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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버림받은 예수님 (막 15:33~39) - 고난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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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림받은 예수님 (막 15:33~39)


제 9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는 뜻이라. 

역사상 위대한 위인들은 장수하고 마지막 죽음의 모습에서도 차별화를 느낄 수 있습니다. 모세는 120세를 살았습니다. 출애굽 사역을 당당하게 이루었으며 후계자에게 사역을 인계하고 조용히 일생을 마감하였습니다. 아브라함도 175세를 살다가 수한이 차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중에 조용히 삶을 마감하였습니다. 다윗도 30세에 왕위에 올라 40년 동안 통치하며 통일왕국을 이루었고 그 왕위를 아들에 넘기고 천수를 다해 일생을 마쳤습니다. 그런데 예수만은 33년밖에 살지 못하는 특이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 33년의 삶도 고난의 삶으로 일관되었고 태어남도 기구했고 태어나자마자 피난생활부터 했습니다. 청소년기에는 주위로부터 무시 속에서 자랐고 생애 마지막 한주간도 고난주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시서 “나의 때가 왔다”고 외치셨습니다(요 17:1). 이제 내가 죽을 때가 왔다는 말입니다. 그때가 유월절 명절 때로 전국에서 300여만 명이 모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때 유월절 제사에 드려진 양도 17만 마리나 되었고 예루살렘 하수구의 물은 피물이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였습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예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렸다는 소문과 5병이어, 눈먼 자가 눈뜸, 나병환자의 고침, 38년 된 병자의 고침, 앉은뱅이의 일어난 이야기들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앞으로 나흘 후 금요일이면 십자가에서 처형될 것도 아시고 준비하셨습니다. 십자가형은 당시 고대 로마에서 일반적인 형틀로 당시 야만인들이나 반란자들을 처형하는 형틀이었습니다. 그 십자가에 매달리면 몸무게 때문에 못 박힌 손이 찢어져 내리는 형틀인데 죄수들은 그 고통으로 마침내 빈사상태가 되어 몇 시간 안에 기절하여 죽어갔습니다. 예수님도 오전 9시에서 오후 3시까지 매달려 있다가 마침내 운명하셨습니다. 그렇게 운명할 때 그 비참한 광경을 마가는 본문에서 “제 9시에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하고 외쳤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버림받고 죽으셨습니다.  


종교인들로부터 

예수님은 당시 종교인들로부터 버림을 당하였습니다. 당시 종교인들은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입니다. 그들은 누구보다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입니다. 장차 메시야가 올 것을 학수고대하며 율법서와 예언서를 손에 들고 다니며 연구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를 버렸고 예수를 죽이는데 앞장을 섰습니다. 예수는 당시 깡패들이나 부랑자들 그리고 로마인들이 죽이지 않았습니다. 가장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자처하던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이 죽였습니다. 

제사장들에게 당시 예수는 눈에 가시 같은 존재였습니다. 당시 예수께서 가장 많이 지적하고 비난하며 호통했던 대상이 그들입니다. “화 있을쩐저 바리새인들이여” 성전으로 가서 책상을 엎으시고 하나님의 집을 더럽히지 말라고 호령을 했고 나오다 무화과나무를 저주해서 말라죽게 했습니다. 그것은 제사장들의 정수리를 내리 친 것입니다. 그래도 그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벼락을 내리치지 않고 대신 나무를 친 것입니다. 그 나무가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무화과 나무였습니다. 장차 이 나라가 저주받아 망할 것이라는 사인이니 그 사실을 보고 정신을 차리라고 경고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께서 무사했겠습니까. 예수님은 끝내 하나님을 믿는 종교인들로부터 버림받고 죽임 당하였습니다.  

오늘도 예수를 죽이는 것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싸우고 반대하고 다투고 증오하고 분열하여 세상으로부터 욕을 먹습니다. 교파를 나누고 찢고 분열하고 갈라섭니다. 그것이 예수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이고 버리는 행동들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교회들이, 종교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으로부터 욕을 먹고 지탄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예수를 다시 죽이는 행동들입니다.  


세상으로부터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로부터도 철저하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당시 빌라도는 로마가 예루살렘에 파송한 총독이고 지도자이고 정치인입니다. 그를 보낸 것은 예루살렘을 잘 관리하라고 파송한 사람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를 불러 밤새 조사했지만 죄를 발견하지 못하고 무죄를 확신했습니다. 자기 아내도 밤새 꿈에 예수를 죽이는 꿈을 꾸어 그에게 손대지 말라는 경고까지 했지만 군중의 요구가 너무 거세지자 큰 봉기가 일어날 것이 염려되어 끝내 군중의 요구를 무시하지 못하고 군중에 내줘 죽게 한 것입니다. 

정치인은 믿을 사람이 못 됩니다. 자기의 유익이나 입지에 따라 조석으로 입장을 바꾸는 사람들이 정치인들입니다. 그러니까 정치인들의 말로를 보면 불명예로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결국 빌라도는 예수사건으로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소요에 책임을 물어 로마로부터 소환 당했고 소환당해 가던 길에 죽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높은 자리에 앉으면 그만한 책임감도 크게 요구됩니다. 높은 자리에 앉은 지도자는 위기 시에 책임을 회피하거나 군중과 야합하고 자신의 입지를 먼저 생각하면 결국 다 잃게 됩니다. 빌라도가 그래서 심판받은 것입니다.  

