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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워 가는 기쁨 (마 16: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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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워 가는 기쁨 (마 16:13~28)

 
모든 인간은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싶어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으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삶을 증명할 것입니까?  어느 날 여러분이 이 땅을 떠날 때 여러분이 가지고 있었던 소지품입니까?  여러분의 이름이 여러분을 증명하겠습니까?  여러분이 안 먹고, 안 입고 힘써서 모아두었던 소유가 여러분을 증명하겠습니까?  여러분의 그 하찮은 지식이 여러분을 증명하겠습니까?  아닙니다.
 
기억하십시오.  여러분 속에 있는 삶의 아름다운 사랑만이 여러분을 증명해 줄뿐입니다.  사실 이 세상에 사랑을 주고받는 놀라움보다 더 위대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하십시오.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십시오.  여러분의 그 사랑의 입술이, 여러분의 그 사랑의 손길이 닿는 순간에 그 한 생명 속에는 이런 외침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모른다.  그렇지만 분명히 하나님이 내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전하십시오.  지금 이 땅에 있는 모든 생명들이 간절히 필요로 하는 것은 아낌없는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우리가 하나님께 구할 때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지렁이 같은 인생들아! 내가 너를 도우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혹여 지난 한 주간을 보내면서 어떤 한 사건 때문에 크게 화를 낸 적은 없었습니까?
어느 한 순간에 스스로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나의 영과 육을 지배하게 한 적은 없었습니까?
 
사실 우리 인간은 감정의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어쩌다가 화를 낼 수는 있지만 그 화가 습관화되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별 것 아닌데도 습관화되어 가지고 화를 냅니다.  그러니까 자기 성격이 자꾸 거칠어집니다.  자기 행동이 자꾸만 과격해집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스스로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분노를 통제하지도 못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습관적으로 분노하면 안됩니다.  습관적인 분노에서 자유하십시오.  그런데 이것이 내 마음대로 안됩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셔야 합니다.  습관적인 분노에서 해방 될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능력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뿐입니다.  내 안에 나도 어쩌지를 못하는 분노가 일어날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실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공격적인 성격들을 잠재워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공격에는 상대로부터 강한 불신과 저항력만 키웁니다.  그러나 칭찬과 사랑에는 모두가 무저항이 됩니다.  공격하면 긴장하게 되고, 신경이 날카로워집니다.  그러나 칭찬과 사랑에는 모든 저항을 풀어버리는 신비한 능력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은 누구나 크고 작은 절망과 아픔을 안고 가슴앓이를 하면서 한 세상을 살아갑니다.  "저 사람은 아니겠지..."  하지만 아닙니다.  때로 우리들에게 닥쳐오는 시련과 고통들은 삶이 왜 이렇게 불평등한가?  하나님 앞에 따져보고 싶은 그런 충동들이 일어날 때가 많습니다.  어느 누구의 영혼이라도 사람의 영혼은 바다와 같아서 그 표면에는 끊임없이 파도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깊은 곳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온유와 평화가 언제나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고 내 영혼 깊은 곳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로 접속을 하십시오.  그러면 넉넉히 이길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아무리 곤고할지라도 하나님의 권능에 접속하십시오.  그러면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가는 새로운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명령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구하라는 것입니다.  찾으라는 것입니다.  두드리라는 것입니다.  미련한 자라도 자식이 달라고 하면 주는데 하늘의 아버지께서 안 주시겠느냐는 이야기입니다.  미련한 자식이 달라고 하면 떡도 주고 다 주는데 왜 하나님이 안 주겠느냐?  그러므로 구하라는 것입니다.  찾으라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인간이 저지르고 있는 제일 무서운 죄악 중에 첫 번째 죄악은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부탁한 사람은 5분간 바보가 되고 끝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탁하지 않는 사람은 평생동안 바보가 되는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내 자존심이니 내 자만심이니 이런 것들은 다 던져버리고 5분간 바보가 되어서 진실하게 부탁하는 사람은 일평생 행복하고 일평생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5분간의 자존심으로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일평생 부탁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은 평생을 후회하면서 보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대개 부탁하지 않는 사람들은 자존심이 센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만큼 어리석은 사람은 없습니다.  남에게 부탁할 줄 모르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들입니다.  5분간의 자존심을 깨지 못하고 지키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일평생 바보가 되지 말고 우리 주님의 이름을 붙들고 구하십시오.  찾으십시오.  문을 두드리십시오.
 
