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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난중에도 감사하라 (시 119:65~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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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중에도 감사하라 (시 119:65~72) 
 
 
1. 인생고(人生苦) 

목회를 해오면서 겪은 상황 가운데, 지금 그 분의 입장과 형편에 대해 어떤 말을 해주어야 할지, 무슨 말로 위로를 해주어야 할지, 참으로 난감한 고난을 겪는 성도들을 종종 만났습니다. 그럴 때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하나님은 왜 그에게 이런 고난을 허락하셨는지를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저 만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종교인, 철학자, 신학자 등 수많은 사람들이 이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하여 애를 썼습니다. 그들은 과연 그 답을 찾았을까요? 여러분은 그 답을 알고 계십니까? 왜 인생에게 고난이 오는 것일까요?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고난의 이유를 묻는 것은 어리석은 질문’이라고요. 그 이유는 우리가 인생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인생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고난이 온다는 것이죠. 그래서 “인생고(人生苦)”라는 말이 생겼나 봅니다. “태어난 것이 괴로우며, 늙는 것이 괴로우며, 병드는 것이 괴로우며, 죽는 것 또한 괴로움이라.” 또한 인생은 때로는 험한 산과 높은 고개를 넘어야 할 때가 있고, 때로는 넓은 강과 험한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를 건너야 할 때도 있으며, 때로는 위험하고 험한 길과 평탄하지 않은 길을 걸어야 할 때가 있기 때문에, 모든 인생은 이러한 것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고난이 있는 그 자체가 바로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한시(漢詩) 중에 사강(思江) 정윤칠(鄭胤七)이라는 분이 지은 “人生苦(인생고)”라는 시가 있습니다. 

苦痛一有消去(고통일유소거) 한 가지 고통이 없어지면 
二有來患亂(이유래환란) 두 가지 환란이 찾아오네. 
一喜二悲苦(일희이비고) 한 번은 기쁘고 두 번은 슬프고 괴롭고 
煩惱元兇苦(번뇌원흉고) 고통은 마음을 괴롭히는 원흉. 
試鍊爲花(시련위화) 시련의 꽃 苦滿是油泥(고만시유니) 고통에 찌든 
人守觀醜惡(인수관추악) 사람의 추악함 지켜본다. 
顔面老(안면로) 얼굴은 늙었고 
森羅萬象不存在(삼라만상부존재) 모든 것이 존재하지 않네. 

인생이라는 것 자체가 필연적으로 고난을 동반하는 것, 그래서 고난이 없는 것은 인생이 아니며, 고난을 피하려거든 생명을 중단하라는 말과도 같다는 것이 저들이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에 동의하십니까? 그래서 여러분도 고난을 만나면 ‘사람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이것이 인생이다’, 혹은 ‘운명이겠거니’ 하고 살아가시겠습니까? 성경은 고난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고 있을까요?

2. 고난의 이유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인생에게 있는 고난의 이유에 대해 찾은 몇 가지 답들이 있습니다. 

❶ 첫째는 반복되거나, 이미 습관처럼 굳어버린 죄의 행실에 대한 엄중한 경고로서 고난이 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정신이 번쩍 들 만한 사건이나 상황이 아니면 좀처럼 죄에서 빠져나오기 어렵다는 것을 아시고 고난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❷ 두 번째는 경고에서 조금 더 나아가 즉 일종의 징벌로서 고난이 주어집니다. 다양한 환경이나 방법을 통한 성령님의 여러 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계속 죄에 머물 때 하나님께서 징계의 채찍을 드시는 것이죠. 그렇다고 모든 고난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보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❸ 세 번째로 징벌과는 비슷하지만 조금 차원이 다른 것으로 지금의 시련과 고난을 우리 스스로가 불러들인 것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발을 디디고 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과 육신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환절기엔 감기에 걸리고, 운동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체력이 약해지고, 그래서 다른 사람에겐 그냥 넘어갈 질병이 어떤 사람에게는 심각한 것이 되기도 합니다. 지방 섭취를 많이 하면 고혈압이나 다른 많은 질병에 걸릴 가능성이 더욱 높아지며, 많은 스트레스와 염려와 불안 가운데 있게 되면 몸이 긴장하게 되고, 혈압이 정상적이지 못하며, 혈액의 공급이 각 기관마다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게 되지요. 그러면 몸의 면역기능이 저하되고, 조직에 궤양이나 혹은 암이 발병하거나 또 다른 질병이 오게 됩니다. 그 누구를 탓할 수도 없는, 그리고 탓해서도 안 되는, 자업자득으로서의 고난도 있다는 말입니다. 

