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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보지 못했으나 믿는 사람들 (요 20:2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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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지 못했으나 믿는 사람들 (요 20:24~29)


목사님이시며, 시인이신 최효섭목사님이 쓰신 ‘부활의 아침’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갈보리 언덕에서 예수는 죽었다./ 창자국과 못 자국에서 흐르는 그 붉은 피는/ 나사렛 예수의 죽음을 확증했다./ 그렇다 그는 죽었다./  그 순간 인간의 부활도 예수와 함께 무너졌다. / 인간의 희망은 무덤 속에 장사되고/ 인간의 사랑이라고 부르는 보물은/ 시체처럼 싸늘한 화석(化石)이 되었다.  아름다운 그 모든 것이 예수와 함께 죽어 갔다.// (중략) 

부활의 아침이다./ 새싹은 흙을 뚫고 대지(大地)는 약동한다. / 보라 푸른 잎이 언덕을 덮고 꽃이 필 것이다/ 겨울 옷을 벗는 대자연처럼/ 새 옷으로 단장하고 무덤에서 나오라./ 부활은 승리, 부활은 개선/ 허물과 죄에 죽고 영원에 사는 새로운 생명/ 친구여 다메섹 도상(途上)의 바울처럼/ 부활하신 주님 살아계신 예수를 만나자/ 그래서 하잘 것 없는 / 인간의 자신(自信)을 버리고/ 어둠 속을 방황하는 욕심의 방랑을 중단하고/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자.   “허물과 죄에 죽고 영원에 사는 새로운 생명” 바로 그것이 우리 예수님의 부활이요, 우리의 부활입니다. 

초대교회의 사도 베드로가 나가서 백성들 앞에서 처음으로 설교를 하였습니다.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그 선포하는 것을 “케리그마”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초대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복음의 내용 케리그마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었습니다.  

사도행전2:23-24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였던 백성들에게 외쳤습니다.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고 외쳤습니다.  유대 교권자들은 로마 군인을 내세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은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되셨지만,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이란 죽었던 사람이 소생하거나, 원기회복이나 회생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나신 것입니다.   살다가 죽은 몸이 일어난 것이기에 다시 살아나셨다고 말하지만, 단순히 예전과 같은 생명으로 살아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독특한 용어인 부활이라는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설명하는 사도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예전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아울러 우리 성도들의 부활도 예수님의 부활과 같은 몸으로  살아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고전15:42-44에서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 곧 우리의 부활은 예수님과 같은 영광스러운 몸이 됩니다.  썩을 것으로 심었는데,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욕된 것으로 심었으나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약한 것으로 심었는데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났습니다. 육의 몸으로 심었지만, 신령한 몸으로 살아납니다.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정말 기대가 됩니다. 흥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이 이생뿐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변화를 입는 날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롬6:8-9을 보면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람들이요, 이제는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하여 살아난 사람들입니다.  우리 주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습니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알고 있습니다.  새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흙으로 지은 육신의 몸을 가진 사람이 영원히 살아갈 몸으로 새로운 차원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부활절을 보내면서 형식적으로만 예수님의 부활을 말하고, 입술로만 예수님의 부활을 말하는 사람이 되기 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상식적인 수준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말할 수 있습니다.  입술로만 예수님의 부활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동행하시는 살아계신 주님을 고백하여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와 하나 되시고, 우리를 통하여 부활하신 주님이 살아가시는 것을 경험해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여전히 살아계시고 역사하시고 있습니다.  

기독교회가 유대 팔레스타인 지역을 넘어 서방세계로 들어갔습니다.  당시는 로마제국이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길을 로마로 통한다는 말처럼 로마의 국도를 따라 기독교는 전 세계로 전파될 수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그리스어로 말하면 세계 모든 나라 사람들이 알아들었습니다.  신약성서는 처음부터 그리스어로 기록되었고, 초대교회 선교사들은 아람어로 설교하면 그리스어로 통역하였습니다.   

로마제국은 황제 숭배하는 나라였습니다.  로마 황제를 주님이라고 고백하여야 하는데, 유대인 나사렛 예수를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종교를 그냥 놔두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기독교회는 로마의 지하묘소인 카타콤으로 숨어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은 물고기의 암호를 그리며, 자기의 신분은 밝히기 시작하였습니다.  

