나 쉽게 헤어질 생각들을 합니다. 너무나 쉽게 이혼을 결정하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성경은 여기에 대해 뭐라고 말하고 있을까요? 오늘 성경 본문 31절을 같이 읽어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하나님께서 처음에 아담을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혼자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담을 잠들게 하시고, 그의 갈비뼈로 하와를 만들었습니다. 참 잘 만드셨습니다. 만약 아담의 머리뼈로 만들었다면 여자가 남편의 머리 위에 군림할 것입니다. 만약 남자의 다리뼈로 만들었다면 남자가 여자를 종처럼 여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중심 부분인 갈비뼈로 만들었기 때문에 남자와 여자의 관계는 동등하다는 것입니다. 높고 낮음의 문제가 아닙니다. 역할이 다를 뿐이지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동등한 관계입니다.

이렇게 인간을 만들었는데 이제는 남자가 부모를 떠나서 그의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룹니다. 사람은 성장하면 부모를 떠납니다. 독립하는 것입니다. 어릴 때는 부모의 슬하에서 부모의 지도하에 살아왔지만, 성장해서 결혼하면 그 때부터 부모로부터 독립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의 영향권 하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물론 낳아주시고 길러주시는 부모님께  대한 효도나 공경에 대한 마음은 변함이 없지만, 가정의 중요한 결정은 부부에게 그 결정권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결혼한 사람이 매일 부모님께 가서 “아빠, 이거 어떻게 하면 좋아요? 엄마 돈 좀 주세요.” 이런 사람은 마마보이입니다. 이제는 중요한 결정을 스스로 결정해야 합니다. 가정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아내와 모든 일들을 신중하게 의논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독립입니다. 정신적으로 독립하고, 경제적으로 독립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사랑은 두 사람이 했지만, 결혼 이후에는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부부 사이에는 촌수가 없습니다. 하나이기 때문에 뗄 수 없습니다. 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이혼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성경이 금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주 불가피한 경우 외에는 이혼을 피하셔야 합니다. 할 수만 있으면 이혼하지 마십시오. 이혼은 너무나 많은 고통과 괴로움을 줍니다.

제가 종이 두 장을 풀로 붙여서 한 장으로 만들었습니다. 부부란 이렇게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혼하려고 서로 떼어 보십시오. 보기 흉하게 됩니다. 아무리 잘 떼어 낸다고 떼어도 흉한 모습이 됩니다. 상처가 남습니다. 이것이 이혼입니다. 여러분! 할 수만 있으면 이혼은 피해야 합니다. 이 상처를 안으면서 서로 나누어진다면 그 아이들의 문제는 어떻게 할 것입니까? 온 가족이 안는 고통은 누가 책임질 것입니까?

