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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장하는 믿음 (요 20:2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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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하는 믿음  (요 20:24~29)


평생을 인도의 켈커타에서 빈민의 어머니가 되어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는 헌신의 삶을 살았던 빈자의 성녀 ‘마더 테레사’ 수녀는 1979년 12월 11일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인도의 전통 의상 사리옷을 입고 샌들을 신고 상을 수상한 그녀는 수상 연설을 통해 이렇게 말한바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사랑하다고 하면서 이웃을 사랑할 수는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상에서 죽으신 그는 먼저 배고픈 자, 벌거벗으신 자, 집 없는 자중에 오신 분이셨으며, 따라서 우리는 바로 그런 이들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찾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어디에나 계십니다. 그는 우리 마음에 계시며, 우리가 만나는 가난한 이들 가운데 계시며, 우리가 주고받는 미소 가운데도 계십니다." 

그런데 평생을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았던 그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고뇌하고 회의했다는 고백이 적힌 편지들이 책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최근 마이클 반 델 피트(Michael van der Peet)라는 사제에게 노벨상 수상 3개월 전까지 보낸 편지를 통해 그녀가 고백한 믿음의 고뇌가 "와서 나의 빛이 되어 주시오"(Come Be My Light)라는 책으로 출간되었습니다. 
그 책에서 마더 테레사는 이런 정직한 믿음의 회의를 털어놓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특별히 사랑하고 계신 듯 합니다. 그러나 내게는 침묵과 공허가 너무 커서 그분을 보려 해도 보지 못하고 있으며 들으려 해도 듣지 못하고 있으며 기도의 혀를 움직이고자 해도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발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이런 그의 고백에 대하여 무신론자들은 옳거니 ... 하며 “종교는 인간이 만들어낸 허구라는 것을 그가 증명한 것” 이라며 잘 됐다는 듯이 신앙인들을 공격하고 있지만 그녀는 그러한 깊은 영적인 회의를 가슴에 품고서도 평생을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서 “나의 행복은 오직 당신 뿐” 이라고 주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 삶을 살았습니다. 
테레사 수녀를 성인의 반열에 오를 수 있도록 힘썼던 ‘부라이언 콜로디에추크’ 신부는 테레사 수녀의 이러한 회의에 대하여 “기독교인들이라면 누구나 경험하는 신앙속의 어둠(darkness with in faith)을 평생 껴안고 살면서 믿음으로 궁극적 구원을 일구어 냈다“ 라고 평가하였습니다. 

테레샤 수녀가 평생 안고 살았던 신앙속의 어둠(darkness with in faith) 에 대한 경험을 또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합니다. 영성학자들은 신앙속의 어둠을 “하나님의 부재"(Absence of God)의 경험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영혼의 어둔 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이런 영혼의 밤을 지날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의 열두 제자중 하나인 도마가 이런 믿음의 회의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죽은 줄 알았던 예수님이 눈앞에 등장하자 이것을 도마는 그의 상식적인 이성으로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믿을 수도 수용할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도마는 어떻게 합니까? 

