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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단 3: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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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단 3:13~18)


환난과 위기의 순간에 드러나는 참신앙 
아내: "여보, 이번에 일제 전기밥통을 샀어요." 
남편: "그거 참 잘했네. 아무래도 일제가 튼튼하고 실용적이고, 디자인도 예쁘지." 
-잠시 후- 
아내: "앗, 밥이 탔네." 
남편: "참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군." 
-이 후 둘은 서로를 응시하더니만 한 목소리로 외친다.- 
아내 & 남편: "우리나라 전기는 정말 못 쓰겠다니까!"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가전제품 하면 일제가 최고였던 시절이 있었지요. 그러나 일제가 아무리 좋다고 할지라도 불량품이 있기 마련입니다. 명품이 좋다고는 하지만 써봐야 압니다. 어떤 물건도 그냥 이름만 믿어서는 안 되고 반드시 시험을 해봐야 합니다. 중국에서는 하도 짝퉁이 많아서 고객들이 속아 넘어가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한번은 어떤 농부가 비관이 되어서 농약을 마시고 자살을 하려고 했는데 안 죽었답니다. 농약도 가짜였다는 말이지요.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보통 때에는 우리의 신앙이 좋은지 안 좋은지 알 수가 없습니다. 어려운 때가 되어야지만 알 수 있습니다. 환난이 오고 고난이 올 때 어떤 모습을 보이는가에 따라서 참신앙과 가짜신앙이 구분이 됩니다. 배고플 때 양심을 지키는 사람이 진짜 양심적인 사람이지요. 남이 안 볼 때 교통법규를 지키는 사람이 진짜 양심적인 시민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손해보고 고난당해도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고 불평하지 않는 사람이 참신앙인입니다. 아니 꼭 예수님 때문이 아니라도 이해하기 어려운 질병이나 실패를 당해도 믿음에 흔들림이 없는 사람이 진짜 신앙인입니다. 건강할 때나 병에 걸릴 때나 변함없이 주님을 섬기는 이가 진정한 신앙인입니다. 성공할 때나 실패할 때나 여전히 주님을 바라보는 이가 참 그리스도인입니다. 부할 때나 가난할 때나 한결같은 믿음을 지키는 이가 진짜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환난과 위기를 만났습니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형편에도 굳센 믿음에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불이 활활 타오르는 풀무불 화덕 속에 들어가도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도 고난당할 때 드러납니다. 세상이 어렵다보니 이 모양 저 모양으로 고난당하는 분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를 기억하시고 참믿음으로 고난과 위기를 잘 극복해내시길 바랍니다.  

민심 통합을 위해 금신상 숭배를 강요하는 느부갓네살 
 다니엘과 세 친구는 예루살렘을 떠나 바벨론 제국에 살고 있었습니다. 포로가 되어서 원수 나라에 끌려오게 된 것이지요. 다니엘도 그랬지만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모두 성실하고 유능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포로 신세임에도 다니엘의 추천을 받아 바벨론의 도를 다스리는 고위 관리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이 바벨론의 관리로 중용되었다면 대단히 뛰어난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바벨론 본토 사람들이 가만있을 리 만무하지요. 자기들보다도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갔으니 시기와 질투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던 차에 느부갓네살 왕은 민심을 통합하고 국가를 하나로 만들기 위하여 금으로 신상을 만들어서 두라 평지에 세웠습니다. 높이가 60규빗, 즉 27미터나 되는 큰 금신상을 세운 것입니다. 이 금신상이 느부갓네살 왕 자신의 모습인지 바벨론 사람들이 섬기는 신의 모습인지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사실만큼은 분명합니다. 이 금신상은 느부갓네살 왕이 더욱더 효율적으로 바벨론 제국과 시민들, 특히 히브리 노예들을 통치하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이 금신상에게 절하게 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고 민심을 통합하고자 했던 것이지요. 

이렇게 금신상을 만든 뒤 제막식이 있던 날 임금이 특별한 명령을 내렸습니다. 악기 소리가 들리면 누구나 다 무조건 금신상 앞에 절을 해야만 하는데 만일 이 명령을 어기는 사람은 불타는 풀무화덕 속에 던져 넣을 것이라는 명령이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에게 큰 위기와 환난이 찾아왔습니다. 과연 여호와 하나님 신앙을 저버리고 일시적으로 타협할 것인가 아니면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켜야 할 것인가를 선택해야만 했습니다. 두말 할 필요도 없이 세 친구는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이 중요합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보여준 3단계 신앙 

악기 소리가 났음에도 세 친구가 금신상 앞에 절을 하지 않는다는 소식이 느부갓네살 왕에 전해졌습니다. 이들은 세 친구가 "왕을 높이지 아니하며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며 왕이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 않는다."고 고발했습니다(12절). 왕이 노하여서 세 사람을 불러 심문합니다. 그러면서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악기 소리가 날 때 금신상 앞에 절을 하기만 하면 용서해주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화덕에 넣겠다며 회유와 협박을 했습니다. 이랬을 때 세 친구가 보인 신앙의 태도는 놀랍습니다. 