로마제국 하에서 기독교인들은 죽음의 고비를 수없이 넘겨야 했습니다.  수없는 순교자들이 나왔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물고기(ivcqu,oj)라는 암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기가 기독교인 것을 말하고 싶으나, 상대방도 기독교인인지 알고 싶으면, 슬그머니 두 곡선을 그려 물고기 형상을 그렸습니다.  그러면 상대방도 기독교인 때에는 자기도 기독교인이라고 물고기를 그렸습니다.  ΙΧΘΥΣ라는 글자는 'Ιησους Χριστος Θεου Υιος Σωτηρ'로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라는 말입니다.  다섯 글자의 첫 소리를 가지고 합하고 보니, 마치 물고기란 글자와 비슷해졌습니다.  그래서 물고기 형상을 그리게 되었습니다. 

역사가들은 기독교회가 로마제국 하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지하공동묘지인 카타콤에서 예배드렸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인들이 지하묘지인 카타콤을 신성시하여 그곳에 들어가면 어떤 죄인도 잡아오지 않기에 초대교회가 박해를 피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장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여러 정황과 기록을 보면 교회가 단순히 박해를 피하기 위한 수단, 그 이상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지하에 널려있는 시신들 앞에서 죽음을 두렵지 않게,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라고 외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가진 신앙은 부활의 신앙이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오늘은 우리 주님이 부활하신 후 두 번째 주일입니다.  초대교회로부터 제8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안식 후 첫 날에 우리 주님이 부활하셨고, 그리고 다시 제8일에 나타나셨습니다.   오늘 본문 26절 말씀에 “여드레를 지나서”라고 했습니다.  주일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시 여드레를 지나서 제8일에 나타나셨는데, 역시 오늘의 주일입니다.  제8일에 다시 나타나심으로 주일은 작은 부활절이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안식 후 첫 날, 당신이 부활하신 그 날 저녁때에 엠마오로 가던 제자에게 나타나셨고, 다시 10명의 제자들이 모인 곳에 나타나셨습니다.  그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였습니다.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아걸었습니다.  그 때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 가운데 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하시면서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셔서 못 박히신 손과 창에 찔리신 옆구리를 보여주시면서 당신이 살아나신 것을 보여주실 때에 주님을 보면서 기뻐하였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면서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12제자 중의 하나인 쌍둥이라는 뜻의 디두모라고 불리는 도마라는 제자는 첫 날 예수님이 오셨을 때에 그 자리에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도마에게 자랑하듯이,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에 도마는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도마라는 제자에게 정말 고마운 제자였다고 생각합니다.  말만 들고 믿었다면 맹신에 가까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사람이 죽었는데 다시 살아나셨는데, 그것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면서 다니는 이상한 모습으로 살아나셨다고 하면 믿어질 것입니까?  

의심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선생님이 부활하셨다는 말 좋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왜 내가 없을 때에 다녀가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왜 나만 빼놓고, 나는 12제자 중에서 쓸모없는 사람이냐, 이런 저런 생각이 교차하면서 은근히 화도 나는 것이었습니다.  도마는 말하였습니다.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부활하시자마자 막달라 마리아에게 제자들에게 이르라고 하시면서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마28:10)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한 주일이 지나가는데 제자들은 여전히 예루살렘에 머물고 있습니다.  아직도 예루살렘의 정세가 평안치 못하였기에 조금 잠잠해진 다음에 움직이려고 하였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갈릴리로 가지 못하는 이유 중에 한 가지는 도마의 방황하는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어느 자리에 나타나시는 것도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오시지 아무 때나 오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이 도마가 없을 때에 오신 것도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두고 도마가 있을 때에 오신 것도 의심하고 방황하는 도마를 위한 것이요, 우리 모든 성도를 위하여 오셨습니다.  도마를 12제자 공동체의 일원으로 반드시 데려가시기 위한 목적이 있어 도마가 있을 때에 찾아오셨습니다.  그는 육적인 열정에 비하여 영적인 통찰력에 부족함을 드러낸 인물이었습니다. 

여러 다른 제자들이 도마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고 합니다.   그러나 도마는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했습니다. 