1. 믿음의 회의(懷疑)를 정직하게 표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도마는 도무지 자신은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상식과 지식으로부터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만으로 믿어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 회의(懷疑)가 찾아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의 과정에서 찾아오는 이러한 영적인 회의들을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성장하는 아이들이 끊임없이 “왜” 라는 질문을 하면서 세상을 배우듯이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의 회의(懷疑)를 신앙 성장의 한 과정으로 생각하고 정직하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믿음에 대한 회의를 말하면 믿음 없는 사람으로 오해 받을 것을 두려워하는 나머지 우리들의 신앙 풍토에는 아예 회의에 대한 생각을 말하지 않는 그리고 말하지 못하게 하는 경향이 존재합니다. 이것은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정직한 모든 회의는 진리를 진지하게 구하는 진실한 태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 믿어질 때 진실하게 안 믿어진다는 표현을 해야 합니다. 진리를 찾기 위해서 진지하게 질문하는 사람은 결국 믿음의 해답을 얻고 믿음의 진보를 경험합니다. 결코 질문하지 않는 학생들은 공부 잘하지 못합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정직한 의심을 표현했던 도마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는 12사도중의 한 사람으로 아주 소중한 예수님의 일군이 되었고 인도에 가서 선교하여 인도 선교의 문을 열고 순교하게 됩니다. 만일 당신이 정직한 의심에 쌓여 있다면 그것은 믿음 없음의 증거가 아니라, 유능한 전도자나 선교사가 될 징조인 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25절에 나타난 도마의 솔직한 회의의 표현을 주목하십시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이런 도마의 회의적 반응에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예수님은 그런 반응에 마귀적이라고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의 대답을 27절에서 읽어 보십시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주님께서 말씀하신 태도는 결코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는 책망이나 꾸지람이 아닙니다. 
네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자신의 믿음을 검증하고 믿음의 진정성을 확인하고 네 안에 있는 회의를 극복하라고 는 따듯한 격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의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진리를 믿고 있는 것이라면 진리를 두려워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정직한 회의는 진리의 문을 여는 열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의를 진지하게 표현하십시오. 그리고 기도하십시오. 토론하십시오. 연구하십시오. 주님은 정직한 회의를 환영하는 분이십니다. 분명 지독한 회의감에서 벗어나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2.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신앙 생활의 과정에서 오는 회의감을 극복하려면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대개의 경우 회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떤 경험이나 체험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계신 실제적인 어떤 증거들을 경험할 때, 예를 들어 기도하여 병이 낫는 체험이라든지... 신비한 어떤 은사를 경험함으로서 신앙적인 회의가 극복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회의를 극복하고 성숙하는 신앙은 주님의 말씀을 붙드는 신앙입니다. 
회의를 극복하고 안정적인 신앙에 들어가려면 말씀에 대한 신뢰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벧후 1장 16절 이하에 보면 사도 베드로는 그가 예수님과 함께 소위 변화산으로 알려진 산상에 올라가 예수님이 모세, 엘리야와 함께 등장하여 거룩한 모습으로 변화하시고 하늘의 문이 열리며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음성이 들리는 놀라운 체험의 목격자가 된 것을 회고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체험이 있는 그는 이어서 이런 신비한 체험보다도 우리가 믿음의 근거로 붙들어야 할 더 확실한 것이 있다고 그는 증언합니다. 
벧후1:19을 보십시오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 까지 너희가 이것(성경 말씀)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어떤 체험이나 경험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도마는 예수님이 부활하였다는 사실에 대하여 회의 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회의에 빠진 도마에게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는 도마가 예수님의 옆구리에 손가락을 실제로 넣어 보았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유명한 화가 카라바지오(Caravaggio)는 도마가 실제로 예수님의 옆구리에 손가락을 넣는 것으로 그렸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의 기록과 다릅니다. 성경에는 도마가 예수님의 옆구리에 손을 넣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내 옆구리에 손을 넣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실 때 도마가 보인 반응이 무엇이었습니까? 28절입니다.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결국 도마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드리고 주님 앞에 엎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또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29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도마는 처음 신앙의 증거와 체험을 요구하는 제자였지만, 그는 마지막 단계에서 주님의 말씀을 받아드리고 말씀만으로 믿는 제자가 되어 다시 일어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에 믿음의 닻을 내리는 사람만이 견고한 믿음의 항해를 계속할 것입니다. 회의를 극복하고자 하십니까? 그러면 무엇보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시기를 축원합니다. 

3. 공동체를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세 번째로 회의에서 벗어나려면 공동체를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도마가 회의에 빠지게 된 계기를 관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도마가 공동체를 소홀히 한 까닭이었습니다. 
본문이 시작되는 24절 말씀을 읽어 보십시오.
"열두 제자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만일 도마가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처음 자신을 나타내셨을 때 거기 있었다면 다른 제자들과 달리 혼자 회의에 빠질 이유가 있었을까요? 
그러나 불행하게 그때 도마는 어떤 이유인지 제자들의 모임에서 이탈해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의 신앙은 공동체를 통해서만 성숙하도록 하나님은 디자인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10:25)고 말씀합니다. 
예배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성도의 교제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우리 교회 가장 중요한 교제의 장인 구역 모임과 각 기관 모임에 꼭 참여 하십시오. 그 곳이 우리가 진정한 믿음의 가족들을 경험하며 서로가 영적으로 자라가는 성숙의 마당인 것입니다.