❹ 네 번째는 다른 이의 의도적인 죄악이나, 혹은 악의는 없었다고 할지라도 다른 사람 때문에 여러분이 겪어야 하는 억울한 시련과 고난도 있습니다.

❺ 다섯 번째는 하나님을 향한 여러분의 믿음에 대한 테스트로서의 고난도 있습니다. 평안할 때는 여러분이 하나님을 얼마나 신뢰하는지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위기 상황이 오면 비로소 믿음의 참된 모습이 드러나지요. 여러분이 붙들고 의지하는 것이 돈인지, 사람인지, 아니면 여러분 자신인지, 정말 하나님인지…. 

❻ 여섯 번째는 여러분 자신을 연단하고 성장시키기 위한 <훈련>으로서의 고난도 있습니다. 고난과 시련을 통해 여러분의 믿음과 삶의 태도가 훈련되기 때문입니다.

❼ 일곱 번째는 여러분의 모난 성격과 기질적 약점, 그리고 잘못된 인격을 다듬고 깎아내는 하나님의 작업으로서의 고난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그 모난 것 때문에 먼저는 여러분 자신이 계속 불행해 질 수 있고, 그리고 다른 이들을 불행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다듬으시며 깎아내시길 원하셔서 고난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❽ 여덟 번째는 여러분을 겸손하게 만드시려는 하나님의 배려로서의 고난입니다. 우리는 아주 작은 성취를 이루고 그로 인하여 다른 사람의 칭송을 받으면 자신의 힘으로 그렇게 된 줄 알고 스스로 영광을 취하며, 나아가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할 영광까지도 가로챌 때가 있습니다. 이런 본성적인 교만을 겸손으로 바꾸시려고 하나님이 고난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❾ 아홉 번째로 여러분에게 오는 고난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특별한 섭리와 계획일 수도 있습니다. 고난을 통하여 여러분이 하나님의 거룩한 도구로 사용되는 것이죠. 예레미야나 호세아처럼요!

이상에서 말씀드린 것만 해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고난의 또 다른 유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3. 고난의 유익

1) 시편 119편은

119편은 시편에서 가장 긴 시로서 176개의 절로 되어 있습니다. 이 시의 특징은 22개의 히브리 알파벳 순서를 따라 각각 8개의 절로 구성된 22개의 단락으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119편의 진정한 특징은 따로 있습니다. 독일어 성경은 이 시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찬양하며, 의지하고, 사용하는 기독교인의 황금 A B C 이다.” 이 설명처럼 119편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찬사와 그 말씀을 믿고 행하는 자의 복에 대한 설명이 풍성하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❶ 먼저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10개의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데요. “법(토라-지시, 또는 훈령: 25번)”, “말씀(다바르-하나님의 계시: 20번)”, “말씀(이므라: 19번)”, “계명"(미츠와-분명하고 절대적인 명령: 복수형 21번, 단수집합명사 1번)”, “율례(후킴-제정된 법률: 21번)”, “규례(미슈포트-판결, 심판: 단수형으로 4번)”, “법도(피쿠딤-훈령: 21번)”, “증거"(에다-선포, 증거: 복수형으로 22번, 단수형으로 1번)”, “도(데레크-하나님의 율법에 규정된 삶의 형태: 복수형으로 5번, 단수로 6번)”, 그리고 “길(오라흐-도: 시편에서 5번 사용됨).” 입니다.

