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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진정한 쉼(마 11:2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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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쉼(마 11:28~30)
 
 
1. 쉼

자, 성도 여러분, 지금 한 번 상상을 해 보십시오. 푸른 풀밭에 누워서 찬란한 봄 하늘을 바라보는 것, 나뭇잎이 태양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는 것과 그것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보는 것, 시냇물이 졸졸졸 흐르는 소리가 들려오고 상큼한 풀냄새와 향기로운 꽃내음이 바람을 타고 와서 여러분의 코를 간지럽히는 것 …. 이런 상상을 해보니까 어떠세요? 아마 여러분도 이런 곳에서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드실 겁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요즘 저 자신이 “쉬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기 때문입니다. 저 만이 아니라, 자신이 느끼든 느끼지 못하든 많은 사람들이 지쳐있습니다. 많은 일, 혹은 복잡한 일들로 인하여 지쳐있고,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일상적인 생활도 사람을 지치게 만듭니다. 또 지금까지 해오던 일들이 싫어질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다 쉼이 필요하다는 사인입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나는 그 정도는 아니다’라고 하실 분은 다음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누군가가 만든 <쉬어야 할 사람의 기준>입니다. 

“방긋방긋 웃는 아기 얼굴을 보고도 마음이 밝아지지 않는다면 지금이 쉴 때이다.
가족의 얼굴을 보고 살짝 웃어주지 못한다면 지금이 쉴 때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하루가 궁금하지 않거나 전화가 기다려지지 않는다면 지금이 쉴 때이다. 
오래간만에 걸려온 친구의 전화를 받고 바쁘다는 말만하고 끊는다면 지금이 쉴 때이다. 
친구가 보낸 편지를 받고 끝까지 읽지 않거나 답장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이 쉴 때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여러분은 제대로 쉰 적이 없이 지금까지 살아오지는 않았습니까? 아니면, 일할 때는 못 느끼다가 혼자 가만히 있으면 가슴이 답답해 진 적은 없습니까? 그런 분들이 바로 쉬어야 할 분들입니다. 오늘 이 예배가 여러분에게 쉼의 시간, 안식의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사람에게 진정한 쉼이 없는 이유, 혹 “쉬고 싶다”는 말을 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따로 있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쉬고 싶다”고 말하는 진정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진정한 쉼은 어떤 것일까요?

2.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무리들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수고하고”, 또 “무거운 짐 진 자”라고 하신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즉 예수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라고 하신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며, 그들의 수고는 무엇이며, 그들이 짊어진 짐은 무엇이었을까요?

먼저 오늘 본문의 “수고하고(코피아오)”라는 말은 고전 헬라어에서 ‘열심히 일하다, 수고하다, 애쓰다’라는 의미의 단어에서 나온 것인데요. 그 의미는 그렇게 열심히 일하고 수고한 결과, ‘피곤하게 되다, 지치다’를 의미합니다. 즉 이 “수고하고”라는 말은 ‘노력과 수고’의 결과인 ‘극도의 피로’를 나타내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그 예가 요한복음 4장 6절, 요한계시록 2장 3절에 나옵니다. 요한복음 4장 6절,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에 나오는 “피곤하여”, 요한계시록 2장 3절,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에 나오는 “게으르지 아니하고”가 다 같은 단어입니다. 이 단어들의 의미가 뭐냐면, 열심히 수고한 결과 ‘녹초가 되다’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신 “수고하고”라는 말은 ‘많은 일들을 계속적으로 하여서 피곤으로 인하여 지친 상태’를 뜻합니다.

그 다음으로 “무거운 짐 진 자(포르티조)”라는 말은 ‘짐을 싣다, 짐을 지우다’라는 의미와 ‘~로 인하여 부담을 느끼다’라는 의미입니다. 특별히 신약성경에서 예수님께서 이 말을 쓰신 것은 ‘인생의 짐’, ‘세상살이의 짐’을 의미하기보다는 ‘율법의 짐’, ‘유대 전통의 짐’을 의미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의 율법학자들은 구약율법을 가지고 수백 수 천 가지의 또 다른 법령을 만들어냈습니다. 조목조목이 아닌 큰 규정만도 모두 613 가지나 되었습니다. 즉 인생살이 자체가 <시지프스의 신화>에 나오는 대로 큰 바위덩어리를 산으로 옮기는 것과 같이 무겁고 버거운 일인데, 그것 말고도 유대인들에게 부과된 <율법과 유전(遺傳)의 짐>이 따로 있었고, 주님이 의미하신 것은 바로 그 <율법과 유전(遺傳)의 짐>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23장에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 사람들의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운다고 책망하셨습니다(마 23:1~4).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무거운 짐”의 일차적인 의미는 이렇게 유대 지도자들이 백성에게 지운 율법과 전통의 짐이었지만, 사실 이 말은 그보다 훨씬 넒은 범위를 뜻합니다. 즉, 예수님 당시의 백성들이 지고 있던 짐들은 ‘율법의 짐’ 만이 아니라, ‘로마로부터 부과된 각종 세금의 짐’, ‘가난의 짐’도 있었고, 인생이기에 질 수밖에 없는 ‘죄의 짐’, ‘병의 짐’ 등도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았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만 이렇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았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금도 동일합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짐들을 지고 살아갑니까? 