기억하십시오.  구하는 자에게만 미래가 열립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니까 아무 사람에게나 미래가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구하는 자에게 미래가 열립니다.  끝없이 구하고 있는 사람은 낙심하지 않습니다.  끝없이 구하고 있는 사람은 실망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변을 가만히 보십시오.  대개 실망하고 낙심하는 사람들을 보면 구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섬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바보가 되십시오.  바보가 되어서 구하십시오.  끊임없이 찾고 두드리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삶에는 놀라운 평안과 기쁨이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여러분들에게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여러분, 행복하기 때문에 웃습니까, 웃다보니 행복해집니까?  솔직하게 대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안타까운 것은 오늘 많은 사람들은 행복하니까 웃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파랑새가 되어 이리 저리 행복을 찾아다닙니다.
 
그러나 제가 목회를 하면서 수많은 사람, 수많은 가정들을 보면 행복해서 웃고 사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웃다보니까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자꾸 웃으십시오.  웃으면 복을 받습니다.  오래 살고 싶으면 웃으십시오.  아침에 일어나서 그 모습 그대로 웃으십시오.  놀라운 것은 웃으면 암도 다 낫는다고 합니다.  웃으면 모든 질병이 다 낫는다고 합니다.  근심이 뼈를 녹인다고 했습니다.  무슨 약, 무슨 약 해도 웃음이 최고의 보약입니다.  사람과 사람을 제일 가깝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  웃음입니다.  사람과 하나님을 제일 가깝게 하는 것도 웃음입니다.

지난 주간에 제가 휴대폰으로 컴퓨터의 전원을 자유롭게 관리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았습니다.  휴대폰으로 컴퓨터의 전원을 자유롭게 관리할 수 있는 방법을 아십니까?  얼마나 편리한지 모릅니다.  제가 가르쳐 드릴 테니까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일단 휴대폰을 준비합니다.  기억할 것은 반드시 최신기종이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음으로 휴대폰의 상단이 컴퓨터 본체를 향하게 하여 듭니다.  그 상태로 본체로 다가갑니다.  그리고 휴대폰으로 살며시 본체의 전원 버튼을 누릅니다.  추심. 끄는 요령도 동일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웃으십시오.  웃음이야말로 생명의 제일 귀한 창조입니다.  창조력이 없는 사람은 절대로 웃을 수 없습니다.  우리들 주위에 보면 반응력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네가 화를 내니 나도 화를 내고, 네가 혈기를 내니 나도 혈기를 내고, 네가 감정적으로 대하니 나도 감정적으로 대하고, 네가 막 말을 하니 나도 막 말을 하고.  그런데 이런 반응적인 사람들은 절대로 웃지 못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인생은 반응을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창조를 위해 태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붙들고 우리 주님의 권능에 취해서 반응하지 말고 창조하는 사람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름지기 건강한 신앙인은 자기 신앙의 영적 성장을 위해서 끊임없는 자기 헌신과 도전이 있어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영적 성장은 오토매틱이 아닙니다.  교회에 나오면, 예배에만 참석하면 믿음이 성장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착각이요, 자기 합리화일 뿐입니다.
 
일주일에 한번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생명줄만 부지하고 살아가는 것이지 영적 성장은 어렵습니다.  모유도 먹어야 되고, 이유식도 먹어야 됩니다.  밥과 고기도 먹어야 됩니다.  생활의 기초도 다져야 합니다.  훈련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다닌 경력에 따라서 성장한 그리스도인이냐 아니냐를 결정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

사랑하는 여러분, 영적 성장은 시간이 흐른다고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영적 성장은 의지적인 훈련이 있어야 합니다.  성장하기 위해서는 헌신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영적으로 성장하기를 원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성장하려고 결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결심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기 위해서 구체적인 자기 헌신과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한 마리의 새가 하늘을 솟아오르기까지 얼마나 퍼덕거리고 애를 쓰는지 모릅니다.  수 천, 수 만번 날개를 퍼덕거리며 날다가 떨어지고, 날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합니다.  그러면서 하늘을 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루아침에 되는 것 아닙니다.
 
