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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기만 하라 (눅 8:4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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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기만 하라 (눅 8:40~56)


어느 미국 회사에서 텔레비전에 이런 광고를 냈습니다.
그 광고의 주제는 자사는 고객의 '신뢰'(trust)를 가장 귀중하게 여기고 그것을 추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처럼 남을 신뢰하게 되는 마음은 아무도 태어날 때부터 절로 소유할 수 없고 오직 한 사람 한 사람과의 관계를 통하여 조금씩 쌓아 가게 되는 것이라고 하면서, 자기네 회사는 고객으로부터 그처럼 신뢰받을 수 있는 관계를 정립하고 유지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이 그 광고의 내용이었습니다. 
그런 주제를 묘사하기 위해서 그 광고에 이런 장면이 등장합니다.
한 아버지와 어린 아들이 물에서 놀고 있는데, 아버지는 먼저 물속에 들어가 있고 어린 아들은 지금 물에 반쯤 잠겨 있는 계단 위에 서 있었습니다.
물속에 있는 아버지는 지금 물 밖의 계단 위에 서 있는 자기 아들을 향하여 물속으로 뛰어들어 오라고 손짓을 합니다.

일단 아들이 뛰어들어 오기만 하면 곧 그 아이를 물속에서 받아 안을 채비를 차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아버지를 보면서 그 어린 아들은 갈등 섞인 얼굴을 합니다.
물에 다이빙해서 뛰어든다는 것은 그 어린아이에게는 두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일단 용기를 내어 뛰어들기만 하면 자기가 물에 빠지지 않도록 아버지가 받아 줄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신뢰 또한 이 아이의 마음속에 없지는 않습니다.
이 두 가지 생각이 왔다 갔다 하면서 조금 망설이던 그 아이는 이윽고 결심하고 물속에 뛰어들었고, 그 아버지는 자기를 신뢰해 주고 물에 뛰어든 그 아들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면서 그에게 손을 벌려 물속에서 받아 주는 것입니다.
그 어린 아들은 물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수영을 잘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 아이는 오직 아버지를 신뢰하고 물에 뛰어 들기만 하면, 나머지는 아버지가 알아서 이끌어 주게 되어 있는 것이었고, 그것이 곧 그 어린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를 더욱 가깝고 돈독하게 만들어 주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바로 이 아이처럼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결코 완전하거나 수준 높은 신앙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온 사람들이라고는 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서투른 신앙을 가지고도 일단 예수님을 향하여 '뛰어들었으며'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부족한 신앙까지도 당신의 팔을 벌리고 '받아 주셨고', 그로 인하여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더욱 굳게 할 수가 있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는 이 두 가지 사건을 통하여, 우리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어떤 약한 믿음까지 품어 주시고 더 굳게 만들어 주시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예수님께서는 '소원 성취욕으로 시작된 신앙'을 끝내 '구원 신앙'으로 온전케 만들어 주셨습니다. 

혈루증이라는 병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오게 되었던 여인이 바로 이런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우선 본문 40절로 42상반절에 보면 "40예수께서 돌아오시매 무리가 환영하니 이는 다 기다렸음이러라 41이에 회당장인 야이로라 하는 사람이 와서 예수의 발아래 엎드려 자기 집에 오시기를 간구하니 42a이는 자기에게 열두 살 먹은 외딸이 있어 죽어감이러라"고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앞서 거라사인의 땅에서는 귀신을 돼지 떼 속에 쫓아 보내셨다가 지역 주민들로부터 배척을 받아 다시 갈릴리로 돌아오셨는데, 그 곳에는 오히려 "환영" 인파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 회당장 야이로라 하는 자가 죽을병에 걸려 있는 자기 딸을 고쳐 주십사고 예수님께 간청해 오자 예수님께서는 응낙하시고 그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셨는데. 그 길 가는 도중에 바로 이 '혈루증 여인'의 사건이 벌어진 것이었습니다.

42절 하반절로부터 48절에 "42b예수께서 가실 때에 무리가 옹위하더라 43이에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중에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가 44예수의 뒤로 와서 그 옷 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 45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 하시니 다 아니라 할 때에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무리가 옹위하여 미나이다 46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 하신대 47여자가 스스로 숨기지 못할 줄을 알고 떨며 나아와 엎드리어 그 손 댄 연고와 곧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고하니 48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고 기록했습니다. 

