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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도의 응답 (마 6: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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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응답 (마 6:9~11)


오늘 새벽부터 2009년 봄철 다니엘 새벽기도회를 시작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쉬지 말고’ 기도해야하지만 특별히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요청하실 때가 있습니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를 요청하실 때가 언제인지 살펴보면서 말씀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찰스 스탠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이란 책에서 아래와 같은 경우는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강력하게 요청하실 때라고 가르쳤습니다. 

① 불안한 영혼 

이상하게 우리 마음이 불안할 때가 있습니다. 
이유도 알 수 없고, 정체도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놓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요청하실 때 사용하시는 가장 간단한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하던 일을 멈추고 하나님께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에스더 6장에 보면 불안한 영혼을 통해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예가 나옵니다. 
아하수에로 왕이 모든 유대인들을 처형한다는 조서에 서명을 했습니다. 
그런데 왕은 그 조서에 서명을 하고 난 다음에 불안하여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에6:1절 “이 밤에 왕이 잠이 오지 아니하므로 명하여 역대일기를 가져다가 자기 앞에서 읽히더니.” 
그러다가 하만 총리가 죽이려는 모르드개가 사실은 자신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알려주어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을 죽이려는 하만 총리를 처형하고, 모르드개에게는 상을 내렸습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이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불안하여 잠을 못 이룰 때, ‘잠이 오지 않는다.’고 불면증을 호소하지 말고 ‘아,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요청하시는구나.’라는 사실을 깨닫고 즉시 무릎을 꿇으십시오. 

② 다른 사람의 권면 

하나님은 다른 사람, 특별히 신실한 사람들을 통하여 우리의 기도를 요청하십니다. 
따라서 주위의 신실한 사람들이 “자매님, 기도하세요.”라고 권면할 때, 예수쟁이들이 흔히 하는 소리거니 하지 말고 하나님의 기도요청으로 받아들이시길 바랍니다. 
삼하 12장에 보면 그 예를 볼 수 있습니다. 
다윗왕은 밧세바와 우리아 사건으로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후에도 표면상으로는 아무 일도 없는 듯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그때 나단이라는 선지자가 다윗 앞에 나타났습니다. 
삼하12:1절 “여호와께서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시니 와서 저에게 이르되........” 
여기 보십시오. 
누가 나단을 다윗왕에게 보냈다고 했습니까? 
여호와이지요! 
다윗왕은 나단의 권면을 “네가 뭔데 감히......”라고 불쾌하게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왕은 나단 선지자를 하나님이 보내신 사자인 줄 알고, 그의 말을 신중하게 듣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주위 사람들의 기도권면을 귓등으로 넘기지 말고 하나님의 기도요청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으십시오. 

③ 축복 

하나님께서 뜻밖의 축복을 통하여 우리의 기도를 요청하실 경우가 있습니다. 
그 축복이 영적인 것일 수도 있고, 재정적인 것일 수도 있고, 자녀에 대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예기치 못하는 축복을 받음으로 “하나님, 저는 받을 자격이 없는데 왜 이렇게 축복하십니까?”라고 감격하여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께 돌릴 때가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롬 2:4절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따라서 우리는 예기치 못한 축복을 받을 때 ‘내 복이거니’ 하여 하나님의 뜻을 멸시치 말고 무릎을 꿇을 줄 알아야 합니다. 

④ 응답되지 않는 기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요청하는 방법 중에는 응답되지 않는 기도가 있습니다. 
다급한 문제를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묵묵부답일 때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욱 간절하고 끈기 있는 기도를 요청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의미 없는 침묵처럼 보이는 이러한 시간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도를 통하여 영적인 성찰을 이루길 원하실 경우가 많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간구가 응답되지 않는 이유로 다음 몇 가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정욕을 위하여 잘못 구하는 경우(약4:3), 불순종하는 경우(요일3:22)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경우(요일5:14), 결혼생활에서 하나님의 뜻하신 바를 이루지 못할 경우(벧전3:7), 등입니다. 
이럴 경우에 우리의 기도가 깊어짐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을 때 포기할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은혜를 위하여 끈기 있게 기도해야 합니다. 

