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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 26:3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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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 26:36~46)


초등학교에 다닐 때 '일과표'라는 것을 만들어 본 기억이 다들 있으실 것입니다.
백지에 커다란 동그라미를 하나 그려놓고 그것을 여러 개의 부채꼴 모양으로 갈라놓고서 그것들 안에다 하루의 일과들을 이것저것 적어 놓은 것 말입니다.
그리고 그 어떤 초등학생이 만들어도 그런 일과표에는 기상과 세수, 아침 식사, 등교 및 파교, 노는 시간, 자습, 그리고 취침 시간 같은 것들이 반드시 포함되어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공생애를 사시던 기간의 하루하루를 만약에 그런 일과표로 만들어 본다면, 식사나 취침 등을 제외하고 거기에 꼭 들어 있을 만한 필수적인 일과가 무엇이었을 것 같습니까?
물론 거의 매일 말씀을 가르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대중 앞에서 설교하지 않고 보내신 날들도 전혀 없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병을 고쳐 주신 일도 물론 부지기수였을 것이지만 그것도 단 하루도 빠짐없이 하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일과에 틀림없이 매일 들어 있었던 일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의 공생애 3년 동안 단 하루도 예외가 없이 반복된 일과 중에 가장 확실한 것은 바로 기도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우선 예수님의 공생애의 출발부터가 바로 '40일간의 금식기도'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복음서 곳곳에서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마 14:23),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 1:35),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맟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눅 6:12) 등의 기록들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기도 습관은 당신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에마저도 예외가 없었습니다.
본문과 같은 사건을 기록한 누가복음 22장 39절에 보면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혼자 일찍 만찬석상을 떠났던 가룟 유다도 예수님께서 그날 밤에 으레 감람산에 가셔서 기도드릴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까닭에 예수님을 잡으려는 자들에게 그 장소를 밀고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성 바로 옆에 있는 이 '감람산' 즉 '겟세마네 동산'은 우리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오실 때마다 "습관을 좇아" 즉 날마다 기도하신 장소였음에 분명한 것입니다.

오늘 종려주일을 맞이하여 저와 여러분은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에 마지막 순간까지 보여 주셨던 놀라운 기도의 모범을 배움으로써 이 수난주간 내내 그 보여 주신 본을 따라 기도드리는 성도가 되고자 합니다. 

1. 어려운 일이 불가피해 보일 때에도 '무조건 기도드림'으로써 용기와 힘을 얻게 됩니다. 

본문 36절부터 38절에 "36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37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38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라고 기록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 기도하러 오신 예수님을 가리켜 37절에서 "고민하고 슬퍼하사"라고 했습니다.
이 "고민하다"란 '몹시 낙망하다'라는 뜻이며 "슬퍼하다"란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워하다'라는 뜻입니다. 
남들이 보기에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직접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라고 제자들에게 토로하실 정도였던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언뜻 생각하기에는 참 의아스러운 일입니다.
좀 훌륭한 위인이나 성인 정도만 되어도 죽음에 대하여 초연했다는 사람들을 세상 역사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는데, 예수님 정도 되시는 분께서 어떻게 자신의 죽음을 담담하게 맞이하기는커녕 마치 자기 목숨 하나에 연연하는 듯이 고민하셨을까 하는 의문이 들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예수님께서 짊어지신 그 짐의 중량과 의미를 전혀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우리 예수님의 고통은 그냥 당신 자신의 한 목숨이 십자가에서 죽게 되는 정도의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다 지고' 죽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의 죄짐을 혼자서 몽땅 다 짊어지고 죽는다는 것은 예수님 외에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도 겪어 보지 못한 최고의 고통으로서, 정말 겪어 보신 예수님이 아니고서는 도무지 알 길이 없는 것입니다.
바로 그처럼 인류 역사상 한 사람이 겪을 수 있는 최대 최악의 고통을 이제 곧 친히 당하게 될 것을 예수님께서는 알고 계셨으며 그 '잔'을 피할 길이 없는 것 또한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니 그 심정은 정말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될" 정도였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우리 예수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겟세마네 동산에 기도하시러 가셨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우리 같으면 어차피 당할 것이 기정사실이라면 그런 일을 두고 기도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자포자기 하지 않으시고 그래도 일단 기도부터 하셨습니다.
그렇게 기도하심으로써 그 '심히 고민할' 수밖에 없었던 극단적인 고통의 십자가를 끝내 짊어지실 수 있는 힘을 얻으셨던 것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주로 어떤 때에 기도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까?
우리도 무슨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이 닥치면 기도해야 하겠다는 마음은 가집니다.
하지만 때로 그 환난이 너무 힘들고 오래 계속되면 우리는 자신의 기도에 대하여 일찍 낙심하기 쉽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일은 기도해 보면 해결될 길이 있겠다.'라고 여겨질 때는 기도하지만, '이 일만큼은 아무리 기도해도 별 수 없겠다.'라고 스스로 판단을 내리게 되면 그 문제에 대하여 기도드리기를 미리 포기해 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내가 아무리 기도드려 보았자 어차피 지금은 세계적인 경제불황 시기이고 사업하는 사람마다 다 예외가 없이 적자에 허덕이고 있으니 나라고 무슨 수가 있겠나?'라는 생각 때문에 아예 기도를 전혀 하지 않고 있는 교인은 없습니까? 
'한 학기 내내 주말마다 방을 제공하고 시간과 정력을 다 바쳤는데도 단 한 명의 해산신자도 생기지 않으니 이 지역에서 하는 새소식반은 아무 효과가 없겠다.'라는 낙심 때문에 기도드리는 것까지도 잊어버린 새소식반 교사는 없습니까?
'내가 이 구역에서 구역장을 한 지 이미 몇 년이 되어 가는데 구역예배 모임이 전혀 늘지 않고 있으니 아마 이것이 이 구역의 한계점인가보다.'라고 제멋대로 결론을 내려놓고서 기도와는 아예 담쌓고 있는 구역장은 혹 없습니까? 

