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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 이후 (고전 15: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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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이후 (고전 15:12~20)


여러분 가운데서도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내신 아픔이 있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죽음의 이별은 대단히 슬프고 참으로 힘듭니다.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이런 아픔을 옛 시에서 보았습니다. 아주 오래된 시인데, 신라 향가 중 사랑하는 누이를 잃고 죽음의 이별을 슬퍼하는 시입니다. 고어로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생사로난/ 이샤매 저히고/ 나난 가나다 말도/ 몯다 닏고 가나닛고/ 어느 가잘 이른 바라매/ 이에 저에 떠딜 닙다이/ 하단 가재나고/ 가논 곧 모다온뎌 / 라고 시작되는 시입니다. 

현대말로 하면, 삶과 죽음의 길은/ 여기에 있으매 두려워하여/ 나는 간다고 말도/ 하지 못하고 갔는가/ 어느 가을 일어난 바람에/ 여기저기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같은 나무 가지에서 나고서도/ 너 가는 곳 모르겠구나/ 라는 슬픈 시입니다. 고등학교 다닐 때 ‘나난 가나다 말도 몯다 닏고 나나닏고’ 라고 외우면서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모릅니다. 향가 ‘제망매가’의 한 부분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도 사랑하는 사람들을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내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슬픕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세상 사람들과 다른 것이 하나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오래 되지 않아 슬픔을 털고 일어설 수 있습니다. 신앙이 독실한 사람들은 슬픔을 터는 정도가 아니라 도리어 돌아서서 하나님께 감사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엔 까닭이 있습니다. 이별이 길고 또 길고 긴 것 같지만 그렇게 길지 않기 때문입니다. 머지않아 나보다 먼저 떠난 그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희망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슬픔을 털고 일어설 수 있습니다. 

또, 나보다 먼저 간 저 사람이 지금 어디 있는가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죽기 전에 그렇게 아파하던 모습, 혹은 사고로 비참한 모습, 혹은 이 세상 살면서 이런 저런 문제로 많은 고민과 고뇌, 아픔을 겪다가 죽어가는 모습이 아니라, 그러한 세상이 아니라 지금 그 사람이 간 그 곳은 너무나도 좋은 세상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슬픔을 털 수 있고 오히려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죽으신 지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부활하시고 어떻게 되셨는가?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어떤 모습이셨는가? 주님께서 부활하시고 나중에 어디로 가셨는가? 이것을 바로 아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나중에 우리 주님께서 부활하신 꼭 그대로 부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이 땅의 삶을 마치고 나면 어떻게 될 것인가 라는 것을 우리 주님께서 그대로 보여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20절에서 주님께서는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 가운데 부활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다 부활한 열매란 우리도 똑같은 열매로 나온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는 똑같이 부활하게 될 것인지 알기 때문에 참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죽었다 부활할 때 어떤 몸으로 부활하게 될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이 일에 대해서 영혼만 부활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부활할 때는 영혼뿐만 아니라 영혼과 몸 전체가 똑같이 부활합니다. 그것은 죽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을 때에도 영혼만 또는 몸만 죽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장례를 치를 때 시신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70년 혹은 80년 혹은 90년 살면서 수고한 시신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시신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지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그 시신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그 사람을 오랫동안 귀하게 모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선물을 받으면 마치 그것이 사랑하는 사람인 마냥 귀히 여기며 함부로 하지 못합니다. 그 사람이 죽어도 그 사람과 관계되는 물건을 함부로 처리하지 못하여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시신에는 이런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신은 사실 이미 떠난 분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흙이기 때문입니다. 돌아가신 그 사람은 완전하게 새로운 마음과 영혼으로 부활했기 때문에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이란 몸만 죽고 영혼만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전인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이는 전체적인 인간이 죽었다가 전체적인 인간이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활한 몸과 영혼, 마음은 어떤 것일까요? 이 땅에 살던 몸, 이 땅에 살던 마음, 이 땅에 살던 영혼과는 전혀 새로운 몸과 마음, 영혼으로 부활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를 들어 이 땅에 살면서 장애가 있었다면 부활하면 그 장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또 살아있을 때 질환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정말로 무서운 병에 걸릴 수도 있는데 부활하면 이런 질환도 끝이 납니다. 또 이 세상 살면서 열등감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키가 많이 작고 어떤 사람은 생긴 모습이 좀 형편없을 수 있고 또 이런 저런 열등감이 있을 수 있습니다. 또 우리 스스로도 볼 때 시기질투가 많고 화를 많이 내는 것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부활하면 하나도 없어지게 됩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남아 있는 할머니를 위로하시려고 목사님이 “할머니,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 안에서 돌아가시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면 얼마 있지 않아서 곧 만나게 될 것입니다. 곧 속히 만나게 되면 그때는 손을 잡고 함께 하나님께 찬송하십시다.” 목사님의 그 말씀을 들은 할머니가 한참 생각하다 “목사님 저 천국 가지 않으렵니다.” 목사님이 “왜 그러십니까?” “그 영감이면 저는 가지 않으렵니다.” 천국은 그런 곳이 아닙니다. 이 땅에 있을 때의 모든 악함과 죄와 잘못된 것, 육신적인 것, 물질적인 문제도 하나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여기에 대해서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이 성경에 있습니다. 소위 유대지도자들은 다 종교지도자들입니다.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찾아와서 예수님이 꼼짝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자기들 나름대로의 기묘한 질문을 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계대 결혼의 풍속이 있습니다. 형이 결혼하여 자식을 보지 못하고 죽게 되면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자식을 낳아야 하는데 이를 두고 사두개인들은 예수님께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장가들었다가 죽어 상속자가 없으므로 그 아내를 그 동생에게 물려주고 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그런즉 그들이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마22:25-28) 라고 질문했습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그렇습니다. 여자는 하나인데 남편이 일곱이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사두개인들은 꼼짝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아주 점잖게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마22:29-30) 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이것을 두고 신학적으로 불연속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연속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 여러분, ‘나’라는 존재는 연속되고 나머지는 불연속입니다. 이것이 부활 때 우리 모습입니다. 

