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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 16: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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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막 16:9~18)

 
제가 대학을 다닐 때 선택과목으로 “감각과 지각”이라는 학문을 배운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제가 느낀 것은 인간이 갖고 있는 감각과 지각은 엄청난 허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청각은 들을 수 있는 범위가 매우 제한되어 있습니다. 눈도 볼 수 있는 범위가 매우 제한되어 있습니다. 촉각도 후각도 제한된 범위 안에서만 체험할 수 있습니다. 텔레비전은 시각의 착시현상으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실상은 화면이 1초에 16~24장 이상의 사진을 연속으로 보여주면 물체가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왜 지구가 돌아가는 소리를 들을 수 없을까요? 
이 지구가 태양주의를 돌면서 엄청난 속도로 우주여행을 하고 있습니다. 
지구와 태양간의 거리는 약 1억5천만 Km로 지구가 태양을 한바퀴 도는데 365일 걸리므로 계산을 하면 지구의 공전 속도가 초당 약 30Km입니다. 정확하게는 평균 공전 속도 초당 29.783km입니다. 그러니까 한 시간으로 계산하면 10만7천 218km입니다. 이것은 소리 속도의 88배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엄청난 속도입니까? 그렇게 지구가 날아가는데 우리는 그것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그 돌아가는 소리를 듣지 못하며 살고 있습니다. 왜요? 우리 인간의 체험 한계를 초월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이해가 안되고 느낄 수 없으나 사실인 것이 얼마나 많습니다. 우리 인간은 한계가 있어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나는 하나님을 보지 못했으니 못 믿겠다면 그것이야말로 어리석은 짓인 것입니다. 
  
예수님 제자들을 보세요. 예수님을 3년씩이나 따라다니며 수없이 많은 기적과 이적을 본 사람들입니다. 그러면서도 주님의 부활 소식을 듣고도 믿지 못했습니다. 심지어는 아는 사람들 중에 “예수님이 부활했다”, “예수님을 보았다”고 하는데도 믿지 못한 것입니다. 
전해준 사람이 예수님을 전혀 모르던 사람이라면 그러려니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측근에서 모시던 여인들이고 제자들입니다. 그런데도 안 믿습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수없이 여러 번 당신께서 죽으실 것과 부활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 부활을 믿지 못했습니다. 
  
왜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믿지를 못했을까? 

1. 자기들의 경험과 지식으로 이해가 안되기 때문입니다. 

“인자가 죽을 것이다 죽은 지 3일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러나 그 제자들은 설마 예수님이 죽으실 리가 있나? 어떻게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산다는 말인가? 이해가 안 된 것입니다. 그러니 듣기는 들었어도 믿지를 못한 것입니다. “설마” 한 것입니다. 자기들의 상식과 경험, 지식으로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 부활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은 아는 지식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믿음입니다. 
아무리 많은 지식을 갖고 있고 아무리 성경을 많이 알아도 믿지 못하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왜 믿지 못하나요? 자기를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 경험, 내 체험을 못 넘는 것입니다. 그러니 불가능한 것입니다. 왜냐면 이제까지 그런 경험과 체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우리 수준의 능력과 지식으로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부활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약속으로 주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약속으로 시작하여 약속으로 끝을 맺습니다. 
구약 성경은 오실 메시아를 약속하였고 신약성경은 오신 메시아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성경은 다시 오실 메시아를 약속하고 계십니다. 
  
그 약속을 믿지 못한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가짜입니다. 
그 약속이 믿어지고 그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확신하셔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신앙은 내가 이해되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머리로 이해가 안 되고 내 생각으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야 신앙입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 구름타고 다시 오신다고 성경은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 우리의 이성이나 과학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소립입니다. 물위로 사람이 걷는다, 물로 포도주를 만든다, 죽은 사람을 나흘만에 살린다....현대 과학으로는 웃기는 이야깁니다. 
그러나 염려치 마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예수님은 인간의 과학을 초월하실 수 있는 전능자이십니다. 그러기에 성경의 약속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고 약속의 대상임을 잊지 마시기를 축원합니다.  

  
2.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랐던 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한 것입니다. 
요한복음11장에 보면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나사로가 병들어 죽으려 할 때 사람들을 통해 예수님께 SOS를 쳤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즉시 오시지 않고 나사로가 죽은 후 나흘만에 나타났습니다. 그러자 마리아와 마르다가 똑같은 소리를 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말을 뒤집으면 “주께서 늦게 오셨기 때문에 우리 오라비 죽었다”라는 것이 됩니다. 주님이 살릴 수 있었는데 왜 늦게 왔냐는 것입니다. 서운한 마음이 담긴 소리였습니다. 

