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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마가요한의 집, 목장교회의 중보기도 (행 12: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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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종려 주일이 돌아왔습니다. 매년 종려 주일 우리 교회는 초대 교회가 보여준 모범을 따라 성도들의 집에서 모입니다. 여기에는 세 가지 중요한 목적이 있습니다. 첫째는, 이런 가정 모임이 있었기 때문에 초대 교회는 박해가운데서도 교회의 기능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을 기억하고자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모임은 박해 사건을 대비한 일종의 민방위 훈련과 같은 것입니다. 
                  
둘째는, 평소 여러 가지 사정으로 목장 교회 모임에 나오지 못하던 성도들에게 목장 교회모임을 소개하고 그 참여를 격려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자, 오늘 주일을 계기로 평소 목장 교회모임을 등한히 하시던 모든 분들이 자수해서 광명을 찾으시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초대 교회가 이런 가정 모임을 가질 때 사도와 같은 대표적 교회 지도자들이 모임을 인도하지 않아도 평신도들에 의해 교회 모임이 인도될 수 있었습니다. 목장 교회 모임은 일종의 평신도 목자들의 지도력을 강화하는 훈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 오늘의 모임이 기대가 되시지요?

오늘의 본문 사도행전 12장은 헤롯왕(헤롯 아그립바 1세, 헤롯 대제의 손자)이 일으킨 박해로 예루살렘 감옥에 사로잡혔던 베드로가 사형을 기다리던 시점에서 일어난 중보기도의 기적을 경험하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기적 사건의 진원지가 바로 마가 요한의 집이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초대 교회는 대부분 집에서 모이고 있었고 마가요한의 집이 또한 그러했습니다. 마가 요한의 집은 예루살렘 교회의 일부였던 것입니다. 물론 예루살렘 교회는 성전에서도 모였습니다. 그러나 성전은 자주 사용하기에 불편한 여러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넓은 다락방을 가진 마가 요한의 집에서 보다 중요한 예루살렘 교회 모임이 함께 진행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 집니다. 성령강림이 일어 난 곳도 바로 이 마가요한의 다락방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초대 목사님이었던 사도 야고보가 순교한 후(12:2) 사도 베드로마져 잡히자 아마도 긴급 기도회가 이 마가 요한의 집에서 다시 소집된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에 베드로가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5절) 이렇게 시작합니다.

오늘 우리는 종려주일 목장 교회 모임의 자리에서 마가 요한의 집을 진원지로 하여 일어난 이 기적 사건의 레슨을 잠시 함께 묵상하고자 합니다. 마가요한의 집의 중보기도의 레슨은 무엇일까요?

1.집의 모임을 ‘교회의 모임’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 먼저 본문의 1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하고 있더라” 

우리는 정확하게 그 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지 모릅니다. 그 구절은 그냥 여러 사람이 모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모임에 대하여 본문이 시작되는 5절에서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십니까?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그 모임, 그러니까 마가요한의 집의 기도회를 교회가 기도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그 모임은 교회의 대표성을 갖고 모이고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실 얼마나 많이 모이느냐 어디에서 모이느냐는 것은 초대 교회에서 중요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교회의 본질은 건물이나 빌딩이 아닙니다. 교회의 본질은 성도들의 모임입니다. 역사적으로 교회가 빌딩을 갖기 시작한 것은 AD320년 이후 로마의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인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고 그리고 그 이후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면서 비로소 예배당 건물을 갖기 시작한 것입니다. 물론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의 예외라고 할 수가 있고 대부분의 이스라엘 이외의 지역 소위 이방인의 세상에 복음이 전해지면서 성도들은 박해 중에 건물을 지을 수 없었고 성도들의 집에서 교회로 모이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골로새 교회는 빌레몬의 집(빌몬1:2)에서, 빌립보교회는 루디아의 집(행16:40)에서, 라오디게아 교회는 눔바의 집(골4:15)에서, 에베소 교회는 브리스가 아굴라 부부의 집(고전16:19)에서 모이고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니까 초대 교회는 대부분 오늘의 우리처럼 집에서 모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집에서 모이지만 교회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교회였기때문입니다. 

한번 따라서 복창하시겠습니까? 제가 '우리가' 하면 여러분은 '교회다'하는 겁니다.(우리가 남이가~~하는 식으로 말입니다./처음에는 ‘우리가 남이가’ 하시고 두 번째는 ‘우리가 교회다’ 라고 선포하시겠습니다.)


2.교회의 이름으로 드리는 간절한 기도를 응답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몇 사람이 모여도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교회를 대표하여 모이면 그 모임은 교회의 모임이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그런 모임이 기도할 목적으로 모일 때에 주께서는 아주 특별한 약속을 하십니다. 

마태 18:20의 말씀을 기억하시나요?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주께서 함께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그 직전 구절인 마태18:19을 읽겠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그런 응답이 바로 마가 요한의 집에서 일어 난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자 본문 5절의 말씀을 다시 확인하겠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7절에 보면 베드로를 매고 있던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집니다. 8절 이하에 보면 천사가 등장하여 출옥의 기적을 연출합니다. 이것이 바로 마가 요한의 집에서 드려진 목장교회 성도들의 간절한 기도의 응답이었습니다.

