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종려주일] 나귀 새끼 타신 예수님 (눅 19:28~40)

  • 잡초 잡초
  • 772
  • 0

첨부 1


나귀 새끼 타신 예수님  (눅 19:28~40)


어느 정신병원에서 정신과 의사가 환자들을 한 사람씩 불러서 상담을 했습니다. 상담을 하던 의사가 한 환자의 이름을 불렀는데 환자가 대답이 없는 것입니다. 의사가 다시 한번 환자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래도 대답이 없습니다. 의사가 환자 대기실에 들어가 봤더니 그 환자가 다른 환자들과 어울리고 있었습니다. 의사가 ‘왜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데도 대답을 하지 않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환자가 정색을 하고 의사에게 ‘이제부터는 나를 나폴레옹 장군이라고 부르시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의사가 ‘왜 당신의 이름을 나폴레옹이라고 바꾸었습니까? 그 이름을 누가 지어 주었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환자는 ‘지난 밤에 하나님이 나에게 나타나셔서 이제는 너의 이름을 나폴레옹이라고 부르라’ 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 옆에 누워있던 그 말을 듣고 있던 다른 정신병 환자가 벌떡 일어나더니 그 환자에게 ‘내가 언제 너의 이름을 나폴레옹으로 부르라고 말을 했단 말이냐?’ 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착각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잘못된 착각은 자신만이 아니라 주변의 모든 사람을 힘들게 만들고 어렵게 만듭니다. 

미국의 레이건 전대통령이 착각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자주 사용했던 유머가 있습니다. 한 농부가 산속에서 거대한 붉은 곰을 만났습니다. 농부는 공포에 질려 그 자리에 털썩 주저 앉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간절히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이 곰의 마음을 순하게 변화시켜 주세요’ 농부가 한참 기도를 하고 눈을 떴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곰이 마주 앉아서 기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농부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빨리 내 기도에 응답을 하시다니··’ 농부는 자신의 기도가 빨리 응답된 것에 크게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농부가 곰이 하는 기도를 가만히 들어 보고 기겁을 하고 말았습니다. 곰은 ‘하나님 저에게 이렇게 맛있는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식사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레이건은 ‘사람들 속마음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뜻으로 이 농담을 자주 사용했습니다. 사람들은 가끔 다른 사람들 모두가 자신과 똑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그것이 착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실망과 좌절을 하게 됩니다. 

본문에는 착각을 한 많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입니다. 우리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신 날을 기억하면서 종려주일로 지킵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본문에 기록된 것처럼 군중들의 호응이 대단했습니다. 수백만 명의 군중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호산나’ 라고 외치는 그 함성으로 예루살렘성이 떠나갈 것 같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여러 부류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한결같이 예수님에 대해 착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기뻐하고 환호하는 사람들은 그들대로, 분노와 두려움 속에서 긴장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대로 착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가장 눈에 띄는 사람들은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옆과 뒤에서 호위하며 따랐습니다. 그들의 입은 환한 웃음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놀라운 능력을 일으키셔서 헤롯왕과 로마 군사들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자신들은 최고 권력의 자리에 오 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제자들의 모습은 온 세상을 가진 사람들처럼 의기양양 했습니다. 그렇게 의기양양하게 예수님의 뒤를 따르던 제자들이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님을 보고는 자신들이 착각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길로 모든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목이 터져라 호산나를 외친던 군중들도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권위있는 말씀으로 가르치셨던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놀라운 기적과 이적을 행하시며 온갖 병든 자들을 낫게 하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명을 먹이셨고, 갈릴리 호수에 풍랑이 일어났을 때 풍랑을 꾸짖어 잔잔케 하신 능력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헤롯왕과 유대 지도자들을 향해 ‘이 독사의 자식들아, 회칠한 무덤들아’라고 외치시는 모습에서 부정과 부패로 찌든 사회 지도자들에게 호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군중들은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정치적으로 해방시키고 자유와 번영을 가져다 줄 힘있는 메시야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군중들도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힘없이 십자가를 지시고 죽음을 택하시자 자신들이 착각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부터 군중들은 갑자기 돌변해서 예수님을 향해 야유와 욕설을 퍼붓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라고 분노의 함성을 질렀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실 때 바리새인들이 나옵니다. 그리고 전면에 등장하지는 않지만 헤롯왕과 빌라도 총독 그리고 로마 병사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시는 모습을 보고 두려워 떨었습니다. 헤롯왕과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권력의 자리에서 쫓겨날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총독 빌라도와 로마 병사들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군중들이 반란을 일으켜 폭동이 일어날 것을 걱정했습니다. 헤롯왕도, 총독 빌라도도 자신들의 권력의 기득권을 중심으로 예수님에 대해 착각을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입성하실 때 긴장했고, 군중들의 반응에 놀랐습니다. 그들은 대책을 세우느라 분주했습니다. 예수님을 처음 다룰 때는 조심했습니다. 그러나 재판에 진행되면서 예수님의 온순하신 모습과 예수님을 향한 군중들의 여론이 변하자 그들은 예수님을 함부로 다루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을 조롱하고 멸시했습니다.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제자는 제자대로, 군중은 군중대로, 헤롯은 헤롯대로, 빌라도는 빌라도대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그들대로 모두가 착각에 빠졌었습니다.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착각에 빠진 이유가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만 그 중의 하나가 자기 중심적인 이기주의입니다. 모든 것을 다 자기 중심적으로 보기 시작할 때 착각이 일어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볼 때 자기들의 욕심을 중심으로 보았습니다. 군중들도 자신들의 욕심을 중심으로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헤롯왕도 빌라도 총독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자기중심적인 이기적인 생각을 가지고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공군 비행사들이 곡예비행을 할 때는 밖을 내다보고 하는 것이 아니라 조종사 앞에 놓여 있는 계기판을 보고 한다고 합니다. 앞을 보고 조종을 하다보면 비행기가 뒤집어지고 엎어지는 순간에 착각을 일으켜 공중으로 올라가야 할 때 땅으로 곤두박질하여 생명을 잃게 된다고 합니다. 자기의 주관적인 판단과 주변 환경을 중심으로 비행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비행기의 정확한 위치와 비행해야 할 방향을 정확하게 제시하는 계기판을 중심으로 비행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사고 없이 계획대로 비행을 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행사가 공중 곡예비행을 할 때 계기판을 보지 않고 자기 주관과 주변 환경에 따라 조종하는 것과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착각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기심을 중심으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판단하고 반응했습니다.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향해 호산나라고 외치던 환호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라는 외침으로 바뀐 것도 그들의 이기심에 의한 착각의 결과입니다.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으로 인해 두려워 떨던 헤롯왕과 빌라도 총독이 예수님을 조롱하고 비웃는 모습으로 변한 것도 그들의 이기심에 의한 착각의 결론입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자기 중심으로 이해하고 해석하였기에 변덕을 부렸습니다. 

