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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를 좇는자 (눅 9:57~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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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좇는자 (눅 9:57~62)  


예수님은 공생애 마지막을 보내신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계셨습니다. 이 길은 죽음을 예비하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지경을 통과하는 도중에 그곳에 있는 한 촌에 머물려고 했으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오히려 영접하지 아니하고 대적했습니다. 
이것은 오랫동안 사마리아인과 유대인들 간에 역사적 적대감정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요 4:9). 예수님은 사마리아인들의 적대감도 제자들이 자신을 보호하는 행위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길을 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길은 이미 예정된 길입니다. 마태복음 26장 24절에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라고 했습니다. 그 길은 영광의 길입니다. 
예수님의 최후에 대하여 변화산에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님의 대화의 내용에서 구체화 되었습니다. 
누가복음 9장 30-31절에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새 』라고 했습니다. 

본문은 마태복음 8장 18-22절과 병행구절입니다. 예수를 좇는 자의 삶은 때로는 가족 관계마저 초월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4장 26절에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라고 했습니다. 
자기의 모든 소유를 포기해야 할 경우도 있습니다. 
마태복음 19장 21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라고 했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좇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10장 38절에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고 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는 존재론적인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선택이라는 것은 둘 중에 하나를 택하는 것이 아니라 둘 중에 하나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적인 안락함을 포기하고 고난을 선택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이 선택은 결코 어리석은 선택이 아닙니다. 이것은 궁극적이고 영원한 안락을 위한 최선의 선택입니다. 

누가복음 14장 26-27절에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영광과 함께 고난도 받는다는 것을 충분히 예견할 줄 알아야 합니다. 
본문은 주를 좇겠다고 하는 세 사람의 유형이 나옵니다. 제일 먼저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라고 하는 어떤 서기관은 반드시 알아야할 사실들이 있습니다. 

Ⅰ. 주님을 좇는 길은 절대 고난의 길입니다. 

본문 9장 57-58절에 『길 가실 때에 혹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혹이 』는 불특정 인물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8장 19절에 보면 이 사람은 서기관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서기관은 상류계층의 인물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예수를 따르겠다고 나선 것은 뜻밖의 일입니다. 
그가 어떤 경우에든지 예수님에게 감동을 받은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겉으로 드러나는 능력이나 명성으로 인하여 자신을 따르는 것을 원치 아니하시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매우 의미심장했습니다. 겉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매력을 느껴서 나를 따르려고 한다면 크게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것은 세상에서 얻어지는 명성과 부귀와는 아무 관계도 없다는 것입니다. 여우나 공중에 날아다니는 새와 같은 짐승들에게도 살아갈 수 있는 보금자리와 활동무대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따르는 자에게는 이것마저도 보장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따르는 것으로 얻어지는 명성과 부귀를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물리적인 허영심에 사로잡혀 예수를 따라보겠다는 서기관은 예수님의 이러한 끔찍한 말씀을 들은 후에 그가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는 기록되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실 때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말구유에 오셨습니다. 그는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이시면서도 세상 죄를 지고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사도행전 14장 22절에 『제자들이 마음을 굳게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하고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전 생애가 고난이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주님을 따르려는 자들은 고난을 즐거워해야 합니다. 이러한 고난은 아무런 가치가 없이 그저 고통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난 받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 된 축복의 표징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13-14절에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두려워하되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이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고 했습니다. 
로마서 8장 18절에 『생각컨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16절에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 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5장 10-12절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고 했습니다. 
마가복음 10장 29-30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Ⅱ. 주님을 좇는 길은 하나님 나라를 전파 하는 것입니다. 

본문 9장 59-60절에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 사람의 경우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장례식은 그 어떤 일보다도 중요한 행사입니다. 예컨대 장례식은 유월절 행사나 할례하는 일보다도 우선이었습니다. 장례식을 도와주는 일만으로도 상당한 영적인 보상이 있다는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유대 사회의 장례가 이쯤 되고 보면 부친의 장례를 하고 난 뒤에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일에 대해 아무도 백안시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누구도 도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에 오해가 없어야 될 것은 자식 된 도리로 부모의 장례를 치루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본문의 의미는 철저하게 영적으로 죽은 사람, 즉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로 하여금 육체적으로 죽은 사람들로 장사지내게 하라는 말입니다. 
세상의 일과 영적인 일 중에 영적인 일을 우선하라는 것입니다. 부모의 장례도 중요하고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영접하고 따르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나를 좇으라 하시는 예수님의 명령 뒤에는 '예'라고 하는 절대 순종 밖에 다른 순서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일은 모두가 상대적인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절대입니다. 절대를 상대로 바꾸려고 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우리는 한 절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 절대를 가지고 있는 자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상대화시킬 수 있습니다. 