당시 동네 안의 길들은 매우 폭이 좁았는데 거기에다 예수님을 "옹위"하면서 따르는 무리는 많았던 까닭에 그 행렬은 매우 복잡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한 혈루증 걸린 여인이 예수님께 다가왔습니다.
혈루증이란 비정상적인 하혈이 있는 병인데, 레위기 15장 25절 이하에 보면 "불결"한 병으로 지정되어 있었습니다.
이 말은 그녀가 성전 제사에 참석할 수 없으며 평소에도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피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녀가 그 병에 걸려 있던 "열두 해" 동안의 생이란 참으로 고통스럽고도 고독했던 것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이 때문에 그녀는 군중이 많을 때를 일부러 택해서 예수님께 접근하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만일 그 여인이 예수님 주위에 사람들이 별로 없을 때에 찾아왔더라면, 제자들이 그녀가 예수님께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막을지도 모르고 또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 해도 다른 사람들이 듣는 자리에서 예수님께 자기의 병을 밝혀야 했을 것입니다.
그 여인은 그런 창피 당할 위험을 감수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예수님을 남모르게 접촉하는 수단을 강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처럼 그녀가 군중들 틈에 섞여 예수님께로 접근하여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순간 그 병은 깨끗이 낫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는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하고 물으셨습니다.
하지만 이 질문은 거기 있던 모든 사람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었으며 사실 우스꽝스럽게 여겨졌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서로 밀치고 복잡하게 얽힌 상태로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었으니 부지중에 예수님과 접촉한 사람은 한두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고, 그러니 그런 질문은 아무 의미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의아해 하면서 "주여 무리가 옹위하여 미나이다"라고, 즉 '예수님, 무슨 그런 엉뚱한 질문을 하십니까?'라는 심정으로 반문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계속 단언하시기를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 자신의 의사에 관계없이 그냥 어떤 마술적인 능력이 예수님 몸으로부터 옷을 타고 그녀의 손가락으로 전해져서 넘어갔다는 뜻이 아닙니다.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이 당신의 옷 가에 손을 댈 때까지의 전 과정을 완전히 의식하고 계셨으며 또한 그녀의 병이 낫도록 의도적으로 역사하셨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여기서 이처럼 물어보시는 의도는 그 여인으로 하여금 사람들 앞에서 당신을 나타내고 증거하게 만드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녀의 신앙을 온전하게 만들기 위해서 꼭 필요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여인이 처음에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에는 어디까지나 자기 혼자만 아는 가운데 은밀히 이 일을 시작하고 마치려는 계획이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물론이려니와 예수님도 모르게 그저 살짝 옷 가만 만지고 그래서 병이 낫게 되면 또 예수님께 감사 인사조차 드리지 않고 조용히 사라지려고 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이 여인은 그저 자기의 병을 치료해야겠다는 그 소원 하나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것이며 그것이 성취되기에 필요한 계획만을 완전히 세워서 왔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내 능력이 나간 줄 내가 안다. 누군가 내게 손을 대었다."라고 공언하시자, 그 여인은 더 이상 자신의 행위를 숨길 수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스스로 숨기지 못할 줄을 알고 떨며 나와 엎드리어 그 손 댄 연고와 곧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 고하게" 되었습니다.
원래 계획했던 바와는 달리 그녀는 자기에게 생긴 일들을 공식적으로 고백하고 간증하게 되었던 것이며,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의도하신 바였던 것입니다.

