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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진실한 마음으로 (요일 3: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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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한 마음으로 (요일 3:16~18)


시작하는 말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한주간도 안녕하셨습니까. 가정의 달 5월을 지나면서 이런 저런 행사도 많았고 그러면서 주변의 사람들을 생각해 봅니다. 한마디로‘사랑’이라는 단어를 새삼스럽게 강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다음 주일은 웨슬리 회심주일 그 다음 5월의 마지막 주일은 성령강림주일이라 사랑에 대한 설교를 할 기회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 사랑을 주제로 하는 설교를 하면서 우리의 가정과 교회 그리고 삶의 주변들을 돌아보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갑이라는 교인 있었습니다. 그는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살기에 별 문제가 없을 정도의 재산을 가지고 있었고 인품도 좋아서 교회에서 늘 칭찬을 듣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신앙이 깊어질수록 예수님을 더욱 더 닮아가는 삶을 살고자 고민하며 노력해 왔습니다. 그런 갑에게 최근 을이라는 한 친구가 생겼습니다. 을은 같은 교회에 전도되어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성도였습니다. 그 친구에게 갑은 말씀을 가르쳤고 기도도 해주었고 교제의 장으로도 인도했습니다. 그런데 최근 문제가 생겼습니다. 을이 하던 사업이 부도가 나서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옆에서 친구의 아픔과 고통을 지켜보던 갑은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열심히 을을 위해 기도를 해주고 위로의 말도 전하는데 정작 그에게 실질적 도움은 못주고 있는 것 같은 마음이 들어서였습니다. 매일매일 을은 현실적인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에 갑은 자신의 위로와 격려가 극히 피상적으로 여겨졌습니다.‘도대체 이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어떤 것일까?’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하는 위로가 참 위로인가?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선뜻 물질적 도움을 주기에는 마음 한구석이 편치 않았습니다. 누구나 물질에는 마음이 약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일까? 고민합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고민이기도 합니다.

몸 말

오늘 본문말씀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16절은 시작부터 매우 강한 어조로 말씀을 시작합니다.“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다시 말해 우리는 무언가를 줄 수 있는 사람이기 훨씬 이전에 엄청난 것을 받은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섣불리 누군가를 위해 뭔가를 해주겠다는 열심을 내기 이전에 우리가 얼마나 엄청난 선물을 받았는지를 묵상해 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목숨을 받은 자들입니다. 성경은 그분이“목숨을 버리셨다.”고 표현합니다. 자신의 목숨을 의로운 일에 쓰신 것이 아니라 죄 많은 우리를 위해 버리셨다는 것입니다. 버릴 만한 것이 아닌 너무나도 소중한 생명을 마치 하찮은 물건인 것처럼 버리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도 당당히 말씀하십니다. 원래 뭔가를 희생하게 되면 당당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목숨을 기꺼이 버리신 주님은 우리에게 요한일서를 통해 말씀하십니다.“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이 사랑은 일찍이 예수님께서 손수 보여주시고 말씀하신 사랑입니다. 죽으시기 전날 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너희도 서로의 발을 씻기며 희생하는 사랑을 하라.”고 말씀하신 바로 그 사랑입니다.

이어 18절에서“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라고 우리를 독려하십니다. 말뿐인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물론 꼭 물질적인 도움이 아니어도 나름대로의 행함과 진실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앞선 이야기에서 갑의 경우, 을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무언가를 찾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의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이 위로의 말이라면, 그것이라도 진실하고 성실하게 하여야 하고, 어쩌면 을의 일을 틈나는 대로 몸으로 도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혹은 그를 위해 금식하며 기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그저 틀에 박힌 말로 위로하는 척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식적 행위는 도리어 상대방을 시험 들게 하고 고통을 가중시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진실된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듯이 우리도 형제에게 진실하고 진정한 사랑을 전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저는 우리 교인 중에 한 사람의 사랑 이야기를 전하려 합니다. 그가 쓴 글을 좀 길지만 그대로 인용하겠습니다. 

