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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확실하게 믿자 (눅 9:57~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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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하게 믿자 (눅 9:57~62)


1. 확실한 것이 좋다.

전에 함께 사역했던 여 전도사님 중에 커피를 마실 때마다 “커피는 지옥같이 뜨거워야 제 맛이다”라고 하시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 분은 조금 식은 커피나 미지근한 커피는 아예 커피로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그렇게 뜨거운 커피를 마시면서 지옥 갈 뻔 한 인생이 천국 백성 된 것을 감사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아주 확실한 그 분의 성격만큼이나 커피에 대한 嗜好도 아주 분명한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의 신앙이나 삶도 그와 같아야 하지 않을까요? 신앙인의 삶도 그와 같이 분명하고 확실해야 한다는 말씀이죠. 그래서 우리 예수님께서도 요한계시록 3장 15, 16절에서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이와 같은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갈릴리 사역을 마무리 지으신 후, 사마리아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하셨으나, 사마리아 사람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히자(눅9:53), 다른 경로를 통하여 유대 땅으로 향해 가시던 중 따르는 무리들과 있었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2. “확실하게 믿어라”

1) “여우 굴, 새 집”

예수님께서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57).” 그런데 마태복음 8장에 보면 지금 주님을 따르겠다는 이 사람이 “서기관” 중의 한 사람이라고 합니다(마8:19). 여러분, 서기관이 주님을 따르겠다고 자원하여 나선 것은 아주 특별한 일이고, 또 이 일이 미칠 영향도 아주 컸습니다.

왜냐하면 서기관이라면 당대의 식자층이며 유대 사회의 최상류층에 해당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평범한 사람 열 명이 주님을 따르는 것보다 이런 서기관과 같은 사람 한 명이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 훨씬 나아 보일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서기관은 율법을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구약 성경을 줄줄 외울 정도입니다. 서기관이 주로 하는 일은 성경을 옮겨 적는 일인데, 인쇄술이 나오기 전이었기 때문에 일일이 손으로 옮겨 적어야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바르게 적었는지 틀리게 적었는지 맞춰보는 것까지 서기관의 일이었는데요. 

그러다 보니 서기관들은 성경이 모두 몇 글자인지까지 훤히 알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서기관이 되기 위해서는 다섯 살부터 열세 살까지 율법 교육을 받고, 그리고 서른 살이 되면 성경을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그 뿐 아니라 유대 사회에서 법을 다루는 법관의 역할까지 담당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인정을 받으면 그 다음 단계는 유대 사회의 최고위층인 산헤드린 의회의 의원도 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 전체에서 서기관은 6,000 명 정도였다고 하는데요. 이런 평범치 않은 사람이 주님을 따르겠다고 자발적으로 나선 것은 여러모로 아주 특별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서기관은 예수님으로부터 전혀 뜻밖의 말씀을 듣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58).” 

❶ 얼핏 들으면, 서기관이 자기를 따르겠다는 말이 고맙기는 하지만, 예수님은 ‘데리고 다니며 먹이고 입히고 잠재울 능력이 없으므로 사양하겠다’는 의미로 이 말씀을 하셨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는 이미 제자가 많기 때문에 그들의 뒤치다꺼리하기도 버거워 더 이상의 제자를 받을 수가 없어 거절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달리 보면, 이미 열두 사도와 70명의 제자와 그 이상 되는 많은 제자들은 데리고 다니셨기 때문에 거기에 서기관 한 사람 더 보탠다고 그렇게 큰 재정적인 부담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❷ 그러면, 혹시 서기관이 예수님을 따르면서 어떤 부가적인 이익을 계산한 것에 대해 차단하는 의미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아닐까요? 대부분의 학자들은 바로 여기에 무게를 둡니다. 당시 유대 사람들에게 여우나 참새는 가장 흔하면서도 아주 보잘 것 없는 것을 뜻하는 짐승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려는 뜻은 여우나 참새처럼 하찮은 것들도 제 집 하나는 확실하게 가지고 사는데, 예수님이나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그렇게 보잘 것 없는 것들보다 훨씬 더 못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을 좇겠다는 서기관에게 ‘그러한 삶을 살 수 있겠느냐?’고 물어보신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참새보다 못하고 여우보다도 못한 삶을 각오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 서기관이 주님을 따른다고 한 데에는 한참 대중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는 예수의 무리에 속하고 싶은 속마음이 있어서, 나아가 立身揚名을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서기관의 동기가 세상적인 영광에 있었으므로 그에게 ‘제자로서 살아가는 것은 자기 부정과 희생과 고난의 길’이라는 것을 알려주심으로 그의 잘못된 생각을 고쳐주시려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을 따르는 일은 주님의 고난에 동참할 각오가 없이는 안 됩니다. 세상적인 야망이나 인간적인 욕심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즉 예수 믿어서, 주님의 일군이 되어서 ‘팔자 고치는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말씀을 들은 서기관은 그 후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당시 사회에서 아주 특별한 사람이었던 이 사람에 대한 기록이 오늘 본문 이후로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아마 그는 포기하고 돌아선 것 같습니다.