그러나 이 말 속에는 예수님의 능력을 공간적으로 제한하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여기 계셨다면 살았고 저기 계셨기 때문에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말씀하시자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합니다. 그 말은 지금은 안된다는 것입니다. 늦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반면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백부장은 자기 하인이 중병으로 쓰러져 몹시 괴로워하자 주님께 찾아옵니다. 그때 예수님이 그의 집으로 따라가려하자 위대한 신앙고백을 합니다.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습니다.” 
이 말은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러니 굳이 오실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안 오셔도 여기서 말씀만 하시면 된다는 것입니다. 아멘? 
그러니 마르다 마리아와 이 백부장의 차이는 주님의 능력을 믿느냐, 못 믿느냐의 차이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천지 창조 능력을 믿으십니까?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죽은 자를 부활시키는 것은 매우 간단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능력을 얼마나 믿습니까? 우리는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믿는 만큼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믿는 만큼의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내 믿음이 크면 큰대로, 적으면 적은대로 복을 누립니다. 
주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얼마나 믿느냐, 예수님의 능력으로 얼마나 믿느냐가 우리 신앙의 성패를 좌우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 수준으로 낮추어 믿으시는 일이 없어야합니다. 
우리 하나님의 능력은 능치 못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얄팍한 지식으로 하나님이 ‘있네 없네’ 합니다. 
우주의 신비를 보세요. 생명체의 신비를 보세요. 과학으로도 설명키 힘든 그 오묘함과 위대함을 어찌 측량할 수 있겠습니까?
 
79장 찬양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마음속에 그리어 볼 때 하늘의 별 울려 퍼지는 뇌성 주님의 권능 우주에 찼네. 


3.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한 결정적 요인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 앞에서 그토록 많은 기적을 행하고 놀라운 일을 한 것은 이유가 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이며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믿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요한복음 20장 마지막 부분을 보세요. 
“30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31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할렐루야!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많은 이적과 기적을 행했습니다. 그러나 필요치 않는 것은 다 빼고 요한복음 21장, 신구약 성경 66권만 기록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믿게 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믿어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는다면 간단한 것입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아들도 생명의 주인입니다. 그러니 죽었다가 다시 사는 부활은 주님의 능력으로 보면 매우 간단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와 같은 분이라면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각종 병자를 고치고 물로 포도주를 만들고 물위로 걷는 기적을 행하신 일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기적과 표적을 보고 체험한 제자들은 주님 공생애 후반부에 가서야 몇 명이 믿었습니다. 그러나 믿었던 그들도 결국은 도망쳐 버렸습니다. 

오늘 본문에 주님이 부활후에 나타났는데도 믿지 못합니다. 
듣고도 믿지 못함이러라... 듣고도 믿지 못함이라라 11절, 13절, 14절에 세 번이나 반복됩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러나 성령이 그들 속에서 역사하시면서 믿어지게 함으로 그들의 삶은 완전히 바뀐 것입니다. 주님의 살아계심과 전능하심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부활도 능히 믿는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 제자들을 대하는 주님의 자세는 어떠하셨습니까? 그토록 오랜 기간 동안 예수님에게 배우고 듣고 했건만 부활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런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자세는 어떠했습니까? 

1. 그들을 꾸짖으셨습니다. 

14절을 보세요. 
14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예수님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자 그들의 믿음 없음을 꾸짖습니다. 더 나아가 그 마음의 완악함을 꾸짖습니다. 
  
뭔 말입니까? 믿음이 없는 것은 꾸짖음의 대상이 된다는 말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믿음이 없으면 주님께 야단을 맞는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이미 주님은 우리에게 충분한 믿음을 갖도록 주셨고 또 일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믿지 못하는 것은 책망의 대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믿음이 부족함을 인해 애통해 하고 믿음의 성장을 위해 노력해야 함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또 믿음이 부족한 이유 중 가장 큰 원인은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완악하면 말씀이 마음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 완악한 마음은 교만에서 나오는 마음이며 ‘무지’와 ‘불신’에서 나오는 마음입니다. 그러기에 이 교만을 버려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을 가로막아 복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진리 가운데 거해야 하며 성경 말씀을 날마다 가까이 하고 주님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믿음이 없으면 아무것도 안하십니다. 
예수님이 나사렛을 방문하셨을 때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목수로만 알기에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주님은 그들 가운데서 기적이나 이적을 행치 않으시고 떠나셨습니다. 왜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믿지 않는 그들 앞에서 더 큰 이적을 행하여 당신이 메시아임을 입증하면 좋았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주님은 그들 앞에서 아무것도 행치 않으셨습니다. 왜요? 그들에게는 믿음이 없었을 뿐 아니라 완악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교회 나오고 예배를 드려도 마음이 완악하고 믿지 않으려는 마음이 있다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믿음이 성장할 수 없고 오히려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의 문을 여시기를 축원합니다. 열린 마음으로 복음을 접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은총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믿음이 있으면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고 보지 못하는 것들이 결국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처럼 믿음은 엄청난 능력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을 성경을 통해 약속으로 소유하시기를 축원합니다.  

