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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 (롬 6: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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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롬 6:1~11)


I. 인류 최대의 드라마: 부활

뱀의 유혹으로 아담과 하와(인류)가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 사탄은 쾌재를 불렀습니다. 온 땅을 죽음의 저주로 덮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난폭하게 쳐죽였을 때 사탄은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죽음의 저주가 역사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라멕이 '연쇄살상'을 저질렀을 때 사탄은 힘찬 박수를 보냈습니다. 세상에 이 저주가 신속히도 확산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죄악이 관영하여 하나님이 홍수로 세상을 쓸어버리셨을 때 사탄은 오른손 불끈쥐고 높이 쳐들며 판정승을 자축했습니다. 하나님이 죽음의 권세 앞에 스스로 굴복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죽음의 권세가 온 세상을 완전히 장악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사탄은 흐뭇했습니다. "보라! 온 땅은 저주의 땅이 되었다" 사탄이 만세를 불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아기 예수가 탄생했습니다. 사탄은 긴장했습니다. 어떤 반격의 시나리오가 펼쳐지지나 않을지 염려되었습니다. 예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과 나인성 과부의 아들과 나사로를 살리셨을 때 사탄은 혼비백산했습니다. 그러나 정신을 가다듬고 그들에게 또 다시 죽음의 망을 씌웠을 때 사탄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렇지, 살아나도 난 다시 그들을 죽일 수 있다!' 

사탄은 예수를 가만 두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를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보고 사탄은 조롱하며 승리를 자축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흐르는 예수의 피가 사탄의 머리를 부수었습니다. 지휘본부를 소멸시켰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3일후,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우주 최대의 드라마가 연출된 것입니다.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죽음 권세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를 가두었던 무덤문 열고 부활하셨습니다. 

II. 기독교 복음의 핵심(케리그마): 십자가와 부활

우리가 믿는 복음의 핵심, 기독교의 알맹이가 무엇일까요? 그것을 신학자들은 케리그마라고 합니다. 

① 예수님의 탄생입니까? 그분이 태어날 때 천군천사가 노래하고 하늘의 별이 움직입니다. 역사상 단한번 그분은 동정녀 몸에서 탄생합니다. 이 얼마나 대단한 사건입니까? 그러나 성탄이 기독교 복음의 핵심은 아닙니다.
② 예수님의 가르침이나 교훈입니까? 모든 국가 헌법의 기초가 된 모세오경과 십계명, 모든 성인을 감동시킨 산상보훈 - 이 얼마나 놀라운 메시지들입니까? 그러나 그분의 교훈이 복음의 핵심은 아닙니다.
③ 그분이 행하신 기적입니까? 병든 자를 고치고 바람과 풍랑을 꾸짖고 죽은 자를 살리고 보리떡 몇 개로 오천명을 먹였던 기적들! 이 얼마나 신비한 능력입니까? 인류역사에 누가 감히 그분의 기적을 흉내라도 낼 수 있더란 말입니까? 그러나 기적 사역은 복음의 핵심이 아닙니다. 

기독교 복음의 핵심은 오직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그래서 복음서 특별히 요한은 고난의 기간, 단 일주간의 짤막한 시간내에 있었던 사건을 기록하는데에 그의 복음서 절반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모든 복음서와 서신서들이 하루 이틀 사이에 있었던 이 십자가와 부활을 기록하고 전하는데 모든 열정을 기울이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 바로 이것이 기독교의 케리그마,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20세기 신학계의 거장 칼바르트는 "부활의 메시지는 짧을수록 좋다. 왜냐하면 부활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인 사실을 성경은 구차하게 증명하려고 하거나 변증하려하지 않았다. 단순하게 선포했고 믿고 살라고 선언했을 뿐이다."


III. 모든 것이 불확실하나 죽음은 확실하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이 살아가고 있다는 말은 곧 죽어가고 있다는 말과 동의어입니다. 인생의 문제가 많을 것 같지만 그 종착점에 가보면 결국 하나 - 죽음의 문제입니다. 죽음은 너무나 큰 문제이기 때문에 죽어가는 사람에겐 아무리 중요한 얘기도 소용이 없습니다. 