정말이지 그런 경우일수록 당장 기도부터 시작해야 하며 기도부터 더욱 열심히 해야만 합니다.
우리에게 '이제 더 이상 기도드리지 않아도 상관없는 때'나 '이제는 기도를 중단해도 괜찮은 경우'라는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조차 당신께 곧 닥치게 될 피치 못할 고난을 아시면서도 그것을 위하여 마지막 순간까지 기도하셨기 때문입니다.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나는 오늘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라는 유명한 말은 흔히 스피노자가 했다고 잘못 알려지고 있지만 사실은 마틴 루터가 했던 말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합니다.
그 말을 누가 했던지 간에, 여러분께서는 내가 내일 망하게 될 것이 뻔하다 하더라도 오늘은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내 남편은, 내 시부모는 아무리 보아도 예수 믿을 가망이 눈곱만큼도 없어 보인다 하더라도 계속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병든 내 형제자매를 두고 의사는 이미 가망 없다고 사망선고와 같은 진단을 내리더라고 그 생명을 위해서 끝까지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내일 닥치게 될 십자가의 고통을 잘 아시면서도 그 전날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우리 예수님을 본받아서, 그 어떤 불가피하게 보이는 시련과 환난을 맞이하게 될 때에도 일단 엎드리고 무조건 기도부터 시작함으로써 그 어려움을 맞서 헤쳐 나갈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얻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자기 일이 아닌 것처럼 보여도 '함께 모여 기도드림'으로써 시험을 미리 피할 수 있게 됩니다. 

39절 이하 41절 말씀에 "39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40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41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라고 기록했습니다. 