그런 후에 예수님께서는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선언해 주셨습니다.
그 여인의 믿음이란 원래는 지극히 단순하고도 유치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옷 가라도 만지면 자기 병이 나을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그 전부였으니 어쩌면 미신적이라는 말도 들을 만한 믿음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 믿음은 오로지 자기 개인적인 소원 성취에만 철저히 입각한 것으로서,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나 사람 앞에서의 공적인 고백 따위는 아예 들어갈 자리가 없는 믿음이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여인을 가리켜 끝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선포해 주셨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그녀가 처음부터 예수님의 능력을 믿고 찾아왔었다는 그 한 가지만은 분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예수님의 의도적인 유도질문을 받고 사람들 앞에서 자기가 예수님께로부터 병 고침을 받게 된 것을 고백하고 간증하게 되었을 때 그녀의 신앙은 그 초보의 단계를 벗어나서 '구원 신앙'이라는 최고의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오직 자신의 소원 성취 혹은 문제 해결 이런 것들만이 동기가 되어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는 것은 오늘날에도 아주 흔히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사람들이 교회에 발을 들여 놓게 되는 동기 중에 첫째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렇게 시작했다 할지라도 그런 소원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는 확실히 성취될 것을 믿는 것입니다.
소원을 잔뜩 안고 막연한 희망만 품고 교회에 다니는 것과, 예수님이야말로 그런 자신의 소원이나 문제를 분명히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이심을 확실히 믿는 신앙생활에 온 몸을 내던지면서 '뛰어드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비록 개인적인 소원이나 문제를 통해서라도 우리가 일단 그처럼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게 되기만 하면, 예수님께서는 그런 어린 신앙조차 받아 주시고 자라게 해 주시고 온전한 것이 되도록 인도해 주시고 결국에 가서는 바로 그 믿음을 통하여 완전한 구원에까지 이르도록 만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게 될 때, 우리는 자기 욕심만을 채우려고 시작했던 신앙생활이 하나님께 진정으로 감사할 줄 알게 되는 신앙으로 자라게 됩니다.
그런 주님의 신앙 성장 교육을 받게 될 때, 평소에 사람 앞에 서는 것을 꺼려하는 성격 때문에 자기는 교회 다닌다는 말도 못하던 사람도 오히려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행해 주신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증거하고 전도할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동기로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을지라도 반드시 이 예수님과 직접 영적으로 '접촉'함으로써,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로 시작된 어린아이 같은 신앙도 '예수 믿으면 구원 얻는다'는 완전한 신앙으로 성장시켜 주시는 은혜를 꼭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예수님께서는 '두려움으로 흔들리는 신앙'까지도 '부활 신앙'으로 완성시켜 주셨습니다. 