어느날 자기 종을 시장으로 보낸 바그다드의 상인에 관한 옛 전설이 하나 있습니다. 나갔던 종은 금방 창백한 얼굴로 부들부들 떨며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매우 흥분하여 주인에게 말했습니다. "시장에 내려가자 무리중에 섞여 있던 어떤 여인이 나를 떠밀었습니다. 그리고 뒤돌아보았을 때 나를 떠민 것이 바로 죽음의 여신임을 알았습니다. 죽음의 여신은 나를 보더니 위협적인 몸짓을 해 보였습니다. 주인님, 제게 말 한 필을 빌려주십시오.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는 서둘러 도망하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저는 사마리아로 도망가서 거기 숨으렵니다. 그러면 죽음이 저를 찾아내지 못할 것입니다." 상인은 종에게 말을 빌려주었고 종은 급히 서둘러 사마리아로 피신을 갔습니다. 얼마 후에 상인은 시장에 갔다가 사람들 가운데 서 있는 죽음의 여신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상인은 죽음의 여신에게 물었습니다. "왜 당신은 오늘 아침 나의 종을 놀라게 했습니까? 왜 위협적인 몸짓을 해 보였습니까?" 죽음의 여신은 대답하였습니다. "그것은 위협적인 몸짓이 아니었습니다. 놀람의 표시였을 뿐입니다. 나는 바그다드에서 당신의 종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오늘 밤에 그를 사마리아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각자는 사마리아에서 이 여인을 만날 약속이 있습니다. 반드시 언젠가! 죽음의 신은 피할 길도 피할 장소도 없습니다. 

「이 세계 모든 것이 불확실하지만 죽음만은 확실하다.」 어그스틴의 말입니다.

피할 수 없는 이 죽음을 피해보고자 인간은 갖가지 헛된 시도들을 해 왔습니다. 죽음을 피할 수 있고 생명을 연장 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해보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일찍이 한무제는 장생불사하겠다고 숭로반에 이슬을 받아먹고 살았습니다.
(요즘도 자기가 무슨 한무제라고 매일 "아침 이슬"을 마시는 사람이 있지요?)
·진시황은 불노초 불사약을 구하기 위해 동방삼신산에 동남동녀 오백인을 보냈습니다.
·세계 도처에 영생의 꿈을 담은 "미라"가 있습니다. 이집트, 칠레, 네델란드, 중국, 소련, 북한...
·우리나라 어떤 재벌은 말년에 모든 피를 젊은 피로 바꾸어 보았습니다. 그래도 가셨습니다. 

현대에 와서는 그럴듯한 과학적인 근거까지 마련하여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뇌세포와 뇌의 구조가 잘 보존되면 심장박동이나 호흡이 멈춘 후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그 사람을 살려낼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미국 서멈(Summum) 장의사는 7천만원쯤 내면 현대판 미라를 만들어 줍니다. "엘코 생명 연장사업단" 이라는 곳에서는 1억 3천만원 정도를 받고 "미라"의 특별관리를 약속하고 있습니다. 다 부질없는 짓이지요. 그렇게 해서 먼훗날 골동품같은 인간이 살아나면 어쩌자는 겁니까?

이 사람들은 그들이 그토록 갈망하는 영생이 이미 주어졌다는 기쁜 소식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영생의 비밀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부활하셨습니다.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죽음과 죽음의 공포를 빼앗아 영생으로 바꿔주십니다. 예수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영생을 얻었습니다. 

IV. 부활은 실제입니다.

모든 인간에게 죽음이 확실하고 실제적이듯 성도들에게 부활 또한 확실하고 실제적입니다. 그러나 부활에 대한 몇 가지 오해들이 있습니다.

① 겨우내 메마른 땅에서 새싹이 돋아나듯, 겨울을 지낸 앙상한 가지에 새움이 돋듯, 계란에서 병아리가 깨쳐 나오듯 자연 현상의 일부로 부활을 이해하고 설명할 때가 있습니다. 부활은 Life process 생명의 과정이 아닙니다. 유일회적인 사건입니다.

② 부활을 톨스토이의 부활처럼 정신속에 살아있는 부활, 관념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③ 기독교의 부활을 환생이나 소생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두 아닙니다.

성경에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여럿 기록되어 있습니다. 
열왕기하 4장에 나오는 수넴 여인의 아들은 죽었다가 엘리사의 기도로 다시 살아났습니다(왕하 4:17-37). 나인 성 과부의 독자가 죽었는데 예수님이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게 되었습니다(눅7:11-17). 회당장 야이로의 열 두살 된 외딸도 죽어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해 울며 통곡할 때 예수님께서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시고 이어 달리다굼, "소녀야 일어나라"하시니 아이가 일어났습니다(막5:41, 눅8:40-56).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는 죽어 나흘이 되어 무덤에 들어가 냄새가 나는데 예수님이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수족을 베로 동인 채 얼굴은 수건에 싸인 채로 나왔습니다 (요11:1-44). 바울이 드로아에서 설교하는데 밤중까지 설교하니까 유두고라는 청년이 창에 걸터앉아 있다가 깊이 졸다 삼층에서 떨어져서 죽었습니다. 바울이 그 청년을 살렸습니다(행20:7-12).