아까 읽었던 37절과 3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특별히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 즉 야고보와 요한을 향하여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물론 '눈뜨고 망보고 있으라.'는 뜻이 아니라, '자지 말고 날 위하여 또 너희들 자신을 위하여 함께 기도하자.'라고 당부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고민스러운 심정으로 기도하시면서 그날 밤만큼은 당신의 제자들도 깨어서 같이 기도해 줄 것을 바라셨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그 제자들은 예수님의 합심기도 요청에 응하지를 못했습니다.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돌아오신 주님께서는 그 제자들 모두가 곤히 잠들어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고민하여 죽게 될' 정도로 고통스러운 심정이셨고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될' 정도로 힘써 기도하고 계셨는데도, 이 제자들은 그 예수님의 십자가는 전혀 '자기네 일이 아닌 것'으로만 여기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40절의 말씀에서 "한 시 동안"이란 문자적으로 번역하자면 '한 시간 동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같이 밤을 꼬박 새우자는 것도 아니고 그저 '한 시간만'이라도 당신과 함께 기도해 주기를 바라셨는데도 제자들은 기도하다가 잠든 것이 아니라 아예 기도를 시작도 하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죽을 정도로 고민스러우셨던 예수님의 마음이 이런 제자들의 모습을 볼 때 얼마나 더 섭섭하시고 아프셨겠습니까?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고 주님께서 장탄식하신 것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물론 각자 개인의 기도시간이 있어야 하지만, 때로는 함께 기도해야 할 시간도 꼭 필요합니다.
때로는 같이 기도해야만이 해결될 수 있는 문제들도 있고, 서로를 위하여 기도드리는 가운데 피차 큰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일들도 교회생활에서 많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약 5:16)고 했는데, 그런 의인들의 기도를 함께 모으면 그 힘이 얼마나 더 많이 증폭되겠습니까?
베드로가 옥에 갇혔을 때에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행 12:5)고 했는데, 그 결과 "헤롯이 (베드로를) 잡아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정확하게 타이밍을 맞추어서 주의 사자가 옥문을 열고 그의 쇠사슬을 벗겨주는 기적이 실제로 벌어지지 않았습니까? 
함께 모여서 같이 기도하면 기도드리는 각 개인도 더욱 힘 있게 기도할 수 있게 될 뿐 아니라, 그 기도의 결과로 나타나는 역사는 그야말로 폭발적이요 무적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또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기도하지 아니하면, 아무리 '마음으로는 원한다' 할지라도 '육신이 약한 것'을 스스로 쳐서 복종시켜 기도하지 아니하면 필연적으로 시험에 들 수밖에 없다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함께 모여서 기도할 줄 모르는 교인은 시험에 대한 예방주사를 맞지 않고 있는 사람이나 다름없으며, 자기 혼자만 걸리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다른 교인들에게 '시험의 바이러스(virus)'를 퍼뜨리는 '영적 보균자(保菌者)'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금요철야기도회에 와서 일주일에 단 한 시간만이라도 다른 성도들과 함께 기도할 수 없습니까?" - 이것은 비단 담임목사나 교구 담당 교역자만 가지는 안타까움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마지막 기도회 시간에 당신의 '가까운 제자들'을 두고 하셨던 그대로, 오늘날도 교회의 기도회에 전혀 나올 줄 모르면서 장로, 집사, 권사라는 직분만 달고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똑같이 탄식하고 계실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성도가 함께 모여서 기도드리지 않을 때 그로 인하여 개인적으로 놓치게 되는 은혜들이 정말이지 참 많이 있습니다.
교회가 힘을 모아서 간절히 기도드렸더라면 이미 응답받고도 남음이 있었을 큰 역사들도 참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한 시 동안만' 같이 기도했었더라면 분명히 막을 수 있었던 시험들, 아니 지금이라도 같이 기도하면 앞으로 얼마든지 막을 수 있는 시험들도 많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헌당관리위원회는 누구의 눈에도 불가능하게만 보였던 일을 10년 이상 매주일 오후마다 기도회를 모임으로써 결국 해 내었습니다.
이제 교육관관리위원회에서 시작한 특별기도회 역시 '요령은 전(前)과 동(同)'일 뿐인 것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주의 나라와 의를 위한 일'이 '내 개인적인 일'은 아닌 것 같지만 사실은 반드시 같이 기도드려야 할 필수적인 기도제목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와 성도와 주의 사자들을 위한' 기도는 '당장 급한 불'이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여러분의 그 어떤 개인사정보다 훨씬 더 급한 최우선의 기도제목인 것입니다.
'주님의 몸 되신 교회의 일'은 언뜻 자기 일이 아닌 것처럼 보일지라도 사실은 바로 그 교회의 지체 된 우리 각자에게 가장 급한 기도제목인 줄 깨닫고, '한 시 동안'만이라도 함께 모여서 기도드림으로써 온갖 시험들을 사전에 미리 막아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내 소원대로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드림'으로써 반드시 응답을 받게 됩니다. 

42절부터 46절에 기록하기를 "42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43다시 오사 보신즉 저희가 자니 이는 저희 눈이 피곤함일러라 44또 저희를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45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46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고 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님의 기도 내용은 시종일관 분명했습니다.
아까 39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시작하실 때부터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을 일단 깨우신 후에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실 때에나 다시 "세 번째"에도 역시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셨던 것이었습니다. 

이 "잔"이라는 말은 '당신이 마셔야 할 고통'을 비유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의 뜻은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고통 말고 다른 방법으로 이 구원 사역을 이루어 낼 길이 있으시면 그렇게 해 주십시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아까도 말씀 드렸듯이 그 십자가는 '온 세상 사람들의 모든 죄를 다 혼자서 지시는 잔'이었기 때문에 사람이 상상할 길이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우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예수님의 기도는 과연 어떻게 응답되었습니까?
성부 하나님께서는 '그 잔이 예수님에게서 지나가도록' 허락해 주지는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에 예수님의 기도 중에서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기도대로 응답하셨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오직 '성부께서 원하신' 그대로 '십자가 고난의 잔을 마시게' 되셨던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기도는 일견 응답 받지 못한 것 같지 않습니까?
기도하는 본인이 원하는 대로 되어야 응답받았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상식에 따르면 예수님의 기도는 분명히 응답되지 못한 셈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점에 대하여 히브리서 5장 7절부터 9절은 실로 놀라운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7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고 증거한 것입니다.
그처럼 겟세마네에서 "심한 통곡과 눈물로" 올린 예수님의 기도는 "들으심을 얻었다"라고 즉 분명히 응답을 받았다고 한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응답받았다는 말씀이겠습니까?
이어지는 말씀은 갈수록 더욱 기가 막힙니다.
"8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9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라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자 하나님조차도 오로지 당신을 십자가에서 고난 받게 하시는 성부의 뜻에 순종하심으로써 인간의 구원을 성취하신 그 자체가 바로 예수님의 기도가 '들으심을 얻은' 응답이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신비스러운 기도의 응답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대하여 때로는 '예스'(yes)로 응답하시지만 때로는 '노'(no)로 응답하기도 하십니다.
그리고 설사 그 응답이 우리의 소원에 대해서는 '노'라 할지라도, 그러한 하나님의 뜻 자체가 바로 기도의 응답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기도는 항상 최종적으로는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는" 기도가 되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또한 주기도문에서 예수님께서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도록 우리에게 가르치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기도에 대한 응답이라는 것은 '자신의 소원대로 이루어지느냐 아니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오로지 '기도했느냐 안 했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어떤 소원에 대하여 기도하셨습니까? 
내 소원대로 이루어지든지 아니든지 간에 그 기도는 하나님의 뜻대로 분명히 응답받은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떤 일에 대하여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만약 자기 소원대로 이루어졌다면 결코 좋아할 일이 못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이루어진 일'이 절대로 아닌 것임에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기도드리지 않으면, 자기 소원대로 되든지 안 되든지 간에 다 '무응답'일 뿐인 것입니다.