성경이 하라고 하면 해야 합니다. 성경이 안 된다고 하면 못하는 것입니다. 철저히 성경에 나타난 이러한 동사(動詞)를 거역하는 것은 죄입니다. 죄는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절대 순종의 길입니다.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의 뜻에 절대 순종하시므로 우리에게 순종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육신을 입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은 고난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 사명을 다할 때가 온 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형벌이 육체적으로 미치는 아픔이 얼마나 가혹한지를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기를 마태복음 26장 39절에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라고 했습니다. 

Ⅲ. 주님을 좇는 길은 하나님 나라를 최우선 추구하는 것입니다. 

본문 9장 61-62절에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고 했습니다. 
이 사람은 세 사람 중 마지막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가족에 대한 작별 인사가 문제가 아니고 가족에 대한 애착 때문입니다. 만약에 가족이 매달리면 뿌리칠 수 없는 연약이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일제가 교회를 핍박할 때 가족의 정에 못 이겨 주님을 따르지 못하고 순교의 길에서 돌아선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것을 좋지 않게 보신 것입니다. 가정을 사랑하고 가족을 소중히 여기는 일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가족애로 인하여 하나님의 일에 지장을 초래한다면 단호히 배격해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밭을 가는 사람이 손에 쟁기를 잡고 밭가는 이랑을 계속해서 주시하여보지 아니하면 밭가는 일이 엉망이 될 것을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롯의 아내는 소돔에서 피하여 나오다가 뒤를 돌아보므로 소금기둥이 되어 버렸습니다(창 19:26). 
본문에 『합당치 않다 』에서 '합당'은 헬라어 '유데토스'( )로 '잘 놓여 있는', '적합한'의 뜻입니다. 따라서 합당치 않다는 말은 본래의 자리에서 이탈된 것을 말합니다. 
마태복음 10장 37-38절에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 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고 했습니다. 

에스겔 1장 9절과 12절에 보면 '그 네 생물들은 신이 어디로 가든지 돌이키지 아니하고 곧게 행한다'고 했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절대 목적적 길입니다. 
여기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heaven 혹은 Kingdom of God)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누가복음 17장 20-21절에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고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는 말은 잘못된 말입니다. 너희 안( )이란 말은 영어로 in within으로 번역할 수 있지만 주위(among)란 말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in you가 아니고 among you로 번역되어서 너희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있다고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바로 바리새인들과 같이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찬송가 495장에도 이 본문에 의지하여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는 오늘의 주님의 몸 된 교회에서 맛보아야만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후에 그 다음의 행동에 대해서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께서 어디로 가시든지 주를 좇을 수 있습니까? 이 말을 환언하면 주님께서 어떤 명령을 하시든지 그 명령에 순종 할 수 있겠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은 갈릴리 바다에서 제자들과 함께 조반을 잡수셨습니다. 그리고 수제자격인 시몬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고 하셨습니다. 이 때 시몬은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내 어린양을 먹이라 』고 하셨습니다(요 21:15-17). 이 같은 질문을 세 번이나 하셨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21장 18-19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라고 했습니다.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라는 당시 서기관을 포함한 세 사람의 고백을 어떻게 수용해야 합니까? 

여기 『저는 좇겠다 』는 말은 다른 사람들과 차별화 되겠다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좇지 아니하더라도 나만이라도 기꺼이 따르겠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주를 좇겠다는 말을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긴다는 것으로 등식화시켜야만 합니다. 이 세 사람의 말의 현대적 의미는 교회 운동에 대한 여타 사람들과의 차별화를 선언하는 것입니다. 교회 운동은 가족애에 이끌려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인정에 끌리거나 세상을 돌아보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영광과 함께 고난도 감수해야 합니다. 교회 운동은 부친을 장사하는 것보다 더 급하고 중요한 일입니다. 교회운동은 가족을 작별하는 여유도 주어지지 아니합니다. 

가족애는 좋은 것입니다. 가족에 대한 관심과 애착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가족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 동시에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도구가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좇는데 가족이 걸림돌이 될 경우가 없지 아니합니다. 어떤 경우에든지 하나님의 일(교회운동)은 절대의 자리에 두어야 합니다. 교회 일은 비판 가능한 자리에 두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 일은 차선이 될 수도 없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주님의 몸 된 교회운동은 최우선 추구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삶은 구령운동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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