처음 본 레마는 무척 슬퍼 보였습니다. 여섯 살짜리 아이가 어쩌면 그렇게 슬픈 눈을 하고 있는지…. 마치 한 마리 슬픈 사슴을 보는 듯했습니다. 레마는 어렸을 때부터 많이 아팠고, 학교에 들어간 후에도 몸이 아파 제대로 공부를 하지 못해 유급을 했다고 했습니다. 그런 레마를 응원하고 싶었습니다. 직접 만나서 용기를 줄 수는 없어도 멀리 지구 반대편에서 누군가가 레마를 열심히 응원한다면 조금은 힘이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레마를 응원하는 것이 좋을까? 처음부터 마라톤을 하면서 후원금을 받을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마라톤을 시작하게 된 동기는 조금은 어이없는‘내기’때문이었습니다. 레마를 처음 만난 2002년에 호놀룰루로 출장을 간적이 있었습니다. 하필이면 내가 도착한 그날 마라톤 대회가 열렸습니다. 호놀룰루 마라톤 대회는 세계에서 알아주는‘세계 BIG 3 마라톤 대회’중 하나로 화려한 축제 같은 느낌을 주었습니다.

호놀룰루 마라톤 대회는 마라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부담 없이 참여할 수 있는‘10km 걷기’행사도 함께 열었습니다. 걷기 행사는 현장에서 접수해 바로 참가할 수 있어 한국에서 함께 간 사람들과 어울려 걷기에 동참했습니다. 새벽 5시에 출발했는데 호놀룰루의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하며 걷느라 전혀 지루하지 않았고, 주변 술집에서 술을 마시던 아저씨들이 나와“에이, 한잔 마시고 가”라고 농담을 건네며 응원을 해주어 아주 재미있게 걷기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나는 걷기 행사에 참여했지만 처음 10km는 걷는 코스와 마라톤 코스가 겹쳐 속도가 늦은 마라톤 참가자들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저 사람들은 뛰는데 나는 왜 걷고 있지? 나도 뛸 수 있을 것 같은데...”그리곤 회의에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통역을 맡은 사람이“오늘 마라톤에 참석한 사람 손들어보세요”라고 말했습니다. 드문드문 손이 올라갔습니다. 그 다음 그분은 “그럼 걷기에 참가했던 사람 손들어보세요”라고 말했고 이번에는 제법 많은 사람이 손을 들었습니다. 그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이번에는 걸었지만 내년에는 뛸 사람 손들어보세요. 이렇게!”그러면서 옆에 있던 내 손을 번쩍 치켜 올렸습니다. 친절하게 “이 여성도 내년에는 뛸 거라”는 설명을 덧붙이면서 말입니다. 순간 앞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박장대소를 하며 한마디씩 했습니다.“정말 마라톤을 하면 2백 불 내지.”“그녀가 결승점까지 무사히 들어오면 나는 스트리킹을 합니다.”모두 내가 뛰지 못할 것이라 장담하는 분위기였습니다. 묘한 오기가 생겼습니다.“그래? 그렇다면 내년에 내가 꼭 뛴다.”그렇게 나의 마라톤은 시작되었습니다. 

한국에 돌아오니 걱정이 태산이었습니다. 생전 달리기라곤 해보지 않은 내가 덜컥 마라톤에 참가하겠다고 약속을 해버린 터라 암담하기만 했습니다. 우선 되는 대로 신발부터 사서 동네를 뛰어보았습니다. 생각보다 할 만했습니다. 10km 마라톤에 참가해보았는데 그것도 그럭저럭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마라톤 준비를 하면서 문득‘이왕 뛰는 거 후원을 받으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한 건 대학교 다닐 때 참가한‘백만인 걷기 운동’이 떠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나는 양친회라는 단체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양친회는 전쟁고아와 가난한 아이들을 돕는 미국 단체였는데 우리나라도 양친회의 도움을 받는 나라 중 하나였습니다. 나는 그곳에서 편지 번역하는 일을 했는데, 양친회가‘백만인 걷기 운동’을 주관해 참여하게 됐었습니다. 어디서부터 걷기를 시작했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시작점은 모호하지만 과천까지 걸어갔다 돌아오는 대회였는데, 걸은 거리만큼 후원을 받았습니다. 신기했습니다. 그냥 내가 걷는 건데, 다른 사람이 내가 걸은 거리만큼 후원을 한다는 개념이 꽤 재미있게 느껴졌습니다. 

