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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평강의 하나님 (히 1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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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강의 하나님 (히 13:20~21)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력을 따른 특별한 절기, 고난절과 부활절을 보내고 이제 일상으로 돌아가 다시금 히브리서 말씀을 돌아가겠습니다. “. . .평강의 하나님이. . .자기 뜻을. .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 무궁토록 있을 찌어다”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 히브리서를 받는 성도들을 축복하고 있습니다. 

비록 짧은 축도이지만 그 속에 히브리서 전체의 교리를 간단히 요약하고 있습니다. 열 세장의 서신을 통해 권면한 바를 지금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축도 속에는 히브리서 전체의 교리가 담겨 있습니다. 사도는 지금 자기가 가르친 진리를 성도들이 깨닫고 그 마음속에 적용되도록 하나님께 기도드립니다. 그러므로 이 축도는 히브리서에 어울리는 결론이며 22절 이하는 추신에 해당합니다.

히브리서 전체의 맥락 속에서만 아니라 바로 앞부분과의 관련 속에서 본문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앞 문단 18-19절에서 사도는 성도들의 기도의 지원을 부탁했습니다. 목회자를 위해서 기도하도록 요청한 다음 여기서 사도 자신이 그 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신을 위한 그들의 기도를 요청한 다음, 그들을 위해서 은혜의 보좌 앞에 간구하는 사도 자신을 만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목회자로서 제 남은 삶은 이 아름다운 사도의 본을 배우고 싶습니다. 지금껏 목회를 돌아보면서 보강해야 할 부분으로 이 점을 꼽고 있습니다. 4월 첫 주일예배에 참석한 분들에게는 목회자로서 우리를 위한 기도를 부탁드렸습니다. 

사도들이 목회의 우선순위를 설정한 것 같이 우리 목회에서도 우선순위를 바로 정하기로 다짐합니다. 불공평한 구제 때문에 문제가 생기자 모든 제자들을 불러 놓고 사도들은 각자 해야 할 일의 우선순위를 결정합니다. 과부들을 돌보고 식량을 배급하는 일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일곱을 택하여 맡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연초에 요람을 받으시고 거기 기록된 제직부서를 잘 살펴보셨습니까? 제직 부서 편성은 일을 잘 분담하기 위한 방안입니다. 지금이라도 살펴보셔서 어떤 일은 누구에게 부탁해야 할지 그 분들의 도움을 구하는 데 주저하지 마십시오. 

언젠가는 “잘 났어, 정말” 하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직분자 명단은 교회에서 잘난 사람들의 명단이 아니라 섬기는 분들의 이름입니다. 문제가 있으면 바로 담임 목사를 만나서 일을 해결하려고 들지 마시고 부서에 세운 분들, 부장도 있고 위원장도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 일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일의 분담이 꼭 필요합니다. 그 때 우리 목회자는 사도들의 모범을 따라서 결단하기가 한결 쉬워질 것입니다.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앞으로의 우리 목회는 정말 기도하는 일과 말씀 전하는 일에 더욱 힘쓸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 역시 그가 기록해 보낸 히브리서 내용이 성도들의 마음속에 역사하도록 기도하는 본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신실하게 가르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자주 열심히 기도하는 일이 필요함을 깨닫습니다. 듣는 이의 심령에 말씀이 역사하도록 기도하는 일도 우리 목회자의 주요사역임을 깨닫습니다. 

앞으로 더욱 우리 목회자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정말“기도하는 일과 말씀 전하는 일에만 힘쓰도록”기도해 주십시오. 구약 사무엘의 표현을 빌면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우리 가운데 아무도 범치 않도록 간구해 주십시오. 

모든 죄에 왕을 구하는 악을 더한 이스라엘을 향해 다음과 같이 사무엘은 밝힙니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도로 너희를 가르칠 것인즉 너희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신 그 큰일을 생각하여 오직 그를 경외하며 너희 마음을 다하여 진실히 섬기라” 

사무엘 선지자 역시 기도하는 일과 가르치는 일을 자기 중요 임무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꼭 같이 신약의 사도들도 “기도하고 말씀 전하는 일에 전무하리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성경적인 목회를 하기 위해서 다른 모든 일들은 집사님, 권사님, 장로님들이 맡아주시고 우리 목회자는 보다 본연의 직무를 하도록 도와 주십시오. 

