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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나라에서 복된 자 (사 65:22~23 / 눅 14: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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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나라에서 복된 자 (사 65:22~23 / 눅 14:12~15) 
 
 
어느 국제 구호 기관에서 아프리카에 의료선교를 갔습니다. 의사가 진료를 한 후 약을 조제하여 하루 세 번씩 식후 30분에 약을 먹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부락민들은 약을 먹지 않았습니다. 왜 약을 먹지 않았느냐고 물어보니 세끼 밥을 먹고 먹으라고 하였는데 먹을 밥이 없어 밥을 먹지 않아서 약을 먹지 않았다고 하더랍니다. 이런 사람에게 어떻게 세상에서의 복을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행복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람들이 세상에서 행복을 느끼고 복이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나아가서 세상에서는 복되지 못해도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얼마든지 복이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늘의 복은 세상의 행복지수가 아닙니다. 
  
행복지수는 삶의 만족도, 평균수명, 생존에 필요한 면적과 에너지 소비량 등을 바탕으로 계산합니다. 그런데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들을 보면 비누아투, 콜롬비아, 코스타리카, 도미니카, 파나마, 쿠바, 온두라스,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세인트빈센트그레나딘 등의 생소한 나라 이름들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행복지수가 세계 102위입니다.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들은 거의 우리나라보다 훨씬 못사는 나라들입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행복하다고 하더라도 세상의 것으로 영원한 복을 얻지는 못합니다. 
  
요즘 세계는 ‘행복전쟁’ 경쟁이 한참입니다. 각국 정부는 행복지수 개발과 정책을 적용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국가총생산(GDP) 대신 국민총행복(GNH) 지수 고안에 더 많은 힘을 쏟고 있습니다. 행복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고, 느낄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의 복은 인간의 노력에 의하여 얼마든지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의 복은 사람의 힘으로 얻지 못하는 초자연적인 은혜를 뜻합니다. 성경적 복이 그렇습니다.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얻어지는 것이 성경적 복이며 하나님의 나라의 복입니다. 
  
복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본성입니다. 하나님은 인류 모두가 구원받기를 원하고, 구원받은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복은 하나님의 본성이 주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복은 쌍으로 안 오고 화는 홀로 안 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복은 오다 말고, 화는 연거푸 온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흔히 ‘지지리 복이 없다’는 말을 합니다. 세상에서도 복 받기란 힘들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복은 쌍으로 오고, 화는 안 온다”고 해야 옳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 주시기를 좋아하시고 복을 준비하고 우리가 얻기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오늘 성경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복된 자’라고 하는데 사실 이 말은 이상한 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모두 복된 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갔는데 복된 자가 아닐 자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그 자체가 복입니다. 그 나라에 가는 것이 복입니다. 그 나라는 고통이 없고, 아픈 것도 병도 없고, 눈물도 없고, 다시 사망이 없는 곳입니다. 인간의 모든 고통에서 해방되는 곳입니다. 구원받은 자가 가는 곳입니다. 이미 복 받은 자가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한 자는 이미 복 있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복 있는 자가 어떤 자들인지 말씀을 통하여 봅니다. 

첫째, 갚을 것이 없는 자를 대접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 14잘에는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고 합니다. 이 땅에서 보답을 기대하지 않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서 “가난한 자들, 몸이 불편한 자들, 저는 자들, 맹인들을 청하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앞에서 언급한 “벗, 형제, 친척, 부한 이웃”과 비교되는 말입니다. 이 사람들은 아무런 보답도 해 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아무 보답도 해 줄 수없는 이런 자를 대접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복이 있습니다. 
  
보답을 기대하면서 선행을 베풀고 대접하는 자에게 복은 없습니다. 보답을 기대하는 자체가 복이 없는 마음입니다. 어느 착한 농부가 무 농사를 지었는데 너무 농사가 잘 되었습니다. 농부는 원님이 고을을 잘 다스린 덕에 농사가 잘 되었다고 생각하여 몸뚱이만한 무를 가지고 가서 원님께 드리며 말했습니다. “무 농사가 너무 잘 되었습니다. 다 원님의 덕입니다”. 원님은 그의 착한 마음씨에 감탄하며 “뭐 좋은 거 들어온 것 없느냐?”하고 물었습니다. 아랫사람은 좋은 황소 한 마리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황소를 가지고 와서 착한 농부에게 주었습니다. 그 마을에 마음씨 고약한 농부가 있었습니다. 그는 ‘무 하나를 가지고 가서 황소 한 마리를 가지고 왔으니 황소 한 마리를 가지고 가면 땅 몇 마지기는 주겠지?’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황소 한 마리를 가지고 원님에게 갔습니다. 원님에게 “이렇게 잘 생기고 튼튼한 황소는 처음입니다. 이 모든 것이 원님 덕입니다” 하면서 드렸습니다. 원님은 다시 ‘뭐 좋은 거 없느냐?’하고 물었습니다. “예, 잘 생긴 무 하나가 있습니다”. 마음씨 고약한 농부는 원님에게 황소 한 마리를 바치고 무 하나를 가지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왔다. 이 농부는 마음이 복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놀부의 심보를 잘 아시지요? 대가를 기대하는 선행은 복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구제와 자선은 하나님의 나라에 가기 위한, 혹은 하나님의 나라의 보상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 삼기보다 사랑의 동기로 해야 함을 말합니다. 
  