독수리가 집을 짓는 방법을 관찰해 보십시오.  독수리는 제일 먼저 새끼들이 살 수 있는 집을 지을 때 사용하는 재료는 가시덤불을 가져다가 놓습니다.  삐쭉삐쭉 찌르는 돌멩이들을 가져다 박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짐승이나 새의 깃털을 덮어서 보금자리 둥지를 만듭니다.  어릴 때는 먹이를 갖다 나릅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독수리가 자라면 바깥으로 날 수 있도록 퍼덕거려 줍니다
 
 그러나 새끼는 나가기 싫어서 날개를 접고 안으로 더 웅크리고 들어갑니다.  그때 어미 독수리가 둥지에서 날개를 퍼덕거리면 깃털은 다 날아가고 가시덤불과 삐쭉삐쭉 찌르는 돌멩이들만 남습니다.  거기서 견딜 수 없던 새끼들이 벼랑에서 떨어집니다.  새끼들이 잘 날지 못해서 땅에 떨어지게 될 것 같으면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어미는 쏜살같이 날아가서 새끼를 잡아채어 안전하게 해줍니다.  그렇게 하기를 수십 번, 수백 번 하는 사이에 독수리는 하늘을 가르는 하늘의 왕자로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내가 스스로 훈련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내 보금자리를 흔들어서라도 하나님 앞에 나와 기도하게 하십니다.  때로는 고난을 주고 시련을 줘서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이 예수님을 닮아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룰 믿고 교회에 다닌 지 10년 20년이 되었음에도 영적으로 성장하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계속 기저귀를 차고 젖병을 빨며 영적 유아상태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영적 성장을 위한 자기 헌신과 도전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육체의 안식과 평안을 위해서는 노력하고 투자하면서도 영적 안식과 평안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어느 날 갑자기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그들도 우리들과 똑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우리들과 다른 것은 그들은 자신의 영적 성장을 위해서 육신의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끊임없이 헌신하고 도전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고, 시대적 소명을 감당하기 위해 자신 안에 일어나는 육체적 욕망과 싸웠습니다.  육신의 법이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성령의 도우심을 구했습니다.
 
그러므로 기억하십시오.  자녀는 태어납니다.  그러나 제자는 만들어집니다.  목사인 제가 확실하게 말씀을 드릴 수 있는 것은 지금 여러분이 어떤 일에 헌신하고 있는가를 보면 5년 10년 이후 여러분이 어떤 모습의 그리스도인이 되어 있는지를 예견해 드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자녀를 얻었을 때 얼마나 흥분했습니까?  나를 꼭 닮은 이 생명의 신비!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갈 때에 기뻐하십니다.  흥분하십니다.  좋아하십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목적은 그저 편안하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성품,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인격, 그리스도와 같은 사역자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실패하는 신앙생활을 했어도 괜찮습니다.  초라한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했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이제는 전반전이 끝났습니다.  후반전의 생애가 우리 앞에 남았습니다.  후반전에는 멋있게 역전하는 아름다운 신앙생활을 하나님 앞에 올려드릴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더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헌신과 도전을 멈추지 마십시오.

오늘 우리가 함께 봉독한 본문의 배경은 예수님께서 3년에 걸친 공생애를 매듭지으시고 이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목에서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과는 정반대 방향인 북쪽으로 향하고 계십니다.  바로 변화산으로 알려진 헬몬산에 가시기 위해서입니다.
 
