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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힘대로 돕는 교회 (행 11:2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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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대로 돕는 교회 (행 11:25~30) 


우리는 이미 스데반이 순교한 그날부터 예루살렘교회에 큰 박해가 일어났고 그래서 신자들이 각지로 흩어지게 되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 박해와 흩어짐의 결과로 이방 도시인 안디옥에까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전파되었고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셔서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님께로 나아오게 되었습니다(행11:19-21).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들은 예루살렘교회는 착하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 바나바를 안디옥으로 보냈으며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는 그의 권면에 힘입어 주님을 따르는 무리의 수가 더욱 커지게 되었습니다(행11:22-24). 최초의 이방인교회인 안디옥교회는 그렇게 세워진 것입니다.

안디옥교회 신도의 수가 크게 늘어나자 바나바는 함께 사역할 협력의 손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때 그의 생각에 떠오른 사람이 아직 바울이란 새 이름으로 불리기 전의 사울이었을 것입니다.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회심하고 열렬한 전도자가 되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지만 아무도 그를 믿지 않고 두려워하며 사귀지 않으려 할 때 그를 사도들에게 데리고 가서 사도들이 사울을 믿고 받아들이도록 설득한 사람이 바로 바나바입니다. 그래서 바나바는 사울을 찾으러 그의 고향 다소로 갔습니다(본문 25절). 다소는 안디옥에서 그리 먼 곳이 아니었습니다. 마침 사울은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한 것 때문에 살해위협을 받게 되자 당분간 고향 다소에 피신해 와있었습니다(행9:28-30). 본문 25절을 우리말로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갔다”고 간단히 옮겨놓았지만 원문에 쓰인 “찾는다”는 단어의 뉘앙스는 사방을 구석구석 뒤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열혈파 전도자가 된 사울이 고향에 와서 조용히 지냈을 리가 만무합니다. 여기저기 쉬지 않고 다니며 전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를 만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사울을 찾아내어 안디옥으로 데리고 와서 함께 사역해야겠다는 바나바의 강력한 의지를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바나바는 뜻한 대로 사울을 만나 안디옥에 데리고 오는 데 성공했습니다. 두 사람은 안디옥교회에 일 년간 머물며 함께 큰 무리를 가르쳤습니다. 그 결과 중 흥미로운 일은 그 안디옥의 신자들에게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이 붙게 된 것입니다(본문 26절). “그리스도인”이란 호칭은 비기독교인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붙여준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추종자”, “그리스도에 속한 사람”, “그리스도에 의해 인정받는 사람”을 의미했습니다. 당시 로마인들은 “가이사가 주이시다”라고 말하고 있었던 데 반해 “그리스도가 주이시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호칭의 출현은 의미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존재하던 유대인과 비유대인이라는 이분법적 구별이 사라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유대인이든 비유대인이든 가리지 않고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새로운 집단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공유함으로써 인종, 문화, 언어 등 모든 차이를 뛰어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새로운 인류가 탄생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새 이름으로 불리게 된 이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보여주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마치 안디옥의 신자들이 참으로 그리스도의 사람들이라 불릴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를 시험하기라도 하려는 듯 큰 흉년이 들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안디옥에 온 선지자들 중 아가보라 하는 이가 일어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고 예언했고 실제로 글라우디오가 로마 황제로 재위 중이던 주후 46년에 극심한 흉년이 들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 흉년은 특히 유대지방에 큰 타격을 준 것 같습니다. 이에 안디옥의 교인들이 요즘 말로 하면 재해의연금을 걷어 보내는 일에 나선 것입니다. 본문 29-30절을 봅니다: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이 기록에서 우리는 몇 가지 사실에 주목합니다.

첫째로,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부조를 보내기로 했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교인이 다 같이 참여하여 각각 힘닿는 만큼 구제금을 모아 보내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교회예산에서 얼마를 떼어 보낸 것이 아닙니다.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유대의 신자들에 대한 관심을 갖고 정성을 모았다고 하는 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라고 한 말도 유의할만합니다. 안디옥교회가 예루살렘교회에 부조를 모아 보낸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그 안에 주어진 구원의 진리를 가르쳐준 데 대한 감사의 표시이기도 했겠지만, 안디옥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예루살렘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라는 확신을 표명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인종과 국적과 문화와 언어를 뛰어넘어 누구든 형제자매로 여길 수 있는 것이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셋째로, 유대의 형제들을 돕자는 것이 생각에만 그치고 말에만 머문 것이 아니고 모금을 실천했고 모여진 돈을 즉시 바나바와 사울에 손에 들려 예루살렘으로 보냄으로써 집행했습니다. 급박한 어려움에 처한 이들의 입장을 배려하는 그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을 얻은 안디옥교회의 신자들은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에 부끄러움 없는 심성과 생각과 행동이 무엇인지를 오늘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다움이 무엇인지를 배워 알고 있었고 실천할 줄 알았던 안디옥은 명실상부하게 이방인전도의 요람이 되었으며 바울의 세계선교의 길을 닦는 역할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선교의 빚을 지고 있는 우리 교회도 안디옥교회의 신자들이 보여준 그리스도인다움을 지니고 실천할 줄 아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이라 불리기에 조금도 부끄러움 없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성장하는 교회의 모습이고 더욱 성장해갈 교회의 힘입니다. 교회 밖을 위한 일을 논의하려고 할 때마다 “우리부터”, “우리도 어려운데”,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이라는 핑계가 즉각 발동하곤 하는 체질 가지고는 어머니교회라 불릴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큰 교회 될 꿈은 아예 버리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내 교회밖에 모르는 교회는 사실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모든 교회는 그리스도의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지체의 아픔을 나누지 못하는 지체는 한 몸에 붙은 지체가 아니기에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오직 한 분이십니다. 그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지체로서의 도리와 책임을 다하며 기뻐하고 감사하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우리를 필요로 하는 모든 지체를 힘을 다하여 돕는 교회가 됩시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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