<시지프스의 신화>에서 소설가 ‘알베르 카뮈(Albert Camus)’는 인간의 짐을 네 가지로 설명했습니다. ❶ 첫째는 경제적인 짐입니다. 자신의 생존을 위하여, 자기 꿈을 이루기 위하여, 그리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하여, 돈이 없으면 안 되니까 경제적인 짐을 질 수밖에 없는 것이죠. ❷ 두 번째로 사람들은 정신적인 짐을 지고 있습니다. 혼자 있으면 왠지 불안하고 초조하고 고독하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것, 스트레스를 받고, 우울증에 시달리고, 갈등과 번민과 고독감에 괴로워해야 하는 것 등이 정신적인 짐입니다. ❸ 세 번째 짐은 생(生) 자체가 짐이라는 것입니다. 인생 자체, 육신을 입고 이생을 산다는 것이 짐인 것이죠. ❹ 네 번째는 영적인 짐입니다. 

영국 선교사 ‘오스왈드 챔버스(Oswald Chambers; 1874~1917)’도 인생의 짐을 세 가지로 말했습니다. ❶ 첫째는 ‘육신의 짐’으로서, 의식주, 사업, 취업 같은 ‘경제적인 문제’, ‘건강 문제’ 등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❷ 둘째는 ‘정신적인 짐’으로서 스트레스, 불안, 우울, 좌절감 같은 ‘걱정과 근심’을 말합니다. ❸ 셋째는 ‘죄악의 짐’입니다. 불신앙, 불순종, 각종 범죄를 짓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번뇌하고 고통 받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실 인생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것”이라는 점은 까뮈나 챔버스가 말한 것처럼 그것이 각각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쉽게 구분할 수가 없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예를 들면, 개인적으로 어려운 문제가 생기거나, 가정에 어려운 문제가 생기거나, 자녀에게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어떻습니까? 마음이 ‘자이로드롭’을 타고 갑자기 떨어지듯 내려앉습니다. ‘내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죗값을 받는가보다!’ 이것을 죄책감이라고 하지요. 

그래서 괴로우면 사람들은 술을 찾기도 하고, 담배를 피우려고도 합니다. 어느 목사님이 병원에 입원한 집사님 심방을 갔더니 그 분이 병실 옆 복도에서 담배를 버끔버끔 피우고 있어서 곤란한 적이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괴로우면 어떤 사람은 중독되듯이 어떤 것에 몰입하여 빠져들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방탕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는 자신이나 가족들이나 주변 사람들을 미워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이러저러한 문제로 그 마음에 고통과 괴로움이 생기고, 그것이 한(恨)이 되고 화병이 되고, 그러다가 그것이 육신의 병을 낳고 …. 여러분, 이것이 인생의 모습 아닙니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의 학업 수발과 결혼의 짐, 그리고 나이 들면서 자기 몸을 괴롭히는 병의 짐을 지고 살고 있습니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무거운 짐과 직장에서 부과된 짐으로 인하여 화병이 나고 우울증에 걸리고 몸의 균형이 깨어져 입원하는 남성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여성들은 남편과 자식으로 인한 많은 짐을 지고 살며, 학생들은 공부와 진로의 짐을 지고 버거워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 사회에는 이렇게 무거운 인생의 짐으로 인해 미쳐버린 사람들, 귀신들에게 그 마음과 영혼을 빼앗긴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은 그렇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말씀합니다. “다 내게로 오라.”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무거운 짐을 여러분의 어깨 위에서 내려줄 수 있는 분은 누구입니까? 누가 여러분의 무거운 짐을 대신 질 수 있습니까? 우리 주님 밖에 없습니다. 이사야 53장은 이 사실에 대해서 분명히 선언합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셨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니 (이는) 마땅히 형벌 받을 나의 허물 때문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사야 53장 11절에서 하나님은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담당한다”는 말은 ‘짐을 지다, 짐을 나르다’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이 여러분의 짐을 내려주시고 대신 지고 가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은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누구에게 나아가시겠습니까? 오직 주님만이 여러분의 짐을 내려주시고 대신 져 주실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예수님의 멍에