어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안타까운 서거 소식을 듣고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오죽했으면 그 길을 택했을까요? 물론 그 분은 그리스도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혹 자살의 방법을 선택했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잘못한 것입니다. ‘내가 죽으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겠지.’라고 생각했겠지요. ‘나 하나 죽으면 모든 가족이 고통당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해서 그 길을 택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가정에 평화가 있겠습니까? 남편의 죽음은 온 가족에게 멍에가 되는 것입니다. 권양숙 여사가 어찌 평안하게 잠을 자고, 편안하게 음식을 먹고 웃을 수 있겠습니까? 그 자식들이 어떻게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너무나 큰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이혼처럼 자살 또한 너무 극단적인 방법입니다. 온 가족에게 엄청난 아픔을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절대 그런 생각을 하시면 안 됩니다. 그것은 비성서적이요 범죄요, 그것은 지옥 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그 길만은 피하셔야 합니다. 너무 힘들면 저에게 전화하십시오. 제가 설교 약속이 있어도 여러분이 저에게 상담 요청하면 제가 상담해 드리겠습니다. 다른 것을 취소하더라도. 그 길만은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오늘 성경에서는 부부에 대해 결론적으로 말합니다. 33절에 보니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 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라고 말합니다. 사랑과 존경의 관계입니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합니다. 아내는 남편을 존경합니다. 혹은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정에는 두 개의 기둥이 필요합니다. 사랑과 존경의 기둥입니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합니다. 아내는 남편을 존경합니다.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말씀은 구체적으로 남편과 아내에게 뭐라고 말씀하고 있는지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봅시다. 22절~23절 말씀입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아내들에게 먼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왜 남편들에게 먼저 이야기하지 않고 아내들에게 먼저 이야기했을까요? 가정의 행복은 아내들의 영향이 크고, 아내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아내는 때로 남편보다 지혜로울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남편들도 아내의 말을 잘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쉬운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아내가 먼저 교회에 나오고 남편은 교회에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가정의 남편은 언젠가 교회에 나옵니다. 나이 들어서도 안 나오면 밥도 못 얻어먹으니까 결국 나옵니다. 아내 말을 듣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남편은 교회 나오는데 아내가 안 나오는 가정을 생각해보십시오. 그 가정의 아내가 나오기 참 쉽지 않습니다. 남편 혼자 나오다가 마는 집들도 많습니다. 아내는 끝까지 안 나옵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아내의 영향력이 더 큰다는 것입니다. 아내가 바로 서면 가정이 바로 섭니다. ‘아버지학교’에 가면 “아버지가 바로 서야 가정이 바로 선다.”고 하지만 사실은 아내가 바로 서야 남편이 바로 서고, 남편이 바로 서야 가정이 바로 섭니다. 남자들은 단순합니다. 아내가 조금만 양보하고, 아내가 조금만 지혜롭고, 아내가 조금만 더 남편을 배려해 주면 남편들도 곧 아내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갈 곳이 그 곳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아내들에게 먼저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내들아! 남편에게 먼저 복종하라!” 이 복종이라는 말이 또 귀에 거슬리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내가 남편보다 못한가, 왜 복종을 해. 내가 종인가 왜 복종해.’ 여러분! 좋게 생각하십시오. 순종하라는 의미로 바꾸어 읽으셔도 좋습니다. 그게 싫으면 존경하라는 말로 읽으십시오. “아내들아! 남편을 존경하라.”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입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교회의 신랑이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마치 교회가 신랑된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듯이 아내들은 남편에게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신랑된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듯이 남편들도 아내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부관계는 교회와 그리스도관계의 영적원리가 적용됩니다. “아내들아! 남편에게 순종하라. 남편에게 복종하라. 그것은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듯이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면 복종이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렇게 복잡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성경이 말하는 복종은 남편의 지배력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남편의 지도력, 하나님이 우리 남편을 가장으로 세우셨습니다. 가정의 제사장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마지막 결정권은 남편에게 있습니다. 비록 아내가 경제력이 더 좋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물건 하나를 사더라도 남편에게 의논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여보! 내 생각에는 이런데 이거 사면 좀 어떨까? 당신이 사라고 하면 사지 말라면 안 살 거야.” 이런 것이 좋습니다. 남편에게 최종 결정권을 드리는 것이 순종의 의미입니다.

또한 복종이란 남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남편이 무슨 말을 해도 진지하게 들어주어야 합니다. 여러분! 이 말을 잘 듣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남편이 무슨 말을 하는데 아내가 “아, 당신 말 들을 것도 없어. 시끄러워.” 그 남편은 어디 가서 기를 펼 수가 업습니다. 아내가 남편 말을 잘 들어주셔야 합니다. 우리들이 대화할 때 종종 이런 분들을 봅니다. 자기 이야기만 실컷 하고 남의 이야기는 들어줄 생각도 없습니다. 남이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아니고, 난 바빠, 가야해.” 자기 이야기만 하고 떠나버립니다. 이런 사람은 바보입니다. 그런 사람은 존경받을 수가 없습니다. 훌륭한 리더는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입니다. 아내들은 남편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혹 남편의 이야기 중에 틀린 이야기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들어주십시오.

