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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골 골짜기 (수 7: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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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골 골짜기 (수 7:19~26)


[여호수아가 아간에게 말하였다. “나의 아들아,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에게 사실대로 고백하여라. 네가 무엇을 하였는지 숨기지 말고 나에게 말하여라.” 아간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였다. “제가 진실로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제가 저지른 일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전리품 가운데에서, 시날에서 만든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이 나가는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이 나서 가졌습니다. 

보십시오, 그 물건들을 저의 장막 안 땅 속에 감추어 두었는데, 은을 맨 밑에 두었습니다.” 여호수아가 사람들을 그리고 보냈다. 그들이 장막으로 달려가 보니, 물건이 그 장막 안에 감추어져 있고, 은이 그 밑에 있었다. 그들은 그것을 그 장막 가운데서 파내어, 여호수아와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있는 데로 가져 와서, 주님 앞에 펼쳐 놓았다. 여호수아는, 세라의 아들 아간과 그 은과 외투와 금덩이와 그 아들들과 딸들과 소들과 나귀들과 양들과 장막과 그에게 딸린 모든 것을 이끌고 아골 골짜기로 갔으며, 온 이스라엘 백성도 그와 함께 갔다. 여호수아가 말하였다. “너는 어찌하여 우리를 괴롭게 하느냐? 오늘 주님께서 너를 괴롭히실 것이다.” 그러자 온 이스라엘 백성이 그를 돌로 치고 불살랐다. 그들은 그 위에 큰 돌무더기를 쌓았는데, 그것이 오늘까지 있다. 이렇게 하고 나서야 주님께서 맹렬한 진노를 거두셨다. 그래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도 아골 골짜기라고 부른다.]

• 존재의 이유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신학자 구미정이 재미있는 일화를 들려주었습니다. 칠판에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유명한 명제를 제시하며, 칠판에 “나는 ( )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고 쓰고는 괄호를 채워보라고 주문을 했습니다. 학생들은 상당히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고 합니다. 매일 다람쥐 쳇바퀴 돌듯 습관적으로 사는 터에 갑자기 자기 존재에 대해 물으려니 그럴 만도 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망설이던 학생들 입에서 재기발랄한 답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한 학생이 “나는 취업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고 비장하게 말하자 격려의 박수가 나왔습니다. 

한 학생이 “나는 연애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고 말하자 야유와 질투가 섞인 함성이 쏟아졌습니다. 힙합풍으로 차려입은 폭주족 출신의 남학생이 “나는 질주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고 선언하자, 강의실은 급기야 환호의 도가니로 변했습니다. 하지만 가장 많은 지지를 받은 명제는 이것이었다고 합니다. “나는 쇼핑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하루라도 뭔가를 구매하지 않으면 좀이 쑤시는 세태를 이보다 더 절묘하게 표현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구미정, <<야이로, 원숭이를 만나다>>, 149-150쪽 참조)

뭔가를 소유하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유구悠久합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소유에 대한 욕망이 부풀려진 시대도 찾기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 백 수 천 건의 광고와 대면하고 삽니다. 텔레비전 화면에는 잘 생기고 멋진 젊은이들, 혹은 중후한 중년들이 등장해서 인간다운 삶이란 이런 거라며 청하지도 않은 가르침을 베풉니다. 졸지에 그것을 소유하지 못한 이들은 불행한 인간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구미정 박사는 이런 세태를 예의 발랄한 어조로 이렇게 말합니다. “구매하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구매력이 곧 그 사람의 존재와 등가로 취급되는 세상입니다. 몹쓸 세상이지요. 열 번째 계명은 “너희 이웃의 집을 탐내지 못한다. 너희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소나 나귀나 할 것 없이, 너희 이웃의 소유는 어떤 것도 탐내지 못한다”(출20:17)라고 못 박듯 말하고 있습니다. 탐심은 야금야금 우리 마음을 갉아먹어 마침내 하나님의 뜻을 행할 능력을 고갈시켜버리고 맙니다. 오늘 본문도 탐심이 빚어낸 비극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 영문을 알 수 없는 패전
억압의 땅 애굽을 벗어난 탈출 공동체는 40년의 광야생활을 마감하고 바야흐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제방까지 물이 차오른 요단강은 언약궤를 앞세운 제사장과 이스라엘 앞에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그들은 마른 땅을 밟고 강을 건넜고, 열두 개의 돌을 주워 기념비로 세웠습니다. 길갈에 이르러서는 애굽에서 겪었던 수치를 없애 버린다는 의미로 할례를 행했습니다. 강성했던 여리고 성도 함락시켰습니다. 주께서 그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 앞에는 거칠 것이 없어 보였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늘 예기치 않은 곳에서 발생합니다. 출애굽 공동체는 기세등등하게 서진을 계속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16킬로미터 쯤 떨어진 곳에 있던 구릉지대의 성읍 아이(Ai)에 이르렀습니다. 

