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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의 소문 (살전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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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소문 (살전 1:1~10)
 
 
데살로니가는 마게도냐의 왕이자 알렉산더의 아버지인 빌립 2세가 양자로 삼았던 카산더(Cassander)가 주전 315년에 건설했습니다. 데살로니가라는 이름은 알렉산더의 이복누이로서 카산더의 아내가 된 여인의 이름을 따라 붙여졌습니다. 데살로니가는 빌립보처럼 비잔티움에서 로마까지를 잇는 두 개의 주요 군사도로 중 하나인 비아 에그나티아(Via Egnatia) 상에 자리를 잡고 있는 항구 도시인데, 주전 146년에 로마가 이 도시를 점령한 후 마게도냐 지방의 수도가 되었습니다.

데살로니가에 교회가 세워진 과정은 사도행전 17장에서 소개되어 있습니다. 여기서는 이 서신이 바울 사도가 고린도에서 주후 51-53년 사이에 데살로니가 교회에 쓴 서신이라는 것만 간략히 말씀드리고, 데살로니가인의 교회는 어떤 특징을 가졌던 교회인지를 중심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1절에서 이 서신서의 공동 발신인과 수신인이 밝혀집니다.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바울이 2차전도 여행 때 데살로니가 교회를 함께 세운 동료들입니다. 실루아노(Siluanus)는 로마 시민권을 가진 유대인 ‘실라’(Silas)의 로마식 이름입니다. 디모데는 바울의 1차전도 여행 때 그리스도를 영접했는데 2차전도 여행의 동역자가 되었지요. 그들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합니다. 짧은 구절이지만, 발신인들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동등한 분으로 여기고 있음과 교회를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공동체로 여기고 있음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데살로니가 안에 있는데 데살로니가인의 교회는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요 15:5a)라는 말씀을 기억나게 합니다. 데살로니가인의 교회는 예수님의 약속하신 말씀처럼 신앙의 열매들을 많이 맺었습니다. 바울은 기도할 때마다 그들을 늘 기억하면서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말합니다(2).

감사의 이유는 3절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밝혀집니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발신인들은 단지 그들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기억하지 않고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기억했습니다. 행위가 따르지 않는 믿음, 수고 없는 사랑, 인내하지 못하는 소망은 빛 좋은 개살구처럼 추상적인 관념에 불과합니다. 행위가 따라오는 믿음이라야 살아 있는 믿음이고, 수고가 따르는 사랑이라야 참 사랑이며, 인내할 수 있는 소망이라야 진정한 소망이지요. 특히 소망은 원하고 바란다고 해서 성도의 소망이 되지 못하고,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만이 참 소망이 됩니다.

사도행전 17장을 보면 바울은 세 번의 안식일 동안 유대인의 회당에서 성경을 강론했습니다. 회당에서 쫓겨난 후에는 야손의 집을 가정교회로 삼아 복음을 전했습니다. 데살로니가에 머무는 동안 빌립보 교인들로부터 한 두 차례 재정 후원을 받았으며(빌 4:16), 또 자기 손으로 일하면서 섬겼습니다(2:9). 성경학자들은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머물렀던 기간을 대체로 3개월 정도로 추정합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를 떠나 고린도에서 편지를 쓰기까지의 기간도 그리 길지 않다고 봅니다. 베뢰아에서는 유대인들이 동원한 깡패들의 테러와 관원들의 핍박으로 오래 머물 수 없었고, 에덴에서는 복음을 잘 받아들이지 않아서 오래 머물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정황을 종합해보면, 당시 데살로니가인의 교회는 복음을 영접한지 얼마 되지 않은 성도들로만 구성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방인들로 구성된 그 교회는 사도가 항상 하나님 앞에서 감사할만한 훌륭한 신앙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4)는 말씀에서 해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인의 교회가 놀라운 신앙의 열매들을 맺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그분의 선택하심의 결과라는 것이죠. 헬라어 성경에서는 5절이 ‘왜냐하면’(o{ti, 호티)으로 시작되는데, 4절과 같이 판단한 이유를 설명합니다.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이 구절은 복음이 말로만 작용하지 않은 것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증거이며, 선택받음의 증거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도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고 했습니다. 선택받지 못한 자에게 복음은 미련한 말이나 경건한 우화처럼 받아들이기도 하고, 삶에 도움 되는 좋은 말이나 새로운 철학으로 받아들이기도 하는데 공통점은 인간의 말과 글 이상으로 여기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선택한 자에게 복음은 인간의 말과 글로 전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상으로 받아들여져서 그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습니다. 똑같은 사람에게서 똑같은 말씀을 듣고서도 왜 이처럼 상반된 반응을 나타냅니까?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선택하심 때문입니다. 출애굽 때에, 모세에게서 동일한 말씀을 듣고서도 애굽 사람들은 멸망했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구원을 얻었던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선택하신 자에게는 복음이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작용합니다. 복음은 교회의 핍박자 사울을 사도 바울로 변화시켰습니다. 어떤 핍박과 위협과 어려움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복음을 전파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바꿔놓았습니다. 데살로니가인의 교회는 예수 믿고서 삶의 형편이 좋아지거나 편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많은 환난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복음을 받았으며, 복음 전파자들과 주님을 본받는 삶을 살았습니다(6). 더 나아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그들로부터 퍼져나갔고, “하나님을 향하는” 그들의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습니다(7-8).

