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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누가 인생의 비바람을 잔잔케 할 수 있나 (눅 8: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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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인생의 비바람을 잔잔케 할 수 있나 (눅 8:22~25)


『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매 이 에 떠나 행선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 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 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 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 제자들에게 이르 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그들이 두려워하고 놀랍게 여겨 서로 말하되 그가 누 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 하더라』(눅 8:22-25)

갈릴리 호수는 유대인들이 보기에 너무 크고 넓어서 ‘바다’라고 불렀습니다. 북쪽 골란고원과 백년설을 자랑하는 높은 헐몬산에서 내려오는 물줄기가 많아 물량이 풍성하고 맑아 물고기가 많이 살고 있는 특별한 호수입니다(약 153종류의 물고기가 서식했다고 한다). 

이름도 갈릴리바다, 게네사렛 호수, 디베랴 바다 등 여러 가지로 불려졌습니다. 예수님 당시만 해도 갈릴리 호수 주변에는 큰 도시로 이어지는 도로들이 잘 발달되어 있어서 갈릴리 호수가의 마을들은 상업이 발전하여 다른 마을보다 풍요로웠습니다. 또 호수에는 물고기가 많아서 고기 잡는 어부들 꽤 많았습니다. 우선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 요한과 야고보 형제가 모두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이였습니다.

그런데 갈릴리 호수는 북쪽의 헐몬산 기슭을 타고 내려오는 강한 바람 때문에 급격한 기류변화로 폭풍우를 동반한 풍랑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한 말씀도 풍랑을 만난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제자들이 예수님을 모시고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큰 광풍이 불어 닥치며 배가 파도에 밀려나기 시작했습니다. 제자들이 여러 명이 있었으니 웬만한 광풍쯤이야 이겨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경험해본 것과는 달리 심상치 않은 광풍이었습니다. 제자들의 힘으로는 배를 유지하지 못할 만큼 거세였습니다. 배를 타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릅니다. 폭풍우 가운데 파도에 밀려 추풍낙엽처럼 요동치는 배안에 있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무서운지는 경험한 사람만 압니다.

제주도에서 공군군목으로 근무할 때 목포에서 3등 여객선을 타고 가다 죽을 뻔했습니다. 한번 파도가 요동을 치니 배멀미와 함께 구토가 일어나는데 죽을 맛입니다. 서로 부등켜 안고 뒹구는데 그런 고통과 공포는 처음이었습니다. 한참이나 요동을 친 다음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공군대위 계급장을 붙인 젊은 장교가 40대 후반의 어느 여인 두 종아리를 부등켜 안고 있었습니다. 새우젓동이를 안고 가는 장사꾼 아낙네들이 여러 명 탔었는데 그일 이후에 제주도에서는 새우젓을 멀리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의 힘과 기술로는 도저히 풍랑에서 살아날 수 없음을 깨닫고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Master, Master, We are going to down?)

예수님은 즉시 일어나셔서 바람과 파도를 꾸짖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니라.”

다른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꾸짖으신 말씀, “잠잠하라. 고요하라”는 호령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람과 물결을 꾸짖어 잠잠케 한 예수님은 제자들을 꾸짖으셨습니다.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Where is your faith?)

믿음만 있으면 바람과 파도를 잔잔케 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광경을 지켜본 사람들이 예수님의 권위에 놀랐습니다. 두려웠습니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순종켸 하는가?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서 몇 가지 중요한 신앙적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째로 인생은 바다를 항해하는 배와 같습니다. 배는 순풍에 돛을 달고 평안하게 항해를 할 때도 있지만 느닷없이 큰 풍랑에 휩싸일 때도 있습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근심걱정 없이 평안히 지낼 때도 있으나 예기치 않던 인생의 광풍이 몰아닥칠 때가 있습니다. 비바람 몰아쳐 추위와 굶주림 속에 벌벌 떨기도 하고, 천리길 깊은 바다 속에 빠져 숨도 쉬지 못하는 채 발버둥을 칠 때도 있습니다. 

그 광풍이 질병일 수도 있고, 사고일 수도 있고, 사업의 실패일 수도 있습니다. 동료나 친구의 모함과 배신일 수도 있습니다. 자식일 수도 있고, 부부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이 광풍은 글자 그대로 미친바람이니 예고나 경고도 없이 어느 날 느닷없이 닥쳐옵니다. 특정한 사람에게만 닥치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불특정 다수에게 다가옵니다. 

지난 번 제가 당한 교통사고도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났습니다. 다행히 저는 목숨을 건져주셨으나 1년에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목숨은 살아있어도 중증장애를 얻어 생업을 포기한 채 휠체어에 의지하며 살거나, 평생 병상에 누워 있어야 하는 중상자만도 하루 평균 35-40여명이나 된다니 끔찍한 일입니다. 가끔 TV나 신문잡지에 보면 어느 날 갑자기 교통사고로 불구자가 된다든지, 회사가 부도가 나 거리로 쫒겨난다든지, 직장을 잃어 끝없이 방황하며 처량한 인생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너무 불쌍합니다. 

