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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 이웃을 네몸과 같이 (롬 13: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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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웃을 네몸과 같이 (롬 13:8~10)
 

저는 5월 가정의 달을 맞이해서, 삼 주에 걸쳐서 ‘화목한 가정’, ‘그리스도인의 부모공경’, ‘주 안에서 자녀를 양육하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오늘은 ‘그리스도인의 이웃관계’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화목한 가정생활 뿐 아니라 건전한 이웃관계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로, 우리는 이웃이 누구인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일차적으로 부모와 인간관계를 맺는 것으로 생을 시작합니다. 형제들이 있는 경우에는 형제들과의 인간관계가 추가 됩니다. 그리고 자라면서 친구들을 사귀고 교우관계를 맺습니다. 학교를 다니면서 선후배의 관계도 맺습니다. 취직을 해서는 직장 동료들과 관계를 맺습니다. 장성해서 배필을 만나 부부의 관계를 이루고, 독립된 가정을 꾸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처럼 친분으로 맺어진 인간관계 뿐 아니라, 서로 알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얼굴이나 이름도 알지 못하는 농부들이 재배한 곡물을 사다 먹고, 미지의 목축업자가 사육한 육고기를 사다 먹습니다. 우리가 시장에서 사다 쓰는 물건들은 저마다 생산자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에 대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지만, 실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평소에 친분이 있는 사람들 뿐 아니라 우리 사회의 구성원 모두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비단 한국인들뿐 아니라 외국인들도 알게 모르게 우리 각 사람과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를 중심으로 해서 내 가족, 내 친구, 내 직장 동료 등의 좁은 차원의 인간관계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나와 직접적인 친분이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호의를 가지고 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7장 26절에 보면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년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셨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피부색이 다르고, 얼굴생김새가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사는 지역이 다르고, 관습이 다를지라도 실은 한 조상 아담에게서 나온 자손들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로부터 중국인들은 사해형제(四海兄弟)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이는 “온 천하 사람이 다 형제와 같다”는 뜻입니다. 

지난날 미국인들이 사해형제의 개념을 알았다면, 자유를 위해 신대륙으로 건너온 그들이 아프리카 흑인들을 사다가 노예로 부리는 일이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시 미국인들은 자기들의 자유와 인권만 존중할 줄 알았지, 흑인들이나 타국인들을 존중할 줄 몰랐습니다. 이는 그들이 자기와 남을 구분하는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기독교를 신봉했으면서도 성경의 가르침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나와 남을 구별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 대신 나 이외의 사람들을 이웃이라고 가르칩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누가 우리의 이웃인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한번은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할 목적으로 묻기를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르시기를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하시니,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르시기를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다시 여쭙기를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라고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이런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다” 

여기까지 말씀하신 다음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이에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하니, 예수님께서 이르시기를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서 ‘내 이웃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 만난 자를 이웃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나 사마리아인은 그를 이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인즉 그 제사장과 레위인도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어주었어야 했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 곧 어려운 사정에 처한 사람들만 이웃이 아니라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이 우리의 이웃입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우리는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한층 더 관심을 갖고 보살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3장 3절에 이르기를 “자기도 함께 갇힌 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자기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내가 남의 종이 되고 싶지 않다면, 나도 남을 종으로 부리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배고픔을 느낄 줄 안다면, 굶주리는 사람들을 동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처럼 이웃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배려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심판주이신 예수님과 영생에 들어갈 의인들이 주고받을 대화가 나옵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그들이 대답하기를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라고 하니, 주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다음, 영벌에 처할 자들에게 이르시기를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저들이 대답하기를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라고 할 것입니다. 그 때 주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고 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이웃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을 이웃으로 여겨야 하되, 특히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이웃으로 알고 보살펴 주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이웃에 대한 개념이 희박하다는 것입니다. 이웃이 없으면 남이 있을 뿐입니다.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보면서 남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관심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은 장차 주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이웃이 되어야 하고, 그 같은 행동을 통해서 이웃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이웃에게 악을 행치 말아야 합니다.