남을 돕는 것은 좋은 일이니 그냥 후원해줄 수도 있지만, 어떤 목표를 정하고 성공하면 도와달라는 것이 신선했습니다.“그래 바로 이거야.”백만인 걷기 운동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 마라톤에 접목하기로 작정했습니다. 지인들에게‘이러저러한 사연으로 마라톤 대회에 참가할 것이니 1km당 1천원을 후원해 달라’고 메일을 보냈습니다. 호응은 폭발적이었습니다. 마치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후원 의사를 밝히는 사람들을 보면서 다들 마땅한 기회가 없어 나눔에 참여를 못할 뿐 따뜻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 정말 많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마라톤 대회 날짜가 가까워지면서 두려움은 점점 커졌습니다. 한번도 42.195km를 달려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그 끝이 어떤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습니다. 끝에 가면 쓰러지는 건가? 정신을 잃고 들것에 실려 병원에 가는 걸까? 어쩌면 죽을 수도 있는 것 아냐? 별의별 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럽혔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마라톤 당일에는‘혹시 내가 쓰러지면 이리로 연락해 달라’는 메모까지 비닐에 싸서 몸에 지니고 뛰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생각보다 힘들지 않았습니다. 아주 잘 뛰는 분의 도움을 받으며 10분 뛰고 1분 걷는 방식으로 뛰었는데, 이렇게 뛰니 지치지 않고 계속 뛸 수 있었습니다. 보통 30km 지점이 마의 벽이라고 하는데, 나는 30km를 무사히 통과하고 결승점까지 완주할 수 있었습니다. 기록은 5시간 12분. 초짜 마라토너치고는 제법 괜찮은 기록이었습니다. 기적이 따로 없었습니다. 처음 출전하자마자 완주할 수 있었던 것은 아주 잘 뛰는 분이 옆에서 보조를 맞춰준 이유도 있지만 그보다는 후원자들의 힘이 더 컸습니다. 뛰는 내내 나는 후원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물론 레마를 위한 기도도 빼놓지 않았습니다. 그래서인지 발이 땅에 무겁게 내려앉는 것이 아니라 약간 뜬 느낌이 들어 가볍게 뛸 수 있었습니다. 끝나고 나서도 힘이 넘쳐 수영을 즐기기까지 했으니 첫 마라톤치고는 상당히 성공적이었던 셈입니다. 

마라톤을 완주한 후 후원자들에게 완주했다는 메일을 보냈습니다. 42.195Km를 뛰었으므로 대부분 4만 2천원씩을 후원했고, 42.195Km에 딱 맞춰 4만2천1백95원을 후원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계산하기 복잡하다고 뚝 잘라 5만원, 3만원을 후원하거나 좋은 일에 쓰려는 것이니 더 마음을 보태고 싶다며 몇십만원을 후원한 사람 등 각기 다양한 금액을 후원해 주었습니다. 너무 과하게 후원하겠다는 사람들에게는 앞으로 매년 뛸 것이니 조금씩만 하라고 당부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모인 후원금은 무려 6백만원이나 되었습니다. 레마가 사는 에티오피아에서 6백만원은 엄청나게 큰돈이었습니다. 그 돈을 레마에게 보냈습니다. 일부는 레마가 사는 집을 튼튼하게 고치는데 사용했고, 나머지는 레마가 다니는 학교에 책상과 걸상을 들여놓는데 사용했습니다. 

학교에 책상과 걸상을 기증한 이유는 아프리카 탄자니아에서 본 학교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말이 학교지 변변한 교실조차 없었습니다. 나무 밑이 아이들에게 허락된 교실이었습니다. 교실이 있어도 책상과 걸상이 부족해 흙바닥에 앉아 공부하던 학생들의 모습이 진한 여운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 후 책상과 걸상을 받은 레마의 선생님이 사진을 보내주었는데 사진속의 레마는 처음 보았을때와는 달리 밝게 웃고 있었습니다. 잔뜩 기가 살아있는 활기찬 모습이었습니다. 하긴 레마를 후원한다는 사람이 비싼 책상과 걸상을 잔뜩 사서 보냈으니 반 아이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을 것입니다. 레마의 밝은 얼굴을 보니 마라톤 정말 할 만한 거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즐겁게 뛰고 한 아이의 기를 살려줄 수 있으니 일석이조가 따로 없었습니다.