⑤ 실망 

우리는 때때로 큰 좌절에 의하여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경우가 있습니다. 
좌절이 없다면, 등 따뜻하고 배부르다면, 하나님을 찾기 쉽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실망과 좌절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도를 요청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진학에 실패했을 때,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사업이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 원치 않는 사고를 당했을 때, 실직했을 때, 우리 성도들은 이런 일들을 하나님이 부르시는 신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도를 요청하는 방법 5 가지를 소개해드렸습니다. 
혹시 여러분에게 해당되는 사항이 있습니까? 
그렇다고 인정하시면 기도를 시작하십시오. 
이번 다니엘 세이레 새벽기도회를 기회로 기도하기를 시작하십시오. 
하나님의 저의 입을 통해 여러분에게 기도를 요청하시고 계십니다. 
기도하시면 많은 은혜를 체험하게 될 줄 믿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6:10)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기도일 뿐만 아니라 예수님 자신의 삶을 지배했던 핵심원리입니다. 
성경에서 예를 들어보지요.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님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이뤄드리려는 그분의 삶의 절정입니다. 
마 26:39절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예수님께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이뤄드리는 것은 삶의 동기요, 삶의 목표요, 삶의 이유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목표는 하나님의 뜻을 이뤄드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기쁨은 하나님의 뜻을 이뤄드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영광은 하나님의 뜻을 이뤄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종교와 아주 다른 부분입니다. 
절에 가보십시오. 
“비나이다. 비나이다.”하잖아요? 
그 기도의 내용이 자기 삶에서 부처님의 뜻이 이뤄지기를 구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지요! 
다 자기 욕심을 채우려는 거지요. 
다른 세속종교에서는 오직 자기의 뜻과 소원을 이루려고 기원합니다. 

K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목회가 그렇게 안 되더랍니다. 
교인들은 모이지 않고....... 그나마 있는 교인들은 서로 싸움질이나 하고, 그래서 목회를 그만둘 생각을 하고, ‘후회 없이 일주일 금식기도나 하고 그만 둬야지’라는 생각을 가지고 산에 올라갔습니다. 
소나무 뿌리를 붙잡고 간절히 밤낮으로 매어 달렸습니다. 
그런데 일주일이 다 되도록 응답이 없었어요. 
‘야~ 정말 목회는 내 길이 아닌가보다. 이렇게 통 무소식이니.......’ 
마지막 날 깜박 잠이 들었는데 꿈을 꿨습니다. 
꿈에 제단이 쌓여지고, 그 위에 나무가 얽혀서 놓여지고, 그 위에 사람이 누웠는데 자세히 보니 자기 자신이더랍니다. ‘저기다 불만 지피면 나는 타 죽고 말텐데 어떻게 하나’ 
그런데 진짜 불을 지피더랍니다. 
다 타버리고 재만 남은 것을 보고 놀라서 깨어났습니다. 
꿈 입니다! 
꿈에서 깨어난 김 목사님은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래서 자기 죽음을 선언했답니다. 
“나는 죽었다!” “ 내 뜻도 죽었다!” “내 욕심도 죽었다!” “내 자존심도 죽었다!” “내 이기심도 죽었다!” “내 성질도 죽었다!” “내 질투심도 죽었다!” 
때때로 어떤 어려운 일을 만나 속이 상해도 ‘죽은 사람이 어디에 자존심이 있느냐! 죽은 사람이 어디에 성깔이 있느냐!’ 라고 날마다 죽은 생활을 훈련했답니다. 
그랬더니 목회가 은혜롭게 되더랍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자기의 뜻을 죽이고 하나님의 뜻을 이뤄드리는 삶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습니까?(질문)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이 제시한 세 가지 방법을 소개해드립니다. 
① 이 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가? 
② 모든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일을 떳떳이 행할 수 있는가? 
어떤 사람은 목사가 “무슨 일을 하십니까?”라고 물으면 떳떳하게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그냥 그런 일 해요.”라고 얼버무립니다. 
물론 그 일을 설명하기가 번거로울 수 있겠지만, 기독교인으로서 하기엔 떳떳하지 못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일은 비록 돈이 많이 벌리더라도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③ 이 일로 인해 신앙이 성장되고 진보되는가? 

어떤 일은 일이 잘 되면 잘 될수록 하나님과 멀어지고 예배와 멀어지는 일이 있어요! 
그런 일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내가 이런 일을 계속해야 할 것인지’를 심각하게 질문해 봐야합니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이 그렇게 복잡하지 않잖아요! 
매일 생활에서 크고 작은 일을 만날 때에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 
그런데 인생을 살다보면, 선택이고 뭐고 할 여지도 없이 닥쳐오는 일들,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 일이 때로는 슬픈 일이 될 수도, 고통스러운 일이 될 수도, 너무나 엄청나고 기막힌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사람들을 관찰해 보면 그 일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몇 가지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1) 거칠게 항의하는 태도가 있을 수 있습니다.(bitter resentment) 