1단계: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주는 신앙 

16절을 보세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무슨 말입니까? 그 어떤 논쟁이나 핑계도 하지 않고 일체의 타협을 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태도이지요. 말이 아닌 행동으로써 자신들의 믿음을 보여주겠다는 태도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참신앙은 말이 아닌 행동에 달려 있습니다. 진짜 신앙은 요란스러운 말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단 한 마디 말이 없어도 꿋꿋하고 의연한 행동 하나로 모든 것을 보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참신앙에 대해서 시시콜콜 다 물을 필요도 다 대답할 필요도 없습니다. 절대로 포기할 수 없고 절대로 타협할 수 없는 신앙은 말이 아닌 몸으로 보이면 됩니다. 

대머리인 분들에게는 조금 죄송하지만 유머이니까 용서하고 들어주세요. 대머리인 어떤 분의 고백입니다. "저는 머리카락 속에 빈터를 많이 가진 사람입니다. 공간이 많아서 늘 여유가 있는 사람이지요. 그런데 사람들이 자꾸 '머리와 이마의 경계선이 어디냐?'하고 묻곤 합니다. 여러분 궁금하지 않습니까? 사실 땀 닦는 데까지가 이마이고, 땀이 안 닦이는 데가 머리입니다. 다시 말해, 세수할 때 비누칠이 되는 데까지가 이마이고, 비누칠이 안 되는 곳이 머리입니다. 그리고 세면을 끝내고서 로션을 바르는 데 까지가 이마이고, 안 바르는 데가 머리입니다. 그런데 제가 최근 새로운 경계 구분법을 발견했습니다. 누군가 저에게 '야, 너 대머리지?'하고 물었을 때, 빨개지는 데까지가 이마이고 변화가 없는 곳이 머리인 것이지요. 이제 더 이상 제게 시시콜콜 묻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렇지요. 우리의 참신앙의 경계선도 시시콜콜 묻거나 답해서 입증될 성질이 아닙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도 느부갓네살 왕의 회유와 협박을 듣고서는 말이 아닌 행동으로 자기들의 신앙을 곧바로 보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터키의 한 산맥을 넘어가는 두루미 떼가 있습니다. 날면서도 연신 끽끽거리며 소리를 지르고 날아가는데 소리 때문에 독수리의 먹잇감이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하지만 나이가 든 노련한 두루미는 소리가 없다고 합니다. 특히 높은 산맥을 넘어갈 때면 일체 말하지 않고 조용히 넘어가서 독수리 떼를 피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침묵의 비결이 있습니다. 날기 전에 입에 돌을 하나 물고 떠난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신앙은 말에 있지 않고 행동과 능력에 있습니다. 우리 시대를 다원주의 시대 혹은 상대주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다양한 가치들이 다양하게 존재하는 것은 좋은 것이고 그 중에 어느 하나를 절대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주장입니다. 이러다보니 우리는 상황에 따라 항상 타협하는 믿음을 갖기 쉽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달랐습니다. 절대로 양보할 수 없고 타협할 수 없는 신앙의 지조가 분명했습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풀무불 속에 떨어진다고 해도 포기할 수 없는 신앙의 절개가 있었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만큼을 절대로 안 돼!" 하는 신앙의 지조가 있어야 합니다. 회유하고 협박하는 느부갓네살 왕을 향해서 세 친구는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하면서 단호한 태도를 보입니다. 우리도 세상의 유혹과 협박 앞에서 너무 쉽게 무너지고 둘러대는 값싼 신앙에서 벗어나 절대로 흔들림이 없는 신앙의 지조를 지켜야 할 것입니다. 

2단계: 하나님이 반드시 도우신다는 신앙   

그 다음에 다니엘의 세 친구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확고한 신앙이 있었습니다. 17절을 보세요.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무슨 말입니까? 만일 불 속에 던진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건져주신다는 확신이지요. 하나님이 원하시기만 한다면 이 풀무불 정도가 아니라 더 큰 위기 속에서도 자기들을 건져주신다고 믿은 것입니다. 