2) “나로 먼저 가서”

이 일이 있은 후, 이번엔 예수님께서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은 이 사람을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라고 합니다(마8:21). 아마 주님은 이미 주님을 따르고 있던 그에게 좀 더 확실하게 당신을 따르라는 뜻으로 “나를 따르라”고 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대뜸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59). 이 대답에 대해 주님은 “죽은 자들로 자기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고 하셨습니다(60). 

여러분, 다른 사람도 아닌 주님의 제자가 돌아가신 자기 아버지를 장사한 후 주님을 따르게 해 달라고 부탁한 것은 합리적이고 타당해 보이지 않습니까? 돌아가신 아버님을 장사 치른 후 주님을 따르겠다는데 어떻게 반대합니까? 그런데 주님은 이번에도 안 된다고 하시면서 그의 청을 거부하셨습니다. 피도 눈물도 없이, ‘한번 헌신했으면 돌이킬 수 없다’고 하는 매정함마저 보이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러한 생각은 아주 피상적인 본문 이해에 불과합니다. 즉 人倫之大事인 부친 장례를 저버리고 자신을 따르라는 예수님의 요구를 겉으로 드러난 것으로만 판단할 경우, 여러 가지 오해가 발생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진정한 의도는 무엇일까요? 

❶ 우선 그 사람이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겠다”고 한 것에 대해 알아봅시다. 이것은 지금 막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거나 돌아가시기 직전이라서 운명을 지켜본 후에 장사를 치르고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 말은 “아버지가 살아 계시는 동안은 자식 된 도리로서 아버지를 섬기고 봉양하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장사지내는 자식의 도리를 다한 후에 주님을 따르겠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이 사람의 말을 바꾸어 표현하면 “예수님, 가족의 기대와 요구를 거절하면서까지 예수님을 따르라는 것은 아니지요? 가족의 요구와 기대를 다 부응한 후에 따르겠습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의 청을 거절하셨습니다. 그 사람은 주님을 따르는 것을 거절하기 위한 가장 좋은 핑계거리를 제시했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거부하시면서 당신을 따르라고 요구하신 것입니다. 

❷ 그 다음에 이어지는 “죽은 자가 자기의 죽은 자를 장사한다”는 말은 얼른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미 죽은 사람이 죽은 자기 아버지를 장사지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죽은 자란 “영적으로 죽은 자” 즉, “하나님의 나라와 관련 없는 자”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런 말은 한 것은 그가 주님을 따르는 일을 무한정 연기하겠다는 뜻으로밖에 볼 수 없습니다. 나아가 이 말씀은 “너는 그 일보다 더 중요한 일에 집중하라”는 의미입니다.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것, 그리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일보다 더 중요하고 시급한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두 번째 사람의 문제를 아시겠지요? 그의 몸은 주님을 따르고 있었지만 그의 마음은 집에 계신 부친의 생각으로 차 있었습니다. 연로하신 부모님을 생각하는 일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로 인하여 주님의 일이 중단되거나, 주님을 따르는 일에서 떨어져 나간다거나, 진리를 저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예수님께서 먼저 그에게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셨다는 것입니다. 세상 어느 누구도 주님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명령은 세상 그 어떤 일보다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가족의 대소사, 부모에 대한 자식의 도리, 사회적인 의무나 중요한 사업상의 문제라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일이나,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을 대체할 만큼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주님의 명령을 따르면, 주님은 그 사람이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한 일들까지 다 해결해 주실 것인데, 그는 그것을 믿지 못했습니다.