도마는 분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모르는 것은 모른다, 아는 것은 안다고 하지, 알면서 모른다고 하거나 모르는 것을 안다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최후의 만찬을 하시던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어디로 가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베드로 물었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그 때에 예수님은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말씀을 주고받을 때에 도마가 물었습니다.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알고 넘어가야지, 모르면서도 넘길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하는데, 다른 사람들이 보았다면 나도 보아야 하고, 나도 만나보아야 부활한 것이지, 남의 말만 들고 받아들일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살아계신 주님을 나도 속히 만나보고 싶다는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이 아니라, 내 눈으로 보는 정도가 아니라, 나의 손가락으로 만져보아야 한다는 부활을 의심하였고, 좀 심하게 말을 합니다. 살아난 증거를 보아야 믿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도마는 이래서 비관론자, 회의주의자라는 혹평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의심 많은 제자가 있었기에 우리에게는 얼마나 도움을 받고 있는지 모릅니다.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고 하시고는 도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했습니다.  

도마는 감격하였습니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서 도마는 과거의 선생님을 본 것이 아니라,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하나님이신 것을 깨달았습니다.  의심이 길었던 만큼 그의 고백도 위대한 고백을 낳았습니다. 

우리도 도마처럼 주님 앞에 엎드려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도마는 이제 더 이상 방황할 것도 없고, 의심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나신 주님은 이제는 사람이 아니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도마는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초대교회는 “기쁨의 50일”(The Great Fifty Days)이라는 절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력에는 부활절 후 예배를 6번 연속 지키다가 성령강림절 즉 오순절을 맞이하게 됩니다.  실제로 초대교회는 부활주일부터 성령강림절까지의 50일 동안 부활의 기쁨을 누리며, 승리를 축하하며, 부활을 증언하고 부활의 의미를 깊이 간직하려고 힘을 썼습니다.  그래서 이 절기를 “파스카 절기”라고 하였습니다.  ‘파스카 절기’란 부활 절기를 말하는데, 다른 말로 ‘기쁨의 50일’이라고 불렀습니다.  The Great Fifty Days라는 말을 번역하는 예배신학자들은 “기쁨의 50일”이라고 번역하여 사용하기에 그대로 말하는 것이지만, 위대하고 크고 높은 50일이요, 가장 귀한 50일이란 의미가 있습니다.    이 기간에는 금식기도하지 않았고, 슬픔과 회개의 상징이던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도 금하였으며,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였고, 생명의 예수님을 모시고 누리며 살아가도록 격려하였습니다.  

유명한 「판넨베르그」라는 신학자는 부활을 근거로 하여 모든 기독론을 수립한 학자로 유명합니다.    예수님 부활의 사건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점이며,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판넨베르그는 “예수의 부활은 역사적으로 말해 기독교사의 출발점이 된 사건이다.   특히 부활절 사건은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의 역사의 출발점을 이룬다”라고 했습니다.  부활이 없었으면 십자가의 죽음은 이 세상에 수없이 있었던 죽음, 하나의 죽음에 불과한 것이지 결코 우리의 죄사함을 위하여 죽은 십자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기에 그의 사역에 나타난 모든 이적과 말씀들이 의미가 있고,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로운 말씀이요, 생명을 살리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부활이란 기독교회의 존립을 가능케 한 사건입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두 분의 선교사님에 의하여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그런데 두 분의 선교사님이 인천 제물로 항구에 들어오신 날이 1885년 4월 5일 그 날은 주일이었고, 부활절이었습니다.  한 분은 감리교회의 아펜젤러 목사님이시고, 다른 한 분은 우리 장로교회의 언어우드 목사님이셨습니다.  두 분이 인천으로 들어오시면서 연장자이신 아펜젤러 목사님이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우리는 부활절 아침에 이곳에 상륙하였습니다.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이시여, 어서 속히 이 백성들을 얽어매고 있는 흑암의 사슬을 끊으시사 하나님의 자녀로서 광명과 자유를 베풀어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부활절이 교회의 생일입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부활절의 교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말씀입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1:9-10)  

오늘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예수님을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고, 지금도 여전히 보지 못하지만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시는 구원받은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천국이 있음을 확신합니다.  이 세상에서 잠시 잠깐 당하는 고통이나 어려움은 진정 고통도 아니고, 어려움도 아닙니다.  얼마든지 참을 수도 있고,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잠시 후에 지나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영접하여 구원받았는데, 주님의 죽으심과 연합하여 죽었고, 주님의 부활에 연합하여 우리도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였습니다.  주님을 보지 못하였어도 믿고 사랑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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