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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인생을 바꾸는 힘 - 부활 (고전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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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바꾸는 힘 - 부활 (고전 15:1~8)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그 부활의 소식이 첫 목격자 마리아로부터 전파되었다. 그 부활의 소식 때문에 교회가 탄생되고 성령을 사모하게 되고 유대 사회가 바뀌어졌다. 부활의 소식은 사람들을 바꾸고 어둠과 회의 속에 빠져있는 인생을 바꾸었다. 부활은 인류의 원수인 죽음, 죄, 율법을 패배시켰다. 부활의 소식은 악마의 머리가 깨지고 밟혔다는 것이며 부활은 소망으로 살아야 할 보증이 되었다. 그런데 이 부활에 대해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의심하고 믿지 않았다. 부활은 없다고 단언하였다. 육체가 죽으면 썩고 티끌로 돌아가는 것이지 어떻게 몸이 다시 산다는 말인가? 그래서 바울은 몸의 부활을 증거한다. 

우리의 부활은 영으로만 부활하는 것이 아니다. 연약한 육체의 몸을 지닌 내가 부활한다. 이것이 기독교 부활의 특징이다. 단순히 부활은 영적 불멸론이 아니다. 몸이 함께 살아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본질적 몸이 살아나지만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신령하고 기이한 몸으로 변화된다. 먹고 마시는 나의 몸을 지니고 있지만 변화된 이 몸은 시간과 공간에 제한이 없는 몸의 부활이다. 그 부활의 몸은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이다. (고전15:49) 그 부활의 몸의 첫 모습은 주님의 부활의 몸이 모델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그렇다! 부활의 몸을 알려면 주님을 보면 된다. 주님의 몸은 분명 제자들이 볼 수 있는 몸이었다. (요20:19) 제자들이 있는 곳에 찾아오신 주님의 몸은 닫혀진 문 안으로 들어오신 몸이었다.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는 몸이었다. 그 몸으로 주님은 음식을 나누어 주시고 떡을 떼셨다. 이렇게 다시 사는 부활을 믿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바울은 소문을 뛰어넘어 목격자들에 대한 증언을 기록한다. 

주님이 부활의 몸을 나타내서 보여주실 때 누가 보았는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공개적으로 모두 12번 자신을 나타내 보이셨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5장에 기록된 것은 6가지이다. 세 번은 집단적으로 보여주셨고 세 번은 개인에게 보여주셨다. 그러나 이 세 사람에게 보여주신 부활의 현상은 집단적으로 보여주신 것 이상으로 중요하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사도단의 대표이고 야고보는 유대 교회의 대표이며 바울은 이방 교회의 대표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어떤 사건을 본다는 것은 중요하다. 본 사람은 오감을 통해 보았기에 흔들리지 않는다. 보지 못한 사람과는 아주 다른 확신을 갖게 된다. 의심장이 도마를 보라. 

요20:25에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본다는 것은 보지 않고 믿는 자에 비하여 수준이 낮고 덜 복되다 할 것이다. 그러나 수준이 낮아도, 덜 복되어도 의심이 사라지고 신앙 생활에 회의가 사라진다면 보아야 한다. 목격자가 되는 순간 태도와 증언이 달라지게 된다. 

지난 주 윤 목사의 아들이 원어민 영어 교사가 되어 이 집사님이 있는 학교에 부임하여 왔다. 그가 이 집사의 인도를 받아 우리 교회에 왔는데 이야기 하다가 금가루가 손바닥 위에, 옷 위에 떨어지는 이야기를 하였다. 이 주님의 기름부으심의 방법을 보지 못한 청년이라면 무슨 말인지 몰랐을 것이다. 그 청년은 당신의 교회 이야기를 하면서 옷과 손만 아니라 복도 및 방바닥에 수북히 내린 이야기를 하며 수긍하였다. 그의 어머니 교회에서 자라난 그는 확실히 보았기에 의심하지 않았다. 이렇게 본 자의 확신은 본 자들에게는 일치하고 확신이 된다. 본다는 것은 중요하다. 

계시록에 기록된 천상의 장면은 모두 다 하늘 장면을 보았다는 목격의 이야기이다. 시각적으로 바라본 이야기이다. 오늘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신 주님의 이야기 역시 목격자가 있다는 이야기로 풀 수 밖에 없다. 

1. 게바에게 보이셨다. (고전15:5)

게바의 본명은 시몬이다. 게바란 말이 베드로(반석, 盤石)란 말인데 부활하신 주님을 베드로가 보았다는 말이다. 내가 보려고 해서 본 것이 아니고 ‘게바에게 보이시고’라고 하였으니 부활의 주님으로 나타나서 만나주신 것이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기 전 베드로는 옛날의 사람으로 되돌아갔다. 주님을 잃어버린 후 그의 할 일은 물고기를 잡는 일 밖에 할 일이 없었다. 요21:3에 보면 다른 제자들과 함께 물고기를 잡으러 가는 모습이 있고 날이 새도록 물고기 한 마리를 잡지 못하였다. 바로 그때 부활의 주님이 고기 잡는 현장에 나타나서 “고기가 있느냐”라고 물어보셨다. 이때 사랑하는 제자 요한이 주님이라고 말을 할 때 베드로는 너무 놀라서 물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부활의 주님은 배신자 베드로를 찾아오셨다. 예전과 똑같이 고기를 잡도록 도와주시는 부활의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이전과 그 사랑과 성실하심이 똑같았다. 