❷ 그러고 나서 자신은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한다(16,24,35,47,70,77,92, 143,144).” “사랑한다(47~48,97,113,119127,132,159,163,165,167).” “지킨다(8,17,34,44, 56~57,60,67,88,100~101).” “묵상한다(15,23,27,48,78,97,99,148).” “기뻐한다(14,74, 162).” “사모한다(23,37,40,50,88,93,107,149,154,156,159).”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다양한 이름으로 표현한 후에, 자신이 그 말씀을 얼마나 즐거워하고 사랑하는 지를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❸ 22개의 알파벳을 따라 구성된 각 단락은 말씀의 풍성한 유익을 다양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1절부터 8절에서는(알렙) ‘전심으로 하나님을 구하고 말씀을 지키는 사람의 축복’, 둘째 단락은 ‘말씀이 행위를 정결하게 한다(“베트” 9~16)’, 셋째 단락은 ‘주의 증거는 나의 즐거움이요 나의 모사(“기멜” 17~24)’라고 노래합니다. 넷째 단락에서는 ‘환난에서 구원을 얻게 하는 말씀(“달렏” 25~32)’, 다섯째 단락은 ‘주의 말씀을 행하게 하시고 나를 살리소서!’(“헤” 33~40)라고 노래합니다. 

여섯째 단락은 말씀을 증거하고 전하기를 원함(“와우” 41~48), 일곱째 단락은 유일한 소망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자인” 49~56), 여덟 번째는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우선으로 하여 생활하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헤트” 57~64). 아홉 번째인 오늘 본문의 말씀에 와서는 ‘고난당한 것이 유익’이라고 노래합니다(“테트” 65~72). 열 번째는 시인의 여러 가지 소원들이 기록되어 있고(“요드” 73~80), 열한 번째는 고난 중에서도 말씀을 지키면서 구원을 요청하고 있습니다(“카프” 81~88). 열두 번째는 말씀의 영원 불변성을 노래하고(“라멛” 89~96), 열세 번째는 말씀이 주는 지혜를 노래하며(“멤” 97~104), 열네 번째는 말씀을 지키면서 고난으로부터의 구원을 호소하고 있습니다(“눈” 105~112). 

열다섯 번째는 말씀을 지키는 것이 시인의 소망임을 노래하고 있습니다(“싸멬” 113~120). 열여섯 번째는 말씀을 정금보다 더 귀하게 여기고 지킬 것을 노래하며(“아인” 121~128), 열일곱 번째는 말씀을 사모하여 헐떡임을 표현하고(“페” 129~136), 열여덟 번째는 말씀의 권위가 위협을 받을 때에 말씀을 더욱 사랑함을 노래합니다(“차데” 137~144). 열아홉 번째에서는 새벽에 일어나 말씀을 묵상함을 노래하고(“코프” 145~152), 스무 번째는 말씀을 멸시하는 원수의 손에서 구해 주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레쉬” 153~160). 스물한 번째는 박해 중에서도 말씀을 두려워하며 사랑함을 노래하고 있습니다(“신-쉰” 161~168). 스물두 번째는 기도의 응답과 구원을 요청하고 있습니다(“타우” 169~176). 