십계명의 다섯째 계명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이요, 여섯째는 살인하지 말라는 것이요, 일곱째는 간음하지 말라는 것이요, 여덟째는 도적질하지 말라는 것이요, 아홉째는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것이요, 열 번째는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모 공경은 제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이지만, 나머지 계명들은 다 이웃에게 대한 것입니다. 이 계명들은 언뜻 우리 각 사람의 경건을 위한 계명처럼 보이지만, 실은 이웃을 위해 지켜야 할 계명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개인의 경건을 초월해서 사람이면 누구나 그 이웃에 대하여 지켜야 할 계명들이라는 말입니다.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 증거, 탐욕은 사람이 그 이웃에 대하여 범할 수 있는 대표적인 악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은 행위는 이웃을 해치는 것이므로 악한 것입니다. 

한 가지 공통점은, 여섯째 계명부터 열 번째 계명까지를 보면, 하나 같이 “하지 말라”는 말로 되어 있습니다. “하라”는 것은 적극적인 명령이지만, “하지 말라”는 것은 소극적인 명령입니다. 1세기에 힐렐이라는 유명한 랍비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와서 “선생님, 제가 한쪽 다리로 서 있는 동안에 율법과 선지자가 가르친 모든 교훈을 가르쳐 주시면 고맙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힐렐이 대답하기를 “네가 싫어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말라 이것이 율법의 요점이다”고 했습니다. 참으로 합당한 가르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진정으로 이웃을 배려하는 것은 이 소극적인 명령을 생활 속에서 어김없이 지키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적극적으로 이웃을 위해 선한 일을 하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소극적인 배려는 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차를 주차할 때는 다른 차들이나 행인들이 통행하기에 어려움이 없도록 장소를 잘 선정해서 주차해야 합니다. 대로 한복판에서 비상등을 켜고 버티는 행동은 자기 한 사람의 편의를 위해 법규를 어기고 많은 사람을 위험하게 만드는 몰상식한 짓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보이스 피싱으로 사람들을 속여서 돈을 가로채는 자들은 상대방을 이웃이 아닌 범죄의 대상으로 알고 있습니다. 노인들에게 엉터리 건강식품을 만병통치약인양 속여 파는 것도 마찬가지로 이웃에 대한 개념이 없는 자들의 악행입니다. 이러한 행동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만 악한 것이 아니라 국민으로서 마땅히 내야 할 세금을 내지 않는 것도 악한 행위입니다. 국가를 속이는 것은 실은 국민 전체를 속이는 것과 같습니다. 자기가 남에게 속는 것이 싫으면 자기도 남을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누가 자기 집 앞에 쓰레기를 버리면 싫어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도 남의 집 앞에 쓰레기를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언젠가 교통공원 건너편의 영산강 뚝을 거니는데, 승용차 한 대가 서더니 어느 아버지와 청소년 아들이 내렸습니다. 아버지가 트렁크를 열고는 아들과 함께 유리로 만든 진열장을 꺼내서 길 위에서 아래로 던졌습니다. 저는 그 광경을 보면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남자가 혼자 와서 그랬더라면 아마 충격이 덜 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청소년 아들을 데리고 와서 그런 짓을 하는 것을 보면서, 저렇게 보고 배운 자녀가 어떻게 법과 질서를 지키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그 아버지는 아들에게 영리하게 사는 법을 가르치려고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웃에게 해를 끼치는 아들을 만들 뿐입니다.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지 않은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고 상식에 속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이 같은 것조차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처럼 상식이 없는 행동을 하는 것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의 편의만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본문에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반드시 자기의 재산을 팔아 나누어주거나 봉사활동에 힘써야만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가장 기본적인 개념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내가 싫어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시키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무시당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렇다면 나도 다른 사람을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기준을 생활 속에서 엄격히 지켜서 우리 사회에 귀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불신 이웃들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은 남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을 결코 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자연스레 인륜에 대한 계명들을 준수하는 것이 될 것이요, 그것은 말로 전도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전도의 효과를 거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 번째로, 우리는 이웃에게 적극적으로 선을 행해야 합니다.