모두 놀라운 일들이고 귀한 일들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난 것에 대해 '부활'이라는 말을 전혀 쓰지 않고 있습니다. '아이가 눈을 떴다'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였다' '아이가 곧 일어났다' '죽은 자가 수건을 베로 동인 채로 나왔다' '사람들이 살아난 청년을 데리고 왔다'고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신 일에 대해 이야기 할 때만 부활이라는 말을 씁니다. 다른 이들은 모두 소생(resuscitation)했다가 다시 죽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resurrection) 했고 다시는 죽지 아니하십니다. 이것이 부활입니다.

기독교 복음은 여기서부터 시작이 되어집니다.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눅24:5-6). 이것이 복음의 일성입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셨느니라. 우리가 보았다. 우리가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다" 이것이 초대교회 케리그마입니다.

성경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부활논쟁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부활이 사실이냐 아니냐, 합리적이냐 불합리하냐, 가능하냐 불가능하냐를 논하지 않습니다. 그 형태가 어떠하냐 전혀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너무나도 단순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무덤속에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다. 우리가 보았다.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다!" 

그래서 토마스 왓슨은 "우리는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보다 부활 때에 무덤에서 일어날 것을 더 분명하게 확신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V. 부활의 능력도 실제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요 실제이듯 우리의 부활 또한 실제입니다. 역사 한가운데서 성도들은 예수님처럼 부활하게 됩니다. 부활의 능력 또한 실제입니다. 성도는 오늘도 부활의 능력, 부활의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앙인의 능력도 행복도 바로 부활 신앙에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 죽으실 때 우리도 죽었습니다. 예수님 부활하실 때 우리도 부활한 것입니다. 이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모르면 신앙의 절정을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부활로 바꾸신 것은 우리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이미 끝이 났습니다. 성도의 싸움은 싸워서 이기는 싸움이 아닙니다. 이미 승리가 확정된 싸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이루어 놓으신 영원한 승리를 누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우리가 이미 율법으로부터 죽었다. 죄로부터 죽었다라고 말하는 겁니다. 내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을 알아야 죄 문제가 해결됩니다. 이제 더 이상 죄는 나와 상관이 없습니다. 싸움은 끝이 났습니다. 죽음은 나와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는 영생합니다.

노만 빈센트 필 목사님의 독수리 얘기를 아시지요. 산골마을 한 소년이 산에 갔다가 독수리 새끼 한 마리를 잡아왔습니다. 철사줄로 다리를 꽁꽁 묶어 모이를 주고 마당에서 키웁니다. 처음엔 몇 번 날아 가겠다고 날개를 퍼덕여 봅니다. 그때마다 철사 묶인 다리에서 피가 납니다. 이 독수리는 이제 어미새가 되었는데도 날아갈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어느날 이 소년이 독수리를 보니 언제 풀어졌는지 모르지만 이미 독수리 다리를 묶고 있던 줄이 풀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독수리는 날아갈 생각을 하지 못하고 얌전히 날개를 접고 마당 이곳저곳을 헤집고 다니며 모이를 주워 먹고 있었습니다. 

왜요? 나는 날 수 없어. 나는 묶여 있잖아. 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닙니다. 당신을 묶고 있던 죄의 사슬은 이미 풀어졌습니다. 당신은 저 은혜의 창공을 향해 날아오를 수 있습니다. 아니 날아 올라야 합니다. 죽음의 사슬이 풀어졌습니다.

독수리 날개쳐 올라가듯 나 주님과 함께 일어나 걸으리 주의 사랑으로!