지금껏 그래야 한다는 것을 알긴 했지만 올해는 더욱 간절히 이 일에 전념하기로 소원합니다. 여기에 성도 여러분의 모두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우리를 위해 간구해 주십시오. 우리도 여러분을 위해 간구하는 무릎이 더욱 강하여지도록 훈련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20-21절을 살펴봅시다. 사도의 축도 속에는 그 간구를 들으시는 분과 그 간구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오늘 설교에서는 제목에서 밝힌 대로 “평강의 하나님” 사도의 축도를 들으시는 그 분의 이름과 그 이름에 관련된 사역에만 한정하겠습니다. 

본문에서 사도는 그 축도를 들으시는 분을 “평강의 하나님”으로 부릅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여러 가지 다른 호칭으로 하나님을 부르기도 합니다. 로마서 15장 5절을 예를 들어 봅시다. “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거기서도 롬15장 1-4절의 주제에 따라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으로 부릅니다.

로마서 16장 27절에는 “지혜로우신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취었다가 이제는 나타내신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 하신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가 계시로 알려졌으므로 “지혜의 하나님”이라고 불립니다. 우리는 기도하다 보면 적절한 호칭을 사용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부를 때에는 아버지라고 부르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이고 예수님은 주님이신데 우린 기도하다 보면 실수를 할 때가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반드시 그 문맥에 따라서 적절한 호칭을 사용합니다. 

오늘 우리 본문은 하나님을 “평강의 하나님”으로 부릅니다. 여기 한 번 더 우리는 이 표현을 통해 히브리서가 바울의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도의 서신에서는 아무데도 평강의 하나님”이란 표현이 나타나지 않았으나 오직 바울 서신에만 모두 여섯 번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히브리서까지 포함하면 일곱 번 사용하는 셈입니다. 

1)“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롬15:33) 2)“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 어다.”(롬16:20) 

3)“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케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 하며 평안할 찌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고후13:11) 

4)“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빌4:6-9) 

5)“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5:2-3) 

6)“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주는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실지 어다”(살후3:16) 히브리서의 오늘 본문은 신약에서 일곱 번째 “평강의 하나님”이란 칭호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히브리서가 바울 서신임을 추정할 또 하나의 단서입니다. 

그리고 “평강의 하나님”이란 표현이 나오는 일곱 번 모두 기도와 관련되고 그 중 과반수 이상은 기도를 받으시는 분으로 직접 나타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주 이렇게 평강의 하나님을 불러 축복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왜 하필 기도와 관련해서 하나님을 평강의 하나님으로 부를까요? 왜 “평강의 하나님”을 불러 기도드릴까요? 이는 은혜의 보좌 앞에서 우리를 격려하기 위함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를 향한 진노를 거두신 평강의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십니다. 오직 은혜로 우리를 향해 다가오시는 분이기에 평강의 하나님으로 불리기에 마땅하십니다. 이 사실을 여러분이 알 때 그 은혜의 보좌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본격적으로 하나님이 평강의 하나님으로 불리는 내력을 살펴봅시다. 우선 히브리서 전체 주제와 관련해서 생각해 봅시다. 유대교와 비교할 수 없는 기독교의 탁월성을 설명하는 것이 본서의 목적입니다. 평강의 하나님은 하나님을 새롭게 이해한 기독교의 탁월한 요소입니다.

히브리인들이 섬기는 하나님은 자신을 가장 놀랍게 계시하신 것이 시내 산에서 이었습니다. 그러나 시내 산에서 나타내신 것과 대조해서 오늘 우리 기독교인이 섬기는 하나님은 거룩한 산 시온에서 자기를 나타내시는 하나님은 새 언약의 중보의 피로 말미암아서 우리에게 평강의 하나님으로 찾아 오셨습니다. 

그러면 왜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평강이 필요합니까? 본래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셨을 때에 사람을 보시고 보시기에 무척 좋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를 보고 하나님께서는 첫눈에 반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에게 평강이 필요합니까? 그것은 우리 사람에게 문제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죄를 범한 다음부터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간격이 생겼습니다.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가 서로 멀어졌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를 지은 사람과 평화롭게 공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 모든 사람들은 그의 진노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여기처럼 자기 백성에게 찾아올 때는 평강의 하나님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옛 언약이 아니라 새 언약 안에서 자기 백성을 만나 주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시내 산 대신 시온 산에서 그 복스러운 모습을 계시하십니다.

