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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를 시인하면 (마 10:3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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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시인하면 (마 10:32~39)


지난 주 미국 집회를 다녀왔습니다. 돌아와서 거의 이틀을 누워 있었습니다. 심하지는 않았지만 몸살을 하였습니다. 13시간이 좀 넘는 비행시간이 좀 힘들었나 봅니다. 비행기 타는 것이 힘들어서 몸살을 한 것은 아마 이번이 처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틀을 누워 있으면서 기분은 좋았습니다. 왠지 아시겠습니까? 그것은 제가 조금씩 나이 들어가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조금씩 나이 들어가면서 정말로 욕심을 내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을 신뢰하고 사람에게 신뢰를 받는 것에 대한 것입니다. 제가 제일로 싫어하고 믿지 않는 속담 중에 하나는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라는 속담입니다. 그래서 저는 속담을 ‘발등 찍히는 한이 있어도 믿고 살아라.’로 바꾸어 생각하고 말하며 삽니다. 고등학교 때 국어선생님이 강의 중에 ‘채이기 전에 차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참 근사한 말 같이 들렸지만 결국 동의하지 못했습니다. 채이며 살지언정 차면서 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목회를 하면서 함께 일하던 사람을 내가 먼저 내 보낸 적이 꼭 한 번 있었습니다. 아마 평생 잊을 수 없는 제 마음의 상처일 겁니다. 그때는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해서 그랬는데 지금은 후회하고 있습니다. 제 생각과 스타일이 꼭 옳은 것만은 아니지만 사람을 한 번 신뢰하여 관계를 맺었으면 끝까지 믿고 신뢰해 줄 수 있는 것이 좋다는 생각은 아마 변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저는 그것이 우리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금씩 나이 들어가면서 사람을 깊이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은 복인 것입니다. 사람을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복입니다. 저는 그 복을 받고 싶습니다. 그러면 정말 아름답고 근사하게 늙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을 신뢰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신뢰를 받는 것입니다. 이제껏 살아오면서 제법 많은 오해들을 받아 왔습니다. 언젠가 인터넷에 보니 제가 영국 집회를 가서 강사비가 적다고 화를 냈었다는 기사가 올라온 적이 있었습니다. 높은뜻 숭의교회를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는 우리 교회 홈페이지 게시판에 온도계라는 필명을 쓰시는 분이 제 연봉이 일억 몇 천 만 원이 넘는다는 글을 올리셔서 곤욕을 치른 적이 있었습니다. 메이저급 신문과 방송까지 그 사실을 다룰 정도였습니다. 우리 교회 게시판에만도 8,000개가 넘는 글이 올라왔습니다. 소수의 글을 제외하고는 거의 비난성 글이었지요.

참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을 당할 때마다 제가 생각한 것은 신뢰의 문제였습니다. 제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사실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제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사실이냐 아니냐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와 같은 사실이 보도 되었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서 과연 ‘김동호 목사 그런 사람 아닌데...’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가 였습니다. 

성공적인 삶 즉 잘 사는 사람의 기준은 부가 아니라 신뢰입니다. 저는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신뢰 받을 수 있는 삶을 욕심내며 살고 싶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욕심을 내어도 문제가 없을 좋은 욕심일 것입니다. 저는 열심히 살아 모든 사람에게는 아닐지라도 조금 더 많은 사람들에게 신뢰를 받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런데 제가 정말로 욕심내는 것은 사람에게 신뢰를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신뢰를 받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으로부터 칭찬과 신뢰를 받았던 사람들이 나옵니다. 예를 들면 다윗과 노아와 에녹과 욥 같은 사람들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는 칭찬을 들은 사람이었고, 노아는 당대의 의인이라는 칭찬을 들은 사람이었고,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라는 칭찬을 들은 사람이었고, 욥은 하나님이 사탄 앞에서 자랑할 만큼 하나님의 신뢰를 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에게 신뢰를 받는다고 하여도 하나님께 신뢰를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는 결국 세상 모든 사람을 속인 사기꾼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에게 오해를 받는다고 하여도 하나님께 신뢰를 받는다면 아무 문제 없습니다. 그는 세상과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 나라에서 모든 사람에게 신뢰를 받는 복과 상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행기 안에서 ‘불의 전차’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꽤 오래 된 고전 영화였습니다.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되었는데 제 8회 파리 올림픽 육상경기를 담고 있었습니다. 주인공 중에 하나는 스코트랜드 출신으로 선교사인 에릭 리델이었습니다. 에릭 리델은 100m 선수였는데 경기가 주일로 잡히자 주일에 경기를 할 수 없다고 출전을 포기합니다. 