마태복음 17장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변화산이라고 알려져 있는 헬몬산에서 거룩하게 변화되신 모습으로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말씀을 나누십니다.  특별히 누가복음 9장 31절에 보면, 이 변화산에서 예수님께서는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를 나누시면서 예수께서 인간의 죄 값을 치르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바로 그 헬몬산을 향하시는 도중에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헬몬산을 향하시면서 주님께서는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곳을 통과하시게 됩니다.  이 마을은 해발 3300m에 이르는 헬몬산 자락 345m 지점에 위치한 조그마한 마을이었습니다.  우리 나라 설악산이 1700m쯤 되니까 가히 그 높이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동네에서는 만년설이 뒤덮여 있는 헬몬산 정상이 언제나 올려다 보이는 그림처럼 아름다운 산골 동네였습니다.  그런데 갈릴리의 분봉왕이었던 헤롯 빌립이 바로 이 마을에 신도시를 건설했습니다.  그리고 도시 이름을 로마 황제 가이샤의 이름과 자기 자신의 이름 빌립을 덧붙여서 '가이사랴 빌립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당시 로마 제국 내에는 로마 황제의 이름이 붙여 있는 도시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 도시에나 황제의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황제의 이름을 붙이기 위해서는 그만한 조건이 선행되어야만 했습니다.  로마 황제의 이름을 붙이기 위해서는 도시 한 가운데, 혹은 그 도시의 가장 높은 곳에 반드시 황제의 신상을 세워야만 했습니다.
 
당시 로마 황제는 살아있는 신이었습니다.  따라서 한 도시 이름에 로마 황제 가이샤의 이름이 붙어 있다고 하는 것은 이 도시 한 가운데 황제를 신으로 추앙하는 신상이 자리잡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바로 그 도시를 배경 삼아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얘들아,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이것은 빈들의 광야 위에서 던져진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황제의 도시, 황제의 신전이 자리잡고 있는 가이사랴 빌립보를 배경으로 던져진 질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바로 여기 우상과 죄악의 도시 한 복판에 세워졌습니다.  역사가들의 말에 따르자면, 그곳은 수리아의 바알 숭배 중심지였다고 합니다.  바로 그곳에 14개나 되는 바알 신전들이 있었습니다.  바알에 대한 예배는 풍요를 기원하는 의식들이 음란한 행위들과 함께 자주 진행되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그 근처에는 커다란 언덕이 있었고, 그 한 가운데 깊은 동굴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동굴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자연의 신 판(Pan)의 출생지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가이사랴 빌립보는 수리아의 바알 숭배와 그리스 신화와 관련된 죄악들이 창궐했던 곳이었습니다.  거기다 웅대한 황제의 신상이 우뚝 버티고 서 있는 빌립보를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이 얼마나 드라마틱한 상황입니까?
 
바로 이런 거대한 분위기 속에서, 이렇게 화려한 세상 종교들 속에서, 그들의 모든 역사와 세력의 한 가운데서, 그리고 그들의 모든 부도덕한 범죄들의 한 가운데서, 이제 겨우 12명의 제자들을 거느린 집도 없고 권력도 없던 나사렛 예수가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현대 교회가 부흥하지 못하고 번성하지 못하고 승리하지 못하는 이유는 이 세상이 너무 악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우리 시대의 모든 문화는 교회에 대하여 너무 비호의적이며 반기독교적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교회가 처음 세워질 당시의 상황은 우리의 이런 핑계를 무색하게 만들지 않습니까?  우리를 얼마나 부끄럽게 만들고 있습니까?

세계를 정복했던 로마의 땅에서, 우상의 동굴 밑에 둘러서서, 위용을 자랑하는 거대한 황제의 신상을 바라보며, 그곳 가이사랴 빌립보 땅을 함께 밟고 서서 주님께서 물으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이 대답했습니다.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또 어떤 사람은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 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언뜻 생각하면 제자들의 대답은 주님에 대한 칭송처럼 들려집니다.  그러나 가이사랴 빌립보를 우리의 머리 속에 그려본다면 이것은 결코 칭송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머리 속에 당시의 웅장하고 화려한 로마의 가이사랴 빌립보를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12 제자의 모습을 비교해 보십시오.  그들의 깡마른 모습, 초라한 옷차림.  한 마디로 거지 일행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갈릴리 빈민 출신인 예수 그리스도의 행색이야말로 로마 황제 신전의 문지기보다 더 못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잔뜩 기가 죽어 주님께 대답했습니다.
"사람들은 선지자 중에 하나라고 합니다."
 