룻기의 아름다운 이야기는 영원한 러브스토리입니다. 나오미는 기룐가 말론이라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기근을 만난 나오미는 아들들을 데리고 모압으로 가서 그 곳의 여인들을 며느리로 얻습니다. 두 아들도 다 세상을 떠나고 나오미는 다시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돌아옵니다. 오르바와 룻이라는 두 며느리는 어머니를 따라 오다가 오르바는 모압에 머물고 룻은 어머니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가난했던 룻은 보아스라는 사람의 밭에 가서 이삭을 주어 어머니를 섬겼습니다. 보아스는 가난한 자를 돕기 위하여 룻이 자신의 밭에 와서 이삭을 줍는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대가를 바란 것이 아니라 단지 가난한 자를 돕기 위한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이 일로 보아스와 룻은 결혼을 하게 되고 보아스는 예수님의 족보에 이름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1장에는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을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으니라.”고 합니다. 갚을 것이 없는 자를 도와준 보아스는 다윗의 증주부가 되었고, 예수님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선행을 베풀 때에 사람이 갚아 줄 것을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땅에서의 상을 기대하지 말고 하늘의 상을 기대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6:5에는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고 합니다. 16절에는 사람에게 보이기 위하여 금식하는 자들에게도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고 합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율법적 신앙도 이미 자기 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 세상의 상, 이 세상의 보상, 이 세상의 갚음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빈 털털이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나사로는 갚을 것이 전혀 없는 부잣집 문 앞의 거지였습니다. 부자는 세상에서 상을 이미 다 받았습니다. 거지 나사로는 갚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나사로는 세상에서 상이 없습니다. 세상의 온갖 고생만 했지 갚을 것이 없습니다. 세상에서 자랑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복을 받은 것입니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가지려 하기보다 버려야 합니다. 어떤 분이 행복하기 위해 버려야 할 것이 여덟 가지라고 하였습니다. 나이걱정, 과거에 대한 후회, 비교, 자격지심, 개인주의, 미루기, 강박증, 막연한 기대감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에서 복 있기 위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버려야 합니다. 버려야 할 것들이 많아야 하나님의 나라에서 복이 있습니다. 
  
성경은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고 하는 말이 두 곳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5:12과 누가복음 6:23입니다. 세상에서 핍박을 받을 때, 의를 위하여 주님을 위하여 박해를 받을 때 하늘의 상이 큽니다. 세상에서 받을 것이 없고, 갚을 것이 없고, 가난하고, 박해 당하는 이런 사람이 하늘에서 상이 크고 복이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15절에는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가 복되도다”고 합니다. 세상 떡이 아니라 하늘의 떡을 먹는 자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복이 있습니다. 이 땅에서 아무리 떡을 잘 먹어도 소용없습니다. 하늘에서 떡을 잘 먹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잘 먹어도 하나님의 나라에서 먹지 못하면 아무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가 복되도다”는 말은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메시야 사상을 표현한 말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강림하실 때에 큰 잔치를 베푸실 것입니다. 팔레스타인은 기근이 삶이었습니다. 성경에도 족장이라고 하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두가 기근과 관련이 있습니다. 좀 전에 말씀드린 나오미도 흉년이 들어 모압으로 갔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메시야관에는 메사야가 도래하게 되면 굶주림이 없이 모든 사람이 배불리 먹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메사야가 오시고 잔치를 베풀게 되면 이방인들과 죄인들은 잔치에 참여하지 못할 것이며 오직 유대인들만 참석하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실컷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서 먹을 수 있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시고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그런 의미에서 메시야적 기적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으로 모든 사람을 배불리 먹이셨으니 메시야가 오셨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6장의 기록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에게 너희 조상들은 만나를 먹고도 죽었지만 예수님께서 생명의 떡이며 생명의 물이므로 예수님을 먹고 마시면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떡을 먹고 물을 마시라고 하십니다. 이 말을 듣고 군중들은 다 실망하였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배부르고 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당장 이 땅에서 배부르고 복이 있는 것을 원했기에 이 말씀을 듣고 뿔뿔이 다 흩어졌습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다시 보세요. 세상에서 호의호식하던 부자는 음부로 갔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는 거지 나사로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목이 마르니 나사로를 보내 달라고 합니다. 왜 그랬습니까? 물 한 방울이 아쉬워 그랬습니다. 떡도 아닌 물입니다. 그것도 많은 물이 아닌 한 방울의 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가난한 자, 복 없는 자의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인생역전’이란 말을 하지 않습니까? 위치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요셉과 형들을 보세요. 동생을 팔고 힘을 과시하던 형들이 애굽에 와서 동생 앞에 꿇어앉아 “내 주여”라고 합니다. 아론은 모세보다 세 살이나 형이었지만 하나님은 영을 동생을 위하여 함께 보냅니다. 형인 아론은 동생인 모세에게 “내 주여”라고 합니다. 성경에는 세상에서의 위치가 완전히 바뀐 경우가 많습니다. 세상에서 복이 있다고 좋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복이 있어야 좋은 것입니다. 이 복이 영원한 것입니다. 
  