그리고 우리 몸은 어떻게 다를까요? 한 예로 우리 몸은 공간과 시간을 완전히 초월하는 몸으로 부활할 것을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부활하셨는가를 보십시오. 우리도 똑같이 그렇게 부활할 것입니다. 부활한 예수님의 모습에 대해서 요한복음 20장에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난 후 8일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다 한 집에 모였습니다. 제자들은 그 위대하신 자신들의 스승을 그렇게 십자가에 못 박아서 처형시켰으니 자기들을 언제 잡으러 올지 겁이 나서 문을 꽁꽁 걸어두고 두려움에 떨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어느 틈에 오셨는지 그 가운데 서서 계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문을 열어주지 않았는데도 그 예수님께서 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고 인사를 하셨습니다. 

이는 우리들에게 귀중한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몸으로 부활하셨다, 우리도 이런 몸으로 부활 할 것이다, 시간은 우리를 제약하지 못한다, 공간도 우리를 제한시키지 못하는 몸으로 부활할 것이라고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또 다른 것으로 말씀하십니다. 부활하게 되면 눈으로 볼 수 있는 몸으로 부활합니다. 귀신처럼 보이지 않은 채 여기저기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볼 수 있는 몸으로 부활하게 되고, 손으로 만질 수도 있고, 음식을 잡수는 몸으로 부활하실 것을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24장에서 그것을 말씀하십니다. 또 다시 제자들이 모였습니다. 이때 주님께서 나타나시자 제자들이 예수님을 영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우리말로 하면 귀신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놀라고 무서워했습니다. 그렇게 나는 부활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음에도 제자들은 믿지 못한 것입니다. 믿지 못하면 능력도 없고 권세도 없습니다. 겁나는 것, 걱정하는 것만 많습니다. 여러분,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믿음을 가지십시오. 

제자들이 무서워하자 주님께서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사로가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눅24:39) 라고 말씀하시면서 손과 발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여전히 믿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눅24:41)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제자들은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그 앞에서 생선을 발라서 잡수셨습니다. 볼 수도 있고, 만질 수도 있고, 음식을 먹을 수도 있는 그런 몸으로 부활한다는 말씀입니다. 귀신처럼 그렇게 부활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로 멋진 몸으로 부활합니다. 장애, 열등 문제, 잘못된 것, 병 이런 것 하나도 없습니다. 최고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여러분이 주님 안에서 죽은 사람들을 생각하실 때는 우리가 볼 수 있는 제일 멋진 모습보다도 훨씬 더 멋진 모습으로 부활해서 산다고 생각하십시오. 우리도 죽고 나면 그렇게 됩니다. 