자, 여러분, 한 번 보세요! 어떤 분들은 시편 119편을 지은 분이 다윗 왕이라고 하지만, 사실 정확하게 시인이 누구인지, 어느 시대 사람인지를 알 길은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너무나 분명한 것은 그는 말씀의 사람이라는 것이죠. 이름만 말씀의 사람이 아니라, 그는 말씀이 어떤 것인지를 알았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다양한 이름으로 부르고 있습니까? 말씀이 주는 유익을 얼마나 풍성하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또한 자신이 이러한 말씀을 얼마나 사랑하고 즐거워하는지를 표현하고 있지 않습니까?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 그가 고난으로 인하여 얻은 유익도 이 말씀과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시인은 67절에서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라고 노래합니다. 이 말씀을 다른 성경은 “고난을 당하기 전에는 방황했으나,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킨다”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고백대로 그는 삶의 목표와 인생의 가치에 대해서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그보다 범위를 좀 더 좁히면, 그는 성경 말씀이 정말 가치가 있는지, 정말 성경대로 살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복을 주시는지, 정말 말씀대로 믿으면 그 말씀대로 역사가 일어나는지에 대해서 방황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랬던 그에게 고난이 닥쳤습니다. 시인이 당한 고난이 어떤 것인지를 알 길은 없습니다. 다만 9절,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라는 말씀을 보아 시인은 청년이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청년들이 당하는 시련과 고난은 정말 많습니다. 또 청년들은 경험이 부족하고 의지가 약하며 감정에 치우쳐 행동하기 쉽기 때문에 그들이 당하는 고난과 시련은 더 커질 수 있고, 고난의 기간도 더 길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10절에 나오는 대로, 죄에 대한 유혹은 젊은이들에게 더 크고 강한 법이고, 따라서 시인으로서도 죄의 유혹은 이겨내기 힘든 시련이었습니다. 

내가 주의 교훈들을 지켰사오니 비방과 멸시를 내게서 떠나게 하소서(22) 고관들도 앉아서 나를 비방하였사오나(23) 또한 그는 자신의 영혼이 티끌에 붙었다고 부르짖으면서, “나를 살려 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25). ‘영혼이 티끌에 붙었다’는 말은 거의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기 직전에 있는 것을 뜻합니다. 그의 고난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이 가는 부분이지요. 나의 영혼이 눌림으로 말미암아 녹사오니(28)또 시인은 39절에서 “자신이 두려워하는 대적들의 훼방을 떠나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를 해하려는 대적들이 많았다는 말입니다. 

내가 두려워하는 비방을 내게서 떠나게 하소서(39) 내가 나를 비방하는 자들에게 대답할 말이 있사오리니(42)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50) 교만한 자들이 나를 심히 조롱하였어도(51) 악인들의 줄이 내게 두루 얽혔을지라도(61) 고난당하기 전에는(67) 교만한 자들이 거짓을 지어 나를 치려하였사오나 나는 전심으로 주의 법도들을 지키리이다(69)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71) 교만한 자들이 거짓으로 나를 엎드러뜨렸으니(78) 내가 연기 속의 가죽 부대 같이 되었으나(83) 주의 종의 날이 얼마나 되나이까 나를 핍박하는 자들을 주께서 언제나 심판하시리이까(84) 

주의 법을 따르지 아니하는 교만한 자들이 나를 해하려고 웅덩이를 팠나이다(85) 그들이 이유 없이 나를 핍박하오니 나를 도우소서(86) 그들이 나를 세상에서 거의 멸하였으나(87) 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내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 내가 주의 법도들을 영원히 잊지 아니하오니 주께서 이것들 때문에 나를 살게 하심이니이다. 나는 주의 것이오니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의 법도들만을 찾았나이다. 악인들이 나를 멸하려고 엿보오나 나는 주의 증거들만을 생각하겠나이다(92~95). 나의 고난이 매우 심하오니(107) 나의 생명이 항상 위기에 있사오나(109) 