사령관 여호수아는 정탐꾼을 보냈고, 정탐꾼들은 돌아와 호기롭게 보고를 했습니다. 큰 힘을 들이지 않아도 아이 성쯤은 정복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3천 명의 군사를 보내 아이 성을 치게 했습니다.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실제로 이 성읍이 수용할 수 있는 인구는 고작해야 1,000명 정도였다니 전술적으로 보아도 꽤 적절한 조치였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패배였습니다. 최초로 경험한 패전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가슴은 오그라들었고, 여호수아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슬퍼하면서 옷을 찢고, 하나님의 궤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저녁때까지 있었습니다. 장로들도 그를 따라 슬픔에 젖어 머리에 먼지를 뒤집어썼습니다.

마침내 여호수아가 입을 열어 하나님께 질문을 합니다. 이번 패전으로 인해 주변 부족들은 자기들을 만만하게 여길 것이 분명하다면서, 주님의 명성을 어떻게 지킬 것이냐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패전의 책임이 하나님께 있다는 식으로 불퉁거리지만, 하나님은 패전의 책임이 백성에게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죄를 지었다. 나와 맺은 언약, 지키라고 명령한 그 언약을 그들이 어겼고, 전멸시켜서 나 주에게 바쳐야 할 물건을 도둑질하여 가져갔으며, 또한 거짓말을 하면서 그 물건을 자기들의 재산으로 만들었다.”(7:11)

누군가가 하나님께 돌려야 할 것을 사취했던 것입니다. 전리품을 나누어갖는 것이 고대인들의 관습이지만, 히브리인들은 그것을 불경한 행위로 보았습니다. 그들은 전쟁을 수행하는 것은 인간이지만, 그 승패는 하나님께 달려 있다고 믿었습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오뒷세이아>>를 보더라도 인간의 싸움에 신들이 개입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왕들은 출정하기에 앞서 예언자들이나 샤먼을 통해 신의 뜻을 물었습니다. 이것은 성경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모티프입니다.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신은 다른 신들에게 속해 있던 것들을 태워 없앰으로써 자신의 지배권을 확고히 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 규정을 어겼습니다. 탐심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욕심이 공동체 전체를 위기에 빠뜨린 것입니다. 

• 제비뽑기와 처벌
문제의 뿌리를 제거하지 않고는 어떤 승리도 기약할 수 없음을 알게 된 여호수아는 그 죄인을 찾기 위해 지파별로 사람들을 소집하고 제비를 뽑도록 했습니다. 그 원시적인 과정을 거쳐 마침내 아간(Archan)이 범인임이 밝혀졌습니다. 여호수아는 아간에게 자초지종을 묻습니다.

“나의 아들아,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에게 사실대로 고백하여라. 네가 무엇을 하였는지 숨기지 말고 나에게 말하여라.”(19)

아간은 순순히 자기의 행위를 고백합니다. 전리품 가운데서 몇 가지를 숨겼다는 것입니다. 시날 그러니까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수입해 온 외투 한 벌, 은 이백 세겔, 오십 세겔 나가는 금덩이를 하나 숨겼다는 것입니다. 1세겔이 11.5g 정도 되니까 은 이백 세겔이면 2.3kg이 되고, 오십 세겔 나가는 금덩이는 575g이니까 약 153돈이 됩니다. 견물생심인가요? 그것을 보는 순간 그의 도덕적 자아는 눈을 감았고, 하나님을 속일 수 없다는 엄중한 사실조차 떠오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의 욕심이 결국은 출애굽 공동체에 큰 해를 끼쳤습니다. 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백성을 괴롭히는 자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아골 골짜기로 끌고 가 돌로 쳐 죽였습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인 아간의 이름은 ‘괴롭히다’는 뜻의 아갈과 유사하고, 그가 죽은 ‘아골’ 골짜기도 고통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아골 골짜기는 백성들에게 아간의 죽음과 맞물려 고통스런 기억을 상기시키는 장소로 각인되었을 것입니다. 또 그의 이름은 한 개인의 탐심이 한 공동체에 얼마나 큰 해악을 끼칠 수 있는지를 상기시키는 역사적 이름이 되었습니다. 

• ‘아간’들의 나라
이 사건을 묵상하는 동안 암담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아간과 같은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또 출애굽 공동체는 아간의 범죄를 드러내고, 그에 합당한 처벌을 내렸습니다.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다소 잔인한 듯 보이지만 그들 나름대로 사회를 정화하는 장치가 작동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차라리 그 시대가 지금보다는 희망이 있던 시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비리를 저지른 공직자나 정치인들에 대해 준엄하게 청산을 하지 못한 결과 우리는 지금 불신의 세월을 살고 있습니다. 어느 전직 대통령이 했다는 말 ‘왜 나만 갖고 그래?’라는 말이 우리 세태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세상의 소금이어야 할 종교도 예외가 아닙니다. 지금 감리교회가 이 지경이 된 것도 자정 능력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막대한 물적, 인적 자원을 동원할 수 있는 사람인 경우에 사람들은 ‘그간의 공로를 인정하여…’라고 말하며 면죄부를 쥐어주곤 했습니다. 꿩 잡는 게 매라는 식의 성과주의가 양심의 숫돌이어야 할 신앙조차 타락시켜 버리고 만 것입니다.