이 말은 어떤 경우에도 사람들은 당신과 같은 행색을 하고 있는 분을 로마 황제처럼 살아있는 신으로 여기지는 않는다는 뜻입니다.  기껏해야 똑같은 몰골로 이 땅에서 일했었던 유대 선지자 중 한 명 정도로 생각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사람들은 예수의 일행을 바라보면서 그 옛날 울며 울며 외치던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를 생각했을까요?  음란한 아내를 찾아 맨발로 뛰어 다니던 호세아를 생각했을까요?

주님께서 다시 물으셨습니다.  "그렇다면 너희들에게 있어서 나는 누구냐?"  가이사랴 빌립보 황제의 신상 앞에서 주님께서 물으셨습니다.
"너희들에게 나는 누구냐?"
 
베드로가 대답을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것은 삭막한 광야의 벌판 위에서 행해진 인간의 고백이 아닙니다.  거대하고 화려한 황제의 도시 한 가운데서 예수님을 향해 드려진 고백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부귀와 명예를 쫓아가는 그 화려한 자리에 서서 당신이 홀로 주님을 향해 드릴 수 있는 고백이 무엇입니까?  내가 서 있는 삶의 모든 상황들이 초라하게 느껴질 그 순간에 진정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이요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베드로의 이 고백에는 다음의 두 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첫째로 주는 그리스도시라는 것입니다.  원문에는 '주'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원문에는 베드로가 '당신'이라고 불렀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세상 사람들은 당신을 주목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나의 그리스도십니다.  저 웅장한 로마 제국의 황제가 구원자가 아니라 비록 초라한 행색일망정 당신만이 나의 구원자라는 의미입니다.
 
두 번째로 당신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당신을 보고 맨발의 선지자 정도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외관상 어떤 모양을 하고 있든지 당신은 분명히 하나님이십니다.

베드로는 지금 이 사실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저 황제의 신전에서 인간의 추앙을 받고 경배를 받는 로마 황제가 신이 아니라 그 신전의 문지기보다 못한 옷을 입고 있을망정 당신이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 고백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드려진 고백이 아닙니다.  황제의 도시 한 가운데서, 황제의 신전 앞에서 옹색한 모습의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 드려졌던 고백입니다.

죄악의 땅 우상의 도시 한 가운데서 어떤 도전과 유혹, 어떤 가치와 논리에도 굴하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님만을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다고 고백하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주님은 놀라운 축복의 말씀을 주십니다.
 
본문 17절과 18절을 다같이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문제 투성이 베드로였습니다.  크고 작은 결점들과 실패로 가득찬 베드로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그렇게 나약하고, 약점 많고, 허물 많은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것은 교회 역사가 우리들에게 증거하고 있는 놀라운 비밀이요 신비이기도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주님의 몸된 교회는 강하고 권세 있는 자들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가 아닙니다.  완벽하고 흠 잡을 데가 전혀 없는 세상 사람들이 모여서 세워진 교회가 아닙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는 세상에서 가장 문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변화되어 예수 그리스도가 참으로 누구인지를 보게 된 사람들을 통해서 세워졌습니다.  그 신앙고백의 반석 위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교회를 세우십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인간의 연약함 위에 세워집니다.  그러나 주님의 권세와 능력으로 약한 나를 강하게 하여 주님의 교회를 세우십니다.  그리고 그 교회를 통하여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몸된 교회는 그렇게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려왔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몸된 교회가 세워진 곳에는 언제나 거룩한 변화의 바람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은 부족하고 연약한 당신을 통해 주님의 몸된 교회가 세워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흠 많고 부족한 당신을 통해 잃어버린 영혼이 돌아오는 영광을 보고 싶어하십니다.  약하기 때문에 못한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어차피 교회는 연약한 나를 통해 세워집니다.  늘 교회는 약점과 허물이 많아 보입니다.  그러나 지난 이천년 동안 주님은 이 부족한 교회를 통해 구원의 역사를 이어 오셨습니다.  그래서 복음은 능력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로마 카톨릭교회는 주님의 교회는 베드로의 인격 위에 세워진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부가 있는 곳이 교회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이 교회는 우리의 신앙고백 위에 세워집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의 모임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교회는 바로 저와 여러분의 신앙고백 위에 세워집니다.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모자람에도 불구하고 바로 우리들의 신앙고백과 헌신을 통해 교회가 세워지고 성장되고 번식되고 확장됩니다.
 