도망할 수도, 다른 길도 없기에 화가 잔뜩 나서 항의하는 태도로 그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  습니다. 
여러분, 베토벤을 잘 아시지요? 
베토벤의 삶은 가혹했습니다. 
특별히 음악 하는 사람으로서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완전한 귀머거리가 된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베토벤의 죽은 모습을 사람들은 이렇게 전합니다. 
“그의 주먹은 마치 하나님을 칠 듯이 움켜줘 있었고, 그의 입술은 하나님께 욕설이라도 퍼부을 듯이 잇몸을 드러내고 있었다........” 
도망할 수도, 다른 길도 없기에 하나님께 반항하며, 원망하며, 불평하며, 저주하며, 자기 운명을 사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2) 마지못해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있을 수 있습니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많이 경험하게 되지요! 
아이들이 어릴 때는 부모를 따라가려고 울고불고 하지만, 아이들이 중학생만 돼도 부모와 같이 가지 않으려고 실랑이를 합니다. 
아이들을 데리고 외출을 하면서 “야, 너 아빠하고 나오길 잘했지? 얼마나 공기가 좋으냐! 얼마나 기분이 상쾌하냐!” 라고 물으면 아이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좋긴 뭐가 좋아요! 아빠가 나가자고 하니 그냥 어쩔 수 없이 따라온 거지........괜히 아빠 말씀 안 들었다가 이런저런 잔소리 듣기보다는 차라리 따라 나오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하나님의 뜻을 이런 식으로 야단맞지 않으려고, 책망 듣지 않으려고, 얻어터지기 전에, 마지못해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있을 수 있습니다. 

3)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태도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 일속에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믿고 받아들입니다. 
항상 기뻐합니다. 
범사에 감사합니다. 
‘이 일은 지금 내가 이해할 수도 없고, 받아들이기는 더더구나 힘들지만 그 속에도 하나님의 뜻은 있어! 하나님의 뜻은 나에게 좋고 선한 것이야 하나님은 결코 실수하시는 분이 아니야.’라고 받아들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이 말씀을 되뇌고 또 되뇌면서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입니다. 
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기쁨으로 따를 수 있을까요?(질문) 

① 하나님의 지혜를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십니다. 
우리는 본질상 순간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은 그 다음 순간을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미래를 아십니다. 
여러분, 영화 ‘타이타닉’보셨지요?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영화입니다. 
그 호화로운 유람선이 한순간에 그렇게 파선될지 누가 알았나요? 
그 즐거운 무도회가 한 순간에 그렇게 아수라장이 될지 누가 알았나요? 
수평선 저 너머에 빙산이 떠내려 올 지 누가 알았나요? 
우리는 수평선 저 너머가 아니라 단 3분후의 일을 모릅니다. 
그게 인간의 한계상황이어요! 

찬송가 461장-·캄캄한 밤 사나운 바람 불 때-를 찾아봅니다.(김활란박사께서 작사하신찬송) 

2절 :비바람이 무섭게 몰아치고 그 놀란 물 큰 파도 일 때에 

     저 뱃사공 어쩔 줄 몰라 하니 아 가련하구나. 가련하구나. 

 이게 인간의 처지가 아닙니까? 

5절 :모진 바람 또 험한 큰 물결이 제 아무리 성내어 덮쳐도 

    권능의 손 그 노를 저으시니 오 맑은 바다라. 맑은 바다라. 

인생의 뱃길을 잘 아시는 선장되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믿기에 그분을 기쁨으로 따를 수 있습니다. 

② 하나님의 사랑을 믿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여러분들께 말씀드린 적이 있지요? 
아버지는 절대로 자녀의 눈에서 필요 없는 눈물을 흘리게 하지 않는답니다. 
(A father's hand will never cause his child a needless tear.) 
여러분이 잘 아시는 foot prints(발자국)이란 어느 무명시인의 시를 읽어드리겠습니다. 

“어느 날 밤에 꿈을 꾸었습니다. 그 꿈은 주님과 함께 해변을 따라 걷는 꿈이었습니다. 지나온 인생길이 펼쳐집니다. 모래위에는 두 발자국이 새겨져 있습니다. 하나는 내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주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때인가 모래위에는 발자국 하나만 새겨져 있습니다. 뒤돌아보니, 가장 힘들고 어려웠을 때였습니다. 주님께 여쭤봤습니다. ‘주님, 내가 주님을 따르기로 결정했을 때, 주님은 항상 나와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나요? 그러나 내 생애의 가장 어려울 때에 한발자국만 새겨져있어요. 나는 이해할 수가 없어요. 내가 가장 주님이 필요할 때에 왜 주님은 나를 떠났는지......’ 주님은 대답하셨습니다. ‘내 사랑하는 아이야. 나는 너를 사랑했고, 결코 너를 떠나지 않았단다. 네가 가장 힘들어 할 때 새겨진 한 발자국은 내가 너를 안고 갔기 때문이란다......” 

너무 지쳐있기에, 제 발로 걸을 수가 없었기에 안고 가셨다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가 기쁨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 있는 것은, 
ㄱ)하나님의 지혜를 믿기 때문이고 
ㄴ)하나님의 사랑을 믿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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