어떤 아내들은 지혜가 없어서 남편이 무슨 성경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당신 이거 틀린 거야. 우리 목사님이 말씀하시는데 그거 아니라고 하더라.” 이렇게 말하면 안 됩니다. 남편 말은 무조건 맞는 것입니다. 그럼 남편이 뭐라고 말하는지 아십니까? “그렇게 좋으면 네 목사하고 가서 살아라.”라고 합니다. 제가 무슨 수로 교인들하고 다 살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오직 남편을 최고로 여기시고, 남편 말을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복종이라는 것은 남편을 존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에서 자리에 앉더라도 상석은 남편자리입니다. “얘들아! 거기는 아빠 자리니까 거기는 앉지 마.” 식사를 해도 “아빠 오시면 식사하자. 좀 기다리자.” 맛있는 먹을 것이 있어도 “야! 아빠 오시면 같이 먹자. 너희들 좀 참아라.” 아이들에게는 먹고 싶은 것을 참게 하는 것이 굉장히 좋은 훈련입니다. 제가 언젠가 마시멜로우 이야기를 해 드렸습니다. 미국 아이들이 먹는 사탕으로 실험을 했습니다. “30초만 이거 안 먹고 참고 있으면 하나를 더 줄게.” 그런데 그것을 못 참고 먹는 아이들이 많다고 합니다. 어떤 아이들은 하나를 더 받으려고 먹고 싶은 것을 참고 있습니다. 나중에 그 아이들의 20년 후를 보니까 참은 아이들이 다 훌륭하게 되었답니다. 먹고 싶지만 아빠 기다리려고 참는 아이들은 참을성이 길러집니다. 그 아이들이 리더가 되고 성공적이 인물이 됩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남편이 조금 늦게 퇴근하니까 아이들이 먼저 식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럼 그냥 아내가 “여보! 밥도 안 먹고 지금 시간에 오면 어떡해? 자장면이라도 사먹고 오지. 숟갈 하나 들고 와, 그냥 같이 먹게.” 애들이 막 음식을 흘린데 그냥 앉혀서 먹게 합니다. 이것은 잘못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남편을 가정의 가장으로 생각한다면 좀 치우고 상을 새로 차려 줘야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가정이 안 그럴 것입니다. 저희 집부터 그러니까요. 애들이 먹던데 앉아서 먹는 거지 새 상 받는 경우는 없습니다. 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정말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은 남편을 가정의 최고의 자리에 세워주는 것입니다. 남편들이 밖에 나가서 얼마나 고생합니까? 경쟁사회에서 자칫하면 잘릴 수도 있고, 늘 두려움이 있습니다. 가정에 오면 정말 아내하고 대화 못하고, 아내하고 말할 시간도 없고 외톨이 되는 것이 남편입니다. 어찌 보면 불쌍합니다. 남편들이 공휴일에 좀 쉬면 너무 바가지 긁지 마시고 쉬게 내버려두십시오. 얼마나 정말 힘들면 그렇겠습니까? 그런 날은 보양식도 해서 남편 기도 살려주고, 건강도 챙겨주십시오.

그랬더니 어떤 집사님은 이런 말을 합니다. “목사님! 모르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저는 우리 남편이 쉬는 날 늘 보양식을 해 줘요.” 뭘 해주냐고 물었더니 삼계탕을 해 줍니다. “아! 집사님 대단하시네요.” 그랬더니 그 집사님이 대답합니다. “목사님! 삼계탕이 그 삼계탕이 아니고요, 삼양라면에 계란하나 풀어준 거예요.”

남편을 존귀하게 여기는 아내가 대우를 받을 수 있습니다. 내 남편을 왕처럼 대우해 주면 내가 왕비처럼 대우를 받을 수 있습니다. 남편을 종처럼 부려먹으면 나도 하녀처럼 그렇게 부림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잠언 12장 4절에 보니까 “어진 여인은 그 지아비의 면류관이나 욕을 끼치는 여인은 그 지아비의 뼈가 썩음 같게 하느니라”라고 합니다. 여러분! 지혜로운 아내가 필요합니다. 성 어거스틴은 그의 참회록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아버지를 마치 주님을 모시듯 대하셨다.”