혹 사랑하는 사람 가운데 자동차 사고를 당해서 돌아가신 분,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서 수척해서 돌아가신 분들이 계시다면 비참한 그 모습으로 기억하지 마십시오. 그래서 저는 장례를 집도할 때 입관시 염을 할 때 될 수 있으면 그 염실에 유족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합니다. 어떤 분들은 마지막 인사를 하겠다고 하는데 그것을 보고 인사를 해서 무엇 하겠습니까? 그것을 보고 인사를 하면 정 뗀다고 하는데 그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시신은 아무리 꾸며도 모습이 좋지 않습니다. 그 모습을 왜 보고 있습니까? 조금 있으면 최고의 멋진 모습이 됩니다. 다시 만날 그때까지 더 좋은 모습으로 기억해야하지 않겠습니까? 훨씬 더 좋은 모습으로 우리는 다시 만납니다. 최고의 멋진 모습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번에 짚을 것은 우리가 죽고 나면 언제 부활하는가 입니다. 이것을 분명하게 알아야합니다. 이 문제가 중요한 까닭은 성경의 여러 군데에서 죽은 사람을 두고 잠잔다고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두 군데나 나오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적지 않은 기독교 신자들이 죽고 나면 예수님께서 다 부활할 때까지는 잠자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언제 부활합니까? 죽는 즉시 부활합니다. 죽는 순간이 부활의 순간입니다. 잠잔다는 표현은 매장을 하거나 화장을 했을 때, 그 모습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 모습을 표현하도록 하기 위해서 잠잔다는 문학적인 표현을 한 것입니다. 정말로 잠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신은 정말로 현실적인 의미에서는 돌아가신 분과 관계가 없습니다. 흙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신을 태우기도 하고 매장하기도 합니다. 

사실 제 생각에는 매장보다는 화장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 교회 보령 수도원에 뼈를 뿌리는 동산이 있는데 그 곳에 때가 되면 순서대로 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부활할 때는 이미 우리 몸은 다 천국에 있다가 그런 모습으로 다시 새 하늘 새 땅에서 나타나는 것이지, 가루로 되어 있다거나 썩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관계없습니다. 시신은 우리를 오랫동안 섬겨왔던 하나의 흙일뿐입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23장에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가 다 되어갑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오른쪽, 왼쪽에 강도가 각각 한 사람씩 있었는데 그 중에 한 강도가 마지막 순간에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눅23:42) 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오늘입니다. 죽으면 오늘 곧바로 너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잠자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돌아가신 분을 생각할 때 그 분은 이미 천국에 가 계신다고 생각하십시오. 어디서 쉬고 있다거나 귀신이 되어서 떠돌아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천국에서 온전한 몸으로 부활하여 계시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대답하신 그 말씀은 부활한 후에 어디로 가는가에 대해서 아주 분명한 답을 주십니다. 다시 말씀을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강도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우리가 죽고 난 뒤 부활하게 되면 낙원에 곧바로 들어간다는 말씀입니다. 

이제 우리가 죽고 나면 들어가는 그 낙원은 어떤 곳인가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중요합니다. 내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서 어디에 계시는가? 내가 어떤 누구보다 먼저 죽게 되면 이런 곳에 간다는 것을 내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르쳐주어야합니다. 이사야 11장은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사11:6)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서로 잡아먹고, 약육강식의 세계, 있는 자는 없는 자들을 어떻게 하려고 하는 곳이 이 세상인데 그 곳에는 강탈하고 잡아먹는 일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평화한 곳입니다. 또 표범이 어린 염소화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사11:6)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곳이 부활하게 되면 갈 낙원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평화스럽습니까? 

또 이어서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사11:7)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땅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곳입니다. 천국을 낙원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말로 표현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천국을 생각할 때 이 이상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얼마 전에 외국의 어떤 사람이 사자 우리 속에 넘어가서 다친 것을 급히 구조하는 것을 TV에서 방영했는데 이곳은 그런 것을 겁낼 필요가 없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짐승들을 두려워하는데 요즘은 사람이 제일 무섭다고 이야기합니다. 참으로 악한사람들 많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그런 것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어서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사11:8) 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이들을 데리고 탄천만 가도 얼마나 걱정이 많습니까? 천국은, 낙원은, 우리가 부활하고 난 뒤에 갈 곳은 정말로 평안한 곳입니다. 

계시록 7장에서는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계7:16)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결핍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진짜 없는 사람도 결핍이 있고, 많이 가진 사람도 결핍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없어서 결핍이 있을까요? 먹지 못해서 결핍이 있을까요? 낮은 자리에 있어서 그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더 많이 가지려고, 더 높은 자리에 가려고,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고 하다 보니 마음이 황폐합니다. 그러나 천국은, 낙원을 그런 곳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것들도 우리를 해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우리가 부활하고 난 뒤 갈 곳은 그런 곳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곳에 가면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를 붙들어주십니다. 여러분, 정말로 여러분이 좋아하는 사람이 손만 만져도 좋지 않습니까? 따뜻하게 만져주고 어깨에 손만 얹어도 아이들도 다 좋아하는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주시고, 예수님께서 그렇게 챙겨주시는 곳이 바로 낙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계시록 7장에서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계7:17)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잘 아는 시편23편에서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시23:1-2)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할까, 저것을 할까, 언제 할까, 어떻게 할까, 온갖 걱정이 많습니다, 말 그대로 오만가지 걱정이 있습니다. 자식을 어떻게 키울까, 내가 떠나고 나면 누가 지켜줄까, 걱정할 것이 하나도 없는 곳이 천국입니다. 