3)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마지막으로, 61절에는 세 번째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에 대해 눈여겨 볼 것은 자신이 먼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나섰다는 점과, 예수님께서 묻지도 않았는데 주님을 따르겠다면서 조건을 하나 제시했다는 것입니다.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61).” 얼핏 보기에 이 말은 자신이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것을 가족들에게 알리고 오겠다는 말로 들립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렇게 보는 것은 이 사람의 의도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한 것입니다. 

❶ 여기서 “가족을 작별한다”는 것은 가족과 ‘작별의 인사를 나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열왕기상 19장 20절에 보면,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자기를 따르라고 했을 때, 엘리사는 “부모와 작별의 입맞춤하게 하소서 그리한 후에 내가 당신을 따르리이다”라고 간청했고, 그것이 옳다고 여긴 엘리야가 허락을 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세 번째 주인공의 경우는 그와는 다릅니다. 본문에 기록된 단어와 어구의 사용 예를 볼 때, 그 사람이 한 말은 단순히 이별의 인사가 아니라 집에 가서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자기가 떠나도 좋은지 허락을 받고 오겠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어느 부모가 아들이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사람을 따라 이곳저곳을 떠돌겠다고 하는데 쉽게 그것을 허락해 주겠습니까? 아마 대부분의 부모들은 반대할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의 세 번째 사람이 말한 내용을 바꾸어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따르고 싶습니다. 그런데, 부모 형제가 있는 저로서는 그들의 동의와 지지를 얻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예수님도 아시지요? 일단 부모님께 여쭙고 허락을 받은 후에 오겠습니다.” 이것은 그가 예수님의 제자 되기를 거절하는 멋진 변명밖에 되지 않습니다. 주님의 뜻이나 명령보다 가족들의 의사, 가까운 친구들의 견해, 다른 사람들의 생각도 한 번 다 들어보고 결정하겠다는 말입니다. 

❷ 이렇게 갈등하는 그 사람에게 주님은 이어서 비유를 드셨습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 …(62).” 이 비유는 농사를 짓던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쉽게 수긍할 만한 이야기였습니다. 바위와 돌투성이인 밭을 갈고 있는 농부가 왼손으로는 쟁기를 붙잡고, 오른손으로는 앞서 가는 소 두 마리가 똑바로 나가도록 조정하기 위하여 줄을 붙잡는 일이 굉장히 집중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 것입니다. 그런 농부는 주변을 둘러볼 여유도, 뒤를 돌아다볼 정신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상황을 알고 있는 당사자에게 도전의 말을 던진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일도 마찬가지라는 것이지요. 주님을 따라가고 있다면 뒤돌아보는 것은 용납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즉 주님의 말씀 만 들어야지 왜 다른 사람의 의사나 뜻을 묻습니까? 그것이 잘못 되었다는 말입니다.

4) “확실하게 믿어라!”

이상이 주님께서 당신을 따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말씀이 제게 어떻게 들리는지 아세요? “제대로 믿어라!” “확실하게 믿어라!” “화끈하게 믿어라!” “이왕 믿는 예수 제대로 믿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죽도 밥도 안 된다!”

신혼 시절에 했던 저의 경험입니다. 신혼 초 처가살이를 하면서 난생 처음으로 엘리베이터가 있는 고층 아파트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좋든지 제 아내 몰래 엘리베이터를 두 번씩 타고 꼭대기 층까지 가보고 … 그랬습니다. 어느 날, 제가 집에 도착해서 열쇠로 문을 열었는데요.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열쇠가 들어가지를 않았습니다. 열쇠가 들어가야 문을 열죠. 아무리해도 안되길래 짜증을 내면서 고개를 잠시 들었습니다. 그 순간, 제 머리 위로 <708호>라는 숫자가 보였습니다. 당시 제가 살던 아파트는 <808호>이었습니다. 제가 엘리베이터를 잘못 내려 708호 앞에서 808호 열쇠를 넣고 문을 열려고 한 것입니다. 