히브리서 앞부분에서 저자는 그리스도인들이 도달한 것은 불붙는 시내 산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시온 산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유대 종교 신봉자들을 포함한 모든 인생은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두려워 떠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기독 신앙인은 무서워 떠는 시내 산에 속한 자가 아닙니다.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 뿌림을 얻기 전에는 모든 인생은 그 심판자 하나님을 평강의 하나님으로 만날 수 없습니다. 맨 처음 하나님이 언약의 머리이신 아담을 만난 창조의 아침에는 아담 - 인간이 매우 그 보시기에 아름다운 존재였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기 뜻대로 살게 된 결과로 사람은 하나님의 호의를 상실했습니다. 푸른 하늘 아래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이 보시고 계신 한 사람들은 평화를 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더불어서 다시 관계를 회복하기 전에는 인생은 어디든지 평안한 곳이 되지 못합니다. 

결혼하면 행복해 질 줄 알았습니까? 그러나 거기에도 평안이 깃들지 않습니다. 자기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거역한 사람은, 자기를 만드신 그 분과 화목하지 못한 인생은 사는 동안 항상 문제가 뒤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인류는 그 시작부터 하나님의 통치아래 속해 있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에게 하나님은 그 왕이요, 주님이요, 심판자이십니다. 낙원에서 첫 인간 아담이 하나님의 신적 권위에 복종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를 때에는 인간은 하나님의 호의를 누렸습니다만 그가 죄를 범하는 순간 모든 상황은 변화되었습니다. 

죄는 인간을 더럽히고 그 모든 본성을 타락시켰을 뿐만 아니라 인간을 하나님의 율법의 저주아래 두게 했으며 하나님의 진노아래 예속시켰습니다. 타락한 인생은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 만나는 것이 두려워졌습니다. 

동산을 거니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하와가 숲속에 가서 숨었던 이후로 사람들은 하나님을 막연히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전에는 하나님은 두려운 분이 되셨습니다. 

타락한 인생은 거룩을 훼손당한 심판 주를 대면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거룩이 죄를 범한 인생을 낙원에서 내몰았습니다. 죄는 우리 본성을 어둡게 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게 했습니다.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엡4:18)


인간은 창조함을 받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 버렸을 뿐 아니라 본래 누리도록 의도된 하나님의 호의마저 상실했습니다. 타락의 결과로 하나님과 인간 상호간에 적대관계가 시작되었습니다. 죄가 상호관계를 파괴했고 그 결과 모든 조화와 일치가 부서졌습니다. 

그래서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될 뿐 아니라”(롬8:7)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롬1:18)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죄인에게서 떠나 계신 것과 죄인을 향해 진노하심은 인간이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만큼이나 분명히 성경은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없이 세상 살아가는 것은 고생스럽고 힘든 것은 당연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손상하고, 살면서 행복할 것이라 생각한 그 자체가 착각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의 삶이 고통스럽고 무의미하며 여기 저기 난관이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나님이 없는 삶이 외롭고 힘들고 고달픈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라고 묻지만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비참한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거룩을 손상당한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에 세상에 비참한 일이 일어납니다. 거룩을 손상한 하나님께서 자기 거룩을 훼손시킨 인생들을 그대로 두시지 않습니다. 

“나는 네가 싫다”는 표현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하나님은 진노를 쏟아 붓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사랑이시니까 세상은 낙원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 죄악을 망각한 엄청난 착각입니다. 

우리 자신이 어떤 삶을 사는지 정직하게 관찰한다면 세상에 저주가 있고 비참한 재난이 닥친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자기를 낳아준 부모도 공경하지 아니하고,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도 아니하고 감사하지도 않는데 세상이 어떻게 낙원이 될 수 있겠습니까?

타락한 인생이 만나야 할 하나님은 진노하신 왕이시오, 거룩을 훼손당한 심판장이십니다. 거역하는 인생을 향한 심판자로서 하나님의 태도는 분명합니다.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는 모든 행악 자를 미워하시며 거짓말하는 자를 멸하시리 이다 여호와께서는 피 흘리기를 즐기고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나이다.”(시5:4-6) 

시편 7편 11절은 이렇게 하나님을 묘사합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시며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이사야 선지자는 더욱 적극적으로 표현합니다.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신을 근심케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더니”(사63:10) 

그래서 주 예수께서 친히 경고하셨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10:28) 하나님의 거룩은 죄에 대해 진노의 불길을 발하시며 하나님의 공의는 만족케 되기를 호소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무한히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 하지만 절대로 그의 다른 성품들을 훼손시키기까지 자비하신 분은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십니다(롬5:21). 의를 제쳐두고 하나님의 은혜가 왕 노릇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향해 자비를 베푸시고자 하실 때 그 무한한 지혜로 새 길을 창조하셨습니다. 아담 안에서 타락한 그 백성을 향해 자비를 베푸실 때 하나님 자신의 거룩을 훼손치 않고 구원하신 방법을 마련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율법이 존중되고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되는 방법을 창출하셨습니다. 