미국에 가면 헨리 포드 기념관이 있습니다. 헨리 포드는 미국의 자동차 왕입니다. 그가 처음 자동차를 만들 때 자기 집 헛간에서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이 다 비웃었습니다. “세상에 스스로 가는 차가 어디 있냐? 그런 건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헨리 포드는 몇 번이나 중단하고 싶었지만 아내의 격려와 믿음으로 자동차를 만들어내게 됩니다. 

기념관에 이런 글이 쓰여 있습니다. “헨리 포드는 꿈꾸는 자이고, 그의 아내는 믿음의 사람이다.” 아내가 믿음 좋은 여인이었습니다. 남편을 믿어주었습니다. “당신은 할 수 있어요. 당신은 해낼 거예요. 내가 기도하고 있어요.” 남편을 늘 격려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드디어 1883년 낡은 헛간에서 굉음을 울리며 자동차가 튀어나왔습니다. 아내가 남편을 믿어주니까 헛간에서 자동차가 달려 나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내들이여! 남편을 믿어주시기 바랍니다. 남편들은 불가능을 가능케 할 것입니다. 아내의 격려, 아내의 믿음, 아내의 기도, 그것이 남편을 바로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아내들이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남편들에게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남편들아! 아내를 제 몸같이 사랑하라.” 

25절 말씀을 읽어보시겠습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젠 남편들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대우 받으려고만 하지 말고 자신의 아내를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서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것처럼 남편들도 아내를 사랑하라. 자기의 몸을 사랑하듯이 아내를 사랑하라. 내 생명을 바치듯이 아내를 사랑하라.” 여러분! 정말 그렇게 아내를 사랑합니까?

특별히 아내들은 연약합니다. 중년 여성들 가운데 3분의 1 이상은 우울증을 한 번씩 경험한답니다. 고부간의 갈등으로 받은 상처, 남편에게 받은 상처, 자식들에게 받은 상처 때문에 40~50대가 되면 우울증이 생깁니다. 소화가 안 되고, 잠이 안 오고, 의욕을 잃어버리고, 무기력해지고, 사람 만나는 것을 기피하게 됩니다. 자꾸 죽고 싶은 맘이 생깁니다. 삶의 의욕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남편들은 그 아내의 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적어도 일주일에 적어도 한 두 시간 정도는 아내와 함께 보내는 시간을 만들어야 합니다. 쇼핑도 같이 하고, 식사도 같이 하고, 대화도 같이 해야 합니다. 아내와만 같이 보낼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아내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시는 겁니다. 아내의 아픔을, 아내의 고통을, 아내의 기쁨을 함께 나누는 분이 훌륭한 남편입니다. “남편들아, 아내를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

골로새서 3장 19절에 보니까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라고 나옵니다. 연약한 아내를 폭력으로 제압하려고 하는 남자가 가장 어리석은 바보 같은 남자입니다. 연약한 여인인 아내를 괴롭게 하지 말고 그 아내를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 자기희생적인 사랑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남자 분들이 자기 좀 아프면 견딜 수 없다고 약 사오라고 난리를 치면서, 아내가 아프면 약 사먹지 왜 그리 아파하느냐고 합니다. 아내의 손목을 끌고 병원에 가시는 그런 남편들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아내의 허물까지도 덮어주는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내는 완전한 사람이 아닙니다. 남편이 불완전하듯이 아내들도 실수할 수 있고 허물이 많습니다. 그럼 넒은 남편의 사랑이 그 아내의 허물까지도 덮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아름다운 미래의 우리 아내를 꿈꾸면서 아내를 격려해 주고, 아내를 칭찬해주고, 아내를 세워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훌륭한 남편입니다.