오늘 본문에 예루살렘성 안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 중심의 이기심으로 인해 모두가 요동 칠 때 처음부터 끝까지 요동하지 않는 분이 계십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군중들이 호산나를 외치며 자신들의 겉옷을 벗어 길가에 깔며 환호할 때에도 우쭐해 하거나 요동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군중들이 갑자가 돌변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라’ 고 고함을 지르며 분노를 표현할 때에도 두려워 떨거나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헤롯왕과 총독 빌라도가 두려운 마음으로 재판에 임할 때에도, 재판을 하던 중에 예수님을 조롱하고 멸시할 때에도 요동치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수시로 변하는 주변 환경과 수시로 바뀌는 사람들에게 시선을 고정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한 곳에 당신의 시선을 고정시키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바램과 하나님의 말씀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셨습니다. 결국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면서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은 ‘다 이루었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당신의 몸으로 그대로 다 이루었다는 말입니다. 말씀의 계기판에서 눈을 떼지 않고 끝까지 그 목적을 이루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시면서 나귀 새끼를 타심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당신의 심정을 그대로 표현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등에 태우고 후들거리는 다리를 추스르며 힘겹게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다하기 위해 예루살렘성을 향해 올라가는 나귀 새끼의 모습은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나귀는 겸손과 평화의 상징입니다. 스가랴서 9장 9절에 보면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심은 바로 스가랴의 예언을 이루시기 위함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은 만왕의 왕이심에도 불구하고 군림하지 않으시고 겸손한 섬김으로 구원을 이루심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나귀는 누구나 편안하게 가까이 할 수 있는 동물이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은 백마를 타고 예루살렘성에 입성했었습니다. 백말은 권위와 힘을 상징합니다. 사람들은 백말이 지니고 있는 권위에 눌려 쉽게 접근할 수가 없습니다. 나귀는 황소나 염소처럼 뿔을 가지고 공격하는 동물도 아닙니다. 나귀는 온순하여 누구든지 쉽게 가까이 할 수 있고 다룰 수 있는 동물입니다. 나귀는 어린 아이에서부터 연약한 여인들도 쉽게 다가설 수 있는 동물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1장 29절에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에게는 누구든지 편하고 쉽게 나올 수가 있었습니다. 제 아무리 추하고 더러운 죄인들도 가까이 나올 수 있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도, 병든 사람도 예수님께 쉽게 다가갔습니다. 세상에서 실패하고 소외된 사람들도 예수님께 나올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당신에게로 초대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쉽게 다가 올 수 있도록 나귀 새끼를 타고 온유한 모습으로 다가 오셨습니다. 

나귀는 팔레스틴 지역에서 많이 사용되는 동물입니다. 나귀는 말이 먹는 먹이의 사분의 일밖에 먹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주인의 교통수단이었고 모든 짐을 날랐고 농사일도 했습니다. 나귀의 몸집은 왜소하지만 무거운 짐을 지고도 험한 길도 넘어지지 않고 잘 다녔습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모든 사람을 초대하십니다. 예수님은 인류가 지고 가는 험한 죄의 짐을 대신 지시고 죽음의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십니다. 어린 나귀 새끼가 예수님을 등에 업고 힘에 부쳐 비틀거리면서도 그 험한 길을 끝까지 걸어 예루살렘성에 입성하는 모습은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실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실 때 탄 나귀 새끼는 묵묵히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온유하심과 겸손하심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오늘 2009년도 고난 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고난 주간에 새벽기도회에 참여하며, 금식 기도를 하면서, 말씀을 묵상하고 복기하면서 예수님을 태우고 예루살렘성의 험한 길을 오르는 나귀 새끼의 겸손과 온유함의 영성을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귀 새끼의 온유와 겸손의 영성을 배워 예수님의 십자가의 뒤를 쫓을 때 십자가 고난 뒤에 있는 부활의 기쁨과 감격이 있을 줄 믿습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등에 업고 묵묵히 예루살렘성을 향하는 나귀 새끼의 겸손과 온유의 영성이 우리 모두의 영성이 되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