또 군중도 믿을 것이 못 됩니다. 민주주의는 좋은 정치체제이지만 완벽한 정치제도는 아닙니다. 민주주의는 군중의 뜻에 좌우되어 큰 우를 범할 수도 있습니다. 여론은 공정하지 않습니다. 그 군중들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열광적으로 환호하였던 사람들입니다. 그들 중에는 예수께로부터 떡을 얻어먹은 사람도 병을 고친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금요일에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며칠 사이에 태도가 돌변했습니다. 그 군중들 뒤에는 조종자들이 숨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제사장들이었고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아주 교묘하게 군중심리를 이용하여 예수를 사지로 몰고 갔고 죽음의 길로 내 몰았습니다. 우매한 군중들은 그런 것도 모르고 어제는 호산나를 외쳤고 오늘은 태도를 바꾸어 예수를 못 박으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정치인들과 사회 불만자 그리고 아웃사이더들은 언제나 군중을 이용하고 선동할 줄 압니다. 그때 군중들은 겉에 나타난 현상만 바라보고 움직입니다. 그래서 “정치인은 군중을 잘 움직일 수 있어야 정치가가 될 수 있다”는 말도 있습니다. 여론은 좋은 면도 있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민심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론정치가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이렇게 결정적으로 오판할 수도 있습니다. 군중들은 처음에는 선한 뜻으로 거리로 나왔겠지만 나중에는 배후조종을 받고 그냥 끌려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군중은 믿을 것이 못 됩니다. 그것이 군중의 우매함입니다. 그 뒤에는 악의를 가진 여론주도층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그냥 끌려갑니다. 예수는 그렇게 해서 인민재판 받듯 처형되었습니다. 


제자들로부터 

예수님이 가장 고난스러울 시간에 가장 지근에서 힘이 되어 줄 사람들은 제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목요일 날 밤에 만찬을 끝나고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내일 금요일에는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오늘밤은 결전의 시간입니다. 비장한 시간입니다. 각오를 다져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금 한밤에 피땀 흘려 기도하고 있습니다. 기도할 때 한밤중 기도, 금식기도, 철야기도는 심각할 때 하는 기도입니다. 평안한 기도는 초저녁이나 낮에 그리고 평일의 새벽에 하는 것입니다. 오죽 죽겠으면 철야를 하고 금식을 하고 한밤중에 산에서 피땀 흘려 기도를 하겠습니까. 예수님은 지금 평안하게 다락방에서 기도할 상황이 아닙니다. 그래서 산으로 올라가 한밤중에 피땀 흘려가며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습니다. 그때 제자들은 예수님 가장 가까이에서 같이 심각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잠자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내가 죽게 되었으니 깨어 기도하라고 당부하셨지만 또 잠자고 있었습니다.  

그 일 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산에서 기도를 마치고 내려오실 때 산 아래에서 군인들이 다가와 체포했습니다. 그때 제자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습니다(막 14:50). 이제 예수님 혼자 남았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예수님이 가야바 법정에서 심문받고 있을 때 베드로는 멀찍이서 지켜보았습니다. 그 밤은 추운 밤이었습니다. 몸도 마음도 추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불을 쪼이고 있다가 심부름하는 여자아이가 “당신도 한패 아니냐”고 말하자 베드로는 즉각 반응하며 “아니라”고 맹세까지 하며 대응하였습니다. 나중에는 믿지 않으니까 저주하며 부인했다고 했습니다. 

더 가관인 것은 마가복음 14장51절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한 청년이 베 홑이불을 두르고 나타났다가 사람들이 그를 붙잡으니까 베 홑이불을 벗어 던지고 알몸으로 도망갔다고 했습니다. 이 기사는 하나의 삽화입니다. 마가만 기록한 특별한 내용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를 버려두고 다 도망간 것을 고발하기 위해서 마가만이 기록한 이야기입니다. 이 사람이 누구입니까. 

이 남자를 헬라어로 “네아니스코스”(neaniskos)라는 말로 묘사를 했는데 그 말은 “25세에서 50세 사이의 남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래서 추적해 보니까 베다니에 살고 있던 나사로,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 예수님을 가장 사랑한다고 자청했던 사도요한이 아니었을까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쯤 추리하다가 다시 발견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마가가 그 사람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이유가 저자인 마가 자신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입니다. 