이것이 교회의 신비입니다.  비밀입니다.  이것은 곧 당신의 축복입니다.  만약 당신이 하나의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울 수 있다면 당신은 베드로입니다.  당신의 집에서 목장이 모였다면 당신의 집은 영광스런 교회입니다.  한없이 부족한 나를 통해 세상은 구원되고 이 도시는 복음으로 정복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라.  내가 계속하여 내 교회를 만들어 갈 것이다"
 
주님은 교회의 머리가 되실 뿐만 아니라 교회를 만들어 가시는 설립자이십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커다란 애정의 대상이었습니다.  교회의 주인은 주님 자신입니다.  주님은 나의 교회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가면 세상 나라도 변합니다.  사상도 사라집니다.  사랑도 갑니다.  제왕도 영웅도 지나갑니다.  제도도 변합니다.  종교도 변할 수가 있고 철학도 변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몸된 교회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변하지 않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이 교회를 세우시고 주님이 그 교회를 이루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십시오.  교회는 주님이 세우신 주님의 교회입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으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려고 해야만 합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워가는 기쁨이 우리 안에 충만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몸된 교회를 세우시고 그 교회를 통하여 세상을 다스리기를 원하셨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주님의 몸된 교회가 세워져 가는 기쁨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를 세우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비전을 우리의 가슴에 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그렇습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는 어떠한 세력과 권세로도 이길 수 없습니다.  죽음의 권세도 주님의 몸된 교회를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이 진리는 지나온 2000년의 교회 역사가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실 얼마나 많은 세력들이 교회를 멸하려고 했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상들이 교회를 없애려고 했습니까?  엄청난 어둠의 권세가 교회를 공격해 왔습니다.  어느 때는 교회가 무너지고 끝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몸된 교회는 승리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꽉 붙잡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 당신의 몸된 교회를 세우시기 위하여 우리들에게 하늘의 권세를 주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몸된 교회를 세우시기 위하여 나사렛 예수 이름의 권세와 성령의 능력을 우리들에게 주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강하고 담대하십시오.  그리고 주님이 주신 능력으로 무장하여 세상으로, 도시로, 아파트로, 회사로 나아가십시오.  그러면 그들은 복음의 능력 앞에 무너질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나사렛 예수 이름의 권세와 성령의 능력으로 나가면 세상의 어떠한 견고한 진들도 무너질 것입니다.  음부의 권세가 무너질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세상을 정복하는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죽지 말고 당당하십시오.  주님의 몸된 교회는 세상을 정복하는 승리의 공동체입니다.  사단에게 빼앗긴 영토를 되찾고 잃어버린 영혼들을 건져내어 살리는 구조대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아무 것도 하지 않음에 있습니다.  교회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을 때 세상은 음부의 권세가 휘젓고 다닙니다.  성도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사탄 마귀와 어둠의 권세가 세상을 어지럽게 합니다.  그러므로 나사렛 예수 이름의 권세와 성령의 능력으로 음부의 권세를 무너뜨려야 합니다.  그리고 이 땅에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워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고난이 있고 아픔이 있습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도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과 문제를 해결하고 부수는 능력도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당신에게는 그 모든 것들을 이기고 정복하고 오히려 내 곁의 연약한 지체들을 섬길 수 있는 권세와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복음을 들고 나가기만 하면 음부의 문들은 열릴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 앞에 견고한 진들이 보기 좋게 무너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주님의 심장 속에 있던 그 교회는 바로 세상을 힘있게 구원하는 교회입니다.  세상을 정복하는 교회입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워 가는 이 기쁨을 우리 모두가 누릴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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