아내의 부족함은 남편이 채워주고, 남편의 부족함은 아내가 채워줘서 둘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 몸처럼 아끼고 사랑하는 것, 이것이 바로 진정한 아내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부부는 서로를 잘 알아야 되고, 서로를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정말 내 아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내 남편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 아내가 이런 음식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따지고 보면 아닌 경우도 많습니다. 정말 우리가 아내를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소와 사자가 결혼을 했다고 합니다. 물론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소가 신부이고 사자가 신랑이었습니다. 둘은 서로를 너무너무 끔찍이 사랑해서 결혼했습니다. 소는 정말 사자를 잘 섬기려고 최상급의 풀을 뜯어다가 사자에게 대접했습니다. 사자는 그 풀을 먹는 것이 얼마나 곤욕인지 모릅니다. 이번에는 사자가 자기 아내인 소에게 최상의 육질을 가진 고기를 대접했습니다. 소는 고기를 먹는 것이 얼마나 고욕인지 모릅니다. 서로 참고 참다가 결국 폭발해서 못살겠다고 헤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나는 그래도 최선을 다했는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이 좋아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소는 풀을 먹어야지 어떻게 고기를 먹겠습니까? 사자는 풀을 못 먹습니다. 고기를 먹어야 합니다. 상대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화가 많이 필요합니다. 부부간에 대화가 필요합니다. 서로 마음을 열고 차 한 잔 하면서 충분히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의 방해도 받지 않고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같이 산책하면서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드십시오. 그래야 서로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가 결혼주례를 할 때마다 젊은 부부들에게 늘 하는 말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4절 이하의 말씀을 늘 빼놓지 않고 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사랑은 투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정말 우리가 사랑합니까? 사랑한다면서 성을 낼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대화하다가 툭하면 성을 내버립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부단히 참는 것입니다. 사랑은 참아주는 것입니다. ‘우리 남편이 변할 날이 올 거야.’ ‘우리 아내가 더 성숙해질 때가 올 거야.’ 무던히 기다려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당신 집안은 제대로 고등학교나 나왔어? 우리 집안을 봐!  학사, 석사, 교수가 천지야.” 자랑하지 마십시오. 어리석은 것입니다. 함부로 대하지 마십시오. 부부라고 해서 함부로 대하면 안 됩니다. 무례히 행하면 안 됩니다. 부드러움과 온유함과 기다림으로 상대를 대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미국에 부흥 강사로 유명한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있습니다. 지금은 파킨슨병에 걸리셔서 제대로 활동을 못하십니다만, 그분을 기념하는 도서관이 있는데 2년 전 타계한 부인 루스 그래함의 묘가 그 옆에 있습니다. 그 묘에 가면 묘비에 이런 글이 쓰여 있습니다. “공사 끝, 오랫동안 참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무슨 이야긴가 하면 지나가다 보면 ‘공사 중’이라는 푯말을 보게 됩니다. ‘통행에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라는 푯말을 차를 타고 가다가 루스 그래함이 보게 되었답니다. 그때 유언을 했답니다. 

내가 죽으면 내 묘비에 저렇게 써 달라고. 그래서 그녀의 묘비에 그렇게 기록이 남게 되었답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공사 중입니다. 공사 중이니 아직 불완전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본의 아니게 남에게 상처를 주고받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말 한 마디가 남에게 상처를 줄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 공사가 끝날 때는 모든 것이 완성됩니다. 우리가 은혜로 주님 앞에 설 때 그 모든 공사가 다 끝나고 우리는 영화로운 몸을 입을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 앞에 사랑스러운 하나님의 백성으로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공사가 끝나기까지는 우리는 불완전하기 때문에 공사 중입니다. 우리 남편도 지금 공사 중입니다. 우리 아내도 지금 공사 중입니다. 그래서 불완전 합니다. 서로 상처를 주고받기도 하고, 치고 박기도 하고, 서로 삐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서로 이해하고 받아주셔야 합니다. 아직 공사 중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서로를 보면서 그런 마음을 가지셔야 합니다. 내 아내에게, 내 남편에게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같이 부족한 사람과 지금까지 살아준 게 너무 고맙다고 그런 마음을 가지셔야 합니다. 우리는 툭하면 “당신 나 만나서 횡재한 줄 알아!”라는 말을 합니다. 

하지만 이런 말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당신이 나 버리지 않고 나하고 같이 살아준 것 너무 고마워!” 이런 마음으로 사는 부부가 진짜 행복한 부부입니다. 서로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내에게 감사하고, 남편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행복의 출발입니다. 모든 부부들이 이런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서로를 소중히 여기며 사랑하고 순종하는 아름다운 부부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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