어느 날 병원에 갔더니 “당신은 암입니다.” “당신은 백혈병입니다.” “당신은--병입니다.”라는 청천벽력 같은 진단을 받습니다. 동료가 배반하여 수십 년간 공들인 회사가 무너집니다. 아내를 잃습니다. 남편을 잃습니다. 자식을 잃습니다. 전혀 내 인생에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해 본적이 없는 일들이 닥칠 수 있습니다. 그때 밀려드는 공포와 두려움은 이루 말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기억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학교 다닐 때 한 주일에 하루씩 원호처병원에 나가 봉사활동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는 월남전에 처음 파병했을 때라 부상병들이 많이 후송되었습니다. 20대 후반의 젊은 병사가 다리에 총상을 입고 후송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브라운 디씨즈라 하여 총상을 입은 자리가 노랗게 썩어가는 병에 걸렸습니다. 할 수 없이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았습니다. 두 다리를 다 잘랐습니다. 마취에서 깨어난 병사는 갑자기 두 다리가 사라진 것을 보고는 “내 다리, 내 다리 내놔!”라고 소리를 지르며 몸부림을 치는데 누구도 제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날 밤 침대 곁에서 그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자는 척 하던 그가 제 손을 꽉 잡더니 “난 이제 어떻게 살아요. 나 때문에 고생하신 늙으신 부모님 잘 모시려 했는데 이 몸으로 어떻게 살아요.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전생에 무슨 죄를 그렇게 많이 지었나요?” 피를 토하듯 탄식을 하던 그 청년이 늘 기억에 있습니다. “당신은 나라를 위해 싸우다 다리를 잃었으니 장힌 일에 충성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생명을 살려주셨으니 살길도 주실 것입니다. 남은 생애를 혼자 살지 말고 꼭 예수님과 같이 사세요.” 순진했던 저도 그의 손을 잡고 함께 울었습니다. 그분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궁금합니다.

여기서 꼭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산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크고 작은 인생의 모진 비바람이 불어 닥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나만 당하는 것이 아니요, 산 사람은 누구나 당하고 있습니다. 너무 억울해 하거나 분노하지 마십시오. 

둘째로는 인생의 모진 비바람에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을 위해 예수님께서 우리 곁에 찾아오셨음을 깨닫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신 후 활동무대는 거의 병든 자, 소외된 자, 억눌린 자, 고통당하는 자들의 삶의 현장이었습니다. 문등병자들을 고쳐주시고, 눈먼 소경들의 눈을 뜨게 하시고, 중풍병자를 일으켜 세워주시고, 귀신들린 자들을 온전케 하셨습니다. 과부와 고아, 그리고 어린이들과 여인들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이는 곧 예수님은 인생의 모진 비바람 속에서 괴로움과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의 곁에 있기를 원하신다는 상징적 삶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광풍에 뒤집힐 듯, 파도에 밀리는 배 안에는 두려움에 떠는 제자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함께 계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중에 일어난 모든 사건은 모두 세심한 계획 하에 있었던 일들로 우리에게 신앙적 교훈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혹시 지금 너무 괴롭고 고통스럽습니까? 당신 곁에 예수님이 계심을 잊지 마십시오.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인이 스스로 인생을 포기하고 술과 마약으로 자해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멀리 사는 친구가 “그렇게 자포자기하며 괴로워만 하지 말고 주변에 교회가 있으면 목사님을 만나보라”고 권면했습니다. 

어느 날 낯선 전화를 받고 커피하우스에 나갔습니다. 언뜻 보기에도 자신에게 실망하고 포기한 인생을 사는 여인 같았습니다. 두어 시간 그 여인의 얘기를 다 듣고 물었습니다. “지금은 곁에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처음에는 형제, 일가친척들이 동정심을 보여주었으나 지금은 다 외면하고 있습니다. 나 혼자입니다.” 얼굴근육이 떨렸습니다. 

“지금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당신 곁에 우리 주님이 계십니다. 나는 도울 일이 별로 없으나 주님께 도움을 청하면 도와주실 것입니다.” 
“어떻게 도움을 청하나요?” 
“기도드리는 것입니다. 그냥 눈을 감고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세요. 눈 뜨고 해도 됩니다. 당신 곁에 계시는 주님께 도움을 청하십시오.” 