부활하게 되면 이런 천국, 이런 낙원에 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수고한 것 아무것도 아닙니다. 봉사하고 선한 일을 조금 한 것 그때가 되면 오히려 참 좋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수고를 칭찬하실 텐데 우리가 종노릇을 했다면 얼마나 하겠습니까? 낮아지면 얼마나 낮아지겠습니까? 바보가 되면 어떻겠습니까? 주님께서 위로해주시는 것을 생각한다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조금 더 현실적인 것을 이야기해보겠습니다. 그 곳에는 우리를 위해서 마련해놓은 집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1-3) 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3부 예배를 마치고 한 분에 저에게 좋은 일이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뛰어오셨습니다. 이 분은 월세로 오래 사셨던 분이었습니다. 때로는 어디로 이사 가나 걱정을 많이 했는데 집을 샀는데 아주 큰 집을 샀습니다. 이 좋은 시절에 이처럼 복 받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좋았는지 모릅니다. 여기에서도 그런데 천국에서는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 곳에 가면 우리 주님께서 그런 집을 마련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집은 보통 집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우리의 모든 상상을 뛰어넘는 집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계시록에서 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각 문마다 한 개의 진주로 되어 있고 (계21:21) 라고 말씀하셨는데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의 집 현관문에 한 개의 진주를 붙여놓은 것이 아니라 한 덩이 진주로 현관문을 만들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물론 이런 표현을 좋아하지 않는 분도 계시겠지만 최고로 표현하기 위해서 이런 표현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 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계21:21)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탄천을 걸어가는데 웬만한 신발로는 무릎을 다치지 않을 정도로 폭신하여 너무나 좋았습니다. 그 길로 가다 딱딱한 길로 가니 좀 섭섭해졌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성의 길은 정금 순금으로 길을 만들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순금이 좋아서가 최고의 표현을 한 것입니다. 

성경은 또 천국에 대해서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계22:1-2)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 때문에 병드는 사람이 없고, 혹시 병들어 들어온 사람은 온전하게 깨끗하게 치유되는 곳이 바로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또 성경은 다시 저주가 없는 곳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이 땅에 살다보면 저주적인 일들이 있습니다. 도무지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 그것만은 피하고 싶은 일들이 이 땅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우리가 부활하고 난 뒤 갈 곳이 바로 그런 곳입니다. 

이제 우리는 어떤 것보다 가장 중요한 것을 짚어야 합니다. 누가 그 부활을 맛보게 되는가? 누가 그 구원을 누리는가? 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이 부분에 대해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라고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이어서 하나님께서는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4:12) 라고 냉정한 말씀을 하십니다. 구원은, 천국은, 부활 뒤에 갈 낙원은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시간 주님의 이름으로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혹 이 자리에 계신 분들 가운데 아직까지 예수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지 않는 분들이 계시다면 이 시간 여러분 마음속으로 ‘나는 이제 예수를 믿습니다’ 라고 고백하십시오. 여러분들이 어떤 형태로 고백하든 간에 하나님은 여러분의 고백을 받으시고 여러분의 이름을 그 생명록 위에 기록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부르실 때에 대답하십시오. ‘예’ 라고 대답하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기왕에 예수를 믿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은 신자라 할지라도 잘 듣고 빠뜨리지 말고 기억해야할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5장 29절은 선한 일을 행한 자는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9)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마태복음 25장에서는 마지막 심판할 때 심판하시는 임금이 오른쪽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마25:34) 라고 말씀하셨고, 왼쪽에 있는 자들에게는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마25:4)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왼쪽이고 누가 오른쪽인지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40) 라고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이 시간 여러분 각자가 확인 해보십시오. 나는 정말로 예수를 나의 구주로 모셨는가? 여러분이 ‘나는 모셨습니다’ 라고 대답할 수 있다면 여러분들에게는 생명의 부활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하나 더 권합니다. 선한 일에 힘쓰십시오. 좋은 일을 많이 하십시오. 우리 주님께서는 여러분들이 하신 선한 일, 좋은 일보다도 천배 만배 더 좋은 것으로 여러분들에게 답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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