전 세계 인구 가운데 8억5000만 명이 굶주려 있습니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의 통계에 의하면 적당한 음식과 물, 보건 위생과 교육을 제공받지 못하는 여성은 7억 명 가량이라고 합니다. 이런 남성은 약 5억 명입니다. 전 세계 20%의 인구가 음식에 대한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먹기 위해 안간 힘을 쓰고 있습니다. 
  
‘부자 하나면 세 동네가 망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세상이 불공평하고 한 사람이 너무 많이 독식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어떤 사람은 너무 많이 먹고, 어떤 사람은 너무 적게 먹기 때문에 문제가 있습니다. 세상 나라는 언제까지나 그럴 것입니다. 
  
육신을 위한 양식에 이렇게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면서 생명의 양식, 영혼의 양식에 대해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염려하고 삽니까? 하나님 나라에서 잘 먹을 수 있도록 하는 관심이 얼마나 있습니까? ‘세계선교 연간 통계표’에 의하면 12억 내지 14억 명의 세계인이 복음을 들을 기회가 전혀 없다고 합니다. 육신의 양식이 없는 사람과 맞먹는 숫자입니다. 이 인구에 대하여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 양식을 먹게 하려고 애쓰고 있습니까? 
  
중고등학생 세대의 키워드는 마우스와 힙합이라고 합니다. 대학생 세대의 키워드는 휴대폰입니다. 사회초년병 세대의 키워드는 마이카입니다. 중년층 세대의 키워드는 가족과 커리어입니다. 그런데 장년층 세대의 키워드는 음식과 건강입니다. 
  
음식과 건강은 이제 우리 시대의 이데올로기입니다. 장수하기 위해서는 적게 먹으라고 합니다. 정해진 시간에 일정한 양만 먹으라고 합니다. 튀긴 음식과 짠 음식을 멀리하라고 합니다. 최근에는 예수님의 다이어트도 인기입니다. 예수님의 식습관은 날씬한 몸매와 건강을 지킬 수 있는 비결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주식은 밀떡과 포도주였습니다. 지중해식 음식인 밀떡, 생선, 포도주, 올리브유는 정말 다이어트에 좋은 식품들입니다. 

지중해 사람들이 많이 먹는 양고기도 그렇습니다. 어떤 분은 고기 중에는 양고기만 먹는 분이 있습니다. 성경적이고 가장 좋은 고기랍니다. 하나님도 양고기를 좋아하셨답니다. 하나님은 특히 바싹 구운 것을 좋아하셨습니다. ‘웰던’을 좋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양고기를 태워서 드셨다고 하네요. 이런 장수식품, 다이어트 모두가 배부른 자의 소리입니다. ‘맞기 싫은 매는 맞아도 먹기 싫은 음식은 못 먹는다’고 합니다. 이런 말도 다 배불러 하는 소리입니다. 지금도 인육을 먹는다는 말이 나오고 ‘초근목피’를 먹는 사람도 있습니다. 
  
인간 사회는 언제나 두 개의 계급만 존재해 왔고 존재한다고 합니다. 식욕보다 먹을 것이 넘치는 계급과 먹을 것보다 식욕이 넘치는 계급입니다. 너무 많이 먹는 사람과 너무 못 먹는 사람이 공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모두에게 공평합니다. 
  
요한계시록 3:20에는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풍성한 식탁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마시고, 영원히 배고프지 않는 떡을 먹는 것, 이것이 최고의 복입니다. 

하늘을 높이 나는 새도 먹이는 땅에서 얻습니다. 우리는 땅에서 살지만 떡은 하늘에서 얻읍시다. 하나님의 나라에 가면 이 떡을 영원히 먹을 것입니다. 경제가 참 어렵습니다. 이런 때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복 있는 자로 초대하기 가장 좋은 기회입니다. 지금 우리가 하는 ‘예장 300만 운동’ 전도운동은 우리 시대의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이사야 55:1에는 “오호라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복음 중의 복음입니다. 목마른 자, 돈 없는 자 모두를 하나님의 나라에는 초대합니다. 
  
어떤 사람이 아내에게 “이번 결혼기념일 어디 가고 싶어?”라고 했습니다. 아내는 “내가 한 번도 안 가봤던 곳에 가요!”라고 했습니다. 남편은 “그럼 부엌이 어떨까?”라고 했습니다. 글쓴이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날 나는 집에서 쫓겨났다.” 이런 분들 꼭 하나님의 나라에 가세요. 부엌에 갈 필요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먹을 것이 풍성합니다. 보석 좋아하시는 분들도 꼭 가세요. 하나님의 나라에는 보석이 가득합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나라에 복 있는 자가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성희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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