  
2.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부활을 믿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말도 안되는 명령을 내립니다. 
당장 부활도 믿지 못합니다. 그런데 엄청난 사명을 맡기십니다. 
15~16절을 보세요. 
15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어찌 보면 말도 안 되는 일 아닙니까? 예수님의 부활도 믿지도 못하는데 어찌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한단 말입니까? 
우리 주님은 참 믿음도 좋습니다.ㅎㅎ 
  
어떻게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었을까요? 주님은 제자들의 현재의 모습을 너무도 잘 아십니다. 그러기에 그들의 현재를 보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그들에게 임할 성령의 능력을 내다보신 것입니다.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면 능력을 받게 되고 그러면 능히 온 천하에 다니며 복음을 전하게 된다는 것을 아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처럼 우리 주님은 사람의 현재만을 보시지 않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앞날을 내다 보십니다. 결국 그대로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현재는 아무것도 못하는 형편 무인지경입니다. 그들은 부활도 못 믿습니다. 자신들 믿음도 제대로 세워가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미래가 그대로 계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가십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그들 속에서 그들을 엄청난 사람들로 변화시켰습니다. 결국 그들은 온 천하에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도들 모두가, 가롯 유다를 뺀 모두가 복음을 전하다 순교하는 사람들이 다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기에 우리도 현재의 우리의 모습만을 보지 않기를 축원합니다. 장차 하나님이 크게 들어 쓰실 모습을 믿음의 눈으로 내다보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런 믿음이 있으려면 성령 충만을 누리셔야 하고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명령을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으로 받아들이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꿈이 있는 사람을 들어 쓰십니다. 그러나 그 꿈은 내 욕심과 야망에서 나온 것이 아닌 하나님의 약속에서 나온 꿈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성경을 읽으셔야 하고 성경이 내게 명하시는 약속은 신실하게 붙잡고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파송되는 도금수 목사 내외도 이 말씀을 붙잡고 나가리라 믿습니다. 
하나님의 명령, 그리고 함께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나갑니다. 
국토의 80%가 사막인 나라, 땅의 크기로는 우리나라 남한의 5배인 나라, 그럼에도 인구는 200만 명이 채 안되는 나라, 국민의 30%가 에이즈 환자인 나라, 
그런 나라에 뭐하러 가나요? 주님의 명령이기에,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기에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들어 쓰실 것을 믿고 가는 그 믿음을 하나님이 들어 쓰실 것입니다. 
  
또 여러분의 자녀들을 현재의 모습으로만 보지 마시기를 축원합니다. 앞으로 10년, 20년 하나님이 어떤 모습으로 그들을 쓰실까 를 내다보시기를 축원합니다. 앞으로 10년 20년 후에 여러분의 자녀는 어떤 모습으로 살 것 같습니까? 아니 어떤 모습으로 살기를 희망하십니까? 그렇다면 지금 이렇게 두어도 좋습니까? 
우리 주님처럼 현재를 보지 마시고 꿈과 약속을 통해 미래를 내다보시기를 축원합니다. 

  
3. 능력 주시고 함께 하신다 약속하십니다. 

17절~18절을 보세요. 
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18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명을 맡기실 때 그냥 맡기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에게 엄청난 권능을 부여하셨습니다. 
귀신도 쫒아낼 수 있다./ 새 방언을 말한다./ 뱀을 집고 독을 마셔도 해를 받지 않는다./ 병든 자에게 손을 얹은즉 낫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약속입니다. 능력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래야만 복음이 전파되고 그래야만 감당이 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능력이 생겨서 일을 맡기는 것이냐? 일을 맡기시며 능력을 주는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전자보다는 후자임을 믿으셔야 합니다. 일을 맡기시면서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뭔가를 맡기시면 사양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아멘’하고 순종하면서 일하시면 하나님이 행하십니다. 
  
어떻게 갈릴리 어부 출신, 세리 출신들이 복음의 대 사도가 될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충청도 괴산군 과산면제월리 촌놈이 교회 목사가 되었겠습니까? 전라도 여수 촌놈, 놈이라면 안되지요? 촌사람이 어떻게 선교사가 될 수 있었을까요? 
그야말로 하나님의 은혜이며 하나님이 감당할 능력을 주셨기 때문임을 믿습니다. 성령의 능력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부활을 믿지 아니함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제자들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믿지 아니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믿음 없음을 꾸짖어 돌이키시고 사명을 맡기셔서 일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권능을 주셔서 일하게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 주님은 오늘 우리도 버리지 않으시고 들어 쓰시는 분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일은 주님이 하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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