본문 49절 이하 56절에 다시 회당장 야이로의 사건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기록하기를 "49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하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을 더 괴롭게 마소서 하거늘 50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 51집에 이르러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및 아이의 부모 외에는 함께 들어가기를 허하지 아니하시니라 52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하여 울며 통곡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53저희가 그 죽은 것을 아는 고로 비웃더라 54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가라사대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55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예수께서 먹을 것을 주라 명하신대 56그 부모가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경계하사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아까의 40절과 41절 말씀을 다시 보면 "회당장인 야이로라 하는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왔다고 했습니다.
'회당장'이란 당시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예배드리기 위해 모였던 회당을 관리하고 감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당시 유대 사회에서 고귀하고도 유력한 직책이었습니다.
이 야이로도 지금 죽을병에 걸려 있는 딸을 고쳐달라는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그 방법은 아까의 혈루증 걸린 여인과는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41절에 보면 그는 아예 처음부터 "예수의 발아래 엎드려서" 자기 집에 오셔서 딸의 병을 고쳐 주십사고 간청했습니다.
몰래 와서 살짝 고침 받고 또 소리 없이 사라지려 했던 그 여인과는 정반대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 따위를 아예 생각지도 않고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지극히 겸손하고 정중한 자세로 예수님을 찾아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길 가시던 도중에 혈루증 환자 여인을 막 고쳐 주셨을 때, 그 회당장의 집에서 전갈이 왔습니다.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을 더 괴롭게 마소서"라는 소식이 전해져 왔던 것입니다.
누가 이 전갈을 그 집에서 보내 왔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어쨌든 이 말 속에는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과소평가가 포함되어 있었음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병 치료까지는 효과가 있지만 죽은 사람에게까지는 미치지 못한다는 생각이 확연히 깔려 있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여기 "이 선생님을 더 수고시키지 마십시오."라는 말 속에는 또한 그러지 않아도 바쁘신 예수님에게 쓸데없는 고생을 시킬 필요가 없다는 배려 또한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을 더 괴롭게 마소서"라는 이 말 속에는 꽤 정중한 예의와 함께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불신이 어우러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 전갈을 들은 순간 회당장 야이로의 심정이 어떠했는지는 본문에 정확히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 순간 즉시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그에게 말씀하신 것을 보면, 야이로 역시 그 전갈 보낸 가족과 별 다름없는 생각을 가졌음에 틀림없습니다.
야이로와 그의 가족들은 이처럼 예수님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는 처음부터 내내 정중하고 사려 깊은 예의를 다 갖추었지만, 그 예수님의 능력을 믿는 수준에 있어서는 한계를 드러내면서 두려움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 순간 즉시 야이로에게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일깨워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딸의 병을 고쳐 주실 수 있을 것이라는 야이로의 믿음은 마치 이제 걸음마를 시작한 것 같은 믿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지금 막 죽어 버린 딸 앞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리려 하던 바로 그 위태로운 순간에 예수님께서는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그의 믿음이 파선당하지 않도록 붙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일행이 집에 도착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 이 세 제자들과 그 "아이의 부모" 즉 야이로 부부만 그 딸의 방에 함께 들어가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이것은 그 아이가 살아나게 될 때 원래 죽었던 그녀를 조문하러 왔던 많은 사람들 때문에 그 소녀 아이가 놀라지 않도록 하기 위한 깊은 배려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는 거기 있던 곡하는 사람들에게는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까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는 말씀이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던 것처럼 이 말씀 역시 주위의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으며, 아이가 이미 죽은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개의치 않으시고 그 아이의 방에 들어가서 손을 잡으신 후에 "아이야 일어나라"고 그녀를 부르셨습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달리다굼"이라는 아람어로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람어는 그 당시 유대인들의 일상언어였습니다.
즉 그 아이의 어머니가 매일 아침마다 그 아이를 깨울 때 썼던 말, 그 아이의 귀에는 실로 친숙했던 말을 예수님께서 그대로 쓰셨던 것입니다.
그러자 그 아이는 즉시 살아났고, 예수님께서는 제일 먼저 그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부모에게 말씀하심으로써, 또 한 번 당신의 사려 깊고도 자상하신 성품을 보여 주셨습니다.

원래 회당장 야이로의 믿음은 이런 엄청난 일을 예상하거나 기대한 믿음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일단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렸을 때, 그 다음의 과정은 전적으로 예수님께서 이끌어 주셨습니다.
특히 딸의 병이 동기가 되어 시작되었던 그의 믿음이 딸의 죽음이라는 더 큰 시험 앞에서 결정적인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을 때에, 바로 예수님께서 그의 신앙이 거기서 넘어지지 않고 오히려 당신의 절대적인 능력까지 믿을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의 위태로웠던 믿음은 결국에 가서는 죽었던 딸이 다시 살아나게 됨을 목도하는 '부활 신앙'으로 완성되고 말았던 것이었습니다.