국가대표로 올림픽에 출전한 선수가 경기가 주일에 잡혔다고 그것을 포기하고 거부한다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참 감동적으로 보았던 것 중에 하나는 동료와 임원들이 그러한 결정을 내리는 에릭 리델을 안타까워하고 권면을 하기는 하지만 그러한 리델을 비난하거나 협박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리델의 문제를 가지고 회의를 하던 중 어떤 한 임원의 제안으로 리델을 주종목은 아니지만 주일에 경기 일정이 잡히지 않은 400m 경기에 출전시키는 것으로 결정합니다.

리델도 그 결정을 따라 400m 경기에 출전을 합니다. 100m 선수가 400m에 출전 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리델이 자기 주 종목이 아닌 400m에 출전하면서 성경 한 구절을 읽는데 그 말씀이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예언처럼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에릭 리델은 자기 주 종목이 아닌 400m 경기에서 우승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픽션이 아닌 사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실제로 제 8회 파리 올림픽에서 일어났던 실화이었던 것입니다. 100m가 주 종목인 선수가 400m 경기에 출전하여 우승을 한다는 것은 정말 기적과 같은 사실이었습니다. 

저는 올림픽 국가대표 선수가 올림픽 경기가 주일에 잡혔다는 이유로 그 경기를 꼭 포기해야만 하는가에 대해서는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꼭 예배당에 가서 예배를 드리지 못해도 혼자서라도 하나님께 예배하고 경기에 출전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사람을 신앙이 없는 사람이라거나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을 부인한 사람이라고 매도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마치 바울 시대에 교인들이 우상에게 제물로 드렸던 고기를 먹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와 같은 문제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우상에게 드린 제물이기 때문에 자기는 고기를 좋아하지만 먹지 않았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먹으면 그런 것은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하여 거리낌 없이 먹었습니다. 바울은 둘 다를 인정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인정하지 않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양심에 거리낌이 있으면서도 고기에 대한 욕심 때문에 먹는 것과 자기만 옳다고 생각하고 상대방을 무조건 비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한 것은 에릭 리델이 한 행동은 분명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을 시인한 행동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명예와 체면보다도 더 귀하고 소중한 가치로 온 세계 사람들에게 선포한 것이었습니다. 자기 인생을 걸고 정말 피나게 노력했던 모든 것과 또 자기에게 몰아닥칠 감당할 수 없는 비난과 정죄들을 다 포기하고 하나님 식과 법을 고집한 것이었습니다. 에릭 리델의 신앙은 참으로 위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정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정말로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을 시인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에릭 리델 때문에 영광을 받으셨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에릭 리델 때문에 높힘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에릭 리델에게 경기 전 예언처럼 주셨던 말씀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나님 앞에서 저를 시인하리라’는 말씀을 현실로 이루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에릭 리델을 하나님 나라에서 뿐만 아니라 저가 하나님 때문에 포기한 세상 나라에서도 높여 주셨습니다. 

교회사를 읽어보면 많은 신앙의 위인들이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을 시인하기 위하여 순교를 하였습니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순교한 수많은 교인들, 조상에게 제사 드리는 것이 십계명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거부하다가 절두산에서 참수를 당한 수많은 천주교인들, 배교를 거부하다가 사자 밥이 되기도 하고 화형을 당하기도 하고 목베임을 당하기도 했던 수많은 초대의 교인들이 있었습니다.

믿음은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언제나 하나님 편에 서는 것입니다. 믿음은 언제나 하나님 식과 방법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비록 그것이 좁은 길이라고 하여도, 비록 그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고 하여도, 비록 그것이 사람들과 적이 되고 심지어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등지는 일이라고 하여도 언제나 하나님을 시인하고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은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시인하는 믿음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가족과의 불화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좇아야 함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을 시인한다는 것이 그렇게까지 많은 대가를 지불해야만 하는 일일 수도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완벽한 교회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릭 리델처럼 자신의 이익과 하나님의 의가 충돌할 때 자신의 이익을 버리고 하나님의 의를 선택하려고 노력하는 교회입니다. 매번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는 무슨 일을 판단하고 처리하려고 할 때 그것이 우리에게 이익이 되는 일인가 아닌가를 생각하지 않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가를 물으려고 합니다. 쉬운 일인가 어려운 일인가를 묻기 이전에, 할 수 있는 일인가 아닌가를 생각하기 이전에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가를 물으려고 합니다.