믿음의 소문의 내용은 9-10절에 소개됩니다. 만일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온 것이 3절의 ‘믿음의 역사’와 관련된다면,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사랑의 수고’와 관련될 수 있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리는 것은 ‘소망의 인내’와 관련됩니다. 복음을 받은 데살로니가인 교회는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대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선택하신 사람은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대상이 근본적인 변합니다. 그 결과로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그의 삶에 열매로 드러나지요. 이 때문에 발신자들은 하나님께 감사를 돌립니다. 데살로니가인의 교회를 찬양하지 않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물론 간접적으로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를 칭찬하는 것이지만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망각하지 않은 것이지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를 기도 중에 잊지 않고 항상 감사하는 공동 발신자들을 통해 배우는 바가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관심을 가지시는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기도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바울 일행은 2차 전도여행 때 소아시아 지역에 세운 교회들을 돌아보고 복음을 전하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성령님께서 소아시아에 말씀을 전하는 것을 막으시시고 그들을 마게도냐로 인도하셔서 빌립보와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와 아덴과 고린도에 복음을 전하도록 역사하셨습니다. 그들은 자기 계획을 고집하지 않았고, 실패에 연연해하지 않았습니다. 즉시 하나님께서 관심 가지신 곳을 기도제목으로 삼고 사랑의 수고를 하였습니다.

우리는 당면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지게 되므로 기도 역시 당면한 현실 문제의 해결에 집중되기 쉽습니다. 이런 기도가 필요하지만 자신의 필요 중심으로 기도하다보면 자칫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하기 원하시는 필요에 대해서는 소홀하기 쉽습니다. 또한 그분께서 성령님과 큰 능력과 확신으로 교회에 어떤 일을 이루셨는지에 대해 무관심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다보면 감사가 사라지고 현실문제들이 해결되지 않는 것으로 낙심하여 믿음의 역사나 사랑의 수고나 소망의 인내를 하기 힘들어집니다.

성도는 낙망치 말고 복음의 전파를 위해 기도하되 자기 계획을 관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면서 해야 합니다. 좀처럼 해결되지 않는 현실 문제들을 만날 때, 혹시 하나님의 관심은 다른 방향 다른 곳을 향하고 있지 않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하시려는 일이 무엇인가를 분별하며 그 일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계획이 실패하여 우리 눈에 보기에 아무런 하나님의 능력도 나타나지 않는 것 같은 때조차도 가만히 살펴보면 하나님께서는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것을 기도 중에 항상 기억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엘리아 시대 때는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사람이 엘리아 외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때에도 바알 우상에 무릎 꿇지 않은 칠천 명을 남겨 두셨습니다(왕상 19:18). 이시대의 교회가 많이 부패하여서 믿음의 소문대신에 부끄러운 소문이 많이 있지만, 살펴보면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있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성도가 어려운 시대에 직면하여 힘겨워하고 신앙적으로 부진한 상태에 있는 것 같을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 있게 역사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꼭 있습니다.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며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우리 교회에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선택하신 자들에게 역사하고 계심을 기도 중에 확인하고 하나님께 감사할 때, 살아계시며 참되신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고, 기쁨으로 사랑의 수고를 감당하며, 소망 중에 인내를 지속할 힘을 얻게 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며 역사하고 계심으로 인해 환난 중에서도 기뻐하며 감사함으로 살게 됩니다. 그러한 삶이 또한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와 같은 믿음의 소문을 만들어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과도 함께 있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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