랍비 힐렐은 “네가 싫어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말라 이것이 율법의 요점이다”고 했으나, 예수님께서는 여기 머물지 않고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계명의 적극적인 실천을 가르치셨습니다. 내가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하지 않으면 적어도 남을 해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그런 정신을 갖고 산다면 우리 사회에 범죄가 거의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질서가 잡힌 사회를 만들 수는 있어도 인정이 넘치는 사회를 만드는 데는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피하여 갔을 뿐입니다. 그들 때문에 그 사람이 강도를 만난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그들은 강도 만난 사람의 물건을 빼앗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서둘러 갈 길을 갔을 뿐입니다. 이렇게 볼 때, 그들은 적어도 힐렐의 가르침을 어긴 것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지 못했다고 지적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준에 의하면 그들은 악을 행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적극적으로 이웃에게 선을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야고보서 4장 17절에 보면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고 했습니다. 

또한 야고보 선생은 말씀하기를 “15)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17)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웃을 보았으면 힘닿는 데까지 돕고 나누어 주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분배의 문제를 놓고 국민들 간에 갈등이 큽니다. 가진 자들은 너무 많이 갖고 있고, 못 가진 자들은 너무 가진 것이 없습니다. 점차 중산층이 사라지고 피라미드처럼 사회가 양극화되어 갑니다. 가진 자들은 자본주의 사회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주장하고, 못 가진 자들은 분배가 잘못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이렇게 양측의 갈등이 지속되는 사회는 후진 사회일 뿐 아니라 불의한 사회입니다. 

성경은 모든 재화는 다 하나님의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내가 땀 흘려서 번 것이라도 실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재물을 내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한 일에 사용해야 합니다. 너무 잘 사는 사람도 없고 너무 못 사는 사람도 없이 모든 국민이 골고루 잘 사는 사회가 공의로운 사회요 가장 좋은 사회입니다. 또 그렇게 정치를 하는 것이 최상의 정치입니다. 

저는 모세의 율법인 레위기를 읽으면서 그 세심한 배려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레위기 19장 9절 이하에서 이렇게 명하셨습니다.

“9)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너는 밭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너의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10)너의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너의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11)너희는 도적질하지 말며 속이지 말며 서로 거짓말 하지 말며 12)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13)너는 네 이웃을 압제하지 말며 늑탈하지 말며 품꾼의 삯을 아침까지 밤새도록 네게 두지 말며 14)너는 귀먹은 자를 저주하지 말며 소경 앞에 장애물을 놓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15)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치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 자라고 두호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지며 16)너는 네 백성 중으로 돌아다니며 사람을 논단하지 말며 네 이웃을 대적하여 죽을 지경에 이르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17)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이웃을 인하여 죄를 당치 않도록 그를 반드시 책선하라 18)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자, 어떻습니까? 지금으로부터 3500년 전에 주신 율법의 내용이 21세기의 그 어느 나라의 법률보다 더 정의롭고 온정이 넘치지 않습니까? 현대의 법률 가운데는 사회적인 강자를 위한 법이 적지 않습니다. 소위 이익 단체들이 자기들에게 유리한 법률을 만들기 위해 로비를 펼칩니다. 그러나 그런 방식으로 법이 만들어지는 사회는 불의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법은 만민에게 평등해야 한다는 원칙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익 집단의 로비에 의해서 법률이 만들어진다는 것은 법 제정의 기본 원칙이 없다는 말과도 통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생활의 원칙으로 삼아야 합니다. 구원은 율법을 지켜서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받지만, 구원 받은 성도들은 율법의 원칙에 따라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적극적으로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제 우리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부모를 공경하고 화목한 가정을 이루는데 만족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관심을 이웃 관계로 넓혀 나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먼저 우리의 이웃이 누구인지 알고, 둘째로 이웃에게 악을 행치 말고, 셋째로 적극적으로 이웃에게 선을 행해야 하겠습니다. 믿는 우리가 먼저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주님의 계명을 따라 살아감으로 삭막한 이 사회를 이웃 사랑이 살아 숨 쉬는 사회로 변화시켜야 나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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