VI. 죽음의 권세는 부활의 능력으로 교환되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죽음의 권세에 갇혀 살아갈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죄와 죽음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오늘 본문 로마서 6:1-11에 보면 "율법과 죄에 대해 죽었다"는 표현이 무려 10번씩이나 등장하고 있습니다. 내가 죄에 대해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영적싸움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내 삶에 완전히 승리했음을 알아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6:5-6)

우리가 세례 받을 때에 죽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 우리는 모두 죽음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어거스틴이 회심하고 나서 새로운 존재, 새로운 사람이 된 후에 거리에 나섰습니다. 그랬더니 함께 놀던 여인이 다시 유혹을 합니다. 어거스틴의 이름을 부르며 따라옵니다. 그때 어거스틴이 했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너는 너로되 나는 내가 아니로다!" 너는 이전의 너나 지금의 너나 똑같은 너지만, 나는 네가 이전에 알던 그 어거스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초대교회 훌륭한 목사님 가운데 김익두 목사님이 계십니다. 이분이 거듭났습니다.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첫 번째 한 일이 부고장을 보내는 일이었습니다. 그를 아는 모든 친구들과 친지들에게 '김익두 사망! 이전에 깡패 두목이었던 김익두는 죽었습니다. 나는 새로 태어난 존재입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더불어서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났습니다'라고 선포해 버린 것입니다.

사탄은 오늘도 우리를 속이고 있습니다.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존재라구요. 내가 죄를 짓고 사는 그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속입니다. 나는 노력해도 의로워질 수 없다고 속입니다. 그러한 느낌은 사탄이 주는 느낌입니다. 거짓말입니다. 죄인이 의인으로 바뀌어졌습니다. 죄의 권세는 죽었고 의의 권세가 살아났습니다. 죄 속에 빠져 사는 그것은 본질적인 당신이 아닙니다. 당신은 성자입니다. 성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자랑스런 신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한 목사님이 논산 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치고 추운 겨울날 전방에 배치를 받았답니다. 전방에 배치를 받고 내무반에서 잠을 자는데 내무반장이었던 김 하사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갑자기 한밤중에 "팬티바람으로 바깥에 집합!" 그러더니 줄빠다를 때리는 것이었습니다. 계급순으로 좍 엎드려 뻗쳐를 합니다. 내무반장이 한 대씩 뻥뻥 치고 갑니다. 그 다음에 박 병장이 일어나서 한 대 맞으니까 열불 나지요. 그래서 두 대씩 뻥뻥 치고 갑니다. 그 다음에 최 상병이 세 대를 때렸습니다. 뚜껑이 딱 열렸습니다. 그 다음에 네 대씩, 다섯 대씩 두들겨 패고 가는 것입니다. 이 목사님은 그때 제일 졸병이었기 때문에 팬티가 살하고 엉겨붙을 만큼, 얼마나 맞았는지 궁뎅이가 얼얼하도록 맞았습니다.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도 아니고 매일 밤 빠따를 치는데 살 길이 없더랍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 김 하사가 제대를 했습니다. 이제는 살았구나 싶었는데 사나흘 있으니까 김 하사가 완전복장을 하고 한밤중에 나타난 것입니다. 제대한 김 하사가 "팬티바람으로 바깥에 집합!" 그러더니 또 두들겨 패더랍니다. 또 맞았습니다. 며칠 있더니 다시 김 하사가 나타나 술에 취해서 비틀거리면서 "팬티바람으로 바깥에 집합!" 그러더랍니다. 하지만 이제 내무반 반장인 박 병장이 "김 하사 네 시대는 끝났어. 이제 너는 내무반장이 아니야. 까불지 말고 가! 한 대 터지기 전에. 얘들아, 편히 자라. 앞으로 너희들은 내 말만 들으면 된다" 살았습니다. 김 하사는 제대했습니다. 

여러분, 김 하사 시대는 끝이 났습니다. 죄와 율법에 매여 살던 시대는 끝이 난 것입니다. 사단의 올무에 걸려들어서 지속적으로 괴로움을 당하던 그 시대는 끝이 난 것입니다. 새로운 시대, 은혜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박 병장 시대가 왔습니다. 영광의 시대가 찾아왔습니다. 이젠 승리의 시대입니다. 이 축복, 이 영광, 이 승리를 나의 것으로 누리며 살아가야 합니다.

산꼭대기에 올라갔다가 불길을 만났을 때 사는 방법이 뭔지 아십니까? 사방에서 불길이 밀려올 때 내 쪽에서 불을 질러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탄 자리에 내가 서 있으면 불길이 밀려올 수가 없습니다. 이미 불타버렸는데 태울게 있어야지요. 죄와 죽임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불타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내 저주를 불태워버렸습니다. 저주가 나를 삼킬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내 죄를 완전히 불태워버렸습니다. 이제 죄의 권세가 나를 사를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불타 죽었습니다. 
·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내게 영생을 주셨습니다.
·내게 부활을 주셨습니다.
·내게 천국의 영광을 주셨습니다.
·내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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