악인들이 나를 해하려고 올무를 놓았사오나(110) 너희 행악자들이여 나를 떠날지어다(115) 나를 박해하는 자들에게 나를 넘기지 마옵소서(121) 주의 종을 보증하사 복을 얻게 하시고 교만한 자들이 나를 박해하지 못하게 하소서(122) 사람의 박해에서 나를 구원하소서(134) 내가 미천하여 멸시를 당하나(141) 환난과 우환이 내게 미쳤으나(143) 악을 따르는 자들이 가까이 왔사오니 그들은 주의 법에서 머니이다(150) 나의 고난을 보시고 나를 건지소서(153) 나를 핍박하는 자들과 나의 대적들이 많으나(157) 고관들이 거짓으로 나를 핍박하오나(161) 잃은 양 같이 내가 방황하오니(176) 이렇게 119편 전체에는 시인이 당한 고난에 대한 표현들이 정말 많습니다. 그만큼 고난이 많고 지독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많았던 그의 고난과 오늘 본문 67절과 71절에 반복적으로 그가 고백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는 고난당하기 전에는 말씀의 귀중함과 그 가치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난을 통해서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를 알게 되었습니다. 말씀이 얼마나 강력하고 위대한지, 그리고 말씀은 믿는 자에게 그대로 역사하는 것임을, 무엇보다 말씀 하나 붙잡는 것이 세상의 그 어떤 것을 붙잡는 것보다 더 잘하는 일임을 깨달았다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죄로 인해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살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그들은 성전 대신 회당을 짓고 율법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회당에서 말씀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영적 부흥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자신들이 패망하여 포로 신세가 된 이유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났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벨론에서 오히려 더 진실해졌고,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유대인의 멸망과 포로 사건은 그들에게 저주라기보다 축복의 기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찰스 콜슨의 책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에 보면 월남전 때 포로가 되어 수용소에 갇혔던 공군 장교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 그리워서 한 사람씩 암송하고 있는 말씀들을 기억해낸 후, 감방 벽을 모스 부호로 두드려서 옆 감방에 있는 동료들과 나누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신참 포로가 들어오기를 간절히 고대했습니다. 신참이 혹시 새로운 말씀을 암송하고 있을까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겨우 간수의 허락으로 신약성경을 빌린 후, 벽돌을 갈아 물에 탄 잉크로 화장지에 베껴 적어 암송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그 열악한 열대 지방의 감옥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성경말씀 때문이었습니다. 말씀이 그들을 살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에게 주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말씀을 얻는 것이 세상의 그 어떤 것을 얻는 것보다 여러분에게 더 가치 있는 일입니까? 
희귀한 책만 모으는 고서 수집가가 우연히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의 말에
따르면 집안 대대로 보관해 오던 오래된 성경을 며칠 전에 버렸다고 했습니다.
“그 책을 인쇄한 사람이 구텐… 뭐라고 하는 사람입디다.”
고서 수집가는 대단히 흥분하여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구텐베르그, 아니었습니까? 당신은 방금 가장 유명한 책 한 권을 그냥 내다버린 거요. 얼마 전에 그런 책이 경매에 붙여졌는데 400만 달러가 넘는 가격에 팔렸소!”
구텐베르그의 성경은 1377년에 인쇄된 것입니다. 최초의 인쇄술로 만들어진 최고(最古)의 성경이었지요. 그렇기 때문에 400만 달러면 우리 돈으로 40억을 넘는 액수입니다. 
그래도 그 사람은 별로 놀라는 기색 없이 이어서 말했습니다. 
“하지만 내가 버린 책은 1달러도 받기 어려웠을 겁니다. 그 책에는 마틴 루터라는 친구가 잔뜩 낙서를 해놨거든요.” 
고서 수집가는 그 말을 듣자 “억” 하고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구텐베르그가 최초로 인쇄한 성경이라는 것만으로도 400만 달러 이상인데, 거기다가 루터가 사용하면서 메모를 한 것이라면 그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죠.