이 위대한 방책을 일컬어 영원한 언약, 평강의 언약이라고 부릅니다. 세상을 창조하기 전에 하나님과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 맺은 복된 언약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단절된 관계를 회복하고, 완벽한 화목을 이룩하기 위해 그리고 인간의 죄로 인해 손상된 하나님의 거룩과 영광을 충분히 보상키 위해 자신을 화목제물로 내어주시기로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로마서(롬3:21-26)에서 밝힙니다. 죄에 대한 벌로 예수님의 피를 흘리게 하심으로써 그 피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도 자기 의를 손상하지 아니하시고 예수 믿는 자들을 의롭다고 하는 새로운 방법을 창출하셨습니다. 

화목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쌍방의 화목이 이뤄졌습니다. 화목은 상호적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화목해야 하는 것만큼 하나님도 인간을 향해 마음을 푸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은 죄악된 사람들을 그냥 받아줄 수 없었습니다. 사실은 여러분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일지도 모릅니다. 그냥 봐주면 되지 왜 그렇게 해주지 못했을까? 우리는 이해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과 저는 거룩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거룩은 우리의 본질이 아니기 때문에 그냥 봐준다는 사실이 얼마나 하나님에게 끔직한 일인지를 느끼지 못합니다. 인간 마음에서 하나님을 향한 적의가 제거되어야 하지만 하나님 편에서도 그 진노를 거두셔야 합니다. 그 일을 위해서 마련하신 하나님의 대책이 아들을 화목 제물로 내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아들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공의가 부르짖고 있는 모든 것이 응답되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벌 받지 않고 대신 예수께서 벌 받으심으로써 우리가 하나님 앞으로 돌아올 수 있는 길이 열려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향한 진노 뿐 아니라 죄인을 향한 진노도 거두셔야 합니다. 택함 받지 못한 자를 향해서만이 아니라 택한 자를 향해서까지 진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죄는 하나님과 그 백성을 서로 멀어지게 했습니다. 인생들은 가해자이고 하나님은 피해자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거두시게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속죄 물로 드리셨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푸시려고 그 자신이 모두 담당하신 죽음을 일컬어서 “속죄의 죽음”이라 말합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향해 원수된 자신들의 적의를 제거하기 위해서 제물을 드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드리기 위해 그들은 제물을 드렸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를 풀게 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즉. . .” 전에 원수였던 우리가 지금 화목 되었습니다. 예수의 죽음으로, 그 피로 인한 화목제물을 통해 이제 화목 되었습니다. 손상당한 하나님의 공의를 보상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하심에서부터 벗어났습니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 .”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든 죄는 십자가에서 소멸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이제 멈추었습니다. 하나님의 호의가 다시 회복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평강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축도를 듣기 전에, 축도에 나타난 축복이 여러분의 것이 되기 전에 평강의 하나님을 만나셔야 합니다. 

죄로 인한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는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평강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전에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을 믿고 “평강의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평강의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 바라는 모든 것이 여러분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평강의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속죄의 제물로 돌아가신 예수에 대해서 깊이 상고해야 합니다. 그는 자기를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신 분입니다. 

죄로 인해 모든 문제가 예수님 때문에 해결되었습니다. 히브리서는 이 문제의 해결 방법을 보여 주는 책입니다.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 . 그리스도께서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었고. . .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이 진리를 믿지 아니하면 교회를 왔다가는 것이 여러분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기독교는 여러분이 쏟는 정성에 따라서 축복해 주는 종교가 아닙니다. 아마 그런 종교라고 한다면 여러분의 공력에 대한 축복을 받아갈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배의 자리에 나오셔서 누릴 수 있는 어떠한 복도 하나님을 평강의 하나님으로 만나기 전에는 불가능합니다. 그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로 인해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평강의 왕이 오심으로 우리의 죄는 더 이상 고발당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은혜의 얼굴을 드러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을 평강의 하나님으로 알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그 분을 평강의 하나님으로 경험하셨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두려운 분이십니까? 가까이 하기에는 아직도 주저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당신의 죄를 모두 제거했습니다. 그 분의 죽음이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거두게 했습니다. 이 사실을 묵상하십시오. 이 사실을 신뢰하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특히 여러분의 기도 시간에 평강주시기를 원하시는 그 분을 만나보십시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

사람 모세의 축복이 이제 실현된 시대에 새롭게 히브리서의 축도를 음미해 봅시다.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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