성도의 모든 기도는 반드시 응답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참된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조정하려고 하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길을 찾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만 드리면 저와 여러분의 모든 사사건건은 오로지 '아버지의 원대로' 즉 우리보다 훨씬 더 높고 깊으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해결되고야 맙니다.
우리가 가난해도 기도드리는 가운데 계속 가난하면, 우리가 약해도 기도드리는 가운데 계속 병이 낫지 않으면, 우리가 아무리 못난 인생을 살고 있어도 그 어려움이 기도드리는 가운데 계속되는 것이라면, 저와 여러분은 바로 '하나님의 뜻 안에서' 가난하고 '하나님의 인도 아래에서' 약하고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잠시 시험의 순간을 지나가고 있는 줄로 믿고 안심하시기를 바랍니다.
당장은 내 소원대로 응답이 오지 않는 것 같이 보일지라도 끝까지 기도드림으로써 결국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완벽한 응답을 받게 되는 것을 꼭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사실상 예수님이야말로 기도하지 않아도 될 만한 유일하신 분이 아니겠습니까?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라고 하신 말씀대로 삼위일체이신 성부와 성자 사이에는 그런 '기도'라는 형식을 취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매사에 직통할 수 있을 것이 틀림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매일 '새벽 미명에' 기도하시고 '밤이 맟도록' 기도하시고 마지막 수난주간에도 '습관을 좇아' 변함없이 기도하심으로써 끝내 십자가 대속이라는 엄청난 사역을 완성하고 마셨습니다.
아니 승천하신 지금 성부의 보좌 바로 우편에서도 여전히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조차 그러셨는데 우리가 도대체 뭐라고 기도하지 않고 배겨 내겠다는 것이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기도 없이 단 하루를 넘기거나 단 하나의 사건이라도 혼자서 대처할 수 있다는 말이겠습니까?
정말이지 "기도하지 않고 교회 일 하겠다고 나서는 교인처럼 무서운 사람은 없다."는 원로목사님의 말씀은 너무나도 훌륭하면서도 정곡을 찌르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항상 기도하는 삶'의 본을 보여 주셨을 뿐 아니라 '기도드리는 자세와 방법'까지도 이처럼 깊고도 오묘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성도는 아무리 불가피해 보이는 어려움이 코앞에 닥치더라도 '무조건 기도'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교회와 성도를 위한 기도를 마치 자기 일처럼 여기고 수시로 모여서 '함께 기도'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아야 합니다.
설사 내 소원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기도'함으로써 성도의 모든 기도는 반드시 응답되고야 마는 것을 체험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를 할 줄 아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완전히 나누어지는 시간은 곧 찾아오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지 않고 자고 있던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오셨을 때가 바로 그런 순간이었습니다.
"45b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46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을 자신만 가득 차 있던, 그러나 기도는 전혀 하지 않았던 제자들에게는 이제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치게 되는 시험의 때가 시작되었습니다.
반면에 그 마음이 심히 슬퍼하시고 고민하시던, 그러나 마지막 순간까지 기도하셨던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향하여 담대히 걸어가시는 때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교회와 교인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그 문제는 기도하지 않았던 데서 시작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에게는 끊임없는 시험들, 온갖 환난밖에 달리 찾아올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기도하면, 당장은 그 일이 우리 눈에 어떻게 보인다 하더라도 그 모든 것이 결국에 가서는 다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지는 만사형통이 되고 마는 것을 반드시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일단 기도하고, 시험이 닥치기 전에 미리 모여서 함께 기도하여, 자신의 인생과 이 교회의 앞날을 통하여 오로지 하나님의 크신 뜻을 이루어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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