교회에 발을 들여 놓기 시작할 때부터 남달리 점잖고 예의 바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도 세상에서 잘 배우고 좋은 환경에서 자라고 인간적인 품위와 예절을 갖춘 사람은 신앙생활 시작할 때에도 역시 다른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라 해서 절로 깊고도 참된 신앙에 더 잘 이르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단정한 옷차림으로 예배에 참석하고 목사나 교인들 앞에서 깍듯이 예의를 잘 갖추고 교제하는 것이 곧 신앙생활의 본질은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처럼 '사람 좋은 사람', '사람에게 인정받는 사람'일수록 그 사실이 오히려 자기도 모르는 영적 방심이나 교만이 되어서 바른 신앙을 갖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왜냐하면 소위 '법 없이도 살 수 있다는 평판을 듣는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공로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이 더 어렵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회에서 높임을 받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그분만을 경외하는 신앙생활보다는 그저 교양 있는 현대인의 여가활동 중에 하나로서의 교회생활에 머무르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런 교인들은 약간의 시험만 닥쳐도 쉽게 포기하고 무너지는 경우 또한 허다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세상에서의 신분이나 체면 따위는 적어도 예수님 앞에서는 완전히 잊어버리고 그저 그분의 '발아래'에 엎드릴 줄 알아야 합니다.
그처럼 일단 예수님 앞에 자신을 완전히 '내던져' 놓기만 하면 나머지는 그 주님께서 지극히 세심하고도 자상하게 이끌어 주십니다.
예수님과의 관계란 그저 좀 훌륭한 유명인사와 알게 되는 정도가 아니라 바로 성자 하나님이시며 죄인의 구세주를 만나고 믿게 되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시며, 그런 믿음의 관계를 통하여 누리게 되는 복이란 그저 자신의 인생에 한두 가지를 더 보충해 주는 장식품 정도가 아니라 사망까지 이기는 영생부활이 되는 것을 체험케 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그저 자신의 겉모습만 점잖게 다듬어 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 예수님의 사랑과 능력을 철저히 신뢰하고 끝까지 의지함으로써, '두려움으로 인하여 흔들리는 신앙'까지도 친히 붙잡아 일으켜 주시어서 끝내 '영원히 죽지 아니하는 부활의 신앙'으로 완성시켜 주시는 은총을 꼭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혈루증 걸린 여인'과 '회당장 야이로' - 이 두 사람은 원래 모든 것들이 너무나 대조적이었습니다.
한 사람은 여자였고 또 한 사람은 남자였습니다.
한쪽은 사회적으로 형편없는 존재인데다가 멸시받는 병까지 걸려 있었고, 한쪽은 상류인사요 어느 모로 보나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두 사람이 예수님 앞으로 나아왔던 모습 역시 지극히 대조적이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한 사람은 자기가 바라는 소원에만 철저히 집착된 상태에서 체면도 예의도 없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또 한 사람은 지극히 예의바르고 점잖게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그 예수님의 능력이 이미 죽은 사람에게까지 미치는 줄은 알지 못했었습니다. 

하지만 이 두 사람에게는 매우 중요한 공통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예수님 앞에 자기 몸을, 자기 마음을, 자기 인생을 완전히 내던졌다는 사실입니다.
두 사람 다 성숙한 신앙이라고 불리기에는 아직 너무나도 어린, 마치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어린아이 같은 수준의 신앙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 왔지만, 예수님께서는 그처럼 설익은 신앙을 가지고 당신의 품에 풍덩 뛰어 들어온 그들을 결코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두 손을 활짝 벌리시면서 안전하게 받아 주셨을 뿐 아니라 그들이 처음에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깊게 당신의 품에 완전히 안아 주셨던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면 내 자녀 교육에 좋겠지. 예수를 믿으면 내 사업이 잘 되겠지. 같이 성경공부하고 기도하면 부부 화목에 도움이 되겠지.'라는 마음으로라도 일단 예수님을 찾아오는 것이 중요합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라고, 오늘도 바로 그런 교인들 중에서 당신과 직접적인 영적 접촉을 한 성도들을 예수님께서 친히 당신 쪽으로 더욱 가까이 끌어당겨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예수 믿는 것을 부끄러워하던 사람을 오히려 만천하에 그 이름을 증거하게 되는 '구원의 확신'을 가진 신자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어린이 선교원에 자녀를 보내면서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교회에 등록하거나, 혹은 평소에 이것저것 도와주고 친절을 베풀어 주는 이웃의 교인이 자꾸 조르는 바람에 거절하기 미안해서 한번 쯤 주일예배에 출석하게 되는 것 역시 정말 소중한 기회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예수님께서는 그런 초보신자조차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라는 기상천외의 말씀으로 한순간에 최고 수준의 신앙인으로 끌어올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그저 일상생활의 자질구레한 문제들에 대한 도움이나 받을까 하고 교회에 나왔던 사람이 이 생명의 주님께서 약속해 주시는 내세의 영생을 믿고 전파하는 '부활의 신앙'까지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2장 2절은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격려하신 것 아니겠습니까?
실로 우리 예수님은 "주여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는 기도까지 진짜로 들어주시는 놀라운 구세주이십니다.
그저 '믿기만 하라'고 하시는 이런 예수님의 품 안에 자신을 완전히 내던짐으로써 우리의 약하고 불안한 믿음도 강하고 온전케 해 주시는 이 '믿음의 주'께서 친히 이끌어 주시는 '구원의 확신'과 '영생 부활'의 축복을 꼭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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