이 이야기는 마가복음서에만 나오며 마가가 이 기사를 무명의 삽화로 처리한 것도 그 사람이 마가 자신이라는 점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마가가 자신의 부끄러운 사실을 감수하고 스스로 이 이야기를 기록한 것은 마가가 마가복음서를 기록하면서 초점을 제자들의 무능을 사실 그대로를 기록하는데 두었기 때문입니다. 마가는 그 당시 예수님은 제자들로부터도 완전히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고발하고 이 성경을 읽는 독자에게 알려주어야 하는데 그러자면 자신의 일이 부끄럽기는 하지만 이 사례를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마가가 홑이불을 뒤집어쓰고 갔던 데도 사연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이 마가의 다락방에서 있었습니다. 그때 마가도 자기 집이니까 그 자리에 참석했다는 것입니다. 마침내 만찬을 마치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이끌고 겟세마네 산으로 기도하러 떠났습니다. 그때 마가는 홑이불을 덥고 잠을 자던 중이었습니다. 그때 가룟 유다가 로마 군인들을 데리고 예수님을 체포하려 다락방에 들이닥쳤습니다. 유다는 이미 떠난 예수님에 대해서 마가에게 행적을 추궁하고 곧 떠나갔습니다. 마가는 순간 떠난 예수님이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혹시나 해서 잠자던 베 홑이불을 몸에 두른 채 급히 체포자들을 따라나섰는데 누군가 너도 그 제자가 아니냐 하고 붙잡으니까 마가가 겁이 나서 베 홑이불을 벗어 던지고 알몸으로 도망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마가가 맞습니다. 자신의 일은 부끄럽지만 제자들의 무책임함을 고발은 하기 위해서 자기 이름을 숨기고 “어느 청년이“라고 쓴 것입니다. 

이 마가가 두른 베 홑이불은 우리가 잘 아는 세마포인데 당시 세마포는 값이 비싸서 죽었을 때만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부자 남자들은 잠잘 때 키톤(kiton)이라는 속옷을 입고 그 위에 신돈(sindon)이라는 베 홑이불을 두르고 잤습니다. 그런데 이 마가는 부잣집 아들이니까 그날 베 홑이불만 두르고 잠을 자다가 갑자기 유다를 따라 나갔다가 그 봉변을 당한 것입니다. 당시 제자들이 이 모양으로 예수를 버렸습니다. 

그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버림받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중에 얼마나 유약하고 비겁하고 중심도 뼈대도 자존심도 없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까. 주일도 제대로 못 지키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으며 놀러갈 생각 때문에, 더 잠자려고, 바쁘다고, 주일도 출근하는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 마음에는 주일예배는 개념조차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때만 버림받은 것이 아니고 오늘도 예수님은 여전히 버림받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모두 베드로가 통곡하였듯이 주님을 버린 삶을 통곡하며 회개해야 합니다. 


아버지로부터도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처절하게 아버지를 부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서 “나의 아버지 왜 나를 버리십니까”하고 절규합니다. 하나님도 예수를 버렸습니다. 아침 9시에서 오후 3시까지 6시간 동안 십자가에 매달려온 몸이 아래로 쳐지면서 살이 찢겨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아들이 비명을 지르고 있는데 하나님은 응답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도 버림받았습니다. 

예수님은 마침내 그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고난입니다. 그 고난이 얼마나 혹독하였으면 누가복음 23장44절을 보면 “정오에서 제 3시까지 3시간동안 태양이 빛을 잃고 어둠이 온 땅에 내렸다”고 했습니다. 이 현상을 좀 안다는 사람들이 해석하기를 이는 일식현상이었거나 갑자기 짙은 구름이 몰려왔거나 짙은 안개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아주 분명한 것은 누가복음 23장44절에서 누가가 증명하기를 “때가 제 6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였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단순한 일기변화가 아니고 우주적이고 종말적인 대 변화의 사건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때의 어두움을 외경인 베드로 복음서를 보면 “그때 어두움이 한밤중과 같아서 사람들이 등을 가지고 다닐 정도였다”고 말했습니다. 아모스 8장9절에 보면 아모스가 그때의 징조를 이미 BC760년경에 예언하기를 “그날에 내가 해로 대낮에 지게 하여 백주에 땅을 캄캄케 하겠다”고 예언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그렇게 고난 받게 하고 십자가에 제물로 내어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가 그렇게 버려지고 제물이 되어야 이 세상이 구원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그렇게 버리셨고 세상에 한 가지를 요구를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저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누구를 막론하고 어떤 죄를 지었던지 불문하고 멸망하지 않고 구원을 얻으리라.” 그 예수님이 운명하시자 하나님은 그 약속의 내용들을 즉시 조치하셨습니다. 그것이 성전 휘장이 찢어지는 사건입니다. 

성전에는 두 개의 휘장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성전 앞뜰과 성소를 가로막은 외부의 휘장이고(출 26:36, 38:18, 민 3:26) 또 하나는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는 지성소와 성소를 분리하는 휘장입니다. 예수께서 운명하시자마자 이 두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져내려 밖에서도 누구나 훤히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이 휘장은 높이가 약 55규빗 (약 25m ) 너비 16규빗(약 7m)길이로 드리워진 여러 모양으로 수놓은 천입니다. 그 천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다는 것은 이제 대제사장의 역할은 끝났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누구든지 제사장이 필요 없이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 모두가 예수님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축복이고 은혜입니다. 

예수의 고난과 죽음에는 이런 뜻이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버리는 대신 인간을 위해서 구원의 길을 만드시고 새 길을 여셨습니다. 그것이 예수의 고난의 의미이고 예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의미입니다.(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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