몇 달 동안 소식이 없더니 다시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이제 세상은 믿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만은 나를 배신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제부터 하나님을 믿으며 살렵니다.” 굳은 각오로 결심한 듯 했습니다. 지금도 든든한 교회의 기둥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즐겨 읽는 가이드포스트 편집장인 아더 고든이라는 유명한 문필가가 있습니다. 그분이 한때 심각한 우울증에 빠졌었답니다. 전문의사와 상담을 했더니 어렸을 때 즐기며 놀았던 장소가 어디였느냐고 묻더랍니다. 고향의 바닷가로 했더니 거기 가서 자기가 준 처방전을 차례로 열며 치료과정을 밟으라고 했답니다. 첫째 둘째 셋째를 열어 실행을 하고 넷째 처방전을 열어보니 염려와 근심과 걱정거리들을 바닷가 모래밭에 다 쓰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는 쭈그리고 앉아 열심히 써 놓았습니다. 글자가 무너질까봐 깊이 파서 써내려 갔습니다. 거의 다 썼을 무렵 갑자기 큰 파도가 밀려 덮치니 지금까지 써 놓은 모든 글자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처음에는 당황했으나 이내 의사의 마음을 읽게 되었습니다. 내 딴에는 그렇게 고통스럽고 근심되고 걱정스러운 일들이지만 누군가가 쓸어버리면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는 것이거늘 공연히 붙들고 인생을 허비했음을 깨닫고 하나님께 무릎을 꿇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제 곁에 오셔서 이렇게 치워주시려 하는데 제가 몰랐습니다.” 몰랐던 죄를 회개하니 마음이 평안해지며 우울증이 사라졌답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우리의 질고를 스스로 담당하시기 위해 십자가의 죽음을 택하셨습니다. 양손과 발에 대못을 박고 피 한 방울 남김없이 다 쏟으시는 고통을 참으시며 목숨을 바쳤습니다. 우리를 질고에서 구속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성경이 모두 감동적인 말씀으로 가득차 있으나 사 53장을 읽노라면 이 대속의 진리를 노래하고 있어서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5-6)

저희 어머님이 9순을 넘기시면서 건강이 갑자기 악화되셨습니다. 힘이 없어 엉덩방아를 찧으셨는데 갈비뼈 3개가 골절되시더니 그 이후로 누워만 계시고 가끔 정신을 놓으시는 것 같습니다. 여동생들이 교대로 당번을 서면서 어머님과 함께 잠을 자고 있다는 전화를 받고 며칠 전에 다녀왔습니다. 머리가 하얗게 쉬신 할머니가 되셔서 작아진 몸집을 모로 누우신 채 새근새근 주무시는 어머님의 얼굴을 들여다보니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젊은 날 장정이 짊어져도 힘들 쌀가마며, 나뭇짐을 거뜬히 지고 100리를 마다 않고 다니시던 어머님의 늙으신 모습이 너무 불쌍하기만 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어머니는 전능자였습니다. 무엇이든지 요구하면 어머니는 해주셨습니다. 학교 다닐 때의 어머니는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부자였습니다. 제가 달라는 돈을 끝내는 구해주셨습니다. 절대적인 보호자요, 펜클럽 대장이셨습니다. 자식의 허물을 다 덮으시고 언제나 자랑만 하셨습니다. 훗날 장성해보니 자식을 위해 그렇게 하시느라 정작 어머니의 삶은 다 희생하셨음을 깨달았습니다. 손바닥은 굳은살이 박혀 마른 장작개비 같고, 손등은 오래된 고목 껍질처럼 거칠기만 했습니다. 머리카락은 영양분을 다 잃은 백발이 되어 힘없이 나부끼고 얼굴에는 잔주름이 하나 가득히 덮여 있는 불쌍한 할머니에 불과 했습니다. 이제 쪼그라진 몸이 되어 혼자 힘으로는 일어설 수도 없는 불쌍하신 우리 어머니. 인정머리 없는 세월 앞에서 어떻게 보상해 드릴수도 없는 가엾은 우리 어머니. 그런데도 자식걱정에 빈 가슴이 없는 늙으신 어머니이십니다. 지금이라도 자식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몸을 내던지실 가장 용감한 분입니다. 감히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의 이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나타난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어머니의 한없이 크고 따뜻한 사랑 속에서 하나님의 진한 사랑을 발견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사랑은 이보다 더 큽니다. 십자가의 사랑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그 고통이 너무 크기에 “아버지여, 이 쓴잔이 가능하면 그냥 지나가게 해 달라”고 간청하시던 예수님은 끝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울부짖으시면서도 기꺼이 우리의 죄값을 짊어지셨습니다. 그 사랑은 한이 없으십니다. 

우리에게 불어 닥치는 인생의 모진 비바람이 아무리 거세다 해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어머니처럼 언제라도 우리를 위해서라면 달려오셔서 우리를 지켜 주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옛날 예루살렘 거리에서 종려나무를 꺾어들고 “호산나” 외치며 예수님의 입성을 환영하던 군중들의 가슴으로 예수님을 영접합시다. 그리고 슬플 때나 기쁠 때나, 괴로울 때나, 즐거울 때나, 고통당할 때나, 평안할 때나 인생의 풍랑을 잔잔케 하신 그 예수님,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 던지신 그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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