아간 류(類)의 사람들이 부끄러움도 죄책감도 없이 판을 치는 시대는 살 만한 시대가 아닙니다.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공동체의 안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파렴치한 이기심이 시대의 대세가 되어 우리는 인정의 황무지를 걷고 있습니다. 부동산 불패 신화에 기대어 불로소득을 노리는 사람들, 뉴타운 개발로 인해 막대한 부를 얻고 있는 지주들과 건설사들의 눈에는 살 권리를 박탈당한 채 자기 땅에서 유배당한 이들의 피눈물이 보이지 않는 모양입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라는 말을 기억하시는지요?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그에 걸맞는 도덕적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돈 많은 사람들, 많이 배운 사람들, 지위가 높은 사람들…그들은 자기들이 누리는 많은 것들이 다른 이들의 희생을 통해 얻어진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 고마움을 모르면 사람이 아닙니다. 가진 것, 배운 것을 필요한 이들에게 그저 나누어주려는 마음이 있어야 참 사람입니다.

아간 류의 사람들은 남을 배려할 줄 모릅니다. 제 좋을 대로 살 뿐입니다. 말장난이지만 ‘아간’은 ‘악한惡漢’입니다. 그들은 영적인 미숙아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공공성에 대한 의식이 없습니다. 전철역에서 빌려주는 우산이 채 몇 주가 지나지 않아 다 사라지고 만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지자체가 야심차게 준비했던 자전거 대여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적 공간을 사적으로 전유해버리는 일도 많습니다.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 큰 소리로 전화 통화를 하거나, 디엠비를 크게 튼 채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낯 뜨거운 애정행각을 벌이는 이들도 있습니다. 결혼식장에서 주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큰소리로 떠듭니다. 

남 눈치 볼 것 없이 살겠다는 결의는 장하지만, 그들이 다른 이들의 심령에 가하는 폭력은 심각합니다. 공동체를 위해 자기 자신을 제한할 줄 아는 것이 교양이고 믿음입니다. 아간은 자기에게 최선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택했지만, 그것이 곧 죽음으로 이어질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겁니다. 이익에 마음이 흔들리면 그물과 함정이 앞에 있어도 보지 못한다 합니다. 

• 소망의 문
아간으로 인해 아골 골짜기는 음습한 느낌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게다가 이호운 목사님이 작사하신 찬송가 <부름 받아 나선 이 몸>에서 우리가 비장한 마음으로 복음을 들고 갈 장소로 언급되고 있는 곳이 바로 아골 골짜기여서 이런 느낌은 더 짙습니다. 

하지만 예언자들은 그 아골 골짜기를 희망이 시작되는 곳으로 선언합니다. 바벨론 포로기에 활동했던 익명의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하면서 “샤론 평야는 나를 찾는 내 백성이 양 떼를 치는 목장이 되고, 아골 골짜기는 소들이 쉬는 곳이 될 것”(사65:10)이라고 예고합니다. 호세아는 백성을 향한 주님의 사랑을 말하면서 “아골 평원이 희망의 문이 되게 하면, 그는 젊을 때처럼, 이집트 땅에서 올라올 때처럼, 거기에서 나를 기쁘게 대할 것”(2:15)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렇습니다. 희망을 말할 수 있는 자리로 절망의 현장보다 더 좋은 곳이 어디이겠습니까?

아간의 탐욕과 그로 말미암은 공동체적 고난, 그리고 처벌의 기억이 서려 있는 곳, 그곳이야말로 새로운 역사의 출발점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용산 참사가 벌어진지 이제 100일이 다가옵니다. 그런데도 아직 책임 있는 당사자들이 나서서 유족들에게 사과 한 마디, 위로 한 마디 건네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유족들의 한을 깊게 만듭니다. 제게는 명일당 앞 건물이 우리 시대의 아골 골짜기로 여겨집니다. 그곳을 우리 시대의 탐욕을 매장하는 상징적 장소로 삼을 때 그들의 희생은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고래 가운데는 상처 입은 동료가 수면 위로 떠올라 숨을 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등으로 받쳐주는 종들이 있다 합니다. 바로 그게 교회와 성도의 임무입니다. ‘아간’에게 그것은 낯선 삶입니다. 하지만 믿는 이들에게는 상식이고, 당연지사입니다. 당연한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을 때 삶은 삭막해집니다. 구미정 박사의 질문에 “나는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고 고백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숨결이 마른 뼈들처럼 버성기는 우리의 삶에 불어와, 주님의 뜻을 수행하는 하늘 군대로 거듭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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