여기서 간절한 기도란 도대체 어떤 기도였을까요? 우리의 목소리의 높이나 크기가 간절함을 결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초대 교회 성도들은 베드로의 석방을 눈으로 확인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기도했다는 사실입니다. 응답을 확인하는 순간까지 그들은 계속 기도한 것입니다. 

멈출 수 없는 기도-이것이 바로 간절한 기도의 태도인 것입니다.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는 주의 말씀은 한번만 구하고 한번만 찾고 한번만 두드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구하고, 계속해서 찾고,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라는 말입니다. 나는 우리들의 목장 모임에서 이런 기도 응답의 역사가 풍성하기를 기대합니다. 만일 우리가 합심하여 진실로 한 마음이 되어 주의 이름으로 중보하고 기도하면 옥문도 열리고 하늘 문도 열릴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우리의 하나님 신뢰가 온전치 못해도 기도는 응답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의 본문이 가르치는 매우 흥미로운 중보 기도의 레슨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하는 우리의 믿음이 온전하지 못해도 여전히 기도는 응답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보통 아주 온전하고 강한 믿음의 사람들의 기도에만 주께서 응답하신다는 보편적 인식을 갖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본문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본문에 베드로가 천사의 극적인 인도로 감옥에서 출옥되자 그는 곧장 자기를 위한 석방 기도회가 열리고 있는 마가 요한의 집으로 직행합니다. 13절에 보면 베드로가 집의 문을 두드립니다. 여자 아이가 베드로의 음성을 확인하고 집에 들어가 기도회에 참석한 성도들에게 알립니다. 그들의 반응이 무엇이었을까요? 15절입니다. “그들이 말하되 네가 미쳤다 하나 여자 아이는 참말이라 하니 그들이 말하되 그러면 그의 천사라 하더라” 웃기지 않습니까? 그들은 지금 베드로 석방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었음에도 막상 베드로가 왔다고 하니까 믿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의심하고 기도하고 있었고 기도하며 의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도 기도는 응답되었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기 위하여 반드시 크고 위대한 믿음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겨자씨 한알 만한 믿음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라”(마태 17:20)고 하십니다. 그가 기대하는 믿음은 굉장한 믿음이 아니라 겨자씨 한 알의 믿음인 것입니다. 사실 이 말씀은 간질 병 들린 소년을 고치지 못하던 제자들에게 주께서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때 이 소년의 아버지는 솔직하게 주 앞에 엎드려 어떻게 호소합니까? 
                  
막9:24절을 보십시오.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하더라” 그리고 그 아비의 기도를 주님은 마침내 응답하십니다. 할렐루야! 그는 우리에게 크고 절대적인 믿음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은 많은 경우 의심이 섞인 불완전한 것이지만 그런 기도조차도 주께서는 외면하지 않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이나 성경의 하나님은 우리의 의심을 반드시 정죄한다고 단정하지 마십시오. 
유다서 2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 
                  
맞습니다. 하나님은 의심하는 자도 긍휼이 여기십니다. 만일 우리의 의심이 의심을 위한 의심이 아니고 우리의 인간적인 연약함 때문이라면 그는 기꺼이 우리를 긍휼이 여기시고 비록 우리가 의심하며 기도할지라도 기도하는 우리 곁에 다가오십니다. 저 유명한 마더 테레사도 한때 깊은 신앙의 회의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녀의 남긴 일지에 이런 고백이 있습니다. “오, 하나님 저의 믿음이 어디에 있습니까? 저는 지금 어둠과 공허속에 헤매고 있습니다. 저를 건져주소서” 그러나 그녀는 이 어둠을 헤치고 나와 밝은 빛의 도구로 쓰임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의심속에서도 기도의 끈을 놓치 않는 이들에게 주님은 다가와 당신의 전능하신 손을 펼쳐 주십니다. 이것이 마가 요한의 집에서 기도하던 성도들도 경험한 하나님의 자비요 긍휼이었습니다. 나는 동일한 주의 자비와 긍휼을 성도들이 경험하실 것을 기대합니다. 그래서 우리 모든 지구촌 성도들이 겨자씨 한 알의 작은 믿음에서 더 큰 믿음의 자리로 나아가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온전치 못해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십니다. 그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의 기도의 끈을 결코 놓지 마십시오. 결코 기도를 포기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기도를 포기하지 않았다면 오늘 우리를 결박하고 있는 고통의 쇠사슬도 곧 벗어질 것입니다. 절망의 옥문도 열릴 것입니다. 축복의 문도, 희망의 문도, 기적의 문도 열릴 것입니다. 할렐루야! 
                  
기도하겠습니다.

마무리 나눔 질문 - 

1.그동안 목장 모임에 계속 참석하신 분들은 목장 모임의 중요성에 대하여 그리고 처음 참석하신 분들은 처음 참석하신 소감을 나누어 주십시오.

2.우리가 때로 마가 요한의 집에 모인 초대 교회 성도들처럼 의심하면서 기도했어도 응답된 사례들을 간증해 주십시오.

3.오늘 가정마다 함께 기도를 요청하고픈 기도 제목들을 나누어 주십시오. 
(이동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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