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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찬식 (고전 11: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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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식 (고전 11:23~30)

 
주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새 생명을 주시고, 성찬을 통해 새 생명이 유지되며 자랄 수 있도록 영적 양식을 공급하십니다. 오늘은 ‘은혜의 방편’인 ‘성례’(聖禮)중에서 성찬에 관하여 함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바울 사도는 성찬을 “주께 받은 것”이며,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만드신 것으로 소개합니다(23). 그 밤은 예수께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신 밤이며, 제자에게 배반당하신 밤입니다. 다음 날 십자가에 달리셨지요. 이처럼 일련의 고난들이 기다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식사하기를 원하고 원하셨습니다(눅 22:15). 유월절에 희생된 어린 양이 상징하던 대속의 죽음을 주님께서 성취하게 되셨으므로(고전 5:7), 교회로 하여금 재림 때까지 이를 기념할 성례로 제정하려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식사 중에 떡을 들어 감사하신 후에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셨습니다. 또 잔을 들어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습니다(24-25). 유월절의 떡은 애굽에서의 고난을 상징했으나, 예수님은 당신님의 대속하신 고난의 상징으로 재해석하셨습니다. 포도주는 죄인들을 대신하여 쏟으신 그분의 피를 상징합니다. 바울 사도는 이 떡과 잔을 먹고 마시는 것을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으로 해석했습니다(26).

성찬도 교회에 주신 은혜의 방편이므로 교회가 공적으로 모이는 곳에서 교회의 권위로 시행된다는 점은 세례와 동일합니다. 말씀을 돕는 성례이므로 말씀을 떠나서는 성례가 될 수 없고, 말씀을 맡은 목회자가 집례 한다는 점도 동일합니다. 그러나 참여 대상은 다릅니다. 세례는 부모 중 한 명이 성도이면 그 자녀도 언약의 자녀로서 참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찬은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28)라는 제한이 있습니다. 성도라 할지라도 자신을 살필 수 있는 연령에 도달하지 못한 유아나 자기를 살펴서 결함이 있는 성도는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세례는 중생과 관련된 성례이므로 일생에 단 한번만 행하면 됩니다. 반면에 성찬은 주님의 대속 죽음을 주께서 재림하시기까지 기념하기 위한 성례이므로 기념이 된다면 자주 행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자주 행하다보면 기념할 내용은 사라지고 경외심 없이 형식만 행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분명하게 경고합니다.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27-30).

성경은 주의 떡과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것을 죄로 규정하고 있으며, 실제로 고린도 교회는 그에 상응하는 심판을 받은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성찬에 사용되는 떡과 포도주 자체에 신비한 효력이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떡과 포도주가 성찬 예식에서 주님의 살과 피로 변한 것도 아니고, 주님의 살과 피의 본질이 그것들 안에 함께 또는 밑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물리적으로는 여전히 떡과 포도주이지만, 성찬 참여자들은 단순히 음식과 접촉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떡과 포도주라는 상징을 통해 당신께서 구속하신 교회에 영적 양식을 공급하시는 주님의 신령한 은혜와 접촉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합당치 못한 태도는 죄가 되었습니다.

주께서 성찬을 베푸실 때 제자들이 무릎을 꿇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관습대로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서 성찬을 받았겠지요. 그렇다면 주의 떡과 잔을 ‘합당하게’ 먹고 마신다는 것은 소위 거룩한(?) 외적인 태도와 관련되어 있지 않습니다. 말씀을 보면 합당함은 “자기를 살피”는 것, “주의 몸을 분변”하여 참여하는 것에 관련됩니다. 즉, 성찬이 표(sign)하고 인치는 것(seal) 것을 분별하여 알고서 감사하며 참여하는 내적인 태도에 초점이 있습니다. 마땅히 기념해야 할 의미가 무시되거나 짓밟히지 않도록 자기를 살피는 것이 합당한 자세입니다.

성찬은 첫째로 성도를 위한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으심을 표합니다. 예수님은 떡과 포도주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몸이며 “너희를 위하여 붓는” 피라고 하셨습니다(눅 22:19- 20). 그분의 몸이 찢겨지고 피가 쏟아진 것은 도무지 죄책과 오염에서 벗어날 수 없던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의 죄가 그분의 몸으로 찢기게 했으며, 나의 죄가 그분의 피로 쏟아지게 만들었습니다. 이 의미를 생각하면 성찬에 참여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살해한 죄 자체에 대한 거룩한 분노와 저항감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죄를 마음 품고 회개할 마음도 없이 성찬에 참여할 수가 없지요.

둘째로 성찬은 성도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동참하고 있음을 표합니다. 중생한 자는 그리스도와 신비하게 연합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께서 성취하신 의가 우리의 것으로 간주되고, 우리의 죄는 그분의 것처럼 간주됩니다. 이 때문에 바울 사도는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했고(갈 2:20),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사실을 증언합니다(롬 6:6). 이 신비한 연합은 볼 수 없는 것이지만, 떡과 포도주가 우리 몸과 연합되는 상징을 통해 볼 수 있도록 표하는 역할을 합니다.