이와 같이 오늘 본문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는 초청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주님께 가는 것만으로 피곤하고 지친 여러분이 쉴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만 가지고는 충분치 않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쉬기 위하여서는 하나가 더 있어야 충분해 집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이어서 말씀합니다. “나의 멍에를 매라!” 

여기서 “나의 멍에(쥐고스)를 메고”라는 말의 문자적이고도 일차적인 의미는 ‘동물의 멍에’입니다(민 19:2 신 21:3). 멍에란 것은 짐승들을 부리기에 용이하도록 그 짐승을 어거하기 위하여 그 짐승의 목둘레에 걸치는 나무를 말합니다. 주로 소에게 이 멍에를 사용했는데요. 소는 순하기도 하지만, 이 멍에 때문에 자기를 부리는 사람에게 복종합니다. 멍에가 무겁고, 아프고, 불편하기 때문이고, 또 부리는 사람에게 순종하지 않으면 멍에를 통하여 더 큰 아픔과 고통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멍에가 불편하지도, 무겁지도, 아프지도 않고, 목걸이처럼 단지 목에 두르고 있을 뿐이라면 가축이 자기를 부리는 사람의 말을 잘 듣지 않을 것입니다. 이 멍에가 있어서 사람은 농사나 짐을 옮기는 일에 가축이나 소를 잘 이용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여러분, 이 멍에에 대해 어떤 분들은 인생의 짐을 주님께 내려놓고 그 대신에 예수님이 주시는 짐을 짊어지는 것이 멍에라고 합니다. 여러분의 짐을 주님께 내려놓는 대신에 예수님이 여러분에게 또 다른 짐을 주신다는 것이죠. 예를 들면, 말씀을 가까이하고, 말씀대로 사는 말씀의 멍에. 사람을 영적으로 돌보는 사랑과 사명의 멍에. 권위에 순종하는 멍에. 하루 1시간 이상 기도하는 기도의 멍에. 매주 2명에게 복음을 전하는 전도의 멍에 …. 즉, 직분 등 사명의 짐, 복음전파 등의 짐, 봉사와 헌신의 짐, 말씀의 짐, 기도의 짐이 바로 “멍에”라는 것입니다. 물론 전혀 틀린 말도 아니지만, 그러나 여러분! 본문에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결코 이와 같은 것들이 아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짊어진 것은 “짐”이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은 “멍에”라는 것입니다. “짐”과 “멍에”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다음의 설명을 들으면 분명해 질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팔레스타인에서는 이 멍에를 한 마리의 소에게만 씌운 것이 아니라 항상 두 마리를 짝을 이루도록 하여 두 마리가 한 멍에에 의해 부려졌습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멍에가 편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주님의 멍에가 편하다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그 멍에를 매고 계신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미물이라도, 소 두 마리를 한 멍에에 매면 그 중의 한 마리가 리더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보통 어미 소와 새끼소를 쌍으로 했기 때문에 어미 소가 리더 역할을 했다고 하는데요. 이때 리더 역할을 하는 소가 약간 앞서 나가고, 조금 먼저 방향을 틀고, 또 다른 소는 그 소를 의지하거나 뒤 따르는 것입니다. 그럴 때 앞서 가는 소가 더 힘들고 어렵고 괴로운 반면, 뒤 따르는 소는 훨씬 쉽고 편하고 안전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여기에 오늘 주님이 말씀하시는 핵심이 있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매고 내게 배우라(29).” 겸손하시고 온유하신 예수님께서 멍에를 매시고 앞서 가시니 그와 함께 멍에를 매면 우리의 인생이, 우리의 삶이 훨씬 편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예수님 없이 살아가는 것, 즉 자신이 자신의 멍에를 매는 것은 주님과 따로 노는 것과 같고, 주님보다 앞서 가려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사는 인생살이는 너무나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멍에에 주어지는 모든 힘을 자신이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 그렇게 간다고 해서 인생의 목적에 다다를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성공이 보장되지도 않습니다. 또 하나님 앞에 온전해 질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멍에를 맨다는 것은 자신의 생각, 의지, 고집 등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직 주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의미이고, 그렇게 할 때 여러분의 삶이 덜 힘들 것이고, 그렇게 살 때 소망의 항구에 도달 할 수 있을 것이며, 또 하나님을 만나 뵐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힘들어 하고, 쉬 지치고, 피곤한 저와 여러분을 초청하여 그 모든 짐을 내려놓으라 하신 후, 당신께서 우리의 삶을 인도하기 위하여 우리와 함께 하는 삶을 “멍에”라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30).