베드로는 디베랴 해안가에서 주님과 모닥불 식탁을 나눈다. 부활의 주님이 떼어주시는 떡과 생선을 받으면서 “내 양을 먹이라. 치라. 먹이라”는 부탁을 듣게 된다. 그래서 배신자는 다시 일어서고 배신자는 예수님의 맡겨주신 사명을 짊어지고 수제자가 된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위해 살고 예수님을 위해 죽는 자로 변화되었다. 부활의 능력 때문이다. 그것을 본 자가 되었고 만진 자가 되었는데 죽음이 어찌 두려우며 사람이 어찌 두렵겠는가? 
  

2. 야고보에게 보이셨다. (고전15:7)

고전15: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이 야고보는 열 두 제자 중의 큰 야고보,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가 아니다. 이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이다.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님을 미친 자로 여기고 예수를 잡으려고 헤매이던 사람이다. 그런데 이 야고보가 부활의 주님을 만난 것이다. 주님이 야고보를 찾아와서 보여주신 것이다. 육안으로 보게 된 주님,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다. 후일에 야고보가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이 되었는데 이 불신자를 바꾸어 놓은 강력이 무엇인가? 바로 부활의 경험이다. 부활은 배신자도 바꾸어놓지만 부활은 불신자도 교회 지도자가 되게 만든다. 야고보를 바꾸어 놓은 능력은 부활이다. 야고보는 빠른 속도로 교회의 수장의 자리에 올랐다. 우리들도 부활의 주님이 나타내 주시기만 하면 주님을 비방하고 주님을 불신하며 살았어도 인생 전부가 바뀐다.

부활의 아침에 우리는 이것을 믿자. 목격자가 있는 부활, 목격자를 변화시킨 부활, 목격자가 배신자이든, 불신자이든, 주님을 위해 살도록 바꾸어 놓은 부활, 그 부활은 허구가 아니다. 지어낸 거짓말이 아니다. 이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다. ‘목격자가 있었구나!’ 이것만 믿고 나아가도 내 인생의 운명이 바뀌어진다. 내 신앙 생활 속에 삶의 변화가 없는 것은 부활 신앙이 없기 때문이다.

  
3. 바울에게도 보이셨다. (고전15:8)

고전15: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부활의 주님은 마지막으로 바울에게 보이셨다. 여기 ‘맨 나중에’란 말은 다른 이들에게 나타난 부활의 주님과 똑같은 주님을 만났다는 뜻이다. 순서상 마지막 번째일 뿐 나타나신 주님이 부활의 주라는 뜻이다. 사실 바울은 예수님이 지상에 승천한 이후에 주님을 만났다. 이미 교회가 집사 제도를 두고 스데반이 활동할 때까지도 바울은 핍박자였다. 교회를 반대하고 예수 믿는 자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를 자랑하고 기독교를 말살하는데 앞장 선 자였다. 그런데 그 바울이 만난 주님이 부활의 주님이요, 다른 이들이 만난 주님과 똑같다는 것이니 바울은 큰 은혜를 받은 것이다. 부활의 주님이 핍박자에게도 나타나 주셨다. 그래서 못된 박해자도 부활의 목격자가 되었다. 

그렇다면 승천하신 주님을 부활의 주님으로 목격하였다면 우리도 주를 볼 수 있다. 승천하신 주님이지만 만나주시는 주님을 볼 수 있다. 이는 정말로 가능한 일이다. 사울은 변화되었다. 핍박자가 핍박을 받는 자로, 옥에 가두는 일에 앞장 섰던 자가 옥에 갇히는 자로, 돌멩이를 던져 피를 내던 자가 돌멩이에 맞는 자로 사울이 바울로 변화되었다.   

내 인생을 바꾸는 동력은 부활의 힘이다. 학문도, 재물도, 인기도, 명예도 내 인생의 운명을 바꾸지 못한다. 오늘 부활의 주님이 나타나실 때 목격자가 된 베드로, 야고보, 바울은 배신자, 불신자, 박해자였다. 그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 주님을 위해 일하는 순교자가 된 것은 무슨 힘일까?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고,
야고보는 30년 동안 교회의 지도자로서 일하다가 순교하고,
바울은 로마까지 전도하러 가는 전도자가 되어 목 베임을 받아 순교하고
주님을 외면하던 이들의 삶을 증인으로, 순교자로 바꾼 힘이 바로 부활에 있다.

우리는 인생의 궤도를 수정해야 한다. 땅만 보고 사는 삶을 그대로 두면 죄의 노예가 되어 멸망의 미아가 되어버릴 내 인생의 궤도가 똑바로 운행되도록 수정해야 한다. 하늘을 보는 삶, 영으로 사는 삶, 그 궤도 수정의 동력이 부활 신앙이다. 목격자가 있는 부활, 목격자가 변해 버린 부활, 목격자 모두 순교자가 된 부활. 부활의 주님이 아니고서는 이 세 사람의 삶의 궤도 수정의 이유를 설명할 길이 없다. 

나도, 당신도, 어린 아이까지도 인생이 올바르게 천국을 향하도록 이끄는 에너지는 부활의 주님에 있다. 부활의 주님을 높이며 자랑하며 그 부활의 신앙 때문에 내 인생의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사는 새 삶이 시작되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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