셋째로, 성찬은 영적인 양육과 성장의 표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도의 영적 생명을 유지시키는 “생명의 떡”이십니다(요 6:48). 예수님은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요 6:51)고 약속하셨고,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 6:55)고도 말씀하셨습니다. 떡과 포도주가 육체의 생명을 유지하며 자라게 하는 것처럼, 성도의 영적 생명을 유지하며 자라도록 하는 것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성찬은 이 약속의 말씀과 진리를 시각적으로 보며 음미하게 해줍니다. 또한 주께서 다시 오시기까지 계속해서 영적 양식을 공급받고 있음을 표해줍니다. 그러므로 성찬에 참여하는 성도는 바울 사도처럼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라고 고백하는 사람이며, 그리스도를 배고파하고 그리스도를 목말라 하는 사람입니다.

넷째로, 성찬은 한 떡과 잔에 참여함으로서 성도가 연합되어 있음을 표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고전 10:16-17)고 했습니다. 사도 신경에서 성도가 서로 교통(communion)함을 믿는다는 고백의 의미가 이것입니다.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교제 혹은 친교(fellowship)의 의미와는 차이가 있지요.

때때로 우리가 처한 곤란한 현실들은 신앙이 흔들리도록 합니다. 나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의심하게도 합니다. 그리스도를 신앙함이 현실적으로 무슨 유익이 있는지 회의에 빠지게도 합니다. 죄 앞에서 너무나 연약하고 무능한 자신을 발견할 때, 당면한 문제들로 장래가 불안하고 염려가 끊이지 않을 때, 그리스도는 내 문제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져 계신 분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말씀을 붙들 힘마저 없어서 혼자 외로워하고 괴로워하고 몸부림칩니다. 그럴 때에 성찬은 말씀을 보조하는 은혜의 방편으로서 대단히 소중하게 작용합니다. 합당한 참여자에게 성찬은 단지 과거 사건을 기념하는 정신적인 회상이나 심리적인 체험이 아닙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방편이 됩니다.

예수님은 내가 연약하며 죄인일 때에, 심지어 원수같이 행할 때에 나를 위해 죽으심으로 우리에 대한 그분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롬 5:6, 8, 10). 성찬은 찢어지는 떡과 쏟아지는 포도주를 통해 이 구속적 사랑을 바라보며 인을 치게 합니다. 또한 성찬에 참여하는 성도는 그분께서 성취하신 복음적 은혜를 받을 수 있음을 보증합니다. 여전히 나의 연약함과 죄인 됨이 근절되지 않아서 마귀가 정죄하고 송사할지라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결코 정죄 받지 않는 기쁨을 현재적으로 누리게 되지요(롬 8:1). 또한 지금도 영의 양식을 계속 공급하심으로써 하나님 백성으로 살아갈 힘을 주시며 자라게 하신다는 진리를, 떡과 포도주를 먹음으로써 확신하게 되지요. 그리고 성찬은 주님께 대한 순종과 충성을 새롭게 표하고 인을 치게 합니다.

중생은 본질적으로 수동적입니다. 따라서 중생과 관련된 성례인 세례를 받는 자는 수동적으로 참여하게 됩니다. 하지만 성찬과 관계된 말씀들을 보면 ‘살피고, 분변하고, 받고, 먹고, 마시고, 행하고, 기념하고’ 등 수찬자의 능동적인 참여를 명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명령들은 눈과 머리가 아닌 전 존재로 반응할 것을 요청합니다. 성찬에 있어서의 수동성은 행할수록 나쁜 면역성만 생겨서 기념되지 못하게 만듭니다. 반면에 성찬이 의미하는 바를 분변하여 믿고 받으면, 육신의 감각으로는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실 뿐이지만, 행할수록 그 상징들 안에 포함된 주님의 신령한 약속들을 실제로 풍성히 받습니다.

칼빈은 성찬에 믿음으로 참여할 것을 강조매우 강조했습니다. “나는 믿음으로 맛보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의 살을 먹을 수 없다고 본다”고 했고, 어거스틴의 말을 빌려서 “사람들은 믿음의 그릇으로 담을 수 있는 정도밖에는 이 성찬에서 얻어가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성찬을 통해 나를 위해 살이 찢기시고 나를 위해 피를 쏟으시는 주님을 믿음의 눈으로 보는 사람과 그냥 습관으로 참여하는 사람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육신의 입만 준비한 사람과 영적인 입을 준비한 사람은 함께 성찬에 참여할지라도 그 받는 바가 다를 것입니다.

떡과 포도주는 상징이지만 성찬의 은혜는 상징적으로 주어지지 않고 실제로 주어집니다. 이는 주님께서 성찬의 자리에 상징적으로만 계신 것이 아님과 같습니다. 승천하신 후 그분의 몸은 재림하시기까지 하늘에 계시므로 육체적으로 임재하지는 않습니다. 영적으로 임재하시지요. 하지만 실제로 임재입니다. 매월 성찬이 행해질 때마다 믿음으로 받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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