신앙생활을 짐스러워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물론 목사인 저도 가끔은 신앙이 부담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짐을 지우려고 오신 분이 아닙니다. <에누마 엘리쉬>라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의 ‘서사시’에 따르면,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은 ‘신들이 그들의 귀찮은 잔심부름을 시킬 수 있도록 사람을 창조하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당신이 보시기에 좋게 창조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지상 낙원인 에덴동산을 관리하면서 행복하게 살도록 창조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인간의 참된 행복입니다. 주님을 믿고 알고 그 은혜를 맛본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죠. 주님과 함께 사는 것,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결코 짐스러운 것이 아니라 기쁨이요 은총이라는 것을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은 짐이 아니라 축복이라는 것을 여러분 모두가 깨닫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누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진정한 쉼은 하던 일을 멈추는 것, 무작정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쉼은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고, 하나님이 만드신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고, 내 삶에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게 하는 것”입니다.

4. 진정한 쉼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산다는 것이 힘들고 피곤하시죠? 혹시 지금 여러분 가운데 피곤하고 지쳐 있는 분은 없습니까? 혹시 자신이 짊어지기엔 너무 많은 짐을 지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없습니까? 혹시 해야 할 일은 많은데, 그것을 감당할 힘이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없습니까?

여기에 예수님의 위대한 초대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예수님은 쉼을 약속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짐을 여러분 스스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인생의 짐을 주님께 맡기십시오. 시편 146편 3절부터 5절,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편 55편 22절,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 

주님은 어떤 분이시기에 여러분에게 쉼을 줄 수 있습니까? 창조주시기 때문에 상실한 것을 얻게 하시고, 잃은 것을 회복케 하시고, 아픈 것을 고쳐주시고, 다친 것을 싸매어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로 가면 하늘의 힘과 하늘의 위로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로 가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서 기도의 세계가 열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께로 가면 성령님의 임재 가운데 말씀의 세계가 열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시편 68편 5절에서 하나님은 날마다 여러분의 짐을 져 주시는 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❶ 여러분의 짐을 주님께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인생이기에 어쩔 수 없이 갖게 되는 문제가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짐들을 가지고서 우리 주님 앞에 내려놓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왜 걱정하고 염려하면서 살아갑니까? 여러분의 문제를 주님 앞에 내려놓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기쁨을 잃고 살아갑니까? 예수님께 여러분의 짐을 내려놓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안타까웠으면 이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너희들 살아가면서 힘들고 어렵지? 그 짐들을 가지고 나한테 나아오라!’ ‘경제적인 짐을 너희가 짊어지고 있느냐? 육신적인 질고로 고통당하고 있느냐? 영적인 질고로 말미암아 어려움을 당하고 있느냐? 무슨 짐이 있느냐? 그 짐을 가지고 나아오라!’ 여러분의 모든 짐을 주님께 맡겨버리십시오. ‘에라 모르겠다, 주님 알아서 하십시오!’하고 주님 앞에 내려놓으십시오. 

❷ 그리고 주님의 멍에를 매십시오. 주님과 함께,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 주님의 뜻대로 사는 것, 그것이 여러분이 맬 멍에입니다. 처음에는 그 멍에가 무겁고 힘들게 여겨져도 결국은 그것이 쉬운 일이고 편한 길이요 안전한 길인 줄 알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님과 동행하는 것에 대해,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에 대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에 관한 주님의 멍에에만 관심을 집중하십시오. 그리고 이렇게 살 때 여러분은 참된 쉼, 진정한 안식을 맛볼 것입니다. 이렇게 살면 아무리 바쁜 때라도 그 바쁜 와중에 여유 있고 즐겁고 행복하게 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쉼은 이 세상이 줄 수 없고, 사람이 줄 수 없는 것들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쉼은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쉼이 아닙니다. 돈, 취미나 오락, 잠, 삼림욕 같은 것이 주는 쉼이 아닙니다. 근원적이고 충분한 쉼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쉼을 주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제부터 이 쉼을 늘 맛보면서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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