그 날 저는 아주 중요한 교훈을 얻었습니다. 그 문은 그 문에 맞는 열쇠로만 열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집 열쇠를 가지고 남의 집 문을 열 수는 없다는 아주 평범한 진리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신앙생활이 바로 이와 같더라고요. 무슨 말인가 하면, 신앙의 문, 은혜의 문, 하나님의 복의 문을 여는 열쇠는 따로 있더라는 것입니다. 엉뚱한 열쇠를 가지고 그 문을 열려고 하면 절대로 열리지 않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들고 있는 열쇠는 무엇입니까? 혹시 엉뚱한 열쇠를 가지고 신앙의 문, 가정의 문, 자녀의 문, 직장의 문, 미래의 문을 열려고 하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적당”의 열쇠, “타협”의 열쇠, "양다리“ 열쇠로는 천국의 문을 열수 없습니다.

지난 화요일 밤, 여의도 순복음교회 이 영훈 목사님의 설교 가운데 우리가 들었던 한 재미교포 할머니의 이야기를 기억하십니까? 

미국인 남편과 결혼하여 남매를 두고 있던 할머니는 매일 매일을 정신 나간 사람처럼 살고 있었습니다. 그 할머니가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미국인인 남편은 알코올 중독자, 그 아들도 알코올 중독자, 그런 남편과 어린 아들을 두고 가출해 버린 며느리, 그러다 보니 아들은 마약 중독으로 교도소에 들어가 버렸고, 설상가상으로 역시 알코올중독자가 된 딸은 가출을 해버렸고 …, 이런 사정으로 인하여 그 할머니는 정신을 놓고 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수도 없이 목숨을 끊고 싶었으나 어린 손자 때문에 하루하루를 겨우 겨우 버티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할머니가 슈퍼마켓에서 전도를 받아 교회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 할머니가 교회 나오자마자 얼마나 열심이 특심하든지, 주일낮 1,2,3부 예배에 다 참석하고, 수요예배와 새벽기도회에도 단 한 번도 빠지지 않았으며, 예배 때마다 맨 앞자리에서 항상 손을 들고 찬양하며, 늘 눈물로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신앙생활 처음부터 그렇게 했더니 6개월 만에 남편이 교회에 나오고, 8개월째에는 교도소에 있던 아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리고 1년 만에 가출했던 딸이 술을 끊고 돌아왔습니다. 이왕 믿는 예수, 확실하게 뜨겁게 전적으로 매달렸더니 그 가정이 완전히 변화 된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이 말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왕 믿는 예수, 확실하게 믿고, 열정적으로 믿고, 전적으로 매달릴 때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3. 이왕이면 제대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주님을 따르려는 세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❶ 첫 번째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기는 하되 세상적인 야망과 자기 욕심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우굴과 새 집 이야기를 하시면서 ‘세상의 것에 대한 기대를 버릴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❷ 두 번째 사람은 제자의 삶도 좋지만, 가족, 부모에 대한 자식의 도리 등을 핑계로 내세우면서 그것을 다한 후에 따르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그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다른 사람은 주님과 진리를 모르는 사람일 수도 있지만,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더 하시리라”하신 우리 주님 자신일 수도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면 그 나머지는 주님께서 풍성하게 채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❸ 가족들에게 작별인사를 한 후에 주님을 따르겠다고 한 세 번째 사람에게 주님은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명령하셨으면 그대로 따라야지 왜 가족이나 다른 사람의 뜻을 살피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뒤로 돌아보는 어리석은 행위와 같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여러분이 이 땅에서 먹고 입고 사는 것에 대해서 무관심하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가족을 버리라고 말씀하시지도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전적으로 주님을 따르는 그 자세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따르면 주님은 우리가 내려놓은 것에 대해서 반드시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말씀드립니다. 이왕 믿는 예수, 확실하고 분명하게 믿으십시오. 그래야 진정한 성도가 될 것이고, 또 그렇게 믿어야 하나님의 기적과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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