여명학교를 위하여 건물을 매입하려고 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건물 주가 이면계약을 요구하기에 건물에 대한 욕심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였습니다. 청어람 옥상 정원 공사를 하면서 업자가 부가세를 계산하지 않았을 때 적지 않은 돈이었지만 교회가 그 돈을 계산해 주었습니다. 천안에 씨티움 부지를 매입할 때 계약 후 주변이 개발되면서 땅 값이 많이 올랐습니다. 주인이 농지는 교회가 매입하여 등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찾아내 해약하고 싶어 했습니다. 해약을 하면 교회는 많은 손해를 보아야만 했습니다. 제 개인 이름으로 우선 등기를 하였다가 지목을 변경한 후 교회에 기증하는 식의 편법도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교회는 그렇게 하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정당한 길을 찾아 등기하려고 하였지만 길이 없었습니다. 시청에서도 불가하다고 하였고 우리 교회의 일을 보다 주는 법무사 사무실에서도 정당한 방법으로는 길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 집사님이신 변호사께서 길을 찾아 주셨습니다. 그 땅은 양계를 하던 땅이었는데 그 땅은 농지가 아니라 목장지로 되어 있었습니다. 우리 집사님이 법을 찾아 보니 농지는 교회로 등기가 되지 않는데 목장지는 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시청 직원도 몰랐고 법무사 사무실에서도 몰랐습니다. 결국 우리는 합법적으로 씨티움을 등기할 수 있었습니다.

작은 일들이었지만 우리 높은 뜻 교회의 원칙은 우리의 이익보다 법과 의였습니다. 우리 교회는 그와 같은 행동을 통하여 하나님의 교회는 세상과 다르다는 것을 나타내고 싶었습니다. 저희는 그것이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을 시인하고 높여 드리는 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보이지 않은 성전을 건축하려다 보이는 예배당을 잃게 되었을 때에도 보이지 않는 성전건축을 잠시 뒤로 미루고 보이는 예배당 문제를 먼저 해결하고 싶었을 때에도 단지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 다 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는 말씀 한 마디에 정말 뒤도 돌아 보지 않고 보이는 예배당을 포기한 것도, 그리하여 우리에게 소중하고 가치 있었던 높은 뜻 숭의교회를 포기하고 교회를 분립할 수 있었던 것도 나름대로 그와 같은 원칙을 지키기 위함이었습니다.

보이지 않은 성전건축의 일환으로 열매나눔재단을 세우고 성공 확률이 거의 없었던 탈북자를 위한 공장을 세웠던 것도 다 여러분 하나님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고 무엇이든지 포기할 수 있는 교회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런 교회가 되고 싶습니다. 

100m 선수가 400m에서 우승을 한 것과 같은 기적이 우리 교회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무모한 도전이라고 생각했던 공장이 성공적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습니다. 지난 달에 예배를 드리러 공장엘 가보니 수주 받은 일이 많아서 박스 재료인 골판지들이 마당에 까지 쌓여져 있었습니다. 제가 받은 보고에 의하면 지난 달에 수 천 만원의 흑자가 났습니다. 물론 지금 까지 전체로 보면 적자입니다. 그러나 이 추세로 나가면 몇 달 안에 적자를 다 갚고 전체적으로 흑자 경영이 이루어질 것 같습니다. 불의 전차와 같은 간증꺼리가 되리라고 저는 믿습니다.

분립된 네 교회도 건강하게 아름답게 잘 자리잡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 높은 뜻 네 교회를 높여 주실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우리 높은 뜻 교회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을 시인하고 하나님을 높여 드리면 하나님은 끊임없이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에서 우리 높은 뜻 교회를 시인해 주시고 높여 주시리라 믿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며 사는 일이 힘들고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그 때문에 세상 사람들과 불화하여야 할 때도 있고 심지어는 사랑하는 가족들과도 불화해야 하는 일도 있습니다. 평생을 쌓아 왔던 것을 포기해야 할 때도 있고 감당할 수 없는 비난을 받아야만 하는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그것이 단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포기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것이 오늘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높은 뜻 수준의 신앙입니다.

에릭 리델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은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나님 앞에서 저를 시인하리라.’ 아멘.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에서 높임을 받고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김동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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