레마를 응원하기 위해 시작한 첫 번째 마라톤을 완주하면서 나는 매년 마라톤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몇 번 마라톤에 참가하면서 고정 후원자들이 생겨 지금은 내가 하기 싫어도 멈추기가 어렵습니다.

마라톤을 하는 목적은 매년 월드비전의 추천을 받아 정했습니다. 레마는 집도 고쳐주고 학교에 걸상과 책상을 기증했으므로 좀 더 절박하게 도움이 필요한 곳을 돕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해에는 우리나라 태백 탄광촌의 꽃때말 공부방을 만드는데 후원금을 전달했고, 세 번째 해에는 아제르바이잔 여성들을 위해, 네 번째 해에는 태풍으로 학교가 다 날아가 긴급 구호가 필요했던 베트남 다낭 지역 학교 지붕을 고치는데 후원금을 보냈고, 다섯 번째 해에는 짐바브웨 브에라 지역의 에이즈 예방사업에 후원금을 보탰습니다.

매년 마라톤을 하고 받는 후원금은 약 6~7백만원인데, 가능하면 이 돈이 꼭 필요한 곳에 쓰일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막연하게 좋은 일에 쓰이기 보다는‘학교를 복구하는데 사용할 지붕과 벽돌에 쓰일 돈’‘에이즈 예방 교육에 필요한 돈’등 쓰임새가 분명한 곳에 후원금을 전달했습니다. 물론 지인들이 모아준 후원금이 어디에 어떤 내용으로 쓰이는 지는 메일로 상세하게 알려 주었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나를 지지하는 후원자들도 좀 더 보람을 느끼고 더욱 참여하고 싶다는 동기부여를 받는 모양이었습니다. 

사실 매년 마라톤에 참가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입니다. 특히 마라톤 대회가 열리는 9~11월은 국제회의가 많아 통역을 하는 나로서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기간입니다. 준비하는 데도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마라톤에 참가하는 목적을 일일이 메일로 알려야 하고, 뛰고 나면 완주했으니 돈을 보내라고 메일을 보내고, 연말에는 후원자들이 세금공제를 받을 수 있도록 처리도 해주어야 했습니다. 

국제 마라톤에 참여할 때는 후원금으로 걷는 돈보다 마라톤에 참가하기 위해 쓰는 돈이 더 많을 때도 있었습니다. 비행기 값이며 호텔비, 체류비를 생각하면 차라리 그 돈을 그냥 후원하는게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마라톤을 계속하는 이유는 같은 돈을 후원하더라도 마음을 담아 후원하면 더욱 격려가 되고 응원이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진짜 나눔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돈을 나누는 것보다 할 수 있다는 격려를 보내주는 것 말입니다. 그래서 나는 매년 가장 바쁜 시간을 쪼개 달리기를 고집합니다. 불편한 몸으로 마라톤에 참가해 뛰는 사람들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렇게 마라톤을 하면서 나눔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고, 어렵게 사는 이 세상의 많은 사람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싶습니다.

마무리하는 말

여러분, 어떻습니까? 좀 긴 글이지만 참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교인 중에 이런 사람이 있다는 것이 목사로서 참 자랑스러웠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곧 나눔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2009년 우리교회의 표어‘하늘나라 같은 교회되게 하소서’그 아래 세개의 실천목표 중 하나가‘사랑하며 나눕시다’입니다. 어떤이들은 대중기도를 하면서도‘사랑을 나눕시다’라고 하는데 아닙니다. 사랑하며 나눕시다’입니다. 다시말하면 사랑하면 뭔가를 나누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물질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러나 물질보다 더 소중한 것들이 얼마든지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특출한 엘리트만이 역사를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우리 주변의 평범한 사람들의 용기와 사랑이 세상을 바꾸고 역사를 진보시킵니다. 당신의 작은 사랑과 나눔이 삶을 따뜻하게 하고 살만한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 교회, 삶의 주변을 돌아보십시오. 오늘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진실한 사랑으로 바라보면 나눌 수 있는 것이 반드시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그렇게 달려갑시다. 사랑하며 나누기 위해 우리도 땀 흘려 노력하며 달려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시어 우리의 삶에 채우고자 하시는 그 분명한 사랑이 우리의 가정에, 우리의 교회에 우리가 사는 이 땅에 가득하여 살만하고 행복한 세상을 만들 수 있게 될 줄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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