여러분이 사용하시는 성경도 한 번 잘 보관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무튼 여러분, 

기독교는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세워진 종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뜻을 성경책 에 기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은 지혜의 보고입니다. 우주 만물의 기원에 대하여 창세기보다 더 완벽한 자료를 어디서 얻을 수 있겠습니까? 바다를 갈라서 육지같이 건너가게 한 신이 하나님 외에 어디 있으며, 어디서 레위기보다 더 완전한 법정신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민족을 계몽하기 위하여 민수기보다 더 위대한 기록이 있을 수 없으며, 어떤 부흥사의 설교도 신명기보다 더 위대하고 장엄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의 역사서보다 더 정직한 역사서가 없고, 욥기보다 더 위대한 변증서가 없으며, 시편보다 더 진솔한 시가 어디 있겠습니까? 잠언보다 더 가치 있는 삶의 지혜가 없고, 하나님을 떠나서 추구하는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을 철저히 파헤친 전도서 같은 책을 어디서 구할 수 있습니까? 아가서 보다 더 아름다운 오페라는 영원히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선지자들의 예언서는 일점일획도 어김없이 성취되었고 또 성취될 것입니다. 산상수훈보다 더 위대한 윤리가 세상에 없으며, 신약의 서신서를 통하여 우리는 편지가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계시록보다 더 신령한 계시는 필요치 않습니다. 패트릭 헨리우만은 “성경은 지구상에서 출판된 모든 책의 가치를 합한 것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말한 것에 세상 모든 사람이 공감하고 찬성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성경 말씀만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돈, 권력, 과학, 그 어떤 것도 사람을 구할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의 말씀만이 사람을 구할 수 있습니다.(노우호 목사, <숲도 보고 나무도보는 성경 통독집> 중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고난이 유익이 됩니까? 고난을 통하여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를 깨닫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시인은 비록 고난을 통해서 깨달은 말씀의 가치일지라도, 말씀의 가치를 깨달은 것은 너무나도 소중하고 특별한 축복이 아닐 수 없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합시다. 힘들 때 더욱, 고난당할 때 더욱 더 집착하면서 말씀을 봅시다. 말씀이 여러분을 하나님의 사랑에 붙들어 매어줄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여러분의 삶이 회복될 것입니다. 말씀을 깨달음으로 여러분의 심령이 부흥되고, 여러분의 일터와 가정과 교회가 회복될 것입니다. 

4. 고난으로 말씀을 얻는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시편 119편을 지은 분이 누군지를 알 길은 없습니다. 다만 그가 너무나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을 최고로 여기는 사람이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깨달음은 바로 고난의 현장에서 얻은 것이라고 오늘 본문에서 고백했습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고난의 유익이 바로 이것입니다. 고난의 유익은 무엇입니까? 고난당한 후에 잃었던 것을 찾아서 일까요? 필립 얀시는 “하나님은 고통을 사용하셔서 우리 삶에서 죄를 제거하시고 우리의 헌신을 굳세게 하며, 하나님께 의존하게 만드시고, 다른 믿음의 사람들과 연합하게 하시고, 분별력과 민감성을 주시고, 마음을 연단하시고, 시간을 지혜롭게 사용하게 하시며, 소망이 뻗어나게 하시고, 그리스도를 더 잘 알게 하시고, 진리를 갈망하게 하시고, 죄를 회개하도록 이끄시며, 슬플 때 감사하는 법을 가르치시고, 믿음을 자라게 하시고, 성품을 굳세게 하신다”라고 말합니다. 

이와 같이 고통이 주는 유익은 정말 많습니다. 저는 앞서 고난이 주는 아홉 가지의 유익도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시인에게 그 어떤 것보다 비교할 수 없는 가장 큰 유익은 고난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67, 71).” 이것이 여러분의 고백이 되시기 바랍니다. 세상에서 가장 특별하고 탁월한 가치는 성경 말씀의 가치인데, 시인은 고난을 통하여 그것을 깨달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난이 없으면 좋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고난으로 인하여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장차 내세에서도 가장 가치 있는 주님의 말씀을 알게 되었다면, 그 고난은 감사한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으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렇게 귀한 주님의 말씀을 하나님은 고난을 통하여 그것을 깨닫게 하시고, 몸으로, 삶으로 체득하게 하신다는 것을 고난 중에도 기억하고 감사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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