지난 금요일 심야 기도회에 모두 모두 69명 만이 참석했습니다. 마음이 그랬습니다. 기도회를 인도하면서 주님께 회개했습니다. 
주일 낮에 700명이 넘게 참석하는 예배 숫자가 저녁 예배 때 300명도 못 채웁니다. 숫자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숫자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최근에 새벽기도와 심야 기도회 참석수가 현저히 줄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첫째로 그 이유가 제게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금년 들어 몸이 약해저서 마음도 약해졌습니다. 그래서 예전처럼 피곤해도 내 몸 돌보지 않고 악착같이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집회와 선교지 방문등 외부 활동이 많아져서 몸이 많이 지쳐 있었습니다. 예전 같으면 아무리 피곤하고 아파도 하루 밤 자고 나면 거뜬하던 몸이 이젠 그렇지 않은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목사가 조금 아프고 피곤하다고 새벽에 못 나오고 누워있었으니 장로님들이 잠들었고 권사님들이 잠들었고 안수 집사님들이 잠들었던 것입니다. 교인들이 잠들고 있었습니다. 
제가 잘한 것이 없어서 심하게 나무라지도 못함을 용서해 주십시오. 그러나 그래도 우리 일어나야 합니다. 
예배와 기도의 공동체에서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영국에서 일어난 청교도 운동은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교회 개혁운동이었습니다. 그 시대에 성도들은 철저하게 "주일 예배를 성수한다. 가능한 주간 성도의 교제 모임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 라는 신앙 원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 한 이유가 성경적인 명령 때문이기도 했지만, 거기에는 그들 나름의 아주 실용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서로 이렇게 모임 참석을 격려했다고 전해집니다.
"당신이 빠진 그날 모임에 주님이 특별하게 자신을 나타내시고 부흥이 일어난다면 형제 자매여, 당신의 영적 손해를 상상해 보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공동체 생활 즉 기도와 예배 모임에 적극적으로 열심을 내야 하는 이유는 주님이 공동체에 임하시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 각자에게 개인적으로 방문하지 않으셨습니다. 둘 또는 셋 그리고 전체가 모여있는 곳에 나타나시고 역사하셨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신실한 신앙인은 모이기를 힘쓰고 모임을 즐겨 생각합니다. 

도마는 그가 힘써야 할 공동체 생활에 열심하지 않았습니다. 
본문은 부활하신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오셨을 때에 그곳에 도마가 없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결국 그 자리에.. 그중요한 자리에 없었다는 것이 바로 도마가 회의감에 빠지게 된 원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회에서 모이는 예배 모임에는 가능하면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청교도 들처럼 내가 빠진 그 시간에 하나님의 어떤 역사가 일어날지 어떻게 압니까? 

미국의 유명한 루스벨트 대통령 당시 그가 출석하던 워싱톤의 한 교회에 토요일 이런 전화가 걸려 왔다고 합니다.
“이번 주일에 루스벨트 대통령께서 교회 예배에 참석합니까?”
이때 그 교회의 행정을 담당하던 분이 아주 기막힌 전설적인 명답을 한 것으로 전해옵니다.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참석은 불확실합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께서는 예배에 반드시 참석하실 것입니다. 그 분을 만나러 오시면 좋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주일 모임에 올 때마다 하나님의 임재를 기대하고 예배를 드린다면 그리고 구역 모임에 참여 한다면 우리는 다시 한 번 위대한 영적 부흥을 체험할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믿음의 회의는 눈 녹듯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견고하게 자라 갈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찬란한 빛을 발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바꾸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주님 오실 때 까지 순간 순간 찾아오는 신앙의 회의를 극복하고 성장하는 믿음이 됩시다. 도마처럼 의심을 극복하고 세상에 주님의 이름을 드러내는 위대한 주님의 일군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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