사람 사는 세상도 믿음이 필요하지요. 직원을 채용하기 위해 이력서도 보고 자기 소개서, 학력 증명서, 성적 증명서도 다 보고, 직접 인터뷰까지 해보지만 그것만 가지고서 그 사람을 어떻게 다 알 수 없습니다. 아무리 살펴봐도 알 수 없는 부분은 그냥 믿는 수밖에 없습니다. 같은 집에 사는 친 자식 친 형제 자매라고 해도 잘 모르는 판인데 생판 처음 보는 사람을 다 알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이렇게 더 이상 알 수 없는 부분은 그냥 믿어 버리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큰 믿음이 필요합니다. 사업에 실패했더라도 하나님이 일으켜 세워주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설사 파산 선고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다시 회복시켜주심을 믿어야 합니다. 불치병에 걸렸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살려주심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는 능치 못할 일이 없음을 믿고 하나님의 능력만 구하면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에게는 풀무불보다 더 큰 시련에 빠진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건져주심을 믿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런 확신이 여러분에게도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3단계: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 

세 친구의 믿음에서 가장 돋보이는 부분은 18절입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무슨 말입니까? 설령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풀무불에서 건져 내시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만 섬기고 금신상 앞에서는 절을 하지 않겠다는 신앙이지요. 

오늘 우리는 바로 이런 신앙,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실패해도, 넘어져도, 질병에 걸려도 여전히 하나님 한 분만 섬기겠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안 이루어져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따르겠습니다. 이런 한결같은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역시 세상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성공과 축복과 건강을 구합니다. 하지만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으로 기뻐하고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이 시간에 잠깐 참신앙과 미신의 차이를 생각해봅시다. 미신이란 샤머니즘이요 기복신앙인데 자신의 소원만 이루면 됩니다. 신에게 맛있는 음식이나 돈을 바쳐서 신을 달랜 뒤 자기가 바라는 소원을 잔뜩 늘어놓고 소원 성취만 되면 다 끝나는 것이지요. 신의 뜻이 무엇인지를 묻는 일이나 신의 뜻대로 사는 삶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무속주의 미신을 무(無)윤리적 종교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참신앙은 다릅니다. 내 소원을 이루는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의 뜻을 묻고 알고 그 뜻대로 살기 위하여 내 자신이 변화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미신은 음식이나 돈을 바쳐 신의 마음을 달래고 변화시켜 내 소원과 욕심을 성취시키는데 관심이 있다면 하나님에 대한 참신앙은 하나님의 뜻을 안 뒤 먼저 내가 변화하고자 하는 신앙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이 미신이 아니라 참신앙이 되려면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이 되어야만 합니다. "설령 실패한 나를 일으켜 세우시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질병에 걸린 나를 회복시켜주시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변함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감사드리겠습니다."하는 한결같은 신앙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바로 이런 신앙이 세 친구의 신앙이었고 예수님의 신앙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간절히 기도하시던 중 당신의 뜻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먼저 앞세우는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막 14: 36). 다니엘의 세 친구나 예수님처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시련과 위기가 찾아온다고 할지라도 변함없이 주님을 의지하고 신뢰하시길 바랍니다. 

느부갓네살을 변화시킨 세 친구의 신앙 

참된 신앙은 반드시 주변을 변화시키게 되어 있습니다. 풀무불의 위기 앞에서도 타협하지 않던 세 친구는 평소보다 7배나 더 달군 화덕 속에 던져졌습니다. 세 친구를 붙든 간수가 그 불꽃에 타 죽을 정도로 화덕은 뜨거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주셔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살아났습니다. 

이 놀라운 광경을 지켜본 느부갓네살 왕의 심령에 감동이 왔습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외칩니다. 26절을 보세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나와서 이리로 오라 하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불 가운데에서 나온지라." 

28-29절도 보세요. "느부갓네살이 말하여 이르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가 그 천사를 보내사 자기를 의뢰하고 그들의 몸을 바쳐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 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 그러므로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니 각 백성과 각 나라와 각 언어를 말하는 자가 모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께 경솔히 말하거든 그 몸을 쪼개고 그 집을 거름터로 삼을지니 이는 이같이 사람을 구원할 다른 신이 없음이니라 하더라." 

세 친구는 풀무불에서 살아났습니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그들의 위대한 신앙 때문에 느부갓네살 왕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까지 변화시켰고 하나님을 인정하게 만들었으며 찬양하게 만들었습니다. 혹 여러분 가운데 다니엘의 세 친구처럼 큰 환난과 위기를 만난 분들이 계십니까? 

이때야말로 여러분의 진정한 믿음을 시험해 입증해 보일 때입니다. 어떤 순간에도 주님이 일으켜 세워주심을 믿고 흔들림이 없는 참 그리스도인이 되시길 바랍니다. 더욱이 설령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일으켜 세워주시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주님을 신뢰하고 찬양하고 감사한다면 바로 그 믿음을 주께